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달문명이 서양사에 미친 영향
돌궐(튀르크) 민족의 발상지 ‘위투켄’ 산은 고조선말로 ‘우뚝한’ 산이며, 지방민들은 ‘박달’ 산이라고도 부른다.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고조선 국가는 영역이 요동 요서로 넓어짐에 따라 다수의 부족을 후국(侯國) 제도를 통해 통치했다. 후국은 2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제1형 후국은 ‘직할후국’으로서 매우 일찍 후국이 된 맥과 예(건국에 참여하지 않았던 경우), 부여, 옥저, 구려, 진(辰), 숙신(읍루) 등이다. 제2형 후국은 ‘변방후국’으로서 동호(東胡), 오환(烏桓), 선비(鮮卑), 해(奚), 오손(烏孫), 유연(柔然), 산융(山戎·흉노), 돌궐(突蹶·원튀르크), 실위(室韋·원몽골) 등이 포함된다. 고조선 제왕(단군·천제)은 후국에 왕족을 보내거나 부족장을 제후로 임명해 통치했다. 이 때문에 후국 호칭이나 소왕에는 단(檀)씨가 많았다. 예컨대, 선비족의 왕은 단석괴(檀石槐), 유연은 대단(大檀·아발), 흉노의 왕 호칭은 단우(單于·‘선우’로 읽는 것은 후의 변화, 단후·檀后와 같음) 등이었다. 아사나(Asana·阿史那=조선·朝鮮)와 해(태양)와 같은 단어의 자취도 찾을 수 있다. 돌궐의 왕족이 ‘아사나’이고, ‘아사나’의 축소 변음(ㅱㅱ→오손)으로서 오손의 국명, 해(奚)족의 국명, 오(烏)와 환(桓, 한·韓)의 합성인 오환의 국명 등이 그 예이다.》
이러한 후국들은 전조선 기간만도 1500여 년간 고조선 통치를 받는 사이에 고조선 문화를 분유 통합하여 상위의 공통 ‘아사달(고조선) 문명’을 형성 발전시키게 되었다.
아사달 문명권의 원민족들이 공유한 주요 문명 항목으로는
△고조선 언어
△통치제도와 양식
△고조선 금속기술
△고조선 무기
△태양숭배
△천손(天孫)사상
△고조선 신앙과 종교
△고조선 기마문화
△고조선 궁사(弓射)문화
△고조선 축제문화
△고조선 경기문화
△고조선 음악과 무용 등을 들 수 있다.
고조선 사람들이 중국 산둥(山東), 산시(山西),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성 등에 진출해 자치 소국들을 세워 생활함에 따라 아사달 문명권은 산둥반도 일대와 만리장성 일대, 화이허(淮河) 일대에 미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고중국(하·夏) 문명이 뒤이어 들어왔기 때문에 두 문명이 변경에서는 중첩되었다. 따라서 아사달 문명권은 고조선 국가보다 그 지리적 범위가 더 넓었다.
○ 만리장성은 고조선에 대한 고중국의 방어선
아사달 문명권 민족들과 고중국 문명권은 처음의 협조와 평화 관계가 장기간 존속했다. 그러나 기원전 10세기경부터 고중국 계열 왕국들이 산둥반도의 고조선 계열 소국들(엄·奄, 서·徐, 수·遂, 거·거, 근·根, 모·牟, 서·舒, 회·淮, 우·우, 우·(옹,우))을 공격함으로써 평화는 깨어졌다.
기원전 284년 연(燕) 진개(秦開)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 기원전 214년 진시황의 고조선 공격과 반격이 이어져 약 200년간 아사달 문명권과 고중국 문명권은 갈등기에 들어갔다.
만리장성은 이 시기 아사달 문명권에 대항한 고중국 문명권의 방어선이었다. 한(漢) 고조 때까지도 열세였던 고중국이 한 무제(武帝)가 준비한 대병력으로 고조선을 공격해 기원전 108년 마침내 고조선 국가는 패전해 붕괴되고, 고조선 문명권은 해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조선 문명권에 속했던 여러 민족들은 각각 한족(중국족)과 투쟁하면서 때로는 한족을 굴복시키고 때로는 패전하여 쫓기기도 하면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동하였다. 서방으로 이동한 몇 개 민족만 들기로 한다.
고조선 문명권의 가장 서변에 위치해 중국 한족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흉노(훈)족 아틸라(Attila)의 군단이 406년경 발칸반도의 판노니아(지금의 헝가리) 평원에 도착하여 그곳 동고트(Goth·게르만족의 일부)족을 몰아내고 정착하여 훈 제국(Hungary·
헝가리는 Hun·훈+gary·땅)을 세우고 거대 제국으로 확장했다.
서양사의 게르만 민족 이동은 먼저 기원전 108년 고조선 해체로 말미암은 동방의 ‘민족 대이동’에서 파급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훈 제국은 아틸라의 사망으로 멸망했다. 후에 마자르(Magyar·말갈)족이 도착하여 헝가리 왕국을 계승하였다.
