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스키타이 (Scythian)

한부울 2009. 7. 19. 22:19

유럽대륙의 훈족은 고구려인이었다. http://blog.daum.net/han0114/5274060 

금관의 나라, 신라 http://blog.daum.net/han0114/17049117

신라금관(shilla crown) http://blog.daum.net/han0114/17049115

新羅의 신화·알타이의 눈보라·무덤 속의 女戰士·曲玉·금관·積石목곽분·싸랑·솟대·샤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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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스키타이 문화의 언저리에 도달하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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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Scythian)

 

Approximate extent of Middle East Iranian languages in the 1st century BC is shown in orange


BC 6세기~BC 3세기경 남부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유목 민족을 말한다.

 

Map of the Roman empire under Hadrian (ruled 117-38 AD), showing the location of the Scythae Basilaei ("Royal Scyths") along the north shore of the Black sea


고대 그리스인은 흑해 북쪽 돈강에서 프루트강에 이르는 초원지대를 스퀴티아(Skythia)라고 부르고 그 초원에 살았던 이란계 민족을 스퀴트인이라고 하였다. 항아리의 부조(浮彫)나 무덤에서 발견된 인골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란계 유럽인종에 속하고 장신에 강건한 체구를 가졌으며, 광대뼈가 나오고 털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스키타이를 4개의 집단, 즉 왕후(王侯) 스키타이 ·유목 스키타이 ·농민 스키타이 ·농경 스키타이로 구분하였다. 이 중 왕후 스키타이가 지배자로서 군림, 아조프해(海) 북쪽 연안에 궁전을 건립하고 돈강과 드네프르강 사이의 초원과 크림반도를 영역으로 하였다.


인도-스키타이 Indo-Scythians


인도-스키타이는 인도-이란 사카의 분파이다. 그들은 남 시베리아에서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간다라, 카슈미르, 펀잡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4세기경까지 인도의 중서부 구자라트, 라자스탄으로 들어왔다. 첫 사카왕은 마우에스 또는 모가는 사카 권력을 간다라에 세웠고 점차 북서 인디아에 우월권을 확장하였다. 인도스키타이 지배는 서기 395년 루드라심바 3세의 서부 총독령과 함께 끝났다.


스키타이 종족에의한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의 침입은 인도 스키타이 침입으로 언급되는데 인도와 인근 나라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인도 스키타이 전쟁은 중국 종족과의 불화에서 중앙 아시아 유목 전쟁에 의해 격발된 사건의 한 챕터였다. 그것은 박트리아, 카불, 파르티아, 인도는 물론 로마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스키타이 그룹은 인도로 침입하여 다양한 왕조를 세웠는데, 사카 외에도 파라마 캄보자, 발리카스, 리시카스 와 파라다스 등이 있었다.

 

Territories (full line) and expansion (dotted line) of the Indo-Scythians Kingdom at its greatest extent.

 

Silver coin of the Indo-Scythian King Azes II (r.c. 35-12 7BC). Note the royal tamga on the coin.


Late Antiquity (AD 300 to 600)


In Late Antiquity the notion of a Scythian ethnicity grew more vague, and outsiders might dub any people inhabiting the Pontic-Caspian steppe as "Scythians", regardless of their language. Thus, Priscus, a Byzantine emissary to Attila, repeatedly referred to the latter's followers as "Scythians". In Attila's regime Edekon was the king of Scythians.

 

 

                                                              Attila the Hun

 

The Goths had displaced the Sarmatians in the 2nd century from most areas near the Roman frontier, and by early medieval times, the Turkic migration marginalized East Iranian dialects, and assimilated the Saka linguistically.

 

                                                Treasure of Kul-Oba, near Kerch.


스키타이 왕국은 왕후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를 종속국으로 하여 형성한 연맹적(聯盟的) 성격이 강한 국가였다. 스키타이는 BC 11세기경 볼가강 중류 지역에서 서서히 침투해 온 민족과 원주민과의 혼혈에 의하여 형성된 민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는 키메르인(人)과 함께 BC 90년경 가장 일찍 유목민화하였다. 민첩하고 강력한 기마민족이 된 이들은 BC 7세기에 소아시아 ·시리아 방면을 침범하고 BC 6세기에는 키메르인을 카프카스의 쿠반강 유역으로 쫓아내고 근거지를 아조프해 북부로 옮겼으며,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서 도나우강 중류지대까지 세력을 확대시켰다.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대왕은 스키타이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BC 4세기 서방 초원에서 사르마트인이 침입하여 왕후 스키타이는 주영토에서 쫓겨나고, BC 3세기에는 켈트인에게 압박당하여 서방의 지배권을 상실하고 드네프르강 하류와 크림반도에서만 세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BC 2세기 약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사르마트인과 보스포루스왕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Skunkha, king of the Sakā tigraxaudā ("wearing pointed caps Sakae," a group of Scythian tribes). Detail of Behistun Inscription.


