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노무현(盧武鉉 : Roh Moo-hyun)

한부울 2009. 5. 26. 22:04
서거...하셨습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008

초법적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먼저 국민을 존중하려하고 나와 너를 결코 구분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에게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리려 애쓴 인물, 그분이 바로 오늘 날 성인(聖人)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노무현(盧武鉉 : Roh Moo-hyun)

 


노무현(盧武鉉, 1946년 음력 8월 6일(양력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법조인으로,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광주(光州).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출생하여 사법고시 합격 후 판사생활을 하다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정치에 입문해 부산과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전임 김대중 대통령 임기 동안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고,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4년 3월 국회로부터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었으나 같은 해 5월,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돼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2008년 2월 25일, 5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의 봉하마을로 돌아갔다. 2009년 노건평 등 일가친족이 연루된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하여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2009년 4월 30일 서울에 올라가 검찰 조사를 받아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로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게 된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2009년 5월 23일 컴퓨터에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뒷산에서 투신, 사망하였다.

 

 

16대 President of South Korea

In office
25 February 2003 – 25 February 2008

Prime Minister

Goh Kun
Lee Hae Chan
Han Myung-sook
Han Duck-soo

Preceded by

Kim Dae-jung

Succeeded by

Lee Myung-bak

Born

August 6, 1946(1946-08-06)
Gimhae, Gyeongsangnam-do, South Korea

Died

May 23, 2009 (aged 62)
Yangsan, Gyeongsangnam-do, South Korea

Political party

Uri Party (2003-2007)
Millennium Democratic Party (1997-2003)
Democratic Party (1990-1997)
Unified Democratic Party (1988-1990)

Spouse

Kwon Yang-sook

Religion

Roman Catholic (Lapsed)


생애


어린 시절


1946년 아버지 노판석과 어머니 이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났다. 1953년 대창국민학교에 입학했으며,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에는 담임 교사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했다. 그 뒤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는 외상으로 입학하였다.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청소년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2사단(을지부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동향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오석의 둘째 딸 권양숙과 1973년 결혼해 1973년에 아들 노건호, 1975년에 딸 노정연을 낳았다. 그러나 신세 한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권양숙의 내조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 도전에 유신 시절인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학력


대창초등학교

김해 진영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1998년 고려대학교 노동대학원 수료

1999년 고려대학교 정치대학원 최고위지도자과정

2004년 러시아 모스크바 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6년 알제리 알제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2007년 6월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상고 졸업후


상고 졸업후 농협에 취직시험을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1971년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 준비를 하여 1975년에 사법시험 17기로 합격을 한다.


변호사 시절


1978년 5월,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딩기)를 즐기는 등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5]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치 입문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1988년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7년 12월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문제 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기도 했고 1989년 초 국회 5공비리·광주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번복, 이를 다시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에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


3당 합당과 정치 외길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합당 참여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1992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한 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이듬해 1996년 4월 11일 실시된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그는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과 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과 김원기, 김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라며 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정길, 김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2000년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대통령 후보 경선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었던 새천년민주당은 대선 1년 여를 앞두고 극심한 내홍에 휩싸여 있었다. 당내 소장파들이 부패 추문에 시달리는 낡은 동교동계 구파를 물갈이하는 등 당의 정체성을 선명히하자는 '정풍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정풍 운동'은 당이 정체성의 깃발을 다시 세우자는 뜻도 있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수세에 몰려있던 새천년민주당의 부활을 꾀하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이에 '정풍 운동' 과정 속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어떻게 선출하면 좋겠느냐는 논의가 자연스레 수면 위로 올라왔고, 미국의 예비선거제를 원용한 국민경선제로 흩어진 민심을 끌어모아 대통령 후보 경선을 진행하는 안으로 당의 의견이 모아졌다.


후보는 국민경선제를 거쳐 선출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났지만, 문제는 국민경선제를 언제 실시하느냐였다. 당내 경선 후보간 의견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와 '이전'으로 양분됐다. 노무현은 "지방선거 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않으면 선거를 치를 구심점이 없어지도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만 분분할 것"이라면서 지방선거 이전에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냈다. 노무현은 또 그것이 "선거 득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내에서 의견을 수합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국민경선제는 지방선거 전에 치르기로 했고, 구체적인 시기는 3월과 4월로 결정이 났다.


