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는 대한민국 영토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신숙주(申叔舟)가 일본에 관해 쓴 책 1471년(성종 2) 간행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많은 목판본 지도들 중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지도가 한 장 있다. 무려 여든 두 개의 포구가 자세히 그려진 섬 지도, 그것은 천연의 요새이자 왜구(倭寇)의 본거지인 대마도(對馬島) 지도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무려 500차례 이상 침략과 노략질을 자행한 대마도의 왜구, 마침내 조선은 대규모 원정선단을 편성하여 이들의 본거지를 토벌하러 나선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 거리로 49.5km, 그리고 일본의 후쿠오카에서는 134km 정도 떨어져 있다. 거리상으로는 한반도 쪽에 더 가까운 섬이다. 그 섬이 바로 삼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정예군이 왜구의 근거지를 정벌한 현장, 대마도인 것이다. 조선이 이곳을 공격한 첫 번째 이유는 왜구들 때문이었다. 1281년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 원정 이후 고려와 정상적인 무역이 막히자 대마도를 비롯한 많은 倭 人들은 물자부족에 시달린다. 그러자 이들이 무리를 지어 해적질을 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왜구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치기 위해 대규모 군사를 일으킨다. 1419년 5월, 마침내 태종(太宗)은 전군에 비상 소집령을 내려 조선 수군의 주력함대를 거제의 견내량에 집결시킨다.
견내량은 거제도와 고성 통영 쪽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이다. 섬과 육지가 가장 가까운 곳은 500m 남짓 된다. 육지와 섬 사이가 좁아 조류가 병목 현상을 일으키는 견내량은 대체로 물살이 급하다. 견내량 역시 지형적 특성상 물의 흐름이 빠른 곳이다. 그렇다면 대마도 정벌전(對馬島征伐戰) 당시 조선 수군은 왜 하필 이 좁고 물살이 거센 바다에 집결했을까? 거제도가 갖고 있는 조건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견내량 바깥쪽의 지세포만은 거제도를 지키는 전초기지였다. 지도에는 성이 그려져 있다. 배를 만들던 선창마을 뒤산에는 아직도 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길이 735미터, 높이 5미터의 지세포 성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는데 지금의 것은 인조(仁祖)대에 다시 개축된 것이다. 지세포 성은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 해안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세포 성은 견고한 구조를 갖고 있다. 동쪽 문에는 옹성을 설치하여 방어에 유리하도록 하고 있다. 지세포성은 특히 동쪽 성곽의 원형이 잘 남아 있는데 동쪽은 대마도 방향이다. 대마도의 왜구들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인 것이다. 거제도에는 모두 25개의 산성이 있다. 좁은 면적에 비해 많은 산성, 그것은 왜구와의 치열한 관련성을 말해준다.
이종무가 총지휘하는 정벌군이 견내량에 집결한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견내량의 물살과 관련이 있다. 견내량은 하루에 두 번 조류에 의해 물살의 방향이 바뀐다. 썰물을 기다렸다가 그 물살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넓은 바다로 나갈 수 있다. 그런 다음 해류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대마도로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견내량의 뱃길은 조류를 이용하고 있다. 북동쪽으로 일정한 방향을 지닌채 흐르는 쿠로시오 해류! 거제에서 썰물을 타고나가 북동진하는 해류를 만나면 가만히 있어도 대마도 중심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견내량은 견고한 방어시설로 정벌군의 안전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조류와 해류의 흐름은 조선 수군에게 유리했다. 대마도 정벌군이 부산포 대신 견내량에 집결한 까닭이 여기 있었던 것이다.
원정함대의 총지휘관은 삼군도절제사 이종무(李從茂) 장군이 직책을 맡았으며, 좌군도절제사에는 유습(柳習), 우군도절제사에는 이지실(李智實)이 임명되어 전라도, 경기도, 충청도 지역의 수군 병력을 차출하였고 군사 1만 7천여명, 전함 227척으로 대한해협(大韓海峽)을 건너 대마도를 공격하게 된다.
