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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군사전략적 중요성(1)

한부울 2008. 7. 18. 00:16
 

독도의 군사전략적 중요성(1)

이선호   2005-10-17 06:34:58


허문도 전 통일원장관은 모 월간지에 최근 게재한 글에서 일본은 독도를 러일전쟁 승리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내셔나리즘의 발로로 독도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란 주장을 다음과 같이 폄으로서 독도의 군사전략적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고 있다.


"일본 연합함대사령관 도고 제독은 함대를 정비하기 위해 규슈(九州) 서쪽의 사세보 기지로 이동시킨 후, 1904년 12월30일 전황보고를 위해 동경의 대본영에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사상 유례 없는 천재 작전참모라고 칭송하는 아키야마 사네유키(秋山眞之) 중좌가 동행했다.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대하소설 「언덕 위의 구름」은 동경에 온 아키야마의 행적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1년 전에 결혼한 그에게는 동경 시내 아오야마(靑山)에 신부가 기다리는 새집이 있었다. 동경에 있는 동안 아키야마는 해군 군령부에 매일같이 잠깐 얼굴을 비치고는 이내 집에 와서는 군복을 입은 채 벌렁 드러누워, 늘 볶은 콩을 씹으며 바둑판처럼 구획된 판자 천장을 끝없이 응시하며, 작전구상에 골몰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통과할 것으로 예상한 제주도 근해에서 시작하여 동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 동해를 위도·경도 각 10분씩 바둑판으로 세분한 지도책을 작성하고, 그 바둑 칸 하나하나에 일련번호를 붙였다. 적 함대를 발견했을 때 하나의 숫자를 대는 것만으로 위치 전달이 족했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는 일본 각의가 독도 귀속을 결정한 1905년의 1월 한 달을 동경 새집의 바둑판 천장을 바라보며 작전구상에 빠져들었던 아키야마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동해를 세분하는 작전지도를 만드는 과정에서 일본 해군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독도의 존재에 눈이 갔을 것이고, 국가의 흥망이 걸린 대해전이 벌어질 전장 한복판에 있는 바위섬인 독도의 전략 가치에 괄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1905년 5월 동해 해전에 앞서 일본은 독도에 망루를 세우고, 무선전신 기지를 설치했다.


일본 각의가 어민의 어로를 위해 독도 영유를 결정했다는 1905년 1월 하순 경,, 육전에서는 만주 요양의 북서쪽 흑구대 부근에서 러시아군 대병력과 일본군 수개 사단이 혹한의 풍설 속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러시아군의 반격은 저지되었으나, 일본군 1개 사단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5,000여 명의 사상자와 동상자가 발생했다.


만주 벌판의 전황은 전신을 통해 동경의 대본영으로 즉각 전달되고 있었다. 동복이 무진장 아쉬웠고, 화약이 모자랐고, 전비가 달렸다. 온 정부가 전쟁 뒷바라지에 매달려 있던 것이, 일본 각의가 독도 귀속을 결정하던 1905년 1월29일 전후의 상황이다.


도고 제독은 1905년 문제의 1월 한 달을 꼬박 동경에 머물면서 야마모토 곤베이(山本倦岳衛) 해군상 등 해군 수뇌부와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때 결정된 대작전 원칙은 「함대의 전력을 대한해협에 두고 기(機)에 응해 행동할 것」이었다.


일본 해군은 동해에서 발트함대와 결전을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발트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수로로는 사할린과 북해도 사이의 소야(宗谷)해협, 북해도와 혼슈(本州) 사이의 쓰가루(律輕)해협 등 두 개의 수로가 더 있었다. 도고는 군함 29척, 수송선 40척, 승조원 1만 명의 대함대가 이들 수로 통과하는 것은 어렵고,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긴 항해에 지친 함대가 지름길인 대한해협)를 택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때 독도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동해해전을 앞둔 일본함대가 망루와 무선기지를 설치할 곳으로는 독도 만치 좋은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략이 풍부한 야마모토 곤베이 해군상은 해군 수뇌부의 작전의지에 맞춰, 각의에서 「어로작업」 명분으로 독도 귀속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동경을 떠난 도고 제독은 정비를 마친 연합함대를 끌고, 진해만으로 이동했다. 연합함대는 5월 말의 해전 때까지 석 달 내내 함포사격 연습만 했다고 한다. 거제나 웅천이나 다대포의 우리 어민들은 생업을 닫고 밤낮 없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에 떨었을 것이다. 일본 연합함대와 발트함대가 조우한 곳은 부산과 일본 야마구치현의 서북 끝을 연결한 중간 지점쯤 된다.


