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통박함

한부울 2008. 12. 7. 19:17

 안병직, 위안부 강제동원 없어 또 망언 http://blog.daum.net/han0114/17044564

 

식민지 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植民地近代化論)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가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고종의 무능과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척족에 의해 피폐해진 조선을 일본이 합병함으로써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이론으로 광복 초기의 대한민국이나 일본제국 시절부터 근래까지 일본에서 지지를 받았으나, 최근에는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로부터 많은 반박을 받아 지지를 잃었다.


일본의 우익 상당수와 한국의 일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지만, 다수파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은, 일제의 침략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비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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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통박함

오마이뉴스 (news)  2005-03-24 20:41

 

최근 <개발 없는 개발>을 펴낸 허수열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그는 일제시대 조선경제가 유례없을 정도로 크게 개발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식민지 근대화론과 상반되는 결과를 내놓았다. 허 교수가 자신이 펴낸 책에 대한 소개 글을 보내와 싣는다... 편집자 주ⓒ 은행나무


지난 주말에 필자는 모처럼 책 한 권을 내어 놓았다. 제목이 <개발없는 개발>(은행나무)로 일제시대의 개발이라는 것이 조선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한 책이었다.


오비이락이라고도 할까. 지난 2년을 준비하여 모처럼 책을 내놓았는데,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일본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때에 출간되어 버렸다. 집필을 시작할 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오랜 산고 끝에 내놓은 책이 시의에 적합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고 저절로 책 선전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더 많다. 이번에 출판한 책이 학술서이니만큼 학술적으로 진지한 토론이 뒤따라서 나의 주장의 옳고 그름이 명백히 밝혀져야 하는데, 시대적 분위기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운 것이다.


내 주장은 결과적으로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나를 비판하면서 자칫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친일파 혹은 그 앞잡이로 몰려 몰매를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지한 학문적 토론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일제시대 조선경제 유례없을 정도로 개발


필자가 바라는 것은 거리낌없는 비판을 이겨내어 이 연구서가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것이지, 모든 비판에 재갈을 물린 채로 혼자 우쭐거리는 우물 안 개구리 노릇은 싫다는 것이다. 그간 한국사에서 독보적 지위를 차지해 왔던 수탈론도 오랫동안 우물 안 개구리 노릇만 해 왔기 때문에, 우물 밖으로 나왔을 때 한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경제가 세계를 향해 열리게 되었을 때, 한국사도 세계를 향해 열리게 되었다. 이제 한국사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한국사 연구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흔히 맹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 용어에 대해 불만이 많아 ‘이른바’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과 같은 것도 한국사의 세계화 과정에서 태어났고 학문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책은 이런 연구와 대립적인 입장에 서 있지만, 내용 면에서는 그런 연구결과에 크게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일제시대 조선경제가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크게 개발되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과 아무런 차이도 없고 오히려 수탈론과 대립적이다.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자본이 투입되고 선진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조선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접근방법은 종래의 수탈론과 사뭇 다르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예 수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일부러 피하였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의 거의 모든 경제관계는 교환관계를 통해 이루어졌고 이럴 때는 폭력적인 방법 혹은 경제외적인 방법으로 빼앗아간다는 뉘앙스를 수탈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수탈의 본질을 흐려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흔히 미곡수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지주의 입장에서 볼 때 좀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시장에 그것을 내어놓는 경제적 관계를 통해 미곡이 일본에 수출된 것을 말할 뿐이다.


일제시대 '조선인경제', 개발 없는 개발


그럼에도 결론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크게 다르고 종래의 수탈론을 적극 지지하는 모양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조선경제에 대한 분석을 단순히 조선이라는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중심으로 하여 분석하였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식민지 근대화론’이 조선이라는 지역에서 이루어진 변화의 현상에 대한 분석에 그쳤다고 한다면, 필자의 분석은 그러한 분석을 민족문제까지 집어넣어 좀더 깊이 들어간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조선경제를 분석했을 때와 조선인경제를 분석했을 때 양자간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경제를 분석하면 개발이라는 측면이 뚜렷이 나타나지만, 조선인경제를 분석하면 개발의 징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개발 없는 개발'인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가? 필자는 그것이 민족별로 지극히 불평등한 소유관계에서 발생한다고 보았다.농업생산이 크게 늘어났지만,그것과 동시에 일본인이 소유하는 경지 특히 논의 면적이 매우 빠른 속도로 증대되었다.