좌군절제사에 임명되어 대마도 정벌에 참전했던 박초(朴礎), 그가 남긴 토헌집(土軒集)에는 당시의 수군 훈련방법과 관련하여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이 있다. 상소문은 그의 오랜 수군 생활에서 나온 경험을 토대로 씌여졌다. 전함은 부식 방지를 위해 훈연한 목재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수군의 훈련을 강조했으며, 다양한 진법 익히기와 활쏘기 등 개인 전투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방안들이 담겨있다. 태종(太宗) 세종(世宗) 연간에는 유난히 수군 훈련에 대한 상소가 많았다. 병선에 쓰이는 화통이 모자라니 주철을 녹여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고, 습기에 민감한 화약을 배 위에서 잘 보관하는 방법 등이 보고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대마도 정벌을 단행한 이종무 조선 수군의 훈련과 전력은 어땠을까? 정벌전 당시의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대신 조선 중기의 통제영 수조도에서 대마도 정벌군의 진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중앙에는 지휘선이 있고 지역의 수군들이 편제를 이루어 정해진 진법에 따라 진을 형성했다. 삼도수군의 합동훈련이었다. 각 함대에는 연락과 보급을 맡은 부속선이 있었는데 물동이를 실은 부속선이 이채롭다. 오방진을 이룬 함대는 끝이 뾰족한 첨자형 진영를 이룬다. 이런 진법은 조선 초기부터 나오는데 태종은 직접 한강에 나가 오위의 진을 사열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대마도 정벌에 나선 15세기 초 조선 수군의 배는 어떤 것이었을까? 최근 목포 앞 달리도의 갯벌에서는 선박 한척이 발굴되었다. 갯벌 속의 배는 수백년 전의 원형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존과 복원을 위한 처리가 한창인데, 이 배는 대마도 정벌보다 약 1, 2세기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배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이 배가 지금까지 발견된 배중에서 조선 초기의 맹선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달리도 배는 앞선 시기 고려의 배와 비슷한 구조이지만 한층 발달된 제작 기술을 보여준다. 배의 좌현과 우현은 가룡목이라는 통나무로 연결했는데 외판에는 가룡목을 끼웠던 흔적이 있다. 이 가룡목은 배의 구조를 튼튼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가룡목이 있었기 때문에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배의 구조는 견고했던 것이다. 달리도 배는 선수와 선미가 높고 뭉툭하다. 그리고 가룡목으로 튼튼한 구조를 갖게 되었다. 외판은 나무못으로 고정되어 물을 머금을수록 견고해 졌다. 태종은 전함 개량 사업과 진법 훈련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것이 대마도 정벌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1만 7천의 군사가 227척의 선박에 나누어 탔다. 배는 적어도 60명 이상이 탈 수 있는 규모여야 했다. 원정함대의 사령관 이종무가 탔던 함선, 견고한 구조와 최소 100여명이 탔던 크기의 당시로서는 최고의 전함이었을 것이다. 화약은 특별한 곳에 보관했다. 습기 방지를 위해 화덕 위에 시렁을 얹어 관리했다. 바닥에 물독이 실리고 그 위 칸엔 쌀과 미숫가루 등 65일분의 전투 식량이 있었다. 체계화된 동원시스템과 우수한 전함, 이것이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하게 한 힘이었다.
대마도 정벌을 위해 조선을 철저한 준비를 했고 대군을 출동시키기 전에 사전 정지 작업을 실시한다. 부산포와 내이포의 왜관을 폐쇄하여 일본 상인들과 왜구(倭寇)들 간의 연락을 두절시키고 정보누출을 막기 위한 조치로 591명의 倭 人들을 감금한다. 또한 조선 관헌의 통제에 저항하는 倭 人 21명은 현장에서 참살한다. 즉, 말썽을 일으킬 여지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조선에서 약탈을 자행한 해적들을 체포해서 송환할 것을 요구한다. 대마도를 공격하는 명분을 쌓기 위한 것이다. 정벌 도중 국내방어 대책을 수립,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을 모두 동원하여 군사요충지에 배치시킨다. 이처럼 조선은 대마도 정벌을 위해 사전 작업을 철저히 한 후 드디어 출정의 깃발을 올린다.
거제도를 출발한 조선 수군은 해류를 타고 단 하룻만에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에 도착한다.