16부작 정치드라마로 불렸던 국민경선제는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5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국민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여 누가 더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적합한지를 놓고 승부를 겨뤘다. 대회 1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하면서 국민경선제는 그 막을 올렸다.


제주에서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부산 출신인 노무현이 가볍게 1위를 했다. 다음은 광주에서 경선을 치렀는데, '이인제 대세론'이라는 말을 지어내며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내고 부산 출신 노무현이 광주에서 득표 1위를 기록하였다. 노무현은 당시 연단에 서서 자신의 승리가 "광주의 승리, 민주당의 승리, 한국 민주주의 승리로 이어질 수 있게 하겠다"면서 감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후 노무현은 '노무현 대안론'을 퍼뜨리며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 이인제의 텃밭인 대전·충청권을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나갔다. 그리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을 마지막으로 노무현은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대통령 후보 시절


노무현은 대선 후보로 선출된 다음에 대선 승리를 위한 계획으로 '민주세력대통합론'을 내놓았다. 1987년 대선에서 양김이 분열되면서 쪼개졌던 민주화세력을 하나로 묶어내 한국의 미래를 함께 열어제치겠다는 포부였다. 이를 위해 노무현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민주세력 통합을 이야기했고 지방선거 때의 연합을 위해 후보 추천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통일민주당 시절 김영삼으로부터 손수 받은 손목시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민주세력대통합론'은 국민들에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략으로 읽혀지면서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이 일은 노무현 지지율 하락의 한 빌미가 되고 말았다. 악재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노무현이 당적을 두고 있던 새천년 민주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아들인 김홍업와 김홍걸의 비리로 국민의 지지에서 계속 멀어지고 있는 터였다. 이 일은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였던 노무현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줬고, 지지율은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5월 24일 오전, 노무현은 장기기증을 약속하였다.


노무현은 당의 지지율 하락과 본인의 지지율 급락 속에서도 지방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과 행동에 부심해야 했다. 이는 대선 후보로서 선거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서야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노무현 자신이 국민경선제 실시 시기로 지방선거 전을 거론하며 "후보가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고 한 말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은 부산광역시장 후보로 한이헌 전 감사원장을 내세워 반드시 당선시키겠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신의 '후보 재신임'을 내세우며 선거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였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에서 돌아선 민심은 노무현의 외침을 외면했고,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에서 호남과 제주 등 4석만 건쳐 대참패했다. 대선을 6개월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내는 "이러다 대선에서 패하는 것 아니냐"며 불안감에 술렁거렸고, 노무현의 개혁성 등 그의 색깔이 탐탁치않았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집단적으로 '노무현 흔들기'에 나섰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대로 "후보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고 당 회의에서 후보 재신임을 받아냈지만, 이는 의원 전체의 총의는 아니었다. 여기에 2002년 FIFA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 판 짜기에 나서야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상황이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수도권 의원을 중심으로 새천년민주당에서 대규모 탈당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이들 선도 탈당에 뒤이어 수십명의 의원들이 탈당길에 따라 나섰고, 이들은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을 결성하여 노무현에게 단일화에 나설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원칙없는 단일화를 반대"한다면서, "국민들이 대선 후보로 노무현을 뽑았으니 만큼, 그 민심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무렵 탈당은 후단협 한 갈래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당 대변인이었던 전용학 등을 필두로 한나라당으로 당을 옮기는 탈당 행렬도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노무현에 우호적이었던 소장파에서 탈당 의원이 나왔다. 김민석은 정몽준의 신당 세력과 연대하러 당을 떠난 것이다. 11월 들어 노무현 진영의 입장이 조금 뒤바뀌기 시작했다. "원칙없는 단일화에 반대한다는 뜻에는 변함이 없지만, 국민들이 원한다면 단일화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국민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제시했다.


국민통합21과 후단협 측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대의원경선 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역제안했다. 겉으로는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대의원 경선 방식이 정몽준 측에 더 유리해서였다. 국민경선이냐, 대의원경선이냐를 놓고 양측은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새로운 제안은 노무현 쪽에서 먼저 나왔다. 노무현 진영은 국민경선 실시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수용하여 '여론조사 방식'의 경선을 새롭게 제안했다.


마침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무현과 정몽준은 밤늦게 직접 만나 단일화 협상에 나섰고, 러브샷으로 소주잔을 들며 '여론조사 방식'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협상 타결을 알렸다.


