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집요한 침묵이 독도를 지켰다
[조선일보] 2008년 12월 16일(화) 오전 03:25
"1965년 한·일 회담을 통해 한국은 독도 문제에 대한 우위를 확보했다"는 내용의 논문이 나왔다.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소장 이원덕)의 최희식 연구교수는 최근 학술지 《일본공간》(논형刊) 제4호에 〈한일회담에서의 독도 문제〉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1960년대 한·일 회담 당시 한국이 독도 문제를 애매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이후 영토 분쟁의 빌미가 됐다는 일부 시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일본학연구소는 지난 5월 한·일 회담 한국 측 문서 3만6000쪽을 처음으로 분석해 해제집을 낸 바 있다.
◆日 '국내용 대책'으로 독도 거론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폭파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1962년 9월 3일 한·일 양국의 회담에서 이세키 유지로(伊關佑二郞)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의 발언이다. 이 말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독도 폭파를 언급한 '하네다 발언'보다 10일 앞선 것이었다. 여기서 일본은 앞으로의 회담에서 독도 문제를 의제로 할 것을 고집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일본 정부는 독도에 높은 전략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사회당 등 혁신세력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국내용 대책'이 필요했다. 1963년 1월 11일의 회담에서 스기 미치스케(杉道助) 일본 수석대표는 이런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JP의 돌출행동? 일본은 흔들렸다
1962년의 '김(金)·오히라(大平) 회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 측이 독도 문제를 제기하면 한국민은 일본의 침략을 상기할 것이라고 하라'는 훈령을 내렸으나, 김종필 부장은 이를 벗어난 '제삼국 조정안'을 제시했다. 최희식 교수는 "김종필의 이와 같은 행동은 독단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일본측에 협상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청구권 협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술적 판단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김종필의 제안 이후 일본 측에서 다양한 대안이 나오면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라는 일관된 정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독도 실효지배' 확고해져
계속되는 한국의 거부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합의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공문〉이란 형태로 독도 문제에 여지를 남기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꿨다. 1965년 6월 합의된 이 공문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도록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조정 또는 중재 절차에 의한다'고 했지만 '독도'라는 단어는 빠졌다. 이동원 외무장관이 끝까지 일본 측을 압박한 결과였다. 기본조약이 가조인된 6월 22일 주일대사가 본국에 보낸 전보에서는 "독도 문제의 해결은 실질적으로 우리 측의 합의 없이는 영원히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임"이라고 썼다. 결국 한·일 회담은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한국의 독도 실효적 지배'라는 현상 유지를 더욱 고착화시켰고, 일본이 이를 타개할 모든 방법을 봉쇄해 버렸다는 것이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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