스키타이는 양 ·염소 ·소 등을 대상으로 한 이동목축(移動牧畜)을 영위하고, 가축의 감독과 교통 ·군사상의 필요에서 말을 기마용으로 활용하였다. 흑해 연안의 그리스인 식민(植民)과는 분업사회를 이루어 축산물 ·우랄산 황금 ·북방산 모피 ·수탈한 곡물 등을 제공하는 한편, 포도주 ·올리브유 및 각종 공예품 등을 수입하였다. 이와 같은 교역의 결과 이란적인 요소가 많았던 스키타이 문화는 BC 4세기 이후 특히 그리스 고전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유물은 아키나케스식(式)의 단검, 아가리에 입체장식이 있는 청동솥, 장대[竿頭], 세날개 화살촉, 손잡이가 하나인 주발형 흑색토기, 각종 장식판 등이 있으며, 입체적 또는 투조풍(透彫風)의 동물 의장(意匠)은 특히 주목된다. 또 그리스인으로부터 거울[銅鏡]을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다만 수많은 황금제 용기와 장신구는 그리스의 공장(工匠:職人)이 스키타이에 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스키타이 문화는 동방의 여러 유목민족 사이에 확산되어 각지에 스키타이풍(風)의 문화를 육성시켰다. 이 계통의 문화로는 알타이 산지의 마이에미르 문화와 오르도스지방의 쑤이위안[綬遠] 문화 등이 있다. 스키타이 문화는 화북을 거쳐 전국시대의 중국문화에 영향을 끼쳤으며, 다시 한국과 일본에도 파급되었는데, 거울은 그 좋은 예이다.

 

Scythian warriors, drawn after figures on an electrum cup from the Kul-Oba kurgan burial near Kerch. The warrior on the right strings his bow, bracing it behind his knee; note the typical pointed hood, long jacket with fur or fleece trimming at the edges, decorated trousers, and short boots tied at the ankle. Scythians apparently normally wore their hair long and loose, and all adult men apparently wore beards. The gorytos appears clearly on the left hip of the bare-headed spearman; his companion has an interesting shield, perhaps representing a plain leather covering over a wooden or wicker bas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헤로도토스에 의한 스키타이

 

Herodotus Hălĭcarnassensis 헤로도투스 할리카르넨시스, 기원전 480년경~420년경)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예로부터 흑해 북쪽 기슭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키타이는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BC 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킴메르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BC 4세기에는 돈강 동쪽에서 온 사르마트인의 공격을 받아, 북카프카스의 쿠반지방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서쪽으로 옮겼다. 스키타이의 세력권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돈강 하류지역 등 흑해 북쪽 기슭 일대를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는 카프카스지방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3세기 중엽에는 사르마트의 압박을 받아 세력을 잃었다.


고고학 성과에 의한 스키타이

 

Silver coin of King Azes II (r.c. 35-12 BC). Buddhist triratna symbol in the left field on the reverse.


최근 스키타이에 관한 고고학적 발굴조사는 큰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기술사료의 결락(缺落) 부분을 보충할 수 있게 되어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이나 발전과정 및 특질 등이 밝혀지고 있다. 스키타이의 기원을 BC 1200∼BC 700년 무렵 볼가강 하류지역에서 번성하고 있던 청동기문화의 창성자(創成者)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또 19세기 이래 연구를 이어받아 <스키타이 고고학>의 진전에 큰 업적을 더하고 있는 러시아 연구가들은, 스키타이문화가 구덩고분문화[竪穴古墳文化(수혈고분문화)]에서 지하굴무덤문화[地下橫穴古墳文化(지하횡혈고분문화)] 및 후기 덧널무덤문화[後期木槨墳文化(후기목곽분문화)] 과정을 거쳐 출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키타이문화권은 스키타이형 고분(쿠르간)이 분포하는 범위와 거의 일치하며, 그 범위는 고대의 저술가가 스키티아(Scythia)라 하였던 카르파티아산맥과 돈강의 중간지역에 해당한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를 주거권이 다른 4개의 무리로 나누고, 서쪽부터 <농경스키타이> <농업스키타이> <유목스키타이> <왕족스키타이>라고 하였다. 러시아의 고고학자들은 고분·취락터 등의 유적이나 출토유물에서 이 네 무리에 거의 일치하는 4개의 문화권을 설정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조프해의 북쪽 드네프르강과 돈강 사이의 초원지대를 본거지로 하여 이른바 스키타이왕국을 형성한 것이 본래의 스키타이, 즉 왕족스키타이라 한다. 스키타이문화의 편년도 이 왕족스키타이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스키타이문화