20시간 남짓한 동해의 해전에서 발트함대는 괴멸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러시아의 함정은 순양함 한 척과 구축함 두 척뿐이었다. 동해해전의 결전은 독도근해에서 벌어졌다. 27척의 연합함대 함정들이 전함 두 척을 포함하는 다섯 척의 발트 함대 함정을 원거리에서 포위했다. 러시아 함대에 백기가 올랐고 나포 절차가 진행되었다. 동해해전은 결국 독도에서 끝났다.


독도가 동해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되었던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오늘날도 메이지 일본의 영광의 정점에 러일전쟁사를 두고 있다. 그들은 러일전쟁을 「민족 서사시」라 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인들의 독도에 대한 미련이 그들의 러일전쟁 내셔널리즘에 접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러일전쟁 승전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인지, 일본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한국 침략전쟁이었고,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한 전쟁이었다. 일본인들의 속성으로 봐서, 우리가 일본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나라를 만들기 전에는 독도문제는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독도가 전략적 요충지이며 병목(bottle neck)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러일 전쟁의 전개과정을 재론하지 않더라도 연평해전과 같은 남북한간의 해상분쟁이 동해에서도 재연되지 않는다고 보장 할 수 없으며, 일본과 러시아 수상 및 잠수 함대 일부 세력이 가 주변에 빈번히 출현하고 있는 현상에서 수긍이 간다. 뿐만 아니라, 이 정부가 미련하게도 북한 민용선박과 상선의 제주해협 무해통항권까지 부여한 마당에 독도가 불침함으로서의 지극히 중요한 지전략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특히 북한의 근 100척에 달하는 잠수함과 잠수정의 주 기지가 동해안에 있고 동해가 그 활동무대인 바 양분된 북한 해상세력이 유사시 서해로 이동할 때 그 길목이 될 것 인 바, 해공군의 전진기지가 될 울릉도와 더불어 독도는 장차전을 위한 해상 전초기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본은 독도와 가장 가까운 시마네현 청사와 경찰청 정문 앞에 "다께시마는 죽어도 우리 땅이다"라고 프랑카드를 내걸고 있다 .한국은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당국의 눈총을 받는다.


1996년에 홍콩기자가 각국 기업인들에게 독도 영유권 질문을 한 결과 말레이지아 55%,호주 59%,인도 56%,필리핀 55%로 각각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답하였다 한다. 지금은 거의 90%정도로 바뀌었을 것이다. 정부의 나태와 무지가 돋보인다. 


최근 요미우리신의 보도에 의하면 김종필이 1962년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시에 독도가 골치 아프다고 일본에다 폭파해서 없애버리자고 제의했다가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일본 영토를 감히 한국이 어떻게 폭파할 수가 있느냐,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최근 독도근해의 해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과 관련하여 국력의 우위를 앞세운 일본의 집요한 독도 영유권 분쟁화에 의한 국제사법재판소 회부전략이 가시화되고 있음을 본다.  특히 일본은 5천 여종의 「다께시마」자료를 발간 배포했으며, 전 세계 각 국의 지리부도나 아트라스에 독도를 다께시마로 표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은 독도에 대한 연구를 가일층 심화시켜 국제적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고 공감대를 확산함과 동시에 국력의 성장에 걸맞게 해군력을 현대화·증강시켜 나가면서 독도에 대한 확고부동한 국가적 의지를 견지해 나갈 때, 승산은 한국에게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독도박물관을 국립박물관으로 승격시켜 국고지원을 강화함과 동시에  중앙부처 직할로 독도문제 연구소를설치 운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