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조센진, 조센진... '왕따' 때문에 피해왔건만"

한부울 2007. 7. 1. 18:30
 

조센진, 조센진... '왕따' 때문에 피해왔건만"

[오마이뉴스] 2007년 06월 30일(토) 오후 09:09

 

일본 정부에 의해 쓰레기매립지로 강제이주 당한 재일 조선인들이 세운 도쿄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난 2003년 도쿄도 정부는 "수십 년간 무상으로 사용해온 학교 부지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시대, 강제 이주시킨 일본의 원죄는 배제시킨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다행히 재판부는 '도쿄도 정부는 에다가와 조선학교와 합의하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문제는 남았다. 학교 부지를 계속 사용하려면 시가의 1/10 가격인 14억원을 도쿄도에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소식을 전해들은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 민족문학작가회의 정희성 이사장, 김용택 시인 등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을 결성했다. 오마이뉴스는 에다가와 조선학교 지원모금의 뜻에 공감해 '함께가요 우리학교' 캠페인에 참여한다. 앞으로 해당 학교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와 학생들의 글이 차례로 실릴 예정이다. 네번째 글은 에다가와 조선학교 어머니회 상담고문 김경란씨가 썼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저는 1956년부터 에다가와에 사는 재일조선인 2세입니다. 저는 도쿄조선제2초급학교에서 46년 동안 어머니회 회장을 하였고 현재는 어머니회 상담고문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도쿄도에게서 에다가와 이죠메에 있는 자택의 토지를 불하 받은 사람 중 한명입니다.

최근 주민들의 불하협상이 겨우 끝났으며 앞으로는 학교 토지의 불하가 진행되는 줄로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도쿄도는 학교측과 성의를 가지고 교섭하는 것이 아닌 일방적으로 학교 토지를 양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에다가와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에다가와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거주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도쿄도의 쓰레기 매립지였기에 악취가 나고 모기나 파리가 모여들어 인간으로서 살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식사 때에는 밥에 파리가 모여들어 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하수 시설이 없어 비가 많이 내린 후에는 공동화장실의 오수가 넘쳐 밖을 나갈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럴 때에는 남자들이 펌프를 가지고 오수를 퍼냈습니다.

에다가와의 주민들은 조선인 부락이라는 이유로 엄청난 차별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위생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보건소에 가서 소독액을 달라고 부탁해도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인 부락민이라고 차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일본인 어머니들에게 협력을 요청해 어린이들을 엎고 함께 보건소에 갔습니다. 겨우 소독약 4통을 받았는데 소독약을 뿌릴 펌프가 없어 다시 보건소에 요청을 했는데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 후 한 달에 4번이나 보건소를 방문, 겨우 소독약을 뿌릴 펌프를 2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쿄도나 구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이러한 행정 처리를 해 준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교대로 에다가와죠 내를 소독하여 겨우 모기나 파리가 줄어들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인데, 어느 날 오수 때문에 균이 발생하여 저의 아기에 몸에 발진이 생긴 적이 있습니다. 4살이 된 우리 아이는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병원에 실려가 격리된 상태였습니다.

에다가와는 택시를 타도 '그곳은 냄새가 난다' '파리가 난다' '병에 걸린다'는 등의 악선전 때문에 택시가 잘 가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에다가와라는 곳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살면서도 포기 않은 학교인데...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언어 역사, 문화를 가르쳐 조선인으로써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희망해 조선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조선학교는 우리들의 몸의 일부이며 보물입니다. 어린이들은 우리의 희망이며 민족교육은 우리들의 생명입니다. 저는 2세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학교에 가서 "조센진, 조센진"이라고 차별을 당하고 도시락 속에 모래를 넣는 등의 왕따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에게는 해방된 민족으로서 민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제2학교의 초급부부터 중급부까지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50년 가까이 제2학교에서 어머니회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학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학교는 '인보관'을 빌려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제2초급학교는 도쿄도 내의 조선학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학교였습니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모여 스스로 학교를 수리했습니다.


                                         ▲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선생님과 아이들.