예리하고 사나운 유목민족이었던 스키타이는 소가 끄는 천막집에서 생활했으며, 소유한 말의 많고 적음으로 부를 결정하였다. 싸울 때에는 그리스식 청동제 갑옷·투구와 갑옷 속에 미늘로 엮은 옷을 입고, 아키나케스형 단검이나 활·화살을 갖춘 가벼운 차림의 기병대를 편성했다. 기동성이 뛰어났으며 강적 페르시아인을 괴롭힐 만큼 전술도 교묘했다. 드네프르강 하류인 니코폴 근방에서 실시한 고고학 조사에 의하여 이 지역이 스키타이왕국의 정치·경제 중심지였던 것과, 흑해 북쪽 기슭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도기·직물·금속제품·기름 등을 수입하고 가축·곡물·모피·노예 등을 제공하는 등의 광범한 통상거래로 부유한 계층이 성립했다는 것 등이 확인되었다. BC 4세기 무렵 상층 스키타이 귀족 사이에서는 여자·노예·말 등의 순장을 동반한 장대한 고분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고분들에서는 금·은·구리로 만든 단지와 스키타이 특유의 청동솥, 손으로 빚은 납작한 바닥의 스키타이도기, 갈아서 만든 그리스풍의 토기, 다양한 장식무늬가 있는 암포라, 스키타이 및 그리스인 공장(工匠)의 손으로 만든 정교한 보석장식품 등이 발굴되고 있다. 전사의 무덤에서는 각종 무기 등이 출토되었다.


스키타이 미술


러시아의 에르미타슈미술관 등에는 중앙아시아나 남러시아초원에서 발견된 스키타이문화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대부분 쿠반지방의 코스트롬스카야고분·켈레르마스고분·우리스키고분·엘리자벤스카야고분, 드네프르강 하류지역의 솔로하고분·체르토믈리크고분·알렉산드로폴스크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며, 이 유물들의 총체는 독자적인 스키타이미술의 틀을 나타냄과 동시에 스키타이사회의 여러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무기·병구·말갖춤[馬具(마구)] 등의 장식문양으로 동물의 모습과 투쟁을 부조 또는 투조로 표현한 약동적인 <스키타이풍 동물의장>은 스키타이미술의 특징을 나타낸다. 이 동물의장과 스키타이 특유의 세날개화살촉[三翼鏃(삼익족)]의 보급범위가 스키타이 진출방향과 문화권을 동시에 나타내는 지표라고 짐작된다. 그것에 의하면 오늘날 헝가리나 독일의 동쪽까지 자취를 남겼으며 또 폴란드의 비슬라강유역의 원(原) 슬라브족문화를 파괴한 것도 스키타이라고 한다. 광대한 유라시아 내륙 초원지대를 무대로 펼쳐진 동서문화교류에 큰 역할을 한 스키타이의 기원과 <스키타이 시베리아형문화>의 유래 등에 대하여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되고 있다. 1991년 10월 에르미타슈미술관 소장 스키타이유물이 한국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전시된 바 있다.[야후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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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Issyk) 의 스키타이무덤


이식 무덤은 1969~1970년 케말 A. 아키쉐프를 중심으로 한 소련 까자흐 공화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무덤 떼중의 하나이다.


이들은 알마아타 동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남동 까자흐 공화국 이식(Issyk) 강 왼쪽 둑에 소재하는데 그 중 특히 ‘황금 인간’ 또는 ‘황금 옷을 입은 인간’이 출토된 무덤은 그 규모와 풍부한 부장품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이 무덤들은 이식인(스키타이인)이 남겨 놓은 무덤 떼의 일부인데 무덤 떼는 북에서 남쪽으로 3km 길이에 달하는 커다란 45개의 흙으로 덮힌 쿠르간이라고 하는 봉분으로 되어 있으며 이들은 당시 왕들의 분묘로 추정되고 있다.


봉분은 직경 60m, 높이 6m에 달한다. 봉분 위에는 직경 12m, 길이 2.3m 이며 아래로 꺼져 들어간 함몰부가 있는데, 이는 나무로 된 지하구조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썩어내렸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무덤의 구조는 우리나라 경주에서 많이 보이는 천마총(155호분), 황남대총(98호분)등의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도 비슷하다.


즉, 이는 시체와 여러 화려한 껴묻거리(부장품)를 안치한 목관과 목곽을 흙으로 덮은 후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구릉의 형상을 만든 구조인데 이 같은 성격의 무덤은 시베리아 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에서도 1960년대 후반대에 발굴 조사된 바 있다.


무덤에 대한 조사는 봉분이 완전히 제거된 후 이루어졌는데 당시 지표면에서 1,2m 길이 정도 되는 곳의 중앙과 측면(남쪽) 두 곳에서 매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중앙에 위치한 무덤은 여러 차례에 걸친 도굴로 인해 완전히 변형․파괴되었으나 측면에 위치한 무덤은 유골의 잔해와 껴묻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처녀분이었다. 황금 옷을 입은 인간’이 출토된 측면무덤은 중앙무덤에서 남쪽으로 15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전나무를 다듬어 만든 목곽 시설이 있는데 그 내부의 규모는 2.9 × 1.5m 이다.