단일화 협상 파기와 재협상, 텔레비전 토론과 여론조사를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정몽준 단일후보는 '노무현'으로 최종 판가름이 났다.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첫번째 여론조사는 노무현 승리하였고, 두 번째 여론조사에서는 이회창의 지지율이 낮게 나와 역선택 의심으로 무효 처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노무현은 참여 정부를 표방하며 2003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대통령직 수행


취임 1년차 (2003년 2월 25일~2004년 2월 24일)

 

2003년 5월 14일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 회견하는 모습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서 참여정부가 출범하였다. 2003년 2월 26일에는 고건 총리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03년 2월 27일 참여정부 조각 발표로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2003년 3월 9일, 검찰 개혁의 향배와 검찰 인사를 놓고 검찰이 일선 검사들과 마찰을 빚자, 대통령은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일선 검사들이 함께하는 토론. '대통령과 전국 검사와의 대화'(토론회 명칭)가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이 자리에서 검사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면서 대통령이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고 인사 개입을 하는 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며 대통령 검찰 인사의 부당성을 지적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인사위원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인사 대상”이라며 “여기서 인사하지 않으면 낡은 검찰로 몇 달 더 가자는 것”이라며 검찰 인사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검사들의 부적절한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라고 지적해 한때 유행어가 됐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2003년 5월 21일, 각종 사회적 갈등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자 그는“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며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FTA를 반대하는 농민단체의 시위와 굴욕 외교라는 한총련의 저지로 5·18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건이 이 발언의 결정적 도화선이 됐다.

2003년 10월, 청와대 총무비서관인 최도술이 SK 비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터지고 10월 10일에는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에다가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 가결, 윤성식 감사원장 임명동의안 부결 등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그는 청와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라고 선언했다.


그 밖에도 취임 1년차에는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


취임 2년차 (2004년 2월 25일~2005년 2월 24일)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만찬장에서 건배를 하는 노무현

 

2004년 1월, 연두 기자 회견에서 "지난 수십년간 끊어내지 못했던 정치와 권력, 언론, 재계 간 특권적 유착구조는 완전히 해체될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성큼 다가설 것"이라고 말했다.

2004년 3월, 형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남상국 사장을 질타했고,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2004년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탄핵안 가결로 노무현 대통령의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권한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2004년 4월 15일, 총선 에서 대통령이 당적을 두고 있는 여당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서울을 수도로 보아온 관습헌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수도는 서울이라는 것이 관습헌법에 해당하므로, 수도이전을 위해서는 헌법 개정을 통해 수도의 위치를 삽입하거나, 수도가 서울이라는 법적 확신이 소멸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1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가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행정수도 이전이 차질을 빚게 된다.


취임 3년차 (2005년 2월 25일~2006년 2월 24일)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특별법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행정도시특별법은 신행정수도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자, 몇몇 부분을 수정한 뒤 입안한 법이다.

2005년 2월 14일, 그가 직접 고안한 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 'e지원'이 노 대통령과 강태영 업무혁신비서관 등 시스템 구축에 관여한 5명 명의로 특허를 출원해 특허를 취득했다.

2005년 7월 행정자치부에 시범 도입됐다.

2005년 8월 3일, 국가보훈처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지난 3.1절 여운형 등 54명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서훈에 이어 주요한 사회주의 활동가들에 대해 재조명해 뒤늦게 서훈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보수파들의 반대와 훈격 논란이 일기도 했다.

2005년 3월 7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과 영유권 주장 등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동북아역사재단을 지시, 설립하였다.


취임 4년차 (2006년 2월 25일~2007년 2월 24일)

 

2006년 11월 18일에 권양숙과 노무현(왼쪽에서 각각 첫번째와 두번째)이 APEC 정상 회의 직후 오찬장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있는 모습.

 

2007년 1월 9일, 노무현은 그간 5년 단임제에서 4년 연임제로 헌법 개정을 제안했다.

2007년 2월 22일, 그는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 이와 함께 한명숙 국무총리가 3월 초순께 총리직에서 물러나 당으로 복귀하기로 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당을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탈당' 대신 '당적 정리'라는 색다른 표현을 썼다. 종래 대통령의 임기말 탈당이 대선을 앞둔 당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등떠 밀리듯 이뤄진 것에 비해, 자신의 탈당은 개헌 등의 상황에 따른 자발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취임 5년차 (2007년 2월 25일~2008년 2월 24일)


2007년 1월, 신년 연설에서 그는 "권력형 비리는 없고 밀실, 측근 가신 이런 말도 사라졌다"고 말했다.

