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의 역사
북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언제까지나 끝날 것 같지않은 캐쉬미르 분쟁
일찌기 도시화된 지역들
찬란했던 고대 도시 모헨조다로를 표현한 벽화
파키스탄은 50여년전에 지도상에 출현했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은 수만년에 이른다. 파키스탄은 현재 중앙아시아, 중동, 인도아대륙(亞大陸, Subcontinent)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최소한 5만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시대 인간의 초기 유적 상당량이 라왈핀디(Rawalpindi :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접해있는 도시) 근교의 소안(Soan)계곡에서 발견되었다.
약 9000년 전 선조들은 주로 농경국가를 이루었고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는 법들을 배우며 정착해 나갔다. BC 6000년부터 농경마을들은 발루치스탄(Baluchistan, Balochistan)과 북서변방주(NWFP;North-West Frontier Province) 그리고 펀잡(Punjab)근교를 개척해 나갔다.
이 문명은 모헨조다로(Moenjodaro, Mohenjo-daro)와 하라파(Harappa)와 같은 상당한 도시들을 이루어냈다. 그러한 발전된 도시들은 계획화되어있고 주요도로는 포장되었으며 복층(multistoried)의 집들과 망루, 식량 저장고, 집회 광장등이 잘 구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해독되지 못하고 남아있는 아주 발전된 형태의 문자를 만들어냈다.
신드에서 발굴된 힌두신 브라만의 동상 국립박물관
왕-제사장 상 모헨조다로에서 발굴 카라치 국립박물관 소장
BC 1700년경 인더스문명은 다른 지역의 침입자들에 의해 도시들이 파괴되면서 쇠퇴하였다.
인더스강 문명은 약 BC 2600년경에 발생하고 진전되어온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작은 콧 디지(Kot Diji : 신드주, 인더스 강의 하류에 있는 Khairpur로 부터 25km 남쪽에 있는 고대도시) 근교의 지금은 폐허가 된 요새 마을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그 지역 농경사회에서 출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약 BC 1700년경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아리안족(Aryans, 아리아인)들은 야생 가축들을 기르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가축들을 위한 목축지가 필요했다. 그들의 종교는 자연의 구성요소로부터 형상화된 신들로 이루어져 잘 발달되어 있었다.
그들은 엄격한 카스트 제도(Caste : 인도의 4계급으로 구분된 신분제도)를 따랐으며 이는 후에 힌두교를 이루었다. 그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기억되어져 온 찬미가들을 종합하여 처음으로 힌두어 경전 리그베다(the Rig veda, 인도의 4대 경전 - the Rig, Sama, Yajur, and Atharvavedas -중 가장 오래된 경전)를 써냈다.
탁실라의 불교인들이 남겨놓은 유적 두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묘지
Dhyana Mudrad안에 있는 불상 줄리앙 사원(Julian monastery)
거의 유사한 시기에 페르시아의 아키메니드제국(Achaemenid Empire)의 가장 동쪽주(州)인 간다라(Gandhara)는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지역이 되었다. 그곳의 두 도시 푸쉬칼라바티(Pushkalavati : 현재 페샤와르 근처의 차르사다(Charsadda))와 수도 탁실라(Taxila) 등은 문명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BC 6세기경 그 지역의 사람들은 점차로 카스트제도에 대한 힌두교의 해석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크샤트리아(Kshatriya, Kshattriya, Ksatriya)왕의 아들인 '부다'가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을 가르치자 그의 가르침은 빠른 속도로 인도아대륙의 북쪽지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알렉산더대왕의 정복로
BC 327년,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은 인도아 대륙을 침략하고 칼라쉬(Kalash) 계곡을 정복하면서 아톡(Attock : Kabul river가 인더스강과 만나는 곳의 조금 아래 쪽 지역 이름)에서 북쪽으로 16마일 떨어진 오힌드(Ohind)에서 인더스강을 건넜다. 젤룸(Jhelum : 현재 펀잡주의 한 마을 이름)에서 포루스(Porus : 탁실라의 왕)의 막강한 코끼리 군대를 물리치고 기나긴 갠지스평야(Ganges plain)로 그의 행진을 시작했다.
