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임정 수립 90주년―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한부울 2009. 4. 9. 15:01
 

임정 수립 90주년―3·1운동에서 임시정부까지

[조선일보] 2009년 04월 01일(수) 오전 02:54


초기 이승만·이동휘·안창호 3각 체제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즈음, 상해 에는 국내외 여러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이미 상해에는 300명이 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하루에 수십 명씩 상해로 모여들어 몇 천 명이 됐다는 과장된 회고도 있다. 나라를 잃기 전 고국을 떠난 이들과 3·1운동의 함성을 들으며 망명을 선택한 이들이 섞여 있었다. 장년층부터 스물이 안 된 앳된 청년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출신지는 서북과 기호 출신이 많았지만 전국에 걸쳤다. 명문 양반과 평민이 뜻을 같이한 동지가 되어 함께 어울렸다. 신분과 지역, 연령, 종교의 차이가 문제되지 않았다. 망국(亡國)의 비애를 겪으며 독립이란 목표를 함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한 자리에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세운 것이다.


초기 임시정부를 주도한 지도자는 이승만·이동휘·안창호였다. 안창호는 연통제를 실시하고 특파원을 국내에 파견하는 등 국내 선전활동과 자금모집을 주도했다. 그가 미주에서 가져온 자금은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는 바탕이 됐다. 통합 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서북파의 중심이던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맡았다.


미국 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대미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기호파 명망가들의 지지를 받던 그는 전보와 편지로 정부를 운영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부터 6개월간 상해에 머물렀지만, 임시정부의 단합을 이루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개편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921년 1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노령(露領)으로 돌아갔다. 임시정부 안에 사회주의 동조자를 확보하려고 한 이동휘와 이승만은 크게 대립했다. 이동휘의 참여로 임시정부는 좌우세력이 공존하는 정부로 출발할 수 있었으나, 그의 이탈 이후 194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좌우합작이 가능했다.


내무총장과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은 이동녕은 뒤에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평안감사 출신인 이시영은 6형제가 모두 망명하였는데, 임시정부의 재정을 오래 맡았다. 1921년 10월 손문의 호법정부를 방문하여 사실상 임시정부 승인을 얻어낸 신규식은 이때 법무총장이었는데, 이어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을 역임했다. 학무총장 김규식은 2월 파리강화회의 외교활동을 위해 상해를 떠나 파리 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가서 구미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손정도·김병조·현순 같은 목사들도 의정원과 정부에 참여하였고, 박은식이나 김가진 같은 원로들도 임시정부를 도왔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김구는 이때 경무국장이었다. 그는 내무총장에 취임한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원했다가 일본이나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켜내는 경무국장을 맡았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버팀목 역할을 하는 이 궂은 역할을 5년이나 맡았다. 신채호는 임시의정원의 전원위원장으로 참여했지만, 위임통치 청원안을 제출한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것을 반대했다.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상해로 온 이광수도 독립신문 사장으로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담당했다.


임시정부는 점차 외교론과 무장투쟁론 같은 독립운동 노선 차이에 따른 대립과, 출신 지역이나 이념에 따른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임시정부가 외교활동이나 만주지역의 무장세력을 통괄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자 정부에 대한 비판세력이 늘어났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개혁과 독립운동의 방침을 통일하자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이 제기되었는데, 안창호도 이에 호응하여 1921년 5월 임시정부를 사임했다.


이승만·이동휘·안창호의 세 지도자가 끌던 임정의 삼두마차(三頭馬車)는 삐걱거리면서 1921년까지 유지됐다. 이동휘와 안창호가 사임한 뒤에도 여전히 미국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이승만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대통령에서 면직됐다. 이렇게 초기 세 지도자는 퇴장했지만, 임시정부는 건재했다. 노선이나 지역·이념의 차이에 따른 대립과 다툼은 남아 있었으나, 이동녕·김구·이시영·조소앙 등 임정을 지킨 지도자들의 독립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은 임시정부를 27년 동안 지켜낼 수 있었다.


[최기영·서강대 사학과 교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