2007년 6월 3일 참여정부평가포럼(참평포럼) 특강이 열린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강연하였다. 참여정부와 역대 정부의 성장률, 수출증가, 주가 추이 등에 대한 지표를 조목조목 들면서 “어느 정부와 비교해서 실패라는 얘기냐?”고 반박했다. 이어“아무런 전략도 없이 참여정부의 성과를 파탄이니, 실패니 공격하는 것만으로 우리 경제를 일류로 만들 수 없다”며 한나라당과 이명박, 박근혜 대선주자를 비판하였다.

2007년 6월 8일, 6월 3일 참여정부평가포럼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을 비하하는 내용을 발언한 일로 이에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선거법위반으로 선거관리위원회에 고발하였다. 이에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 중립 위반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중립의무라는 모호한 구성요건은 위헌이며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2007년 9월 12일, 노무현은 오전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린 ‘제주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통해 “균형발전정책은 참여정부의 상징적인 국가발전전략”이라고 소개하고 “균형발전정책이 국가의 정의로운 목표로 뿌리 내려 어떤 정부도 이를 흔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면서 “여전히 많은 기업과 사람이 수도권을 선호하고 있고 수도권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거세지는 등 언제든지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강한 압력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경고하면서 “그래서 내놓은 것이 2단계 균형발전정책으로 지방투자기업에 세제혜택과 같은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지방의 생활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기업과 사람이 지방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얼마나 성공하느냐는 그 지방의 역량에 달려 있다”면서 “중앙에 더 많은 지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지역 스스로 사업을 발굴하고 서로 협력해 좋은 성과를 이뤄낼 때 혁신역량도 커지고 더 큰 발전의 기회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국토균형발전정책의 지속적이고 자발적인 추진을 강조했다.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개최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남북관계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퇴임 후

 

                                                           봉화마을 사저


2008년 2월 25일, 차기 대통령인 이명박의 취임식에 참석 한 후, KTX를 타고 밀양을 거쳐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 봉하마을로 귀향했다. 그는 퇴임 후 고향으로 내려간 첫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2008년 4월 20일, 그는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에 위치한 노씨 문중선산에서 열린 종친회 삼릉단 제종회 대제에 참석해 제관인 초헌관 자격으로 제를 지냈다. 같은날 오후에는 국립 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2008년 7월, 국가기록원과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국가기록물을 사사로이 봉하마을로 옮긴 건에 대하여 검찰에 불법적인 '무단 유출'로 기록물에 관련된 전 비서관과 행정관들을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되었다. 기록원의 고발 조치에 대해 노 전 대통령 측 김경수 비서관은 “청와대와 정부의 목적이 기록 회수가 아닌 참여정부 흠집 내기였음이 분명해 진 것”이라며 “참모진과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 하겠다”고 말했다. 검찰이 대통령 기록물 유출 실체 규명에 나서게 됨에 따라 신·구정권 간 대립과 갈등이 격해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2008년 9월 18일, 그는 건전한 토론 문화 조성을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 을 개설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사용자 참여 중심의 인터넷 환경인 '웹 2.0' 에서 착안한 이름으로 체계적 토론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0월 17일, 한국정치학회와의 인터뷰에서 보수주의를 비판하였다.

2008년 10월 21일, 보수적 성향의 시민단체 자유시민연대(대표회장 이강욱)는 노무현을 국가보안법 및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사망원인으로 된 박연차사건


2008년 12월 5일, 자신의 친형인 노건평의 비리 사건에 대해, "내가 사과하면 형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대국민사과를 거부하였다.

2009년 4월 7일, 노무현은 검찰이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을 체포하자 자신의 개인 공식 홈페이지에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의 돈을 받아 사용했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사과문에 대해 한나라당 최고위원 박순자는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석고대죄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노회한 승부수를 던지는 모습에 국민들은 참담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며 비판하였다.

2009년 4월 10일, 박연차의 진술이 노무현 게이트라는 말까지 발전했다.

2009년 4월 11일, 기업인 박연차의 돈을 뇌물 수수한 혐의로 조카사위 연철호가 긴급 체포되었다.