곽의 남쪽과 서쪽에는 껴묻거리로서의 용기가 놓여 있었고 북쪽에는 널판으로 짜 맞춘 마루 위에 직접 등을 대고 머리를 서쪽으로 하고 누워 있던 피장자의 인골이 남아 있었다. 발굴자인 아키쉐프는 이를 18세가량의 남자로 그리고 인골의 잔존상태로 보아 피장자의 신장은 165cm 정도로 추정하였다.


많은 금제품과 여러 껴묻거리들이 대부분 피장자가 매장될 때 배치되었던 상태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특히 옷 장식, 머리장신구 그리고 나뭇잎 모양의 금신발이 잘 남아 있었다. 인골의 주위에는 피장자가 생시에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칼, 화장품 및 다른 집기들이 남아 있었고 금평판과 여러 가지 형태의 금속판, 머리장신구들도 대부분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위치는 두개골보다 더 위로써 원래의 기능이 머리에 쓰던 관이나 모자로 생각되었다.


또 머리 왼편에서는 금귀걸이가 발견되었으며 목부분에서는 금제 목걸이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목부분과 골반 사이에는 금으로 된 금속판과 실 구멍이 있는 작은 구슬들이 포개져 놓여 있었다. 또 허리 주위에는 이런 판 위에 묵직한 4각형의 금속판이 있었는데 이 직각형태의 금으로 된 작은 금속판들은 4개의 수직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복원 결과 외투의 가장자리 장식물과 허리띠임이 밝혀졌다.


다리뼈 부위에서도 막대한 양의 크고 작은 금속판들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또 오른손 손가락에서는 금반지가 발견되었으며 바닥의 나무판자 밑에서는 보석반지도 발견되었다.


시체의 오른쪽 발을 따라서는 철검과 철단검의 잔해도 확인되었다. 검의 손잡이 주위에서는 3개의 금구슬 장신구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두 개는 원통형이며 세 번째 것은 손가락 모양이었다. 좌측의 왼손과 몸통의 뼈 사이에서도 두 개의 커다란 고리와 두 개의 묵직한 벨트가 달린 철단검이 발견되었다. 그 외에 철단검에 장식된 금속판 고리, 칼장식, 화살촉 장식, 청동거울, 토기, 은제용기, 목기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는 4,000점 이상의 금제품을 비롯하여 철제검과 단검, 청동거울, 31점의 토기, 금속용기와 목기, 은숟가락, 나무국자 및 홍옥수 그리고 26점의 구슬 등이 있다. 이 무덤은 기원전 5~4세기경에 축조된 것이며 그 주인공인 ‘황금 인간’ 또는 ‘황금 옷을 입은 인간’은 남동 까자흐스탄 영토에 살고 있었던 끝이 뾰족하고 높은 모자를 썼던 사카인(스키타이인)의 왕으로 보여지고 있다.


흑해연안이나 중앙아시아 등의 유라시아 스텝지대에 살며 유목과 목축에 종사했던 호전적인 종족인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기록은 페르시아의 베히스툰 비문이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저술에서도 보이고 있다.


한편 그들은 ‘동물 양식’이란 명칭으로 유명한 문화의 창조자들이기도 했다.


이들 동물 양식이나 그들이 남긴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가진 쿠르간 봉토분은 우리나라에서 특히 신라 고분의 기원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후일 이 지역은 중국 서안과 로마를 잇는 비단길의 길목이 되어 중국의 한․당과 로마 제국 사이의 문화교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쿠르간(Kurgan)

 

Sarmatian Kurgan 4th c. BC, Fillipovka, S.Urals, Russian Federation. This kurgan was excavated in a dig led by Russian Academy of Sciences Archeology Institute Prof. L.Yablonsky, Summer of 2006. It is the first known kurgan to be completely destroyed and then rebuilt to its original appearance.

 

An arm from the throne of a Scythian king, 7th century BC. Found at the Kerkemess kurgan, Krasnodar Krai in 1905. on exhibit at the Hermitage Museum.