인도-그리스시대와 쿠샨시대의 금화
하지만 그의 신중한 군대가 더 이상의 전진을 거부했을 때 그는 고국으로 가기 위한 항해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귀로에서 물탄(Multan:펀잡주 중남부에 있는 도시)지역의 말로이(Malloi) 종족과의 전투도중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고 - 결국 그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나 - 알렉산더는 그의 많은 점령지를 그의 부하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BC 323년 세상을 떠났다.
갠지스강 언덕에서 BC 700년 이래로 번영을 누렸던 마가다(Magadha) 왕족의 유배자였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Chandragupta Maurya, Candra Gupta Maurya)는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그의 동맹자들과 펀잡(Punjab)지역을 장악했으며, 후에 BC 321년 마가다의 왕을 물리치고 마우리아 왕조(Mauryan Empire)를 이루었다.
단식하는 부다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 라호르 중앙 박물관소장
Buddhisattva Maitreya 탁실라박물관
왕위에 오른지 24년후 찬드라굽타는 그의 아들 빈두사라(Bindusara)에게 왕권을 물려주었고, 빈두사라는 데칸(Deccan) 지역까지 점령하여 마우리아 왕국의 지배령을 확장하였다.
빈두사라의 아들 아쇼카(Ashoka)는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들중의 한 인물이다. 단순히 그가 광대한 제국을 다스렸기때문이 아니라 또한 인애를 아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칼링가(Kalinga : 현재 인도 북동부에 있는 주 Orissa state)' 정복 초기에 수천의 생명을 앗아간 후, 그는 신앙의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불교의 수도승들을 위한 사원들과 사리탑을 세우고 불교전도자들을 외국에 보내면서 인도아대륙의 안팎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리스 박트리아(Bactria, Bacriana, or Zariaspa) 제국의 데메트리우스 (Demetrius)는 BC 195년경 카불 강 계곡(Kabul River Valley)을 점령했다. 그리스인들은 간다라에 쌍둥이 수도로서 탁실라(Taxila)와 푸쉬칼라바티(Pushkalavati)를 재건했다.
이 지역은 BC 75년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스키타이인(Scythians)과 이란인(Iranian) 유목민들에 의해 침략받았고 다시 약 BC 50년경 카스피해 동쪽에서 온 강력한 파르티아인(Parthians)들의 공격을 받았다.
파르티아인(Parthian)들은 BC53년에 그리스인들을 물리치고 파키스탄의 북쪽지역을 다스렸다. 상업과 경제가 번영하던 시기에 그들은 예술과 종교를 발전시켰다. 그리스와 시리아, 페르시아의 번성기의 영화와 인도의 예술전통을 반영하는 간다라 예술이 발전했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의 지도자, 쿠샨(Kushan)의 왕, 쿠줄라(Kujula)는 AD64년에 파르티아인을 몰아내고 간다라를 장악했다. 쿠샨인들은 북서인도와 뱅갈만으로, 남쪽으로는 바하왈푸르(Bahawalpur : 현 펀잡주 남동쪽에 있는 도시)와 구주랏(Gujrat : 현 펀잡주 북동쪽에 있는 도시)을 못미치는 지경까지, 북쪽으로는 중국 국경에 이르는 카쉬가르(Kashghar, Kashgar : 현재 타림분지에 위치하는 중국의 자치령)와 야르칸드(Yarkand : 현 중국 북서부의 자치령 지역)까지 그 지배영역을 넓혔다.
