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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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은 고려(高麗)가 서세를 혼내주는 전쟁이다.
글쓴이:한부울
만국조천(萬國朝天) 있었던 곳 고려(高麗)
서세(西勢)의 총칭은 일본
정복왕조들이 무수히 생몰한 곳 중앙아메리카(뉴스페인)
스페인이 있었던 곳 캘리포니아반도
신대륙은 스페인(Spain)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라(新羅)가 발견한 것
청(淸)영역과 뉴스페인(New Spain)영역의 중복
마무리
만국조천(萬國朝天)의 고려(高麗)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놀라운 삽화그림을 목격하였다.
고려(高麗)가 야간(夜) 우진(牛陣:소를 이용한 대진)으로 크게 승리한 전도(高麗月夜大戦牛陣得勝全圖:Victory with cattle during the night in Korea war)였으며 이그림이 현재 신중국이 아니라 영국박물관 또는 대영박물관(英國博物館:British Museum)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다는 것은 근세기의 역사혼란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아마도 근세기 1881년에 조선(朝鮮)이 해체되고 난 후 거대한 지배주체가 해체된 것이기에 아직 조선의 잔여세력이 남아 있었지만 힘을 잃은 정부를 장악한 여러세력들이 난립하였다고 볼 수가 있다.
그나마 중앙정부가 건재하였다면 그것은 청(淸)이 아니라 고려(高麗)였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위 삽화그림이며 분명코 청일전쟁이란 펙트를 가진 삽화그림에서 제목을 고려라 하였다는 것은 전쟁의 주체가 청이 아니라 고려(高麗)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은 서세가 이미 장악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비록 조선은 해체되었지만 황실이 존재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며 이 황실이 있는 중앙정부를 대상으로 서세가 공격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삼한역사관점에서 실제 청일전쟁까지는 고려가 존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청일전쟁(淸日戰爭:First Sino-Japanese War)은 1894년 6월(양력 7월 25일)부터 익년 4월까지 약 10개월간의 전쟁이다.
[萬國朝天:Ministers of world countries greet the Emperor 儒賢,陸小芳,1894]
위 그림은 1894년에 육소방(儒賢,陸小芳)이 그린 만국조천이란 그림이며 반복되는 충돌과 분쟁을 막고 세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전에 천자(황제)는 전 세계 왕과 신하 그리고 주요관리들을 궁성에 전부 집결토록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삽화그림이다.
1894년 5월(양력6월)이라고 적혀 있고 만국조천(萬國朝天) 즉 세계 각국의 공사가 황제에 배알(世界各国の公使が皇帝に拝謁す)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만국조천(萬國朝天)은 아래 예시한 1473년 3월 13일 일본국(日本國)에서 사람을 보내와 조선성종(朝鮮成宗)에게 황제폐하(皇帝陛下)라고 칭하면서 부상지수조종(扶桑之水朝宗) 즉 만수조종(萬水朝宗)이란 신성한 모든 물이 조선(朝宗)을 따른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만국조천이나 만수조종은 같은 의미가 있다 해야 한다.
그리고 위 삽화그림의 글을 잠시보면 1894년 5월에 험준한 산과 바다 거친 파도를 넘어 각국의 왕과 대신 그리고 오대주 각 시장에서 한길로 의관을 갖춰입고 황제를 뵐려고 하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것으로 난리가 빈번하여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미 서세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는 천자국이며 황제의 나라 조선 중앙정부 고려를 침입하고자 했던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역사"에 의해 세계가 통치된 사실의 광경이 적어도 1894년까지는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천자(天子) 즉 황제가 있었던 곳을 시노(Sino)라고 하였을 것이고 이것을 지금까지 청(淸:Qing)이라 한 것이라 할 때 이 시노(Sino)는 과연 정확하게 어딜 말한 것일까?
중앙을 중국이라 하면 일본어는 가운데 중[中]을 "주(ちゅう)"라고 발음한다.
때문에 시노는 중국이라는 발음과 상관없고 중국을 프랑스어로 시노 sin(o), 라틴어로 시나, 시노, 시나이(sina-sino-sinai)등으로 발음되어 지나[支那(しな)], 시나[sina(シナ)]로 읽혔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서세들이 시노(sino)라고 부르는 것은 라틴어 시나(sina)에서 출발한 것으로 중국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고 대신 일본인들은 시나(sina)라 하여 한문 지나(支那)라고 표시하지만 기원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진단(震旦) 즉 옛날 인도인이 중국을 치나스타나(Chinasthâna) 또는 치니스탄(Chinistan)에서 나온 china, chini 등에서 보아야 하고 진단(振旦), 진단(眞旦)과 같이 쓰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지나"라고 하는 일본인들은 본래의 의미를 낮춰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시나'를 '지나'라 한 것이라고 보인다.
글쓴이가 판단할 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그리스(Greece)를 희랍(希腊[Xīlà])이라 한데서 '실라', '시라'라 발음하였고 이것이 한문문서가 통일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新羅)에서 출발한 것으로 여겨지며 신라라는 명칭자체는 신라(silla)의 중앙정부였던 당대(唐代)에서 스스로가 일컫던 말로 나타나옛 기록의 전해 내려오는 말(傳說)에서도 신라 모든 사람이 매우 높은 도덕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라고 하여 군자국(君子国)이라 하였다는 사실이 있어 당시 가치관으로 곧 중국(中國)이라 한 것이 아닌가 하며 금나라(大金:1115-1234)시조 완안함보(完顔函普:941-960)를 김함보(金函普)라 하고 신라(新羅)사람이라고 하거나 아골타(金太祖 完顔阿骨打,1068-1123,재위:1115-1123)가 세운 나라를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김, 금(金)이라 하였다는 사실에서 김함보(金函普)가 왕함보가 되며 신라의 김씨(金氏)왕조나 고려의 왕씨(王氏)왕조가 같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금(金)왕조를 왕(王)왕조라 하는 것은 바로 고려왕조까지 연결되는 것임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다..