일반적으로 봉토가 형성된 고분을 말한다. 봉분이 없는 무덤 또는 매장주체부는 마길니끄 라고 한다. 쿠르간은 봉분 또는 구릉 을 뜻하는 터키어계통의 말에서 기원했으며, 현대적인 고고학이 시작되기 이전, 즉 20세기 이전의 고고학관계 문헌에 이미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용연대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쿠르간의 기준은 없으나 대체로 봉토가 외견상으로 보이는 정도(1m 이상)에, 범위는 묘광보다는 넓은 면적으로 적어도 직경 3~4m 이상이 형성되어있는 것을 쿠르간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봉토가 없는 무덤의 경우 토광묘Грунтовой могильник 라고 한다) 쿠르간의 봉토에는 흙, 괴석 등이 이용되며 무덤주위에는 해자(垓子)를 판 경우도 많이 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이른 쿠르간은 B.C. 4000~3000년기 동석기시대 때 흑해연안에서 발견된다. 카스피해-흑해연안의 드레브네얌(Drevneyam)문화, 코카사스지역의 마이코프(Maykov)문화 등이다. B.C. 3000~2000년기가 되면 소아시아의 발칸반도, 중부 유럽 등지로 퍼지고 비슷한 시기에 다른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쿠르간은 발생한다. 쿠르간과 함께 동부유럽에는 넓게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B.C. 2000년기가 되면 스루브(목곽묘)문화로 이어진다. 유럽고고학에서 쿠르간문화(Kurgan culture)라고 하는 것은 B.C. 1500~1200년경에 루마니아, 헝가리 등 동유럽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문화를 말하는 것으로 전차 및 동검, 장검 등 고도의 기마술 및 청동기술을 보유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이 쿠르간은 동석기시대에 출현하며 그 주체는 대체로 인도-이란어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쿠르간의 양식 및 입지조건에 대한 해석은 각 문화마다 달리한다. 예컨대 우랄산맥근처의 초기철기시대문화인 사르가트(Sargat)문화의 쿠르간에는 봉분의 주위에 1m정도 깊이의 C 자형 주구(周溝)가 돌아가며, 파지릭의 고분에서는 적석 밑에 호석을 세웠다. 전자의 경우 해자는 유계(幽界)를 건너는 경계 또는 성스러운 영역의 의미로 해석되는 반면, 후자에 대한 의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쿠르간은 사자(死者)의 거소(居所)라는 의미에서 주거지(유르트)를 모방한 것으로 호석(護石)을 천막주위의 괴임돌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목곽(木槨)과 목관(木棺)주위에 양탄자를 깔고 천을 덮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Horseman, Pazyryk felt artifact, ca. 300 BC


시베리아에서는 아파나시에보문화부터 시작해서 안드로노보문화등 서쪽에서 침투하는 유럽인계의 문화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스키프-사브로마트시대 때에는 대형쿠르간으로 변한다. 스키타이시대 초기인 B.C. 8~7세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대형쿠르간으로는 알타이지방의 파지릭 고분, 투바의 아르잔고분, 미누신스크의 까라-쿠르간1, 우준-오바, 살브익 등을 들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초기 및 중기 스키타이시대에는 미누신스크지역을 경계로 서쪽에 분포하지만 흉노기에 들어서면서 대형쿠르간은 그 동쪽에서도 분포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몽고의 노인울라를 들 수 있다. 카자흐스탄에는 이식고분이 있으며, 카자흐스탄과 알타이의 접경지역인 중국의 신강성(新疆省)에서 직경이 수백 미터에 이르는 공범내사(工凡乃斯)가 대표적이다.


쿠르간이 각 사회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각 문화, 시기마다 다를지라도, 최소한 청동기시대 이후 발생한 묘제로 사회구조의 변화와 병행해서 노동력의 집중, 사회적 부의 집중 등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대형쿠르간은 상당히 체계화된 사회구조가 기반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특히 파지릭을 대표로 하는 남시베리아의 대형쿠르간은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 그 봉분의 대형화 뿐 아니라 내부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에서 널리 주목받아 왔다. 따라서 대형쿠르간을 사용하는 문화와 그것이 당 고고학적 문화에 차지하는 비중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고고학에서 논의되는 북방계문화의 전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연구되어야할 부분이다. 이러한 대형쿠르간은 이후 중세시기(터키시대)에 들어서면서 타쉬트익문화를 제외한 나머지 문화에서는 거의 사라지며 소형쿠르간만이 사용된다. 이 시기에 반대로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는 고총고분이 발달한다는 점도 흥미를 끄는 점이다.


틸리아 테페(Tillya Tepe)


틸리아 테페, 틸라 타파 또는 틸야 테페 (황근의 언덕)는 셰베르간 근처의 현대 북 아프가니스탄의 고고학적 위치이며, 1979년 소련과 아프간의 고고학자 임무에 따라 조사를 받았다. 그 해는 소련이 아프간을 침공하기 바로 이듬해였다.


요새 마을인 옘시-테페는 현대의 셰베르간의 북동쪽으로 악차로 가는 도로상에 5km 떨어져 있으며 유명한 죽은 자의 도시 틸리아 테페에서 500m거리이다. 무덤 여섯 곳(다섯 여인과 한 남자)에 극히 부유한 보석과 20000개의 금장식이 발견되었다. 연대는 기원전 1세기 경으로 측정되었다. 모두 수천 개의 미세 보석이 복원되었다. 대개 금, 투르쿠이즈 라피스라즐리의 복합으로 만들어졌다. 장식은 동전과 보석 목걸이 셋, 허리띠, 메달과 왕관을 포함한다. 카불의 새 박물관이 계획 중이며 그 곳에 박트리아 금이 결국 보관될 것이다. 그것들은 2006년 12월에서 2007년 4월까지 파리에서 전시되었다.