카니쉬카(Kanishka, Kaniska)의 유물상자, 페샤와르 박물관
탁실라에 있는 모흐라 마라두(Mohra Moradu) 사원
그들은 현재 페샤와르(Pershawar : 파키스탄 NWFP의 수도)로 불리는 꽃의 도시, 푸루샤푸라(Purushapura)를 동절기 수도로, 카불의 북쪽지역을 하절기 수도로 정했다.
고대 아라비아와 인도아대륙간의 무역로1.2
쿠샨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카니쉬카(Kanishka)는 AD128년부터 151년 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상업이 번성했고 특히 로마인들과는 보석, 향수, 염료, 향신료, 직물 등을 거래했다. 점차로 약품과 학문적인 부분에서도 상호영향의 진보가 있었다. 수천개의 불교사원과 사리탑들이 세워졌고 간다라 예술 최상의 조각품들이 만들어졌다. 그는 그의 끊임없어 보이던 확장이 중단되면서 그의 부하에 의해 잠자던 도중 살해되었다.
쿠샨왕조는 북쪽으로부터 서서히 그들의 지배령을 잠식하고 있던 페르시아의 사산제국(Sassanian, Sasanian, Sasanid)에 의해, 그리고 굽타(Gupta)왕조가 장악하고 있던 남쪽으로부터 양방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다.
4세기경 상업과 번영의 쇠퇴로 인해 쿠샨왕조는 현재의 페샤와르를 수도로 하는 키다르쿠샨 (Kidar : 작은) 왕조로 축소되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훈족(White Huns : 원래는 중국에서 온 말을 타고 이동하는 유목민들, 만리장성 북쪽에 거주하였음, 흉노족)이 5세기에 간다라를 침입했다.
쿠샨의 번영이 쇠퇴하면서 그리고 태양과 불을 숭상하는 훈족들이 그 지역들을 다스리면서 북쪽 파키스탄에서 간다라 예술의 영화와 불교는 점차 쇠퇴해 갔다.
파키스탄 국가생성의 기초를 이룬 이슬람이 처음에는 파키스탄의 남쪽에서, 후에는 북쪽에서부터 전파되었다.
AD 712년 인도양에서 아랍인들의 상업이 해적들에 의해 위태롭게 되었을 때 무함마드 빈 카심(Muhammad bin Qasim)은 신드지역의 지도자였던 라자 다히르(Raja Dahir)를 진압하기 위해 해군 원정대를 이끌었다. 그는 이슬람교의 원칙에 적합한 사람이었으며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생활, 재산과 예배의 안녕과 자유를 보장했다.
약 3세기의 차이를 두고 투르크(Turk:터키인)의 지배아래 있던 북쪽으로부터 무슬림들의 두 번째 정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Muhammad bin Qasim
가즈니 지역의 술탄 이었던 Mahmud
가즈니(Ghazni, Ghazna : 아프가니스탄의 중동부에 있는 도시 ; Ghaznavid)의 터키인 통치자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구르(Ghur : 아프가니스탄의 중서부 산악지역, 남동쪽으로는 Herat, 북서쪽으로는 Helmand River Valley와 접해있다)인들이 무슬림 군대를 파키스탄을 거쳐 북인도까지 진군시켰다. 가즈니의 술탄 마흐무드(Sultan Mahmud)는 17번이나 원정대를 이끌었지만 결국 얻는 것은 단지 펀잡지역이었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과 함께 무슬림 성인들과 수피교도(Sufis ; Sufism : 이슬람의 신비주의적인 한 종파)들이 인도에 들어 와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이슬람을 전파하였다.
Conquests of Mahmud Ghaznavi
세완(Sehwan)에 있는 Hazrat Lal Shahbaz Qalandar의 무덤
인도아대륙에서 무슬림 지배의 시작은 이슬람과 인도아대륙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다.