또 청(淸)나라 역시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했다는 사실 등을 묶어 보면 전부 중국이라는 이름의 공통성을 신라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며 결국 고려에 닿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중국이라고 하는 곳은 중앙을 나타내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바로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바로 그곳은 신라(新羅)를 잇고자 한 금(金), 청(淸)이 있었던 위치이다.
신라의 명칭을 고전부터 근세기까지 망라한 것을 보면 시베리아를 나타내는 사백력(斯白力)을 시작하여 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야벌(徐耶伐)-서벌(徐伐)-서라(徐羅)-신라(新羅)와 신로(新盧)-사라(斯羅)-사로(斯盧)-시라(尸羅)-시나(sina), 시노(Sino)-변형 지나(支那)로 나타나고 라틴문명에서 희랍(希臘:arab)-실라(xila)-시에라(Sierra)-실라(Shilla, Silla) 등으로 나타남을 알 수가 있으며 이러한 명칭들은 이베리아반도에 많이 나타나고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에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신라의 터전에 고려가 있었다면 경주(慶州:鷄林)와 금성(金星)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가 신라를 병합했다고 하였으니 고려(王)가 곧 신라(金)라 할 수 있는 것이니 곧 만국조천(萬國朝天)이 있었던 곳은 고려(高麗)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세(西勢)의 총칭이 일본
고려월야대전우진특승전도(高麗月夜大戦牛陣得勝全圖:Victory with cattle during the night in Korea war)삽화에서 청(淸:Qīng)나라 명칭 대신 고려(高麗)를 제목에 쓴 것은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뿔이 긴 소”들에게 허겁지겁 쫓기는 쪽은 붉은 자켓의 푸른 색 하의를 입고 나폴레옹 모자를 쓴 무리들임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당시 청일전쟁을 그린 한문그림들에서 공통적으로 소위 왜(倭)라고만 하였지 일본(日本)이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모든 세계 공식 문서에 한문(漢文)을 기준으로 하고 대중적인 언어가 라틴어(Latin)가 사용된 1895년까지 일본은 공식적으로 국명으로 쓸수 없었거나 쓰였던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신 일본인들이 그린 그림에서만큼은 스스로 일본이라 하였던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하여 스스로 일본이라고 한 사람의 모습이 현재 열도 일본인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보다시피 전부 서양인의 모습이었다.
한 예를 들어 청일전쟁, 러일전쟁삽화를 그린 미즈노 도시카타(水野年方:Mizuno Toshikata,1866-1908)나 미기타 토시히데(右田年英:Migita Toshihide,1863-1925)등이 그린 화풍을 우키요에(浮世繪:Ukiyoe)라고 하는데 이것이 1870년 후반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놀랍게도 고흐의 "탕기(Tanguy) 할아버지"라는 작품의 배경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이것은 확인 된 사실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는 네덜란드화가임이 틀림없다.
당시에 그는 인상파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품을 확립하였다고 한 것과 '고흐의 탕기할아버지'뒤 배경에 우키요에 화풍의 그림과 일치한다는 것에서 어쩌면 당시 일본인들의 화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고흐가 일본인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조선왜관에서 관인들에게 붙잡히면 작살이 난 그 화인(和人)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우리가 네덜란드화가라고 하지만 적어도 1895년 당시 우키요에 화풍으로 그리는 화가들과 동일하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인과 현재 열도일본인들의 섞임이 근세사에서 모호하듯이 스스로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화인(和人)이라고 하는 것도 이 섞임과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일본 당시의 사람들을 화인이라고 한 사실과 네덜란드가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반 고흐도 엄밀하게 따진다면 일본인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현재 인종적으로 열도 일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근세사를 볼 때 네덜란드역사와 일본역사가 섞이고 일치하는 것은 인종문제와 관계 없이 같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키요에는 네덜란드 화가들의 하나의 화풍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현재 변질되어 열도 일본인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온 화풍인 것처럼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매우 주요한 이야기다.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가 발전되어 정립되는 과정이 약 50년 후라면 그때 중요하게 회자될 이야기가 틀림이 없다.
때문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현재 열도일본인라고 하면 안된다.
세세히 보면 절대 현재 열도일본인들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오히려 서양인들 복장을 한 근세기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전쟁이나 전투 각종 충돌에서 볼 수 있었던 군인 모습이다.
결국 우키요에라는 것은 조선 왜관에서 생활하던 네덜란드인(和人)의 전통적인 화풍이었던 것이다.
네덜란드인만큼 성의 개방적인 사람이 없다고 한때 알려졌었다.
우키요에 화풍에는 회괴한 춘화가 유명한데 이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서세라고 칭하는 현재 국가명들을 보면 잉글랜드(英), 네덜란드(和), 포르투갈(佛), 프랑스(法), 독일(德), 미국(美)까지라 할 수 있다.