2009년 4월 12일, 뇌물수수 관련 혐의로 그의 부인인 권양숙이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때 문재인은 변호인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같은날 아들 노건호가 소환조사 받았다.

2009년 4월 22일, 검찰이 노무현에게 박연차의 정관계 로비 의혹 수사와 관련된 서면 질의서 7장을 발송했다.

2009년 4월 25일, 노무현이 검찰에 답변서(진술서)를 전자우편으로 먼저 제출했고 검찰은 이것을 검토 중이다.

2009년 4월 30일, '포괄적 뇌물수수' 피의자 혐의로 노무현이 검찰에 출석, 10시간가량의 조사를 받다. 뇌물 수수에 관해 대체로 부인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연차 태광실업 사장과 대질신문은 노무현의 거부로 결국 실시되지 않았다.

2009년 5월 14일, 노무현의 딸 노정연이 받은 40만 달러를 놓고 검찰과 노무현 측이 진실 공방을 벌였으며, 검찰은 권양숙을 이번 주말 재소환하기로 했다.


사망

 

                                                  대한문 앞에서 열린 추도식


길을 봉쇄하고 있는 경찰 버스에 붙여 있는 국화와 경향신문 호외2009년 5월 23일 오전 6시 40~50분경 사저 뒷산인 봉화산을 경호원 1명과 함께 등산하던 중 부엉이바위 위에 올라 경호원과 짧은 대화(“담배 있나”,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를 나눈 뒤 경호원이 산 아래로 시선을 돌린 사이에 아래로 투신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


오전 7시 40분에 김해 진영 세영병원의 앰뷸런스를 타고 마산 삼성병원으로 후송할 계획이었으나 상태가 위급해 양산 부산대학교병원으로 방향을 바꿔 이송되어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으나 오전 9시 30분 경 결국 사망하였다. 경찰은 처음엔 실족사로 추정했지만, 유서로 추정되는 글이 발견되어 투신자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양산 부산대학교병원장은 노무현의 사망 원인이 두부외상(頭部外傷)이며, 9시 30분경 사망했음을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현재 경찰 조사 중이다.


유서


아래는 노무현이 사망 전 남긴 것으로 보이는 유서 전문이다. 이유서는 사저의 컴퓨터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라는 제목의 한/글 파일로 저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김경수 비서관에 따르면 이유서 파일이 저장된 시간은 투신 1시간 19분 전인 오전 5시 21분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장례 진행 절차


사망 직후부터 전국에 자발적인 분향소가 설치되기 시작하여 5월 25일 오후5시 현재 총 263곳의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지며 영결식은 5월 29일 경복궁에서 치뤄진다. 한편, 경찰은 덕수궁 분향소에 조문가는 일반 시민들이 촛불을 켜고 이동하는 것을 '(사전에 신고되지 않은 불법) 시위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면서 제지하고 있다. 또한 시청 앞 서울광장을 전경 및 의경 버스로 둘러 막아 이곳에서의 추모 행사를 원천봉쇄하는 등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조문행렬을 잠재적 폭력시위대로 간주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정책


주요정책


외교안보분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정치행정분야

부패없는 사회 봉사하는 행정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

참여와 통합의 정치개혁

경제분야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

동북아 경제 중심국가 건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

미래를 열어가는 농어촌

사회문화여성분야

참여복지와 삶의 질 향상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

국민통합과 양성평등의 구현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구축


외교활동

 

2006년 베트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직후 한·미·일 정상들 간의 기자회견 모습. 왼쪽부터 한국의 노무현, 미국의 부시 대통령,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외교방식은 동북아균형자론을 표방하였다.


그는 대표적으로 그리스, 루마니아, 핀란드, 영국, 스페인 국빈 방문과 동남아시아, 남미, 러시아, 프랑스, 폴란드, 이탈리아 ,바티칸 순방을 위한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했다. 한국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국가는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6개국이다.


대미관계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생각되어 졌는데 2002년 대선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SOFA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행정부와 대북정책의 입장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익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은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와의 친화적인 모습이 많았다.

 

                  2003년 10월에 노무현 전(前) 대통령과 부시 미 대통령이 함께한 모습.

 

                2005년 11월 17일에 노무현과 부시가 경주에서 정상회담 후 악수하는 모습

.

       2005년 11월 18일에 부시 대통령과 부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악수 하는 모습.