물탄에 있는 Shah Rukn-e-Alam의 무덤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돔형 건축물의 하나
구르(Ghur)의 무함마드(Muhammad of Ghur, Mu'izz-ud-Din Muhammad : 가즈니의 Mahmud의 후손)는 북인도에 무슬림 통치를 확장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체계적인 작전은 처음으로 라즈푸트(Rajput : 라지푸트족, 북인도를 지배했던 종족, Kshatriya 무사계급의 자손이라 여겨짐) 동맹을 형성시켰고 실질적인 세력강화로 인해 결국 AD 1192년에 무슬림 군대에게 승리를 안겨 주게 되었다
Qutbuddin Aibak, Shamsuddin Iltumish
Sultanateunder Alauddin Khalji
AD 1206년에 무함마드(Muhammad of Ghur, Mu'izz-ud-Din Muhammad)가 죽은 후 쿠트부딘 아이박(Qutbuddin Aibak, Qutb-ud-Din Aybak)이 터키의 아미르들(Turkish Ameers)에 의해 술탄(Sultan : 이슬람국 군주의 명칭)으로 뽑혔다. 그는 델리(Delhi)의 새롭게 세워진 술탄국(Delhi Sultanate ; Sultanate : 술탄이 통치하는 나라)의 첫 번째 술탄이 되었다.
이는 델리 술탄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일바리(Ilbari) 왕조로부터 로디(Lodhi, Lodi) 왕조까지 무슬림 술탄의 다섯 왕조가 300년이상 지속되었다.
1398년, 델리술탄국(Delhi Sultanate)의 몰락이 시작되면서, 중앙아시아의 몽골족 티무르(Timur)가 인도를 침략하고 델리를 약탈했다. 티무르(Timur)와 징기즈칸(Chengiz Khan, Genghis Khan)의 후손인 바부르(Babur, Zahir-ud-din Muhammad emperor)는 AD 1494년에 그의 선조들의 조그만 파르가나(Farghana, Fergana : Hindu Kush 산맥의 북쪽, 현재 우크라이나 동부의 지명) 왕국을 물려받았다. 여러 차례의 인도를 공격을 행한 끝에 마침내 파니푸트(Paniput, Panipat : 델리에서 약 80km 북쪽)에서 AD 1526년 이브라힘 로디(Ibrahim Lodhi : 델리 술탄제국 로디왕조의 마지막 술탄)를 물리쳤다. 이것이 무굴제국의 시작이었다.
바부르(Babur)는 그의 장자인 후마윤(Humayun, Nasin-ud-din Muhammad)에게 왕권을 물려주었으나 그는 강력한 군주제 확립에 실패했다. 후마윤이 AD 1540년에 차우사(Chausa), 카나우즈(Kanauj, Kannauj)에서 수르의 셔르 샤(Sher Shah Suri, Sher Shah of Sur, Farid Khan : 북인도 이슬람 수르 왕조의 왕)에게 패하고 무굴왕국은 퇴보를 겪게 되었다.
AD 1555년에 짧게 다시 왕국을 통치했던 후마윤(Humayun)은 AD 1556년 그의 서재 계단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했다.
후마윤(Humayun)의 상속자인 아크바(Akbar, Abu-ul-fath Jalal-ud-din Muhammad Akbar)는 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겨우 13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왕성한 무굴제국의 통치자가 될 때까지 생존했다. AD 1605년에 그가 죽기까지 무굴제국은 신드(Sind)와 라자스탄(Rajasthan : 인도 서북부의 지명)을 포함한 인도 중부지역부터 카슈미르까지 그 세력을 확장했다.