현재 왜(倭)가 일본(日本)으로 공식화 되어있고 왜가 좋은 의미의 명칭이 아님을 알지만 일본인들은 이를 거부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倭)로 남는 것이 그들 역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글쓴이는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일본(日本)이라 함은 당시“하나의 역사체제”에서 분리된 여러 세력들을 총칭(西勢)한 것으로 어쩌면 러일전쟁도 이러한 삽화로 그냥 때려잡은 것 같은 것임을 알 수 있고 현재 열도일본인은 절대로 러시아인들과 충돌하지 않았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근세기에 일어난 서세(西勢)와 각 충돌의 역사에서 사진을 대다수가 남아있지 않고 사진이 남아 있더라도 사실의 진실을 밝힐 수 없도록 거의 한쪽 편의 사진만 있을뿐 쌍방(雙方)간 충돌에서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육박전(肉薄戰)이나 총격전등 에서 전체상황을 알 수 있는 양편 동시에 나타나는 사진들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의혹을 키우는 것들이다.
때문에 현장 사신이 없기 때문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삽화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삽화그림 역시 진실된 사건을 알기에는 부족하고 역사사실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이 곳곳에 나타난다.
이러한 삽화들은 당시 사건깊숙히 자리한 것 같지만 기실 역사 부풀리기(exaggeration)에 동원된 도구일 뿐인 것이다.
글쓴이가 파악한 바로는 동시전쟁(同時戰爭)이라고 하는 스페인아메리카전쟁(Spanish-American War:1898년4월-8월)도 상황은 이와 같다.
일본인들이 그렸다고 하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삽화에서 일본인이라고 그린 모습들이 서양인임은 물론이고 거의 서세군인들이나 미국군인 복장의 군인들이 많이 나타나 북미의 프렌치인디언전쟁(French and Indian War:1755-1763)과 북서인디언전쟁(Northwest Indian War:1785-1795), 그리고 북미남북전쟁(南北戰爭:American Civil War:1861-1865)에서 네덜란드인들이 그린 그림이라고 볼 수있고 당시의 군인복장과 매우 흡사한 것으로 복장장식등 세부적으로 따져볼 필요성이 있다 생각된다.
어쨌거나 이러한 삽화그림들은 근세사를 증명할 수가 없든 것이다.
결국 "청일전쟁 삽화그림"에서의 청(淸)은 고려(高麗)이고 일본(日本)은 서세(西勢)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다.
정복왕조들이 무수히 생몰한 곳 중앙아메리카(뉴스페인)
四千六百年歷史當中漢族被蕃族統治四千兩百年
“4,600년 역사에서 한족이 번족의 통치를 받은 것이 4,200년이다”란 기록에서 이 번족은 바로 남방(南方)세력임을 우리는 본 블로그를 통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었다.
왜(倭)나 일본(日本), 서세(西勢)라는 것도 역시 남방세력임을 알 수 있고 뉴스페인이라 하는 곳은 바로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대륙까지 이어지는 후금(喉衿:後金)의 목구멍지역과 옷깃이란 요해처(要害處), 테우안테펙지협(Tehuan-tepec地峽)의 좁은 목덜미(Narrow Neck)임을 알 수가 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이와같은 항아리 목처럼 지형을 하고 있는 곳은 찾기가 어렵다.
그 만큼 정복영역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지역만 차지하면 남북대륙의 정권들을 마음대로 조종이 가능하고 욕심에 따라 잡고흔들 수 있는 장점이 분명하게 있는 중요한 요해처(要害處)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곳만 차단하면 남북 통로가 막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 만큼이나 양쪽대륙의 지배자들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조종할 수 있다는 잇점이외 부수적으로 경제적, 정치적인 노림수도 많았을 것이다.
서세가 제일 먼저 장악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아마도 큰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이곳을 정복자들은 누구든지 노렸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가 그 시대에 그와 같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해괴한 소리에 불과하다.
단 현재 일본이 열도를 차지하고 있는 시점에는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일본경제력이 세계 4위의 막강한 경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는 일본에겐 길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론 일본이 강한 경제력을 갖추도록 서세들이 힘을 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열도를 차지한 시기는 근세기 1922년 이후라고 해야 맞다.
1868년에 시작된 일본의 명치유신도 현재 열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한반도는 자원이 풍부하지 못하다는 결점은 숨길 수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19세기 이전 중앙정부의 위치가 되려면 사시사철 생산되는 식료품조달과 금은보화가 풍부한 지하자원이 풍부해야 하는 당위성이 첫째이고 모든 정치적인 이목이 집중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계 모든 나라의 길목이어야 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곳은 바로 멕시코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며 곧 뉴스페인지역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요해처(要害處)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힘의 세력을 가진 번족(蕃族)들이 언제나 이합집산하면서 기존세력을 물리치거나 사라지게 만들고 수시로 명암이 갈렸던 곳이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인 가치가 있었던 곳을 결코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이라 할 수 없다.
남조(南趙:420-589)통치169년, 수(隋:589-618)통치29년, 당(唐:618-907)통치289년, 오대십국(五代十國:907-959)통치52년, 송(宋:960-1279)통치319년, 금(金:1115-1234)통치119년, 거란(遼:916-1125)통치209년, 원(元:1271-1368)통치97년, 명(明:1368-1644)통치276년, 청(淸:1616-1912)통치296년을 볼 때 삼한역사 년수와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삼한은 건제하고 이들 나라들만 무수히 바뀌고 새로 생긴 것이다.