 

Reconstitution of two members of the Tillya Tepe burial, with corresponding artifacts: man (tomb IV, left), and woman (tomb II, right).

 

                                                  Kings with dragons, Tillia tepe.

 

                                                     Royal crown, Tillia tepe.


Scythian influences (스키타이 영향)

 

Chinese jade and steatite plaques, in the Scythian-style animal art of the steppes. 4th-3rd century BC. British Museum.

 

                                                              A Crown of Silla.


스키타이 문화(Scythian culture)


스키타이문화의 개관 : 스키타이문화란 B.C. 7세기로부터 B.C. 3세기경까지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에 분포하고 있던 스키타이족에 의해 향유되었던 독특한 초기철기문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매장주체부로 통나무를 짜서 만든 나무덧널(木槨)과 그를 보호하는 돌 및 흙시설물로 상징되는 쿠르간(Kurgan)이라는 무덤․무덤에 껴묻혀진 말․사슴을 위주로 하는 각종 동물의 장식물․철제의 오르도스(Ordos)식 청동단검과 유사한 형태의 유병식단검(有柄式短劍)․버들잎형(柳葉形)투겁창․아주 긴 투겁 끝에 짧은 삼각형 창 몸이 달려 있는 창․반구형의 철제 투구․날끝 부위가 위로 살짝 올라가 있는 뼈손잡이의 손칼․가늘고 길죽하게 만곡되어 있는 낫․근대의 것과 유사한 형태의 도끼․톱․끌․청동제로 된 3개의 날개가 있고, 원통형의 화살꽂이가 달려 있는 화살촉․화살몸체가 제트기 또는 세장(細長)한 가오리모양으로 생긴 화살촉․말재갈과 재갈멈치․어깨부에 2개의 줄문을 사이로 산형문(山形文)을 장식한 납작밑토기․구연 아래에 둥근 오목점문을 장식하거나 무문(無文)으로 되어 있는 각종 형태의 손으로만 빚은 납작밑토기 등이 스키타이문화를 구성하는 주요요소들이다.


유물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양상은 군사적, 유목적, 수렵적 전통이 강한데, 이러한 요소는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Siberia) 및 내몽고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특히 특징적인 동물형 장식물과 단검을 위시한 무기류, 그리고 무덤의 구조형식과 말의 순생(殉牲)에서 공통성이 두드러진다. 일부학자들의 경우, 이러한 공통된 문화가 스키타이문화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스키타이족과 문화의 전개 : 스키타이족은 이란(Iran)어계의 종족으로서 B.C. 7세기경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스키타이족의 선주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는데, 이란고원설과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설 등이 유력하다. 스키타이로 상징되는 집단은 분포지역과 경제행위 등의 차이에 따라 왕스키타이, 농경스키타이, 경작스키타이, 유목스키타이의 4개 집단으로 구별되는데, 모두 동일한 종족계통은 아니었던 듯하다.