아크바의 통치는 비무슬림들에 대한 그의 회유정책과 종교적 개혁 그리고 그의 효율적인 행정 체계 등으로 인해 빛을 발휘했다
무굴시대의 주화
바부르(Babur) 무굴제국의 시조 후마윤(Humayun) (1530 - 1556)
아크바대왕(Akbar the Great)바부르의 손자 수르왕국의 셔르샤 (Sher Shah)
아크바(Akbar)를 표현한 무굴시대의 세밀화
무굴제국의 예술과 건축은 아크바의 아들, 자항기르(Jahangir, Jehangir)와 손자, 샤 자항(Shah Jehan, Shah Jahan) 때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들은 장엄하고 웅장한 모스크 사원과 궁전, 요새, 정원 등의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들을 사용한 훌륭한 유산들을 남겼다. 샤 자항의 시기에 건축된 타즈마할(Taj Mahal : 인도 Agra에 있는 순백 대리석 영묘, 샤 자항이 먼저 죽은 그의 왕비 Mumtaz Mahal을 기리기 위해 건축했음)은 오늘 날 까지도 무굴건축의 최고 절정으로 남아있다.
타즈마할(Taj Mahal), 그녀의 남편이었던 샤 자항에 의해 건축된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의 영묘-자항기르(Jehangir)
Bara Dari at Hiran Minar near Sheikhupura-샤 자항(Shah Jehan)
샤 자항(Shah Jehan)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정통 무슬림이었다. 비록 그가 선조들보다 오랜 시간을 다스렸지만 그 또한 무굴제국의 쇠퇴를 막을 수 는 없었다. 거의 150년 이후에 급격한 멸망의 길을 걷다가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건축된 라호르의 바드샤히 모스크(Badshahi Mosque)
나디르 샤 (Nadir Shah)
아우랑제브(Aurangzeb) 이후에 마라타스(Marhattas, Marathas)가 데칸지역(Deccan)의 막강한 통치자가 되었다. 펀잡지역에서는 시크(Sikh)인들의 세력이 강력하게 되었다. AD 1707년에서 1857년까지 새로운 권력의 중심들이 많이 생기게 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거의 17명의 왕들이 제국의 보좌에 취임과 퇴각을 되풀이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무굴제국의 쇠약으로 인해 페르시안 왕인 나디르 샤(Nadir Shah)가 침략하게 되었다. 그는 AD 138-39 년에 델리(Delhi) 지역의 대학살을 명령하고 그 결과로 3만명의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18세기 중반까지 델리 북동쪽의 로힐라(Rohillas)인들과 자트(Jat)인들 또한 무굴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었다.
18세기에 인도아대륙의 이슬람은 위협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에 따른 반응으로 종교 개혁의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샤 왈리 알라(Shah Wali Ullah, Shah Wali Allah)의 업적이었다. 이러한 그의 업적은 파키스탄 생성 때까지 계속된 교육혁신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Haji Shariatullah Faraizi movement
바하두르 샤 자파 (Bahadur Shah Zafar)가 아우랑제브 알람기르의 뒤를 이었다.
AD 1614년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봄베이(Bombay, Marathi Mumbai : 인도 Maharashtra state의 수도)에 처음 사무실을 열었다. 영국인들은 무굴의 통치자들로부터 여러 면허들을 얻어내어 독점무역으로 상당한 이익을 보았다. 18세기의 중반에는 인도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벵갈(Bengal)의 나와브(Nawab : 인도, 파키스탄의 이슬람 귀족에 대한 존칭) 시라주다울라(Siraj-ud-Daulah, Siraj-ud-Dawlah)와 대항하여 힌두상인들과 손을 잡았던 영국인들은 AD 1757년 플래시(Plassey, Palash : 인도북동쪽에 있는 West Bengal State의 중동부 지역)에서의 전투이후에 인도아대륙의 체계적인 정복에 들어갔다.