즉 위에 열거된 정복왕조에서 400년만 한족(漢族)이 통치한 것임을 실토한 것이다.
반도역사가 이야기 하는 삼한제국들의 통치기간을 보면 위와 비교되는 것인데 고구려(高句麗:BC37-AD668) 통치705년, 백제(百濟:BC18-AD660) 통치678년, 신라(新羅:BC57-AD935) 통치992년, 고려(高麗:918-1392)통치474년, 조선(朝鮮:1392-1910)통치518년 동안 이 민족이 통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것을 한반도에 한정시키고 있기때문에 위 번족이 통치한 지역과 구분되고 있을 뿐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당은 신라, 송은 고려, 금은 신라, 고려에게 까불다가 박살이 안 거란하며, 원도 고려이고 명도 고려임을 알 수가 있으니 결국 한족이 통치한 년수는 고작 400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애신각라라 한 청도 신라를 따른 것이라 하였으니 결국 한족이 아니다.
그렇게 볼 때 현재 동아시아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신중국이 과연 중국으로서의 역량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는 대한 물음과 조건에서 중국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번족들이 통치한 곳은 지금의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라 전부 중앙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역사인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대륙사에서 정복왕조라고 하는 오대십국(五代十國:907-959)를 보면 15개의 나라가 겨우 52년 통치하려고 발버둥친 것이다.
이렇듯 따져보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사이다.
때문에 옛 장성인 만리장성은 이러한 정복왕조들, 번족들을 대비한 장성임을 알 수가 있다.
적어도 멕시코 사막 최단 남쪽에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뉴스페인 북쪽으로는 이 만리장성때문에 번족이 정복왕조가 되어도 감히 넘어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스페인이 있었던 곳 캘리포니아반도
land of rabbits,Island of rabbits, edge, land where metals are forged.
스페인은 실로 서양사의 대문을 장식하는 나라이름이다.
그만큼 중요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Spain)의 명칭기원을 보면 최후의 서쪽나라(western land or land of the setting sun)라고 하여 스페인보다 더 서쪽에 있는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그렇다면 이미 역사사실과 비교할 때 지형조건에서도 현격히 어긋나 있어 스페인은 유럽대륙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스페인은 유럽대륙에 있지 않았다.
그곳에 해양대국이었던 신라(新羅)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토끼의 땅, 토끼의 섬, 둘레나 끝에 해당되는 부분 가장자리(Ispanihad)”라는 뜻도 같이 있다 하였으니 현재 스페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인문학자 안토니오 데 네브리하(Antonio de Nebrija)가 "서쪽 세상의 도시"라는 의미로 히스팔리스(Hispalis)라 하거나 또는 세비야(Sevilla)라고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기초는 페니키아어 문법으로 단어의 뿌리를 "span"으로 보았고 이를 파자(破字)하면 “spy”, 즉 "쇠를 벼리다", "날이 무뎌진 연장이나 금속따위를 날카롭게 만들다"에 해당하고 히스파니아(Hispania)를 더 작게 나누면 “i-spn-ya”가 되며 그 의미는 "금속 따위를 벼르는 땅(the land where metals are forged)"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본 블로그글 "조선금대화(朝鮮錦帶花)와 발트(Baltic)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8 "에서 지금의 캘리포니아(California)의 어원과 맞아 떨어진다 하였고 “cali→hot熱;fornus→forno→oven”으로 나타나 스페인어 칼리엔테 포르나리아(caliente fornalia)와 라틴어 칼리다 포르낙스(calida fornax)는 뜨거운 오븐(熱火爐:hot oven)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spy”, 즉 "쇠를 벼리다"에 기원의 땅은 바로 캘리포니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스페인이란 명칭은 캘리포니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북아메리카대륙 남 캘리포니아의 토끼 귀처럼 늘어진 바하 캘리포니아반도(Baja California peninsula)를 토끼의 땅(land of rabbits)으로 볼 수 있었다는 사실도 스페인땅의 기원과 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토끼의 섬(island of rabbits)이라고 한 사실에서 섬(island)이라는데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알고 보니 이 캘리포니아반도가 섬(島)으로 그려졌다는 사실도 아래 지도에서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때문에 스페인 땅의 기원과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둘레나 끝에 해당되는 부분 가장자리(Ispanihad)" 혹은 ”대륙의 끝 혹은 끄트러미 가장자리 모서리(edge)"등으로 불리었다는 것도 바로 이 캘리포니아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스페인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의 캘리포니아반도가 되어야 맞다.
Nicolas Sanson (1600–1667) was a French cartographer,-1656 Audienca de Guadalajara, Nova Mexico Califormia 프랑스 지도제작자 니콜라 상송(Nicolas Sanson:1600–1667)이 1656년
신대륙은 스페인(Spain)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라(新羅)가 발견한 것.소제:정해년(丁亥年)난리는 장미전쟁(薔薇戰爭:1455-1485)의 일부이다.
앞에서 일본(日本)은 서세(西勢)의 총칭(總稱)이라고 하였다.