그 결과 증산된 미곡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몫으로 귀착되었다.조선인의 분배몫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민족별 소득격차가 확대되고,소득의 불평등은 다시 소유관계의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었다.그리고 이런 식민지적 구조는 공업,광업,수산업 등 모든 산업부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고,식민지적 교육제도가 이런 민족별로 불평등한 관계를 확대재생산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해방 뒤 일제시대 물적 유산 1/10 이하만 기능


결국 식민지적 개발이란 불평등과 종속 그리고 차별을 확대재생산했을 뿐이고 식민지체제가 지속되는 한 조선인에게 있어서 진정한 개발은 기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입증하려고 한 또 하나의 과제는,일제시대에 조선에서 개발이 있었다면 그 개발의 결과 남겨진 것이 해방 후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어떤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자료를 사용하여 해방 후 조선에 남겨진 일제의 물적 유산이 남북분단,해방 후 혼란기 및 한국전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크기가 어떻게 변해갔는지 수량적으로 밝혀 보려고 노력하였다.

 

                                          ▲ 허수열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결과를 보면 일제시대의 물적 유산의 1/10 이하의 것만이 기능했고,그것은 해방 후 한국에 주어진 미국 원조의 1/7 수준에 불과하였다.일제시대의 개발은 조선인들 자신에 의한 개발을 식민지적 개발로 치환함으로써 한국의 본격적 개발을 오히려 저해한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고 본다.


이 책은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실증한 것이다.대부분 것들은 숫자로 표현된다.모든 데이터를 시시콜콜 따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기 매우 지루할지도 모른다.그러나 그 옳고 그름은 명백할 것이다.


단 이 연구로 일제시대 개발의 모든 측면이 실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증할 수 있는 것만 실증했기 때문이고, 실증이 불가능하다고 하여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실증할 수 있는 것만이라도 확실히 해 두자는 것이다.필자가 학문적으로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부디 유익한 비판이 있기 바란다.


* 허수열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출처 :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를 통박함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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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천민화론/식민지근대화론 

글쓴이 Corea [ 2007-10-23 18:09:51 ] 


식민지 사회에서는, 지배국민은 귀족이 되고, 식민국민은 천민이 된다. 서민이란 존재치 않는다. 조선시대의 선비 사대부는 귀족이었다. 그 아래에 서민도 있고 하층민도 있었다. 귀족이건 서민이건 하층민이건 모두가 조선의 국민이요 백성이었다. 조선의 국민이라는 점에서는 그들 모두가 동등한 조선인이요 조선민족이요 사람존재였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나서 귀족도 서민도 하층민도 모두 천민이 되었다. 천민이란 사람 이하의 존재이다. 식민지인은 사람 이하 천민이다. 일본인은 사람이요 조선인은 사람 이하 천민이 된 것이다. 식민화란 전 천민화이다. 조선인이면 모두 천민이 되는 것이지 예외가 없다.


천민화에는 근대화란 존재치 않는다. 식민지는 천민화가 근본이요 본질이며, 식민지 근대화란 허울좋은 속임수이다. 천민화하지 않을려면 식민지가 왜 필요한가.


사람을 천민으로 만들면 그 사람의 외부환경이 지상천국이 되어도, 그것은 천민화를 더 깊숙히 못박는 것이지 천민화를 벗겨주지 않는다. 천민화를 벗기는 것은 식민지를 중단시키는 독립의 길 밖에 없다. 독립운동이란 이 천민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죽음의 투쟁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필연적으로 독립투쟁의 가치를 부정하게 된다. 친일파사회 식민지국가성 대한민국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해괴 괴이한 현상이다.


식민지근대화란 귀족인 일본과 일본국민이 자기들의 위상에 걸맞게 식민지를 향유하기 위한 근대화이다. 천민인 한국인이 향유하라고 한 것이 될 수가 없다. 천민이 된 한국인을 위한 근대화는 식민지를 그만두는 것이다. 그것을 하지 않았으면서 근대화했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인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자기기만이요 아직 미개명 열등한 수준이다.


일본이 식민사관으로 편찬한 조선사 라는 것이, 한국역사를 천민화하여 한국인의 정신상태가 천민화되도록 세뇌하는 것이다. 한국을 천민화하고, 일본은 식민지한국 상위로 귀족화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거짓격하 왜곡허구 사서분서 음모사기 인간악의 최고기술이 다 동원된다.


한국을 천민화하면 할수록 일본은 귀족화되며, 일본을 귀족화하면 할수록 한국은 천민화된다. 식민지근대화란 한국천민화이다. 천민화하지 않을려면 식민지가 왜 필요한가.


무슨 학교다 행정이다 제도다 철도다 하는 것들도 단 하나의 예외없이 모두 일본귀족화와 한국천민화를 목표한 것이다. 식민지 자체가 전체적 천민화이다. 예외가 없다. 귀족일본인이 누리기에 걸맞는 환경을 만들어놓고, 천민한국인은 걸식하는 거지화 노예화하는 것이다.  