이종무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먼저 두지포 앞바다에 선박을 정박하고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그러나 대마도주가 항복을 거부하자 조선 수군은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일방적인 전투가 전개되어 왜구의 군선 129척이 격침되었고 倭 人 120여명이 사살됐으며, 왜구에게 붙잡혀 있던 중국인 포로 131명도 구출되었다. 왜구들이 섬 깊숙이 숨어들자 이종무는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훈내곶은 상 대마도와 하 대마도를 잇는 요충지이다. 지금은 바다 매립으로 육지가 넓어졌지만 당시에는 훈내곶을 중심으로 양쪽의 바다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다. 그래서 작은 배는 육지로 끌어 올려 이동했는데 훈내곶은 일본에서 오는 배가 아소만과 조선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곳에 이종무는 목책을 설치하고 대마도 해안을 봉쇄해 버렸던 것이다.
두지포와 훈내곶을 점령한 다음, 조선 정벌군은 니로군 지역에 상륙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뜻밖의 상황을 만난다. 지형에 어두웠던 조선 수군은 적의 매복에 걸려 18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피해를 입은 것이다. 대마도 정벌 도중 이종무 선단의 유일한 패배였던 이 전투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이 남아 있다. 대주편년략은 대마도 정벌에 관한 짧은 기사를 남겼는데, 니로군의 싸움에서 조선군 2천여명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보다 10배 이상 부풀려져 있다. 또한,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의 정벌군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50여년전의 고려, 몽고 연합군과 같은 경우로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이 시기에 대마도 정벌에 나섰을까? 그것은 당시의 대마도의 내부사정과 연관이 있다. 당시 대마도주는 소사다모리[宗貞盛], 어린 나이로 아버지 뒤를 이은 그는 대마도 왜구들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다. 그 틈새로 왜구들의 노략질은 심해졌고 급기야 조선 조정은 근거지 토벌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종무의 원정함대는 신속하게 작전을 전개했다. 고려 말기 조선 초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 그들의 본거지 대마도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것은 조선 최대 원정함대의 완벽한 진압이었다.
대마도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섬이다. 그러나 이종무의 원정함대는 귀화한 倭 人을 길잡이로 앞세워 해류와 바람을 타고 단 하루 만에 대마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차례의 교전을 거쳐 그 누구도 쉽게 정복하기 힘들었던 대마도를 접수한다. 그렇다면 조선이 대군을 일으켜 대마도를 친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리 왜구 소탕이라지만 전 병력의 3분의 1을 동원한 대규모 정벌전을 하필 건국 초기에 벌인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의 대마도 정벌, 여기에는 절묘한 외교적 정치적 방정식이 숨어 있다.
왜구의 근거지를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선단을 파견한 조선, 그렇다면 왜구 소탕이라는 직접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까?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에는 당시 왜구의 실상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자료가 한 점 있다. 명나라에서 제작한 두루마리 그림이 그것이다. 세로 32cm, 길이 5. 2m의 왜구도권, 이 그림은 명나라 해안에 나타나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왜구의 출병과 항해, 상륙과 노략질의 전 과정을 매우 치밀하게 그려놓고 있다. 동료의 어깨 위에서 망을 보는 장면도 보이고 노략질한 물건을 옮기는 장면, 그리고 토벌에 나선 명나라 군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렇게 그림으로 왜구의 폐해를 경계할 만큼 당시 명나라도 왜구로부터 큰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가 강력한 바다 봉쇄 정책을 펴자 왜구들은 중국 남쪽으로 그 활동범위를 넓혀갔다.