성종4년(1473) 3월 13일 계묘
일본국 경극전 경조윤 좌좌목씨 등이 사람을 보내 와서 토의를 바치다
○日本國京極殿京兆尹佐佐木氏ㆍ江ㆍ歧ㆍ雲三州太守大膳大夫入道生觀遣人來獻土宜。
其書契曰:
일본국(日本國) 경극전(京極殿) 경조윤(京兆尹) 좌좌목씨(佐佐木氏)와 강.기.운 삼주태수(江岐雲三州太守) 태선대부(太膳大夫) 입도(入道) 생관(生觀)이 사람을 보내와서 토의(土宜)를 바쳤다. 그 서계(書契)에 이르기를,
皇帝陛下壽聳南山, 德涵東海, 扶桑之水朝宗, 雞林之野盛大, 至禱至禱至祝至祝。 臣先祖以來, 家世士師日域, 猶如范子之於晋國之者, 專司弓馬, 莫墜箕裘之業。 本朝丁亥而降, 中原風塵, 干戈四起, 臣之敝邑, 江入戰圖, 雲接賊壘, 徭玆俗廢農桑, 最乏絺綌。 是故士卒多困墮指之厄, 若被白登之圍。 伏望忝蒙貴國家紬幷木綿之恩惠, 則救凍死於三軍, 仰皇庇於萬歲之者也。 不腆土宜, 件件具在別幅, 鈞察惟幸。
“황제 폐하(皇帝陛下)의 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 신(臣)은 선조 이래로 대대로 일역(日役)에서 사사(士師)가 되니, 마치 진(晉)나라의 범자(范子)와 같은 자이므로, 오로지 궁마(弓馬)를 맡아 부조(父祖)의 업(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정해년이래로 중원(中原)에 난리[風塵]가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매, 신의 고을도 함께 싸움터 안에 들어가서 적을 많이 대하게 되니, 요역(徭役)에 나가느라 농상(農桑)을 폐기하여 피륙이 가장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사졸(士卒)들이 타지(墮指)의 재앙에 많이 곤고(困苦)하여 마치 백등(白登)의 포위를 당한 것과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귀국의 명주와 무명의 은혜를 내려 주시면, 삼군(三軍)에서 얼어 죽는 것을 구제하고 황제의 은혜를 만세토록 우러를 것입니다. 변변치 않은 토산물 몇 가지를 별폭(別幅)에 갖추어 적으니, 살펴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하였다.
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카리브해에 도착한 시기 1492년 보다 19년이나 이른 시기에 서세(西勢)라고 판단되는 일본국에서 조선왕 성종(成宗)에게 황제폐하(皇帝陛下)라고 칭하면서 토의(土宜)를 바치고 부탁하길 자기네 땅 중원(中原)에 어지러운 일, 즉 풍진(風塵)이 나서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나 농상(農桑)이 폐기되어 물자가 부족하여 그들 군사 삼군(三軍)에게 입힐 명주(明紬)와 무명(木綿)이 없어 지원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이러한 문장이 주는 것은 조선이 당시 천자국 즉 황제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가 있다.
당시 성종이 고려황제로 불리었다는 사실은 반도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조선(朝鮮)이 왜 고려가 되어야 하는지 반도역사 상식으론 이해가 되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세들은 삼한전체를 무조건 가우리, 고려(高麗:CORE, CAURE)라고 하였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도 신라도 가우리 고려라 했을 것이다.
성종에게 말한 일본국에 말을 빌리면 적어도 중앙아메리카에 있었을 중원(中原)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그곳을 근원으로 하던 서세 일본세력들은 조선성종(朝鮮成宗)에게 황제(皇帝)라 칭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을 높혀“수(壽)가 남산(南山)처럼 높고, 덕(德)은 동해(東海)에 젖으시어, 부상(扶桑)의 물이 조회하고 계림(雞林)의 들[野]이 성대하기를 빌고 빕니다”하였다는 것이다.
실로 한반도 조선에 머물면서 늘 상 중국 속국이라 머릴 조아리던 나약한 조선이 아니라 명실상부 세계 중국이라고 하는 천자의 나라를 향해 할 수 있는 좋은 말을 다 골라 조선성종(朝鮮成宗)에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기록만으로도 누가 뭐라 하여도 조선성종은 서세가 볼 때 분명 중국의 천자였다는 사실이다.
“부상지수조종(扶桑之水朝宗)”, 부상(扶桑)의 물로 만수조종(萬水朝宗) 즉 모든 물이 한 곳으로 향해 흐르다고 하여 제후(諸侯)가 천자를 배알(拜謁)할 때 쓰는 문구라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부상의 물이 조종에 모인다"는 말은 실로 만국조천(萬國朝天)과 같은 뜻이다.
천하(天下)의 모든 지배력과 포용의 덕(德)이 조선(朝鮮)으로 모이고 조선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또 하나는 바로 서세(일본국)가 동해를 말하는 것인데 이 동해는 현재 한반도와 열도 사이의 동해가 아니라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쪽바다 대동양(大東洋)임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서세가 일본국이기 때문이다.
대동양(大東洋)이라 함은 본 블로그 글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에서 충분하게 설명한 이야기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계림지야성대(雞林之野盛大)‘ 즉 신라(新羅)의 땅(林之野)에서 기세가 크고 훌륭하길 빌고 빈다는 말이 더욱 우릴 감동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멕시코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 또는 뉴스페인이라고 불렀던 지역 모두를 서세들은 "신라의 땅"이라고 하여 "계림지야(雞林之野)"라 했던 것이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페인(Spain)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라(新羅)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된다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 밝혀지는 것이다.
