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리스트/국가우주무기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외교문서 공개!

한부울 2008. 12. 3. 13:01

한국 ‘핵무기 개발’ 시도…외교문서 공개!

[동아일보]2008.01.15 12:38

 

▲현재 4호기까지 건설돼 있는 월성 원자력발전소 전경. 이 중 1호기는 캐나다가 개발한 가압관식 중수로로 1970년대 중반 이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미국의 ‘핵개발 가능성 원천 봉쇄’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75년 核재처리 시설 도입 추진…美, 분단 상황-日반대 이유 제동

1970년대는 소설가나 영화감독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소재로 가득하다. 베트남전쟁,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외교통상부가 접수 시한 30년이 지나 15일 0시 공개한 17만 쪽 분량의 외교문서에는 박 대통령 시절 주요 사건들이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加 원자로 도입, 美 제동


1975년 1월 6일. 캐나다 앨런 매키천 외교장관은 김동조 외무부 장관에게 비밀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국회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준해야 캐나다의 가압관식 중수로(CANDU)를 수출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은 프랑스로부터는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캐나다로부터는 CANDU와 시험용 원자로(NRX)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협상은 1974년 인도가 캐나다에서 들여온 NRX로 핵 실험을 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핵무기 개발 가능성이 있는 모든 국가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캐나다는 NRX 수출 불가 방침을 밝혔다. 결국 국회는 1975년 3월 NPT를 비준했다.


그러나 미국은 ‘핵연료 재처리 시설도 포기해야 캐나다 원자로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1975년 10월 한국 정부가 “다른 나라도 많은데 왜 한국만 문제가 되는지 납득 할 수 없다”고 항변하자 리처드 스나이너 주한 미국대사는 “한국은 분단돼 있으며, 미묘한 세력 균형상의 문제가 있다. 일본이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한국 정부가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도입을 무기한 연기하겠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1월 26일 CANDU 도입에 양국이 합의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건설된 원자력발전소인 월성 1호기다.


열강 외면 속 절박했던 베트남 탈출기


“1975년 5월 1일.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일본 대사관마저도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 자기네들에게 폐가 되는 일은 삼가 달라고 하면서….”


이번에 공개된 외교 문서에 포함된 ‘김창근 주베트남대사관 2등 서기관의 탈출수기(1975년 4월 28일∼5월 11일)’에는 베트남 패망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베트남 패망 직전인 4월 29일 김 서기관 등은 미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 대사관은 자국 국민들을 먼저 분류해 헬리콥터를 이용해 탈출시켰다. 김영관 주베트남 대사는 이미 탈출한 상태였다. 직원들은 좌절했다. 어떻게든 헬리콥터를 타려고 했으나 미 해병대는 몰려드는 사람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까지 쐈다. 일본대사관과 몸을 숨겼던 프랑스 병원도 더는 도울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김 서기관은 절망에 빠져 청산가리와 수면제를 얻어 자살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는 돈을 주고 배를 사 5일간의 긴 항해 끝에 8일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11일에 도착했다.


정부의 김형욱 대책회의


박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1977년 6월 뉴욕타임스와 미 하원 프레이저 청문회를 통해 김대중 납치사건 등 박정희 정권의 비리와 대미 공작을 폭로했다.


1977년 6월 23일 최규하 국무총리와 김재규 중정부장 등 정부 최고위층이 총리공관에 모였다. 이날 회의에서 김 전 부장의 발언 내용 중 위법 사항에 법률을 엄격히 적용하고 재미교포 사회를 통해 김형욱을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하도록 독려하기로 했다.


동아일보/ 김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