19세기, 데칸지역에서 하이데 알리(Haide Ali, Hyder Ali, Haidar Ali)와 티푸 술탄(Tipu Sultan, Tippu Sultan)이 영국에 대항하고 있는 사이, 사이드 아마드(Sayyed Ahmed)와 샤 이스마일(Shah Ismail)과 같은 무슬림들은 시크인들과 맞붙는 지하드(jihad, 성전(聖戰))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무슬림의 통치가 몰락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영국동인도 회사의 한 대표가 인도상인과 협상을 하고 있다
19세기, 데칸지역에서 하이데 알리(Haide Ali, Hyder Ali, Haidar Ali)와 티푸 술탄(Tipu Sultan, Tippu Sultan)이 영국에 대항하고 있는 사이, 사이드 아마드(Sayyed Ahmed)와 샤 이스마일(Shah Ismail)과 같은 무슬림들은 시크인들과 맞붙는 지하드(jihad, 성전(聖戰))을 실행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무슬림의 통치가 몰락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AD 1845년 까지 영제국은 벵갈(Bengal)에서 신드(Sind)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자유로운 지역으로 남아있는 곳은 펀잡지역뿐이었다.
당시 시크인들은 펀잡 전역을 다스리고 있었고, AD 1848년의 2차 시크 전쟁(Sikh war) 이후 영국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서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란지트 싱그(Ranjit Singh)가 그의 머리장식 끈에서 사용했던 코이누르(Koh-i-Noor, 1849년 이래로 영국 왕실이 소유하게 됨, 108캐럿으로 세계 최대) 다이어몬드는 웨스터민스터 최고의 보석이 되었다.
영국 군대는 그들의 군대를 위해 현지 인도인들을 징병했다. 그들은 금기시 되는 동물의 기름으로 칠해진 탄약통을 사용했는데 이는 심지어 사용하기 전에 입으로 씹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란지트 싱그(Ranjit Singh)
영국과 대항하여 싸티푸 술탄(Tipu Sultan)
영국의 요새 - St. George
벵갈의 나와브(Nawab) 시라주다울라(Siraj-ud Daulah)
AD 1857년에, 이 인도군인들은 벵갈지역(Bengal) 영국군대에서부터 영국인들에 반대하는 폭동을 시작했다. 이는 인도아대륙 전체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 독립전쟁은 성공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무슬림들과 힌두인들의 단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립전쟁이후 영국 정부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영역을 거점으로 자신들의 통치권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50년 동안 영국인들은 인도아대륙 전역의 지배를 확장해 나갔고 영국통치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1857년 독립전쟁은 무슬림들의 참패로 끝이 났다. 영국인들은 반영(anti-British)감정을 부추긴 것이 무슬림들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혹독한 벌과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했다. 이러한 역경가운데 이들을 구하기 위해 사이드 아마드 칸(Syed Ahmad Khan, Sir Sayyid Ahmad Khan)은 인디아의 무슬림 가운데 나타났다.
영국 공무원직을 그만 둔 알란 옥타비안 흄(Allan Octavian Hume)은 인도네셔널콩그레스(the Indian National Congress) 를 설립하였다.
그의 알리가르(Aligarh : 인도 북부 Uttar Pradesh State의 중서부에 있는 도시) 운동은 인도의 무슬림들 가운데 지적혁명을 야기 시키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콩그레스(Congress : 인도의 정당 이름)는 단지 힌두의 이익만을 대변할 뿐이라고 무슬림들이 느낌으로써, 그의 Mohammadan Educational Conference는 이후에 무슬림의 정당인 전인도무슬림연맹(All India Muslim League)를 만들어 냈다. 두 주요한 단체가 눈에 띄게 상반된 방향으로 발전되어감으로써 모든 인도 지도자들이 상당한 우려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콩그레스(Congress)와 무슬림연맹(Muslim League)을 연합시키기 위해 분투하였다
사이드 아마드 칸 경(Sir Syed Ahmad Khan)
영국 공무원직을 그만 둔 알란 옥타비안 흄(Allan Octavian Hume)은 인도네셔널콩그레스(the Indian National Congress) 를 설립하였다.