그곳을 서세(西勢:英和佛法德美), 일본인들은 중원(中原)이라 하였고 그곳에서 내전(內戰)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전(內戰)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정해년(丁亥年)난리를 열도일본역사에서는 바로 오닌의 난(應仁-亂:1467-1477)이라고하여 정치적 변동 및 계속되는 내란의 시기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쇼군(將軍)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내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서세(西勢)의 총수라고 여겨지는 잉글랜드왕권을 놓고 랭커스터가(家)와 요크가(家)가 싸운 전쟁을 장미전쟁(薔薇戰爭:1455-1485)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어 정해년(丁亥年)난리라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보면 곧 수차례의 장미전쟁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조선(朝鮮)에서도 영역확장을 끊임없이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리서(地理書)를 지속적으로 편찬한 사실이 수차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일반적으로 쳐서 빼앗은 영역을 도호부(都護府)라고 하였으니 이 도호부가 이 시기에 빈번하게 설립된 것임도 알 수가 있는데 세종(世宗)8년(1425)에 발행된 경상도지리서(慶尙道地理書)를 시작으로 세종14년(1432)에 조선 최초 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편찬되고 단종2년(1454년)에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가 완성되며 이후 다시 27년만인 성종(成宗)12년(1481)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완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어 일본에서 내란이 있었다던 1473년은 조선역시 영토확장으로 이런 와중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신대륙 발견과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으로 조선이나 고려가 신라영역을 병합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영토확장을 시켜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대륙 발견이라고 하는 역사사실과 함께 보아야 할 문제가 발생했다고 여길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과 스페인을 같이 생각할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지는 것이다.
넓은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조선을 서세(西勢)일본국에서 황제라 하였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근세기에 그린 청일전쟁삽화에서 왜(倭)그룹인 서세(西勢)에서 스페인은 빼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스페인은 아마도 삼한계열로 취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삼한영역을 보면 예를 들어 북애자(北崖子)가 숙종(肅宗) 2년(1675)때 애민, 애족의 일념으로 후세에 남긴 기록이라고 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옛 장성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사막 남쪽에 2000년 동안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 쭈삣하게 서 있다”라고 표현되었듯이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옛 장성(古長城)이란【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데】와 같은 근거가 있다는 것은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조선(朝鮮)땅에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한반도란 사실에서 믿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록이 사실이라면 북쪽 왜구(오랑캐)의 접근을 막겠다고 설치한 것이 아니라 남쪽 번족들을 포함한 왜구(오랑캐)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즉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이 아니라 한반도 조선이라면 그렇다는 것이다.
고려(高麗)때부터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남쪽으로부터의 왜구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기 때문에 고려 이전 역사에서도 왜구로부터의 괴롭힘은 얼마든지 추리가 가능한 이야기다.
신라역시 왜구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받았다는 사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남겨져 있다.
즉 기원전부터 이미 만리장성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것은 늘 상 삼한제국들이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왜구들이 서세가 되었고 현재 서양사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이니 세상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판단은 동아시아대륙처럼 고비사막(Gobi Desert)사막이 하나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방향을 한 곳으로 지정할 수 없는 다수의 사막이 넓게 퍼져 있다면 과연 그 사막을 어디에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솔직히 사막은 자연 장성이라 할 때 고비사막은 적으로부터 북쪽으로 지키려는 장성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북아메리카대륙처럼 여기저기 가로사막 뿐만 아니라 세로 사막이 있는 등 넓은 범위에 사막이 크게 분산되었을 때는 최종 남쪽사막을 기준으로 장성을 쌓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 사막 남쪽에 설치한 것은 남쪽 번족을 막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맞는 것이다.
한편으로 오히려 번족이 아니라 신라가 북쪽 고려를 막기위해 장성을 쌓았다고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쨌던 그곳에는 북아메리카대륙 사막 그레이트베이슨 사막(Great Basin Desert)아래 모하비사막(Mojave Desert)남쪽으로 이어져 있고 다시 남쪽으로 소노라사막(Sonora Desert)이며 멕시코 북부지역 다시 남쪽으로 치후아후안사막(Chihuahuan)이 길게 뻗어있고 이것의 남쪽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만리장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청(淸)영역과 뉴스페인(New Spain)영역의 중복
지금까지 본 블로그에서 무수한 생물학적 근거로 밝힌 바에 의하면 청(淸)은 뉴스페인(New Spain)영역에 있어야 맞다.
그렇다면 고려는 뉴스페인 영역에 존재한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한 정복왕조들이 생몰을 거듭한 지역임을 알 수 있고 근세기에 카리브해(Caribbean Sea)연안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활동하던 서세(西勢)가 거대한 자본을 축적하고 무기화하면서 강자로 등장하고서부터 더욱 이 지역은 엄청난 가치가 있는 침탈(侵奪)의 영역으로 각광받았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청(淸)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에서 여러 각도로 이를 증명한 바가 있고 그 청이 서세와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로 연결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지역이 주목받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재규의 <노년의 탄생>의 글을 보면 평범하지만 이런 글이 있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남단 작은 항구도시 팔로스(Palos)를 떠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1451-1506)는 그해 10월 12일 인도(印度:캐리비어해의 산살바도르섬‘San Salvador Island’를 인도로 착각했다)에 도착했다. 스페인은 곧 멕시코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는 이를 뉴스페인(New Spain)이라고 불렀다. 1538년 스페인의 탐험가 프란치스코 코로나도(Francisco Vazquez de Coronado:1510-1554)가 뉴스페인의 북서쪽 뉴갈리시아(New Galicia)지역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40년 2월 23일 코로나도는 후안 드 파딜라(Juan de Padilla:1500-1542)를 포함하여 프란체스코회 소속 사제들 335명의 스페인사람들, 1300여명의 원주민등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황금을 찾아 북쪽으로 지금의 뉴멕시코의 캔사스지역으로 탐험을 떠났다. 1542년에 끝난 이 탐험은 코로나도에게 성공을 안겨주지 못했고, 파딜라 신부역시 미국 땅에서 순교한 최초의 신부라는 명성만을 남겼을 뿐”이라고 현재 서양사가 말한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콜럼버스가 착각했다는 것을 최소한 세계삼한역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왜 착각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서양사에서 콜럼버스를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으로 묘사하면서도 그가 아메리카대륙을 인도(印度)라고 했던 것은 용납할 수 없었고 착각이라 했던 것이다.