4개 집단의 스키타이 중 왕스키타이가 가장 번성하고 세력이 컸는데, 다른 집단들은 정도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왕스키타이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왕스키타이의 주요분포지는 흑해의 북쪽에 연해 있는 초원지역이다. 스키타이문화는 좁게는 바로 이 왕스키타이 집단에 의해 향유되고 주도되어진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스키타이의 역사와 문화는 B.C. 6-7세기의 전기와 B.C. 4-5세기의 중기, 그리고 B.C. 2-3세기의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기는 스키타이족이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으로 전입하여 자신의 문화를 성립시키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유적과 유물은 그리 많이 발견되어 있지 않은 편인데, B.C.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키로보그라드(Kirovograd)의 멜구노프(Melgunov) 쿠르간과 그 출토유물이 대표적이다. 유적유물 전반에서 나타나는 양상으로 보아 유목적, 군사적 성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중기에 출현하는 정착된 형태의 촌락이나 농경현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에 보이는 주요한 문화요소, 즉 스키타이문화의 주요한 골격이 이 시기에 모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화살촉이나 장식물 및 용기류를 제외하고는 무기류나 공구류 전반에서 철제품이 고루 확인되고 있어 초기부터 철기화가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기는 스키타이족 뿐만 아니라 문화의 전성기로서, 동물형 장식물로 상징되는 특징적인 유물복합체가 가장 정형화되고 번성하는 시기이다. 쿠르간 역시 이 시기에 대형화, 복잡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니카폴리(Nikapoli)에서 발견된 체르타믈르익(Chertamuluik) 쿠르간은 지면 아래에서 왕의 매장주체부를 포함한 총 4개의 무덤방이 발견되었는데, 봉분의 높이만 20여 m에 달한다. 왕을 묻은 무덤방 주위에는 왕비, 시위병, 노예, 말을 순장한 무덩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 도굴되지 않은 왕비의 무덤방에 화려한 금은제의 용기와 장식물들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는 그리이스문화와의 교섭관계도 많이 확인되는데, 전통적인 매장주체시설로서의 통나무덧널 대신 계단식의 아치를 가진 돌무덤방이 출현하고, 그리이스 여인이 장식되어 있는 황금제 귀걸이가 출토된 쿨야바(Kulyaba) 쿠르간, 그리이스적인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은제의 항아리가 출토된 체르타믈루익(Chertamuluik) 쿠르간들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이 시기에는 농업 및 수공업 경제의 발전과 정착화가 가속화되었다. 정착화와 관련하여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드네프르(Denepre)강 하류역 초원지대에 위치한 카멘스코예(Kamenskoye)성이다. 카멘스코예성은 B.C. 5세기 말에 초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적어도 B.C. 4세기대에는 스키타이의 도읍지로 정해졌다. 성내에서는 왕과 귀족들이 거주하던 석조의 궁전 유적과 함께 일반민들의 집자리, 그리고 철기․청동기․토기․뼈제품 등을 제조하던 작업장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외 관련유적으로는 B.C. 4세기대에 해당하는 돈(Don)강 삼각주의 옐리자베토프(Yelizabetov)성과 벨라제르스키(Bellazersky)만의 마을유적 등이 있다. 농경화와 관련된 것으로는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는 철제의 낫과 쟁기관련 유물 및 저장구덩이 발견의 밀․호밀․메밀․귀리․기장․콩․보리 등 곡식낟알이 있다.


중기는 스키타이문화 동물장식의 최전성기이자 변형기이기도 하다. 전기의 동물장식은 신체의 각 부위표현을 실제와는 달리 과장되게 표현한다든지, 높게 융기된 부조표현이라든지, 사슴뿔을 엉덩이부까지 연장시켜 과장시킨다든지, 모든 동물의 눈을 둥글게 표현한다든지 하는 등의 특징을 보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와서 부조된 높이가 낮아지고, 신체 각 부위의 비례나 묘사가 사실적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외에도 들 수 있는 특징은 이전까지만 해도 상호 다른 종류의 동물간의 쟁투를 묘사한 장식물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시기로부터 이러한 모습을 나타낸 것들이 유행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가 어떠한 원인에 의해서 진행되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리이스 장식예술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그리이스의 식민도시가 흑해연안에 건설되어 있었던 점과 함께 사실주의적 표현과 둥물쟁투 묘사가 그리이스 예술에서 유행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그러할 가능성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후기는 스키타이족과 문화의 쇠퇴기이다. 이 시기 스키타이족은 싸르마트족(Sarmatian)의 공격을 받아서 영역이 크르임(Crim)반도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 시기 스키타이족의 도읍지는 크르임반도의 심페로폴(Simpelopol)에 위치한 네아폴(Neapol)로 옮겨졌다. 현재 네아폴의 후기 도성유적이 발굴조사되어 있는데, 석축의 성벽 내부에서 왕과 귀족의 대묘(大墓), 궁전, 일반인의 주거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는 스키타이문화의 그리이스화가 더욱 진행되어 궁전과 일반인의 건축물에 있어서도 그리이스적인 양식이 보편적으로 발견될 정도이다. 이외 왕의 대묘 내 벽화에 그리이스 토속악기인 하프를 타는 인물상 등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농경도 계속적으로 발전되어 도성 내 곳곳에서 많은 수량의 곡물저장 창고시설이 발견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종 동물의 장식물 또한 쇠퇴하여 발견수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중기까지 유지되었던 양식이 거의 보이지 않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과정을 거친 스키타이족과 문화는 B.C. 3세기경 싸르마트족의 공격으로 쇠락하기 시작하다가 B.C. 2세기경 멸망하게 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스키타이족의 문화는 뒤를 이은 싸르마트족 문화에 상당수 반영되어 지속되는데, 싸르마트족 또한 A.D. 4세기경 흉노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하게 된다.


Scythian society

 

Gold clothing appliqué, showing two Scythian archers, 400 to 350 BC. Probably from Kul-Oba, Crimea. British Museum.

 

                                                               Scytians bowl

 

The Hermitage Museum has preserved by far the greatest collection of Scythian gold, including one of the most famous of all Scythian finds: the golden comb, featuring a battle-scene, from the 4th century Solokha royal burial mound.