식민지천민화야말로 한국민을 천민화 노예화한 최악의 독약이며 우리는 아직도 그 독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양성한 독약 친일파가 지금도 득세하고 있다. 식민사관의 독약에 빠져 아직 헤매고 있다. 친일파는 천민한국인이 가장 천민화된 시궁창이요 썩은 냄새를 풍기는 해독이다.


반대로 일본에게는 친일파가 식민지근대화라는 미명의 꽃이다. 일본은 21세기 지금도 한국에서 그 꽃이 죽지 않고 꽃피고 있음을 좋아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아무리 경제대국이라 하여도 일본인은 한국인보다는 그 근성이 근본적으로 천박 미개하다. 좋아하지말라. 시궁창의 독약 친일파는 거세될 것이며,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정체가 모호하였던 뉴라이트라는 단체라는 것이 이 식민지근대화론에 근거하고 출발하였다는 것이 노출되었다. 무슨 교과서모임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그 이론 주창자가 일본에서 연구하다 세뇌되어 돌아와서 뉴라이트가 생기고, 최근에는 친일파근원 한나라당의 정책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학자연하며 말은 하나 일본체류중 세뇌된 자이다. 자본주의니 뭐니하면서 식민지통치의 세뇌, 일본학술의 세뇌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한국학술계의 현주소이다.


왜 그런가. 일본의 학술인들은 식민지근대화라는 "정치적 관점"을 먼저 세워놓고 모든 사실을 거기에 맞추어 수집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증명한다. 한국의 학술인들은 그들이 세워놓은 식민지근대화라는 "정치적 관점"을 덥썩 받아들이고 나면, 그 다음 전개해놓은 사실증명과 논리에서 빠져나갈 도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세뇌된다. 신판 친일파가 된다.  


중국의 학술인들이, 중국땅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정치적 관점"을 먼저 세워놓고 그에 맞추어 사실을 수집하고 논리를 전개하고 증명한다. 이름하여 동북공정, 공정, 공장에서 물건만들듯이 만들어낸다, 공정이란 말이 정직하긴 한다. 공정이란 것이 정치적 관점이다.


동북공정이라는 "정치적 관점"을 덥썩 받아들이고 나서 그들이 전개하는 논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 한국 학술인들이다. 왜냐, "환국공정" "고조선대공" " 만주정략" '단군대정"이라는 한국의 '정치적 관점"을 세우지 않는 한 동북공정을 물리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재단이니 뭐니 하는 이름조차 모호몽롱한 연구소를 차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회색지대에서 흐리멍덩 헤매는 일 밖에.


학술계 지식인의 활동에 대하여 거듭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언론을 통하여 형성한 여론이 사회지도층뿐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국민들의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정책연구소가 정당의 방향을 움직이고, 그 정당의 정책이 국가를 움직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역사는 정치다, 라고 수없이 말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한국의 학술계, 진실이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찾아서 헤매고 있다. 역사학에서 외국에 대칭한 자국의 "정치적 관점"을 먼저 세우는 것, 그래서 역사는 정치라고 하는 것이다. 그 주관이 아니면 역사쓰기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주관을 다 뺀 보편 객관 진실이란 어디에도 없다. 실증사학이란 거짓이다. 신도 모르는 진실을 그대들이 어떻게 찾을려고 하는가. 전지전능하기를 꿈꾸고 있다.


랑케는 국가민족사학자이다. 일본인은 국가민족사학를 취하고, 한국인에게는 국가민족사학이 틀렸다고 랑케를 이용해먹었고 한국인은 그것이 옳은줄 알고 금과옥조 빠졌다.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도 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경우이다. 일본식민지 시대에도 그래서 수많은 변절자가 태어나지 않았던가, 백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사람을 천민으로 만드는 "식민지천민화론"이 한국의 "정치적 관점"이다. 한국의 정치적 관점을 세워놓고 거기에 사실을 수집하고 논리전개 증명하라. 식민지천민화론을 먼저 세워야만, 식민지근대화론의 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식민한국인을 위하여서는 식민지천민화요, 귀족일본인을 위하여서는 식민지근대화이다. 천민을 위한 근대화란, 귀족을 위한 근대화를 거지처럼 얻어먹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란 거짓이요 허구요 속임수이다. 함부로 나서지 말라.