이어 유연(아발, 대단·大檀)족이 서방에 이동해 와 캅카스 지방과 다뉴브 강, 라인 강 우안 일대에 6세기 초 정착해서 250여 년이나 이 지역을 통치했다. 뒤이어 부여족이 캅카스 지방을 거쳐 발칸 반도에 들어가서 불가리아 제1제국을 건설하였다.
오손족은 서방으로 이동하다가 강거(康居)족과 융합하여 오늘의 카자흐 민족을 형성하였다.
뒤이어 돌궐(튀르크)족이 서방으로 이동했다. ‘수서(隋書)’ 돌궐전은 “돌궐의 선조는 평양(平凉)의 잡호(雜胡)이다. 성은 아사나 씨이다”라고 했다.
캐어 들어가 보면 고조선 해체 무렵 고조선족 마을 하나가 외적에게 초토화됐다.
살아남은 한 소년과 몇 가족이 흉노족에게 구원되어 안전한 몽골 지역까지 피신해서 혼혈하며 힘을 길러 재기했다. 현재 모든 튀르크 민족들은 기원지를 위투켄(¨Utuk¨an) 산과 기슭이라고 여기며 지금도 극히 신성시한다. 위투켄 산은 몽골의 항가이 산맥 가운데 높이 4021m로 우뚝 솟은 최고봉이며, 몽골인들은 ‘오트콘 텡그리’ 산, 지방민들은 ‘박달(때로는 복돌)’ 산이라고도 부르는 산이다. 위투켄 산 끝자락에는 방목에 적합한 고원과 평지가 있다.
○ 튀르크 기원지 ‘위투켄’은 고조선 말에서 유래
필자는 ‘위투켄’은 고조선 말 ‘우뚝한(우뚜칸)’이라고 본다. 옛 중국 역사가들이 突厥(돌궐)이라고 ‘突’ 자를 채자한 것도 이 ‘우뚝한’의 뜻을 포함한 것이라고 본다.
왜 ‘우뚝한’ 산의 고조선어가 돌궐족 발생지에 붙여졌을까? 돌궐족의 시조가 고조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돌궐족은 이어 ‘유연(아발)’이 지배할 때에도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장이 역할을 하며 세력을 기르다가, 아사나 두만(Asana Tuman)이 기원후 552년 알타이 산기슭에 ‘돌궐제국’을 건국해 제위에 올랐다.
왕족은 ‘아사나’족이고 최고 귀족은 ‘아사다르(Asadar, 아사덕·阿史德)’라 호칭했다. 아사나 두만은 재위 30년간 돌궐 제국을 동쪽은 싱안링(興安嶺) 산맥으로부터, 서쪽은 카스피 해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시켰다.
중국 시안(西安) 부근 흉노족 무덤에서 출토된 구리 허리띠에 새겨진 흉노족의 씨름 모습. 사진 제공 신용하 교수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돌궐족이 알타이에 돌궐 제국을 건국한 6세기 후반은 한국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문화가 찬란했던 삼국시대라는 사실이다.
언어구조가 동일한 어족을 ‘알타이어족’이라 한다고 해서 한국 민족이나 한국말이 알타이에서 왔느니, 몽골에서 왔느니 설명하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이미 고조선 말을 분유한 고조선족의 후예 하나가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서쪽으로 이동해 가서 6세기에 알타이 산기슭에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돌궐족은 580년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어, 서돌궐은 당(唐)의 회유 정책에 굴복했다가 완전히 멸망했으나, 동돌궐은 682년 ‘아사나쿨튀르크(AsanaKulturk, 아사나골돌록·阿史那骨돌祿)’에 의해 재기해 다시 대제국을 건설해서 당과 겨루었다.
그 후 돌궐족은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면서 서서히 서방 이동하는 중에 위구르(지금의 신장·新疆), 키르기스, 우즈베크, 타지크, 투르크멘 등 다수의 국가와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결국 오스만 베이(Osman Bey)가 아나톨리아 반도 끝까지 진출하여 1299년 오스만 제국을 건국해 오늘의 터키를 탄생시켰다.
이 사이 튀르크말을 사용하는 사람이 약 3억 명에 달하게 되었다.
종래 한국 민족의 기원과 고대문명 이동의 큰 흐름을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느니, 몽골, 바이칼, 알타이,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왔느니 하는 가설은 사실이 아니다. 패러다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상호 교류는 있었지만, 역사적 진실은 반대로 동방 ‘아사달 문명’이 서방으로 이동한 것이다. 고조선 국가 붕괴의 빅뱅으로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서 아사달 문명 후예들이 서방으로 이동함에 따라 유라시아 대륙의 고대역사가 격동하게 된 것이다.
일제 식민주의 사관이 고조선 역사를 말살 왜곡했고, 이제 중국 동북공정이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을 빼앗아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민족의 기원인 고조선과 아사달 문명의 역사 진실을 밝히고 지키는 것은 한국 국민과 학자들의 의무이며, 역사의 독립운동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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