1960년을 전후해서 학생수가 늘고 학교 건물이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63년에 재건축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토지를 살 돈이나 건축비용이 부족해 낡은 건물을 부수는데 학부모들이 해머를 가지고 공사일을 직접 도왔습니다.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고 웅덩이가 생겨 운동장은 다른 지대보다 1미터 이상 부지를 높여 특별한 모래를 쌓아 물이 고이지 않게 정비하였습니다.

아버지들은 일주일 정도 일을 쉬고 돈을 모아 차 수백 대 분의 모래를 운반했습니다. 어머니들은 밥을 지으면서 응원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자력으로 해 냈습니다. 건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어머니들은 낡은 신문지나 우유병, 못 등을 모아 팔았습니다.

저도 힘든 생활 속에서 건축 기부금을 매월 지불했습니다. 토지를 사고 학교 건물을 세웠기 때문에 학교 운영이 힘들어지고 선생님들의 월급은 지연되거나 지급할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1970년 당시 2만7천엔 정도의 월급조차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열심히 일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였고 학부모들이 교대로 자기 집으로 선생님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조성금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토지와 건물의 증개축 비용과 학교 운영비를 걷기 위해 재일조선인들이 기부도 많이 했습니다. 운동회와 같은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닭고기를 끓이거나 계란 수백 개를 삶아서 같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자기 자식들의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했을 정도로 끈끈한 공동체 생활을 해왔습니다.

주민 모두의 관심과 애정으로 커온 조선학교
바블 붕괴 후에는 학교 운영이 더욱 더 힘들어졌습니다. 학교를 지원하는 어머니회는 매년 바자나 마쯔리(축제)에 가서 김치나 지짐 등의 조선음식을 팔아 그 수익을 학교 운영을 위해 썼습니다.

그런 저한테 올해 50세가 되는 장남은 '어머니는 운동회에도, 수업 참관날에도 한번도 와주시지 않았다. 정말 어머니의 인생은 학교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앞으로 80~90세가 되어도 우리학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어린이들의 민족교육을 지켜 나가겠습니다. 도쿄도 지사는 우리의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번 도쿄도의 재판을 반대하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학교의 토지문제와 에다가와 내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하여 1만명을 목표로 서명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학교 주변에 사는 일본인들의 집을 한집한집 방문하면서 서명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많은 시민들이 '왜 조선학교 운동장만이 문제시되어 불법점유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에다가와 내에 사는 사람은 물론 타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게 되어 우리가 펼쳐 온 서명운동은 한 달 만에 1만 5천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학교의 운동장은 학생들만이 아니라 지역주민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현장을 보시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에다가와는 운하로 둘러싸여 있고 다리가 많습니다. 혹시 지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학교 밖의 피난 장소가 없습니다. 운동장은 에다가와 주민들의 피난 장소인 동시에 에다가와 주민들이 야구나 축구를 하는 교류의 장입니다.


모두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바자회나 마쯔리 등에 참가하고 있고 조일우호의 분위기 속에서 조선요리를 먹거나 조선의 무용을 관람하면서 제2학교를 자기들의 학교처럼 사랑해 주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학교는 항상 조일 우호의 풀뿌리 운동의 귀중한 장소였습니다.

에다가와 주민들의 불하문제는 5년에 걸쳐 거의 해결되었습니다. 역사적 경위에 따라 주민들의 요구대로 해결이 된 것은 모두의 단결된 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힘은 무너뜨릴 수 있어도 단결된 힘은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옛날 에다가와 부락에는 공원이 없어 어린이들이 길가에서 뛰어놀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3~4살의 어린이가 교통사고로 숨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 단결하여 어린이의 안전을 위해 행정과 협상을 한 결과 겨우 공원이 생겼습니다. 그 공원에 있는 나무가 크게 자랄 때마다 그 당시 일들이 생각나 단결력의 귀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학교의 토지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목욕탕에 가는 길에 사람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학교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으며 이곳에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젊은 사람들도 모두가 단결하여 학교를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학교문제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제2학교의 용지를 양도하라는 말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도 단결된 힘으로 싸워 권리를 획득하여 민족교육을 지켜왔습니다. 에다가와 학교용지 문제에 대해 부디 에다가와 지역 형성의 역사적 경위를 존중하고 또 민족교육을 보장하는 견지에서 공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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