한국의 경제개발은 박정희의 "식민통치법"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성공한 바탕은 우리국민의 정신상태가 식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식민통치법이 성공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식민통치법이 성공적으로 작동하였으므로 박정희 개인에게만 군사독재의 과오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한계가 여기에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것도 박정희의 경제개발성공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고 정리할 수 없는 무능무력함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계기는 민주화 이후 서민통치법 즉 민주통치법이 오히려 경제개발성공의 효과를 반감시키고 사회혼란까지 초래함에 대하여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과거성찰로 되돌아가서 경제개발성공이 오늘의 발전된 대한민국을 가져왔으므로 박정희의 식민통치법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면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가 박정희 식민통치법의 원류가 되므로, 일본의 식민지근대화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고육지책에 부딪치게 된다. 여기에서 방향전환하여 변절하기를 정당하다고 수용하게 되는 어설픈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것이 수준미달의 한국 지식 학술 지성계이다. 지식인라고도 할 수 없다. 그 누가 말했듯이 보따리 장사꾼들이다.  


근대한국 역사평가는 "식민지천민화"를 초점으로 하여야 한다. 천민화가 어떻게 진행 추진되었는가, 그 방식과 과정과 역사를 바탕으로 한 관점을 튼튼히 세우는 것이 소위 그대들 학술인이 해야 할 일이다.


식민지근대화란 귀족일본인의 자격에 맞춘 것이지 천민한국인의 자격에 맞춘 것이 아니다. 일본귀족화를 깊히 하면 할수록 한국천민화가 더 깊어진다. 반비례한다. 천민이 귀족의 음식을 걸식하도록 함이 근대화라면 근대화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 한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식민지천민화라는 한국인의 "정치적 관점"을 가질려면, 한국국수주의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수주의라는 전제가 식민지천민화라는 "정치적관점"을 두려움없이 부끄럼없이 논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물리치는 힘, 중국이 주장하는 역사론을 물리칠 수 있는 힘, 그 힘을 붙들어매게 해주는 대들보가 한국국수주의이다.


지금까지는 국수주의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인이 사람 이하의 천민이었다고 부르는 수치를 감당할 수 있는, 한국인의 명예와 권력을 보장해주는, 보호막과 기둥이 없었다. 이 자기 수치감 때문에 식민지 현상의 최하 바닥인 천민화론에 바닥을 칠 수 없으므로, 수탈이다 침략이다 등으로 천민화보다 그 상위의 고급스런 차원에서 방황하였다.


한국국수주의는 일본제국주의를 치고 공격할 수 있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한국국수주의 아래에서는 천민화를 수치감없이 논할 수 있다. 국수주의의 무기와 배경이 있으므로 식민시대를 공격할 수 있다. 한국국수주의의 배경이 없이는 일본제국주의를 맞상대할 수 있는 이념능력 무기가 없다.


북한은 주체사상이라는, 일본제국주의를 맞상대할 수 있는 이념능력 무기를 가졌다. 그러므로 북한은 식민시대를 공격 극복할 수 있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남한에는 그 무기가 없었다.


식민시대를 공격하고 극복할 수 있는, 남한의 무기는 한국국수주의이다.


북한의 무기는 주체사상이다. 남한은 국수주의의 관점에 서지 않는한 천민화라는 식민지 최하 바닥을 바닥칠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식민시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방황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시대를 극복하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식민시대의 포로, 즉 식민지사회성 식민지국가성에서 벗어날 수 없고 방황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남한은 북한과 동등하게 어울릴 수 있는 명예와 힘의 지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보수처럼 북한을 두려워하여 북한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 하거나, 진보처럼 북한에 달라붙을려고 하는 것이다. 보수 진보 모두,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식민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이념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한의 그 이념능력이 국수주의이다.  


천민화라는 최하 바닥을 쳐야만 그로부터 우리 자신을 올라 세울 수 있다. 우리를 감금하고 있는 식민시대로부터 자유를 얻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그 다음에 북한과 동급한 명예와 권력의 차원에서 떳떳하고 진정한 민족대화가 가능하고 통일을 논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이제 국수주의가 나타난 이상 방황은 끝났다.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국수주의를 세워야 한다.  


국수주의는 식민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국의 무기이다.


국가사회 전 분야에서, 국수주의는 식민시대를 극복하고 한국인을 진정하고 떳떳한 국가로 올라서게 만들 수 있는 무기요 구세주이다. 북한의 주체사상에 비견한다. 우리는, 대한민국은 한국국수주의로써 일어서야 한다. 국수주의로써 일어날 수 있고 북한처럼 자신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식민통치법"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천민적이다. 식민사관 친일주의 사대주의 통치법이다.  

"서민통치법"이란 것이 민주주의요 인권이요 평등이다.

"귀족통치법"이란 귀족국민 귀족국가 귀족명예를 추구하는 최상위의 통치법으로서 소위 선진국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민족사관, 국수주의, 제국정치도, 주권패권이 귀족통치법이다.


우리는 식민통치법 친일주의, 서민통치법 민주주의를 거쳐, 귀족통치법 국수주의로 올라서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된 나라, 바로선 나라, 선진 강국이 되는 능력이요 자격이다.

[국수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