현대서양학자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왜 착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면 인도(印度)가 아시아의 인도아대륙이 아니라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착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당장 서양사의 근본을 흔들고 망가뜨릴 수 있는 문제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서세가 말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 "에서 충분하게 밝혀 본 사실이다.
그곳에는 정확하게 인도의 역사가 있었으며 "하나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는 주장자체가 실로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볼 때 참으로 실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당시 "하나의 역사 체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더군다나 황제라고 칭하던 조선 성종(成宗)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으로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것에 비교해 보더라도 과연 콜럼버스 이야기가 끼일 공간이 없다는 사실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은 명쾌하다.
오죽 했으면 비주류라 했겠는가 마는 콜럼버스의 당시 인도를 찾고자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주변여건이 쉽지 않았고 비주류입장에서 힘들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으며 또한 스페인 여왕의 도움이 컸다고 하지만 하나의 역사체제에서 여왕이라고 하는 것은 서세들끼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어 대체적으로 합치점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따져 그들의 주장 즉 콜럼버스가 첫발을 디디고 이어 원정대들이 멕시코 땅에 상륙하여 뉴스페인(New Spain)땅을 개척해 과정에서 보면 전혀 일치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들의 활동이 가능했다는 것은 기존 역사세력이 없다는 가정하에 신대륙이란 기본 바탕을 깔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커다란 문제만이 들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볼 때 뉴스페인이라는 명칭도 존재하지 않았던 명칭이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앞에서 스페인이는 명칭이 있었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의 캘리포니아반도 귀퉁이 어디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혀본 사실이다.
바자 캘리포니아 반도(Baja California peninsula)를 토끼의 섬(rabbits lsland)은 프랑스 지도제작자 니콜라 상송(Nicolas Sanson:1600–1667)이 1656년 그렸다는 위에 게시한 지도에 나타나듯이 스페인은 그곳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곳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도 귀퉁이 끄트러미 가장자리 모서리(edge)라고 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인도란 땅에 지배자는 마땅히 신라(新羅)가 되어야하고 고려(高麗)이어야만 하며 고려(高麗)가 곧 중원의 지배가 되어야 마땅하고 또한 천자로서 황제로서 하나의 체제를 구축하고 만국조천, 만수조종 등으로 불리었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중원이라는 곳에 만약 서세라는 일본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잉글랜드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원에서 아주 작고 미약할 것이며 그러함에도 이곳이 그들의 활동에서 중요하였기 때문에 이전투구의 내전을 벌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중화(中華)라는 자체가 본래 삼한(三韓)을 가르키는 것으로 가우리(中)고려(華)가 되어 천하의 중심이라는 뜻이어야 맞다.
중심의 가우리(cauli)로 읽었거나 구려(九黎)라 하여 구주(九州)라 하였으며 여기에 근세기 대조선이 해체되기 전까지 만국제신(萬國諸臣)들이 천자를 조례하는 형식을 취하였던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국조천(萬國朝天)은 고려(高麗)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곳을 서세들은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뉴스페인(New Spain)이라 하였던 것이다.
마무리
뉴스페인은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 보면 고려(高麗)가 되며 동아시아대륙사의 시각으로 보면 청(淸:Qīng)이된다.
청(淸:Qīng)은 근세기에 서세의 대표 영국(England)으로부터 청정부(Qīng government)라는 칭호로 사용되던 명칭이다.
마치 잉글랜드의 정부라는 의미의 명칭이다.
영국 빅토리아왕실을 당시 이롭게 하였던 인물로 인정되어 청 군벌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 1896년 영국을 방문하고 당시 영국여왕으로부터 빅토리아 훈장(Royal Victorian Order)을 수여받는다.
이때부터 역사정체성이 모호해지는 역사혼란이 지속된다.
서세 왜(일본군)는 청일전쟁(시작:양력7월25일)을 일으키기 며칠 전인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에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하는 등 김홍집일파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왜라고 하는 서세가 결국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경복궁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탈취한 것이라고 할 때 김홍집이라는 인물을 내세운 반도역사가 얼마나 정체성에서 모호해지게 하는 가를 알 수가 있다.
영국총리 로버트 케스코인 세실( Robert Gascoyne-Cecil)과 동일한 인물로 밝혀진 김홍집(金弘集:1842-1896)이란 인물 역시 반도역사의 대용일뿐이다.
물론 최후는 정식재판없이 격살되었고 대작로에서 군중들에게 반역인으로 몰려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였다.
이런 인물은 동아시아대륙사에서도 만들어지는데 바로 이홍장이라는 인물인 것이다.