초기 오토만제국(Ottoman Empire)16 - 17세기
벵갈지역의 분할후에 힌두인들의 거센 반발에 의해 무효화됨
콰이드에아잠(Quaid-i-Azam, Quaid-e-Azam : 위대한 지도자라고 해석되나 무함마드 알리 지나를 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임) 무함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는 당시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벵갈(Bengal)지역의 분할을 무효선언하고, 오토만제국(Ottoman Empire)과 북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인들의 침략속셈을 인식한 후, 무슬림들은 영국세력에 대항하여 힌두인들과의 협력을 하게 되었다.
1916년에 콩그레스와 무슬림연맹은 (Congress-Muslim League) 루크노우(Lucknow : 북인도 Uttar Pradesh state의 수도)에서 두 정당간의 화해의 장을 마련하고 루크노우 조약(Lucknow pact)에 언급된 개혁 합의안을 채택했다
힌두-무슬림의 연합은 킬라파트 운동(Khilafat Movement)과 비협조운동(Non-cooperation Movements)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전쟁 이후 알리 형제, 마울라나 무함마드 알리(Maulana Muhammad Ali)와 마울라나 샤우카트 알리(Maulana Shaukat Ali)의 지도아래 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오토만제국 분할을 막기 위해 그 역사적인 킬라파트 운동을 시작했다.
마울라나 무함마드 알리와 마울라나 샤우카트 알리
(Maulana Muhammad Ali and Maulana Shaukat Ali)
간디
간디(Mahatma Gandhi, Mohandas Karamchand Gandhi)는 무슬림과 힌두인들을 연합시키기위해 킬라파트 운동에 자치 운동(self-government issue)을 연결시켰다. 이 연속적인 일련의 운동들은 처음으로 시도된 전국적인 시위운동이었다.
킬라파트 운동은 힌두-무슬림간의 강한 불협화음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힌두인들은 두 개의 반-무슬림 운동을 조직했다. 슈디운동(Shuddi Movement)은 무슬림들을 힌두교도들로 개종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며 상가탄 운동(Sanghattan Movement)은 공통의 분쟁이 있을 때 힌두인들간의 단결을 이루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슈디운동(Shuddi movement)을 시작한 사르다난드(Sardhanand)
이에 따른 보복조치로, 무슬림들은 슈디(Shuddi)와 상가탄(Sanghattan)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타블리그(Tabligh), 탄짐(Tanzim) 조직을 지원하였다. 1920년에는 폭동이 이전에 비할 바 없이 요란하였다. 이러한 상황가운데, 유명한 무슬림 시인이자 철학자인 무함마드 이끄발(Muhammad Iqbal) 박사는 대다수의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펀잡, 북서변경주, 신드와 발루치스탄 지역을 연합해서 분리된 무슬림 국가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무함마드 이끄발 박사
그의 알라하바드(Allahabad : "City of God"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 북인도 Uttar Pradesh state의 남부에 위치) 연설이 있은 지 3년후 초우다리 라흐맛 알리(Choudhary Rahmat Ali) 의 인도아래 캠브리지의 한 무슬림 학생단체가 한 팜플렛 - 바로 지금 그렇지 않으면 결코(Now or Never)라는 표제의 - 을 제작했다.
초우다리 라흐맛 알리
여기에는 무슬림 다수가 사는 지역들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만든 파키스탄(Punjab, Afghan/North-West Frontier Province/, Kashmir, Sind, and Balochistan을 합하여 Pakistan이라는 말이 탄생하였고 이 또한 "순수의 땅" 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라는 신조어가 표기되어 있었다.
초우다리 라흐맛 알리(Choudhary Rahmat Ali)에 의해 가시화된 파키스탄
1930-32년 사이에 세차례 연석회의가 런던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인도들의 입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이 회의에 초대된 힌두와 무슬림 양측 지도자들은 합의된 문서를 작성해 낼 수 없었다.
2차 연석회의의 참석자들
1937년 열린 선거에서 무슬림 연맹(Muslim League)은 조직이 효과적으로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슬림 다수석을 얻을수 없었다. 소수의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지방에서 Congress의 지배와 그들의 정책은 오히려 무슬림들로 하여금 자신들만의 분리된 정체성과 나라를 갖고자 하는 열망을 부추겼다.