 

                            2006년 9월 14일의 백악관에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대일관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출범 이후 일본의 우경화 추세에 맞물려서 일본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2004년 3.1절 치사에서 그는 전범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하여 일본의 지도자(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문맥상 고이즈미를 가리킨다고 판단됨)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국민감정을 대변하려는 것이었지만, 보수언론과 야당으로부터 감정적 대응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2005년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한국의 야당의원들과의 대담에서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대북유화정책을 지속하려는 노무현 행정부를 비판하자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이 외교적 결례로서 공식 항의하는 일도 벌어졌다. 2006년 일본의 시마네 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는 등, 독도문제에 관해 일본과의 긴장이 높아가자 4월 25일에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해 강하게 경고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로도 점점 우경화 되는 일본과 마찰을 빚는 일이 빈번해졌다.


2006년 11월 APEC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열린 아베 총리와의 양자회담에서 동해를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 또는 '우의의 바다'로 부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청와대가 확인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제안과 관련된 파문이 커지자 이를 처음 보도한 통일교 소속의 세계일보에 전적으로 책임을 돌렸다.


대유럽 관계

대중근동 관계


저서


성공하고 싶다면 군대에 가라 1,2 (노무현외 49명 공저, 국방일보 역, 중앙M&B, 2003.12.12)

로마의 논리와 감성(노무현의 논리 마광수의 감성)(노무현, 마광수 외 공저, 우민OK논술교실, 2005.12.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행정가와 CEO를 위한 8가지 리더십의 원리)(행복한책읽기, 2002.10.15)

노무현이 만난 링컨(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정치인)(학고재, 2001)

마음먹었을 때 시작해라(사시. 행시. 외시 성공 Story)(노무현, 박찬종 외 공저, 고시계사, 2000.06.01)

여보, 나 좀 도와줘(새터,1994)


기타사항


어록


TV토론 등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발언을 하여, 이 발언이 대통령 취임 초기 한동안 유행하였다. 당시 KBS의 개그콘서트의 개그맨 김상태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그를 흉내 냈었다. 넷피아의 한글인터넷 도우미를 설치한 컴퓨터에서 ‘맞습니다 맞고요’라는 한글 주소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에 연결되었다. [64]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현재는 그의 개인 사이트인 '사람 사는 세상'으로 연결된다.


일부 보수언론의 대통령 탓하기에 질린 네티즌 사이에서 그와 전혀 무관한 인터넷 기사 리플(덧글)란에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라는 댓글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 참석해 연설하던 도중 전직 국방부 장관 등의 군 인사들이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격하게 말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는 발언이 플래시, UCC 등으로 편집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참여정부 시기, 삼성의 경제적 비중이 확대되고, 삼성의 전 방위 로비활동이 일부 드러나면서 '삼성공화국' 이란 말이 유행했다.


국내 발언


1989년 12월 31일, 5공 특위 청문회장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학살은 자위권 발동"이라 발언하고 퇴장하자 출입문을 향해 명패를 내던지며 "살인마!"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부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겠느냐."

2001년 1월 7일,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언론이 한 판 붙을 수 있는 것 아니냐. 언론과 전쟁을 불사할 수 있는 기개 있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2002년 12월 1일, 부산대 거리유세에서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며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 떨어뜨려 살아 돌아온 놈만 키운다는데 나도 부산에서 세 번 떨어졌지만 대선 후보가 돼 돌아왔으니 확실히 밀어 달라."

2002년 4월 5일, 당내 경선 과정에서 장인의 좌익경력이 공격받자 : "평생 가슴에 한을 묻어온 아내가 또 아버지 일로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대통령 되겠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습니까."

2003년 3월 9일, `평검사와 대화` 도중 한 검사가 `대통령도 취임 전에 부산 동부지청에 청탁전화를 했다`고 따지듯 묻자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2003년 5월 21일, 5ㆍ18행사추진위 간부들과 면담하면서 :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 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

2003년 12월 14일, 4당 대표 회동에서 :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

2004년 2월 5일, 강원 지역 언론과 회견하면서 적은 비용으로 대선을 치렀음을 강조하면서 "대통령 만드는 비용을 원가로 친다면 나는 원가가 아주 적게 들어간 대통령."

2006년 2월 26일, 취임 3주년을 맞아 출입기자단과 북악산 산행ㆍ오찬간담회를 하면서 : "임기 5년이 길게 느껴진다."