뉴스페인(New Spain)지역은 현재 세계삼한역사 관점으로 볼 때 계림지야(雞林之野)라 하여 정통적인 신라(新羅)영역이라고 판단된다.
스페인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바자 캘리포니아(Baja California peninsula)에 근거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스페인은 서세가 만든 고려가 될 수 있지만 스페인은 신라라고도 볼 수가 있다.
사실 뉴스페인의 땅을 차지하는 과정을 들여다 보면 의혹이 많다.
위<노년의 탄생>글에 보듯이 뉴스페인(New Spain)이란 명칭을 얻기 위해 서세는 영토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영토를 차지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물리적인 대가가 필요하겠지만 원주민을 인디언만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가 필요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적어도 자본이 무기화가 되기 전까지 즉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인 18세기 중엽까지 영토가 필요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강한 물리력이 필요한 시기였음에도 기존 영역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과의 어떠한 물리적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라를 이은 고려가 있었거나 조선이 건재하였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서세가 전쟁을 하였다고 하는 그림들을 보면 전부 바다에서 함대로 싸우는 광경의 그림들을 많이 볼 수가 있다.
물론 최소한 1922년 이후에 그린 것이라고 보지만 육지전쟁의 그림은 찾기가 희귀할 정도이다.
서세들이 아메리카대륙에서의 영토취득은 거의 생짜배기 날 것으로 먹어치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한다.
신대륙이라 하였으니 기존에 존재하던 역사세력을 나타낼 수도 없었고 충돌의 역사를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땅을 그냥 뚝 떼어 넘겨준다는 식의 할량(割讓)이라 하였거나 종이 한 장만 필요하는 매매식으로 영역을 주고받으며 공인되지 않는 증서를 남발한 것이 오늘날 서세의 침탈 식민지역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글쓴이가 서세의 역사를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이같은 판단은 무수한 시간을 토대로 분석하고 다각적인 시각으로 얻은 결론이다.
이와같은 생짜배기식 영토빼앗기는 신대륙발견이라는 공식에 의한 것임은 물론이다.
현재 영토(領土:territory)라는 개념에서 보면 토지에 대한 국가영역으로서 국제법상으로 분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되어 있지만 적어도 봉건제(封建制)아래에서 왕정(王政)이나 제정(帝政)시기에 하나의 통치력이 미치는 지역에 승인된 정치적 권위에 대한 공식적 통제나 관할 하에 있는 모든 지리적 영역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정의라 할 수 있고 이런 엄정한 지리적 영역을 아무런 충돌없이 개나 소나 발견했다고 차지하고 탐험했다고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땅을 소유하려면 그만큼 무수한 목숨과 엄청난 더운 피를 헌납해야 하는 것이 고래부터 내려온 영토 쟁탈의 방식이니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과연 서세가 근세기에 차지한 영토들이 신성한 역사개념아래 무수한 생명과 더운 피를 헌납하고 얻은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했다면 그러한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
특히 땅이라 함은 작거나 크거나 오랜 역사가 녹아 있기 때문에 사람의 기억에서 지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할량(割讓)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 모든 역사사실을 무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적 가치에 있어 개인에게도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라와 국가입장에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의 탈출구는 곧 크나 큰 전쟁밖에 없다.
인류가 가졌던 큰 전쟁이라 함은 1914-1918년까지 이어진 1차전쟁이고 1939-1945까지 이어진 2차전쟁이 있다.
사망자숫자만 1차세계대전은 3850만명, 2차세계대전은 6,200만명이다.
최소한 이런 전쟁을 거쳐야만 지금과 같은 영토관념에 이해가 생긴다.
그렇다.
세계1차, 2차전쟁은 바로 역사전쟁임과 동시에 기득권의 영토를 빼앗기 위한 영토전쟁이었다.
근세기 북아메리카대륙의 땅이 모두 할양으로 또는 매매로 넘어간 것은 숨겨진 역사사실을 우리는 모를 뿐이다.
서세가 발견하고 탐험하고 개척하면 서세의 땅이 되어버린다는 공식은 참으로 황망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이처럼 전쟁이나 죽음이 아니면 문제해결이 어렵다고 보이는 영토문제에서 근세기에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장본인들이 바로 해양을 누비며 자본을 축적한 세력인 바로 그 왜(倭)라고 하는 서세(西勢)이니 이러한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하나의 거대한 역사"를 자본력으로 뭉개버리고 동양역사(東洋歷史)와 서양역사(西洋歷史)를 분리하면서 기존 역사공간이 유명무실(有名無實)해 지게 만들면서 어느 한 쪽 공간은 완전히 비우는 제로게임 (zero game) 또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버젓이 오리엔탈역사문명(ancient oriental history/civilization)이라고 하는 오서독스(orthodoxy)한 공간영역이 아메리카대륙에 있었음에도 서양사는 그것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신대륙이라고 만들었다.
그리고 동양사는 철저하게 동아시아대륙으로 옮겨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 서세로 인해 만들어진 불공평한 역사의 결과라 할 수가 있다.
신대륙(新大陸:New World)이라 함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Age of Discovery)때 유럽인(西勢)이 새로 발견한 토지에 대한 호칭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황망한 것들이 현실이 되고 상식화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는 근세기에 이야기다.
이 정의가 근본적으로 세계삼한역사를 사라지게 만든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다.
그곳에는 세계삼한역사를 논할 수 없는 장애가 분명하게 있는 역사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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