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왕정은 소멸하는가
[경향신문] 2008년 06월 04일(수) 오후 02:59
네팔 군주정 종식 계기로 살펴본 전세계 왕정 국가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힌두 왕조인 네팔 왕정이 지난달 28일 막을 내렸다. 239년 만이다. 신성한 통치자로 아침 해를 맞이하던 마지막 군주 갸넨드라 왕은 평범한 시민으로 잠자리에 들게 됐다. 갸넨드라 왕이 받아온 막대한 급료는 몰수된다. 네팔에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그가 가족들과 머물던 왕궁은 박물관으로 바뀐다. 지폐에 새겨진 왕의 초상은 지워지고 국가 의례에서도 왕과 왕정을 의미하는 모든 언급이 사라진다. 그나마 다행일까. 프랑스 혁명처럼 왕과 일가를 단두대에 올리는 비극은 없었다. 앞서 히말라야 산맥의 소국 부탄은 올 3월 국왕 칙령으로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21세기 들어 왕조나 군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분위기다. 네팔처럼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왕정이 폐지되거나, 부탄처럼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존재하나 군림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국도 있다. 지구상 190여개국 중에서 영연방을 포함해 왕정을 유지하는 나라는 45개국이다.
최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네팔 왕정 종식을 계기로 전 세계에 남아있는 군주국들을 소개하는 기사를 싣고 “군주정은 끝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군주정의 종말을 인정하는 쪽은 왕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든다. 반면 군주정이 여전하다는 쪽은 많은 왕조가 쿠데타나 혁명, 폭동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 세계에서 전제 왕권이 가장 강한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다. 국호에 들어 있는 ‘사우디’ 자체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 알 사우드 왕가를 의미한다. 국왕은 왕이자 종교 수장으로 입법·사법·행정에 걸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 이를 견제할 정당이나 의회는 없다. 헌법이나 성문법도 없고 이슬람 율법 등 관습법이 헌법의 역할을 대신한다. 사우디는 1932년부터 현재까지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초대 국왕의 다섯 왕자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부자 계승이 아니라 형제로 이어진 게 특이하다. 현재 국왕은 2005년 즉위한 6대 압둘라 국왕으로 84세다.
초대 사우디 국왕은 공식적으로 부인 17명과 자녀 80명을 뒀다. 첫째~셋째 부인 사이에서 2~4대 왕이 나왔고 여섯번째 부인에서 5대 왕이, 여덟번째 부인에서 현 국왕이 태어났다. 왕자들이 일부다처제를 통해 자식들을 많이 낳아 사우디 왕자들은 6000여명에 이른다. 2대부터 5대까지 왕위에 오른 나이가 평균 63세, 재위 기간은 평균 13년이다. 국왕이 되는 시기가 늦은 만큼 왕위 계승을 놓고 권력 투쟁이 일 가능성도 크다.
(왼쪽부터)갸넨드라 전 네팔국왕·압둘라 사우디 국왕·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왕추크 부탄국왕
압둘라 국왕은 이 때문에 지난해 말 왕위 계승을 최종 승인하는 왕족회의인 ‘충성위원회’를 만들었다. 국왕이 서거하면 왕세자를 바로 새 국왕으로 선포하고 10일 내 새로운 왕세자를 결정하는 기구다. 현 국왕의 이복형제인 미샬 이븐 압둘 아지즈 전 국방차관이 위원장을 맡았다. 위원들도 초대 국왕의 아들과 손자로 구성됐다. 그러나 충성위원회가 사우디 왕가의 불안정한 후계구도를 안정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포브스가 세계 최고의 ‘부자 군주’로 뽑은 하지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의 왕조는 600년째 이어지고 있다. 포브스가 추정한 볼키아 국왕의 재산은 220억달러. 브루나이는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의 북서 해안에 있는 술탄 왕국으로 15세기 중반 이슬람교가 전파됐고 19세기 영국 보호령에 속했다가 84년 독립했다.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이 많아 국민들은 세금이나 교육비, 노령연금을 내지 않는다.
지난해 재임 40주년을 맞은 볼키아 국왕은 막내동생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기도 했다. 10년 전 왕실 재정의 회계 감사를 벌여 동생인 제프리 왕자가 투자청장과 재무장관 재직시절 148억달러를 횡령했다고 고소한 것이다.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라는 판결에 제프리 왕자는 재산을 하나씩 내주고 있다. 이제는 “이사하고 자녀를 양육할 수입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며 형의 우애에 기대는 처지가 됐다.