2006년 12월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문제 관련 연설 중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백만 믿겠습니다. 이게 자주국가 국민의 안보의식일 수 있겠나."


국외발언


2003년 6월 9일 일본에서

"나는 일본 공산당을 받아들이는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도 공산당이 허용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한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3년 7월 10일 중국 CCTV 방송에서

“김구 선생과 링컨 대통령을 존경하며, 중국의 지도자 중에 존경할 지도자를 꼽는다면 모택동과 등소평을 존경한다.”


2006년 11월 한·일정상회담에서

"그래서 오늘은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는 좀 적당하게 얘기하고 넘어가고.... (동해 이름을 예를 들어 평화의 바다로 바꾸자며)"

2006년 11월 20일 캄보디아에서

"우리가 옛날엔 식민 지배를 받고 내전(한국전쟁)도 치르고 시끄럽게 살아 왔는데 지금은 여러 나라를 돕고 있다."


2007년 10월 북한에서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 (2일 만수대 방명록)

"인민은 위대하다." (4일 서해갑문 방명록)


발명품


그는 청와대 온라인 행정업무 처리 표준화 시스템인 'e지원'을 개발하게 하였다. e지원 시스템으로 청와대에서 종이서류를 없애버렸다 하며, 대통령의 모든 지시가 'e지원' 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행정관이나 비서관들의 업무 기안이 온라인에서 이뤄지고 대통령을 비롯해 간부들은 실시간으로 추진중인 업무에 대해 댓글로 지시, 보완하고 결재까지 해서 간소화 되었다.


노무현은 임기 후 e지원의 복사본을 제작해 봉하마을에 설치하였는데, 국가정보 보안과 관련하여 문제가 제기되었고, 복사본을 제작하여 사유하는것에 대하여 법적 근거가 없다는 법제처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차후 국가기록원에 반납처리 되었다. 사법시험 준비생 시절 그는 '개량 독서대'를 고안해 특허받기도 했다.


아울러 민주당 최고위원 시절인 지난 1994년에는 정치인을 위한 인명록 통합관리 프로그램인 '한라 1.0'을 개발했고, 이는 버전업을 거쳐 몇년후 '노하우(KnowHow) 2000'으로 업그레이드 하기도 했다. 또한 의자 등받이를 높게 해 윗부분을 옷걸이 모양으로 해 웃옷을 걸어놓은 '옷걸이 의자'도 있었지만 큰 빛을 보지 못했다. 퇴임 후에는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했다.


가족


조부: 노학용(盧鶴容)

할머니: 안퇴래(安退來)

부: 노판석(盧判石, ?~1976년)

모: 이순례(李順禮, 1904년~1998년)

누이: 노명자(盧明子, 1928년~)

누이: 노영옥(盧英玉, 1938년~)

조카사위: 정재성(1959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변호사)

형: 노영현(盧英鉉, ?~1973년,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재직 중 교통사고로 사망)

조카: 노지원

형: 노건평(盧建平, 1942년~)

형수: 민미영

조카: 노희정

장인: 권오석(權五石, 1971년 옥사)

장모: 박덕남(朴德南, 1920년~)

처: 권양숙(權良淑, 1947년~)

장남: 노건호(盧建昊, 1973년~)

장녀: 노정연(盧靜姸, 1975년~)

처형: 권창좌(權昌左, 1945년~)

처제: 권진애(權珍愛, 1950년~)

이승남(李勝男)

처남: 권기문(權奇文, 1954년~)


수상 경력


2004년 - 영국 최고 훈장 배스 대십자훈장(GCB)

2005년 - 미국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밴 플리트' 수상

2007년 - 카타르 독립대훈장


참고서적


여보, 나좀 도와줘(새터, 1994) : 자전적 일대기

노무현은 배신자인가(강준만의 정치비평집)(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12.16) : 인물 비평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유시민, 개마고원, 2002.08.26)

노무현 죽이기(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3.07.21)

노무현과 국민 사기극('인질'로 잡힌 한국인은 개혁을 원치 않는다)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1.04.01)

조선 바보 노무현(바다에 빠져죽은 명계남이 토해내는 이야기) (명계남, 원칙과상식, 2007.03.03)

노무현, 반DJ 신드롬을 넘어서(2002 대선 코드 읽기 - 왜 노무현 대통령인가) (장신기, 시대의창, 2002.10.28)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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