스키타이 전․후 문화와의 관계 : 스키타이가 흑해 북안의 초원지역으로 진출하기 전인 B.C. 8세기 전후 이 지역에는 같은 이란어계에 속하는 키메르츠족(Kimerts)이 선주(先住)하고 있었다. 키메르츠족 역시 흑해 북안에 분포하고 있었는데, 스키타이족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성향이 강하였다. 이들도 후대의 스키타이족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향유하였는데, 이러한 문화는 흑해 북안을 중심으로 두나이(Dunai)강 하류역과 불가리아(Bulgaria) 북부로부터 볼고그라드(Bolgograd)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된다. 유물은 주로 청동제이나, 철제의 단검이 유행한 것으로 보아 초기철기문화가 흑해 북안지역에서 적어도 B.C. 8세기경에는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키메르츠족은 군사적인 성향이 강하였는데, 발달된 기병조직을 활용하여 자카프카즈(Zakafkaz)와 소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우라르뜨(Urartt), 앗시리아(Atsyria), 리디아(Ridia) 등의 국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키메르츠족은 스키타이족에 의해 멸망된 후 일부는 스키타이족에게 동화되고 일부는 북쪽의 삼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키메르츠족이 짧은 시기 내에 스키타이족에 의해 정복되어 일부가 스키타이족에게 동화된 점으로 보아, 스키타이족의 문화에 대한 키메르츠족 문화의 영향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키메르츠문화를 구성하는 주요요소인 철제의 유병식검(有柄式劍)이나 청동제의 말재갈과 재갈멈추개 및 토기의 어깨부에 장식된 산형문, 그리고 쿠르간 등은 스키타이문화의 같은 종류의 것과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보인다. 따라서 양 문화간에 일정한 연관성이 있을 듯하나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 없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되어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스키타이를 구성하는 대집단 중 경작스키타이의 존재이다. 경작스키타이는 남부그(Bug)강과 드네스트로(Dnestro)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 집중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명칭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경제행위에 있어 일반적인 스키타이집단과는 다소 구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위의 지역에서 발견된 경작스키타이의 유적유물은 토기의 형식과 무덤의 구조형식면에서 일반적인 스키타이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경작스키타이는 왕스키타이 등과는 종족적인 계보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 경작스키타이는 왕스키타이를 중심으로 하는 스키타이 본족에게 정복동화된 선주 종족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따라서 스키타이문화를 연구할 때 선주종족 선주문화와의 관계성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키타이족을 사실상 멸망시키고 흑해 북안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 싸르마트족이다. 싸르마트족의 기원은 B.C. 7-4세기까지 볼가(Bolga)강과 우랄(Ural)지역의 초원지대에 분포되어 있던 싸브라마트족(Sabramatian)이다.


싸브라마트족은 스키타이의 동부 외곽지역에 분포하고 있으면서 스키타이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양자의 관계는 무덤의 구조형식, 말의 순생, 철제의 유병식단검, 청동제의 화살촉과 말재갈, 동물형 장식물, 토기 등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유사성을 근거로 할 때, 싸브라마트족이 스키타이족의 외곽에 위치하면서 스키타이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짐작하여 볼 수 있다. 싸브라마트족은 B.C. 4-3세기경 알란(Alan), 록살란(Roxalan), 씨락(Sirak) 등의 부족을 중심으로 부족간의 연맹을 강화시켜 새로운 체제의 강력한 연맹체를 형성하였는데, 이 시기 이후를 싸르마트족이라고 특칭한다. 이들은 새로이 결성된 군사체제 하에서 서쪽에 접해 있는 스키타이의 영역 내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흑해 북안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흑해 북안의 강자로 새로이 등장한 싸르마트족의 영역은 대체로 타볼(Tabol)강에서 두나이(Dunai)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후 싸르마트족은 A.D. 4세기 흉노에게 멸망당하기까지 흑해 북안의 주인공으로서 활동한다.


싸르마트족의 문화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면에서 스키타이문화와 유사하다. 무기류에 있어서는 스키타이의 것과 유사하면서 좀 더 세장하게 발달된 철제의 둥근고리가 달린 단검과, 손잡이 끝에 반구형 장식이 달려 있는 장검, 3개의 날개가 달려 있거나 원추형의 화살꽂이가 달려 있는 철제의 화살촉과 스키타이문화에서 유행한 바 있는 동복(銅복)이 사용되었다. 토기는 형식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중기까지의 스키타이문화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손으로만 빚은 납작밑토기가 주로 제작되었다. 동물을 묘사한 장식물은 스키타이문화에서처럼 유행하지는 않았으나, 호흘라치(Hohlachi) 쿠르간에서 출토된 황금제 관식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여전히 여러 형태의 장식물상에 반영되어 있다. 두 문화간의 유사성과 지리적인 인접성 등으로 보아 싸르마트가 스키타이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문화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스키타이문화와 주변문화와의 관계를 고찰함에 있어 스키타이 후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싸르마트문화에 대한 검토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Romantic nationalism: Battle between the Scythians and the Slavs (Viktor Vasnetsov, 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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