아프리카에서는 스와질랜드가 마지막 남은 절대왕정 국가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잠비크 사이, 경상도만 한 크기의 소국인 스와질랜드는 음스와티 3세가 통치하고 있다. 야당 활동이 불법일 만큼 봉건적이지만, 총파업으로 국왕의 권한이 약화되고 왕궁 앞에서는 왕정 반대 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매년 1000만달러가량의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음스와티 3세는 해마다 새 부인을 맞이해 현재 14명을 두고 있다. 부친인 소부자 2세가 부인 70명을 거느렸던 것에 비하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 나라는 국민의 30% 이상이 에이즈 감염자로 세계에서 에이즈 유병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도 하다.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산맥에 자리잡은 군주국 부탄은 올 3월 국민투표를 통해 절대왕정을 버렸다. 1907년 통일왕조를 이뤄낸 부탄은 99년에야 인터넷과 TV가 보급될 정도로 ‘은둔의 왕국’이었다.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국왕이 2006년 왕위를 계승하면서 선왕의 뜻에 따라 “입헌군주제로 바꾸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고 올 3월 총선을 실시해 민주 정부를 구성했다. 국왕 스스로 권력을 내놓으며 국민의 지지를 얻어낸 경우다.
모로코는 이슬람 왕정 국가 중 유일하게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지만, 서구식 입헌군주제와 달리 국왕이 상당한 실권을 누린다. 헌법상 국왕은 최고 종교 지도자이자 국가원수로 총리 등 각료 임명권과 법률 공포·의회 해산권을 갖고 있다. 군 참모총장을 겸직하고 조약 비준과 비상사태 선포권도 있다. 현 국왕은 모하메드 6세다.
걸프 지역 국가 최초로 성문헌법을 도입한 쿠웨이트는 권력의 일부를 국민에게 넘겨주면서도 실질적 권력은 국왕이 쥐고 있는 경우다. 입법권은 국정 협의 기구인 45인 슈라위원회에 부여되며, 위원 중 3분의 2는 국민의 직접 선출로, 3분의 1은 국왕 임명으로 구성된다. 국왕은 슈라위원회에서 제정한 법률안의 거부권과 해산권을 갖고 있다. 현 셰이크 사바 알 아마드 알 사바 국왕은 내각이 석유 매장량 고갈에 대비한 경제개혁안을 제출한 뒤 의회와 대립을 계속하자 올 3월 의회를 해산하고 새 총선을 실시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중동 왕조의 힘이 석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석유 매장량이 고갈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의 발로다.
김주현기자 경향신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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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 폐지된 네팔, 사라진 왕관을 찾아라
[쿠키뉴스] 2008년 06월 10일(화) 오후 04:30
239년 만인 지난달 28일 왕정이 폐지된 네팔에서 왕가의 상징인 왕관의 행방을 두고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출궁을 앞둔 마지막 왕 갸넨드라 샤(61)가 왕관의 소재에 대해 입을 다물면서 국왕이 왕실 보물을 빼돌리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10일 보도했다.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등 고가 보석으로 치장된 네팔 왕관은 2001년 갸넨드라 국왕의 대관식(사진) 이후 7년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국유화된 왕실 재산에 대한 조사를 맡은 재산실사위원회의 한 위원은 “갸넨드라 국왕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왕관과 국새, 보석 등 왕실 재산을 실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특히 왕관의 보관 위치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려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현재 왕관은 갸넨드라 국왕이 머물고 있는 수도 카트만두 시내의 나라얀히티 궁 어딘가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추측이다. 하지만 반환이 늦어지면서 보석 바꿔치기에 대한 우려는 높아지고 있다. 연간 50만달러를 지급받으며 호화생활을 만끽해온 갸넨드라 국왕이 왕정 폐지로 급료 중단에 재산 몰수 처분까지 받아 빈털털이가 됐기 때문이다.
네팔 트리뷰반 대학 역사학자 라예슈 가우탐 교수는 “왕관이 얼마나 비싼 것인지는 갸넨드라 국왕이 가장 잘 알고 있다”며 “왕관을 회수하면 반드시 보석을 감정해서 진품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자 갸넨드라 국왕측은 최근 “안전 조치를 약속하면 왕가 보물들을 기꺼이 내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축재를 일삼아 비난을 받아온 갸넨드라 국왕은 지난 4월 총선에서 마오반군이 중심이 된 네팔공산당이 1당이 된데 이어 의회가 공화제 전환을 결의해 12일까지 궁을 비워야 한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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