당시 왜구들의 극심한 노략질과 활동 범위를 보여주는 현장이 있다. 오자끼의 영주 소다가 살던 곳에서 약 500여m 떨어진 곳에서 깜짝 놀랄만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왜구가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노략질한 도자기의 파편들이었다. 불에 찬 탄 흔적이 뚜렷한 동전들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연대측정 결과 이들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시기에 불에 탄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왜구들은 왜 위험을 무릅쓰면서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을까? 그것은 명나라의 정책과 닿아 있다. 명나라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강력한 해금정책, 즉, 바다를 통제하는 정책을 폈다. 대마도 배의 해안 접근 금지는 물론, 일체의 사무역을 금지시켰다. 약탈과 함께 사무역에도 의존하던 대마도의 왜구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일년에 한 두 차례만 허가되던 견명선에 의한 무역만으로는 대마도의 경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물자 부족에 시달린 왜구들은 그 활동 범위를 넓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해금정책이 강화될수록 왜구들의 노략질은 더욱 극성을 부렸고 그것은 명나라의 부담이 되었다. 마침내 명나라는 군선 1만척을 동원하여 직접 왜구를 치겠다는 의사를 조선에 보내왔다. 조선 조정은 긴장했다. 명나라가 왜구 토벌을 위해 직접 군사를 일으킨다면 고려, 몽고 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처럼 엄청난 부담이 뒤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대마도 선제공격이었다. 강한 수군양성과 전함 개량사업으로 충분한 국방력을 확보했던 조선 조정은 마침내 독자적으로 대마도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대마도 상륙작전에 성공한 이종무의 조선 수군은 훈내곶에 주둔하고 목책을 설치한 뒤 장기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대마도주의 항복 의사를 받자마자 조선 수군은 돌연 철군을 한다. 대마도에 도착한지 고작 열흘 만에 철군을 하는 것이다. 철저한 준비와 최정예 부대의 투입, 전투의 승리로 교두보 확보에 성공한 정벌전, 그런데도 이종무의 조선 수군은 이 모든 유리한 조건을 버리고 철군을 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은 승리를 거둔 전쟁인데도 묘한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는 것이다. 대마도 측의 항복을 받아낸 조선의 정벌군이 철군을 한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비밀은 동양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지도(混一疆里歷代國地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건국 초기, 이회가 그린 조선의 팔도도(八道圖)와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져온 일본 지도, 그리고 중국과 아랍의 지도를 합쳐 만들었다. 이 지도에는 조선 남해안의 섬들이 비교적 자세히 그려져 있는데 대마도가 함께 그려져 있다. 일본인이 그린 일본 지도에 대마도는 빠져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가 조선 영토라는 것은 일본인이 만든 지도에도 나타난다. 일본의 조선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의 영역에 속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략을 위해 사용한 지도에도 대마도는 조선 땅으로 그려져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대마도는 조선 영토라는 인식이 일본에도 넓게 퍼져 있었다.
우리가 만든 지도엔 대마도가 어떻게 표현돼 있을까? 조선방역지도에 대마도는 제주도와 함께 한반도를 받치는 두 다리로 인식되기도 했다. 아예 대마도가 경상도로 편입된 지도가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대마도의 영토 인식은 정벌을 선포한 조선왕조 제3대 국왕 태종의 선전포고문에도 잘 나타나 있다.
'대마도는 본래 우리의 영토였다. 그러나 궁벽한 구석에 치우쳐 있으므로 왜인들이 거주하게 두었더니 개나 쥐새끼처럼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날뛰기 시작하여 제멋대로 살상하고 부형을 잡아가니 고아와 과부가 바다를 바라보고 우는 일이 해마다 없는 때가 없었다. 뜻밖에 이제 비인포에 들어와서 인민을 죽이고 노략한 것이 거의 3백이 넘고 배를 불사르며 우리의 장사를 헤치고 장차 명나라 지경까지 침범하려고 하니 이 어찌 심하지 아니하다고 하겠는가.'
태종 역시 대마도는 조선땅 임을 강조하면서 왜구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결국 버티던 왜구는 항복을 했고 그들 스스로 조선 조정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이종무의 함대는 예상보다 훨씬 신속하게 대마도를 제압하고 왜구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대마도의 왜구들은 조선의 정치질서 속으로 편입된다. 조선의 국왕이 관직을 내려 왜구 통제의 의무를 주고, 대신 무역을 허락한다. 대마도 사람인 피고이라(皮考理羅)에게 벼슬을 내린 조선 국왕의 교지이다. 왜구들에게 수직(授職), 즉 벼슬을 내림으로써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대마도는 오랜 기간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대마도가 정식으로 일본의 영토가 된 것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 때였다.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 그것은 열흘 의 전투에 불과했지만 고려 말기부터 계속된 70년 왜구 문제에 종지부를 찍은 원정이었다.
'영토수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본부, 일본, 준비 끝나면 독도 침공할 것 (0) | 2008.07.15 |
---|---|
대마도(對馬島)는 우리땅이다! (0) | 2008.07.14 |
대마도는 한국 땅 (0) | 2008.07.14 |
대마도는 한국인의 땅이었다. (0) | 2008.07.14 |
대마도 영유권 선언과 반환요구 (0) | 2008.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