무슬림의 불만을 조사하여 작성된 Pirpur report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힌두인들의 태도는 힌두-무슬림 연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히 했다. 무슬림들이 영국을 지지할 때 힌두인들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했다.
1940년 라호르회의에서의 콰이드에아잠과 리아캇 알리 칸
전인도무슬림연맹(The All-Indian Muslim League)은 1940년 역사적인 라호르 결의안(Lahore Resolution)을 통과 시켰다. 이는 인도아대륙 지역중 무슬림 다수가 사는 지역에 무슬림들을 위한 분리된 본토를 요구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초우다리 칼리쿠아만(Choudhary Khaliquuaman)이 그 결의문을 입회하여 보고 있는 동안 콰이드에아잠(오른쪽)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 요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갔으나, 이 무슬림연맹의 지지도 총독 와벨 경(Viceroy Lord Wavell)이 1945년에 소집한 Simla 회의에서 기각 당했다.
콰이드에아잠이 1945년 Simla에서 영국총독 와벨(Wavell) 경과 악수하고 있다.
1944년 봄베이에서 간디와 함께 있는 콰이드에아잠
1946년 1월 열린 선거는 막강한 무슬림 단결을 보여주면서 끝이 났다. 영국인들이 그들의 제국적 통치를 인도아대륙에서 포기해야함을 깨달았을 때 여러 정치정당들과 협상을 수행하기 위한 사절단(Cabinet Mission)을 보냈다.
영국에서 보낸 사절단과 악수하고 있는 콰이드에아잠
무슬림연맹과 콩그레스, 양 정당은 그 계획안을 수용했으나 후에 콩그레스의 대표였던 네루(Nehru)는 그 동의를 철회했다. 그는 그 동의안이 콩그레스를 속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지나(Jinnah)는 힌두의 표리부동한 태도와 그들의 조약 수용철회를 비난하고 1946년 8월 16을 행동개시일(Direct Action Day)로 정했다.
콩그레스 또한 같은 날 구성원들을 모아 시위를 조직하여 유혈분쟁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콩그레스의 멤버들은 캘커타(Calcutta)의 주정부 건물 앞에서의 무슬림 시위를 막고자 했다. 결과로, 이날 하루동안 5000명의 사람들이 죽고 20,000명의 사람들이 다쳤다. 집들과 사무실들이 약탈되고 건물들이 불탔다.
자와하랄 네루(Jawaharlal Nehru), 당시 콩그레스의 대표
영국은, 무슬림연맹과 힌두인이 다수인 콩그레스 양쪽 모두가 수용할만한 안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1946년 10월에,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마침내 영국은 인도아대륙이 1947년에 두 개의 독립된 나라로 분리독립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권한이양 11일 전의 마운트바튼 경(Lord Mountabtten)
정당들과의 회의를 거친 뒤 마운트바튼 경(Lord Mountbatten : Wavell 다음 총독)은 1947년 6월3일 분리 계획안을 발표했다. 콩그레스와 무슬림연맹, 양 정당은 모두 그 안을 받아들이고 1947년 8월 14일 새로운 파키스탄이라는 국가가 탄생되었다.
파키스탄의 탄생, 1947
******************1947파키스탄 탄생이 후
파키스탄은 무슬림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선사하였다. 이는 무수한 생명의 희생과 물질적인 손실을 대가로 얻어진 것이었다. 수백만의 남녀노소가 난민이 되어 그들의 고향과 재산을 버려두고 안전한 곳을 찾아 국경을 넘어 피난하였다. 공포, 복수, 강탈 등의 문제가 뒤따랐다.
콰이드에아잠이 보고 있는 가운데 나와브자다 리아캇 알리 칸
(Nawabzada Liaquat Ali Khan)이 파키스탄 첫번째의 수상으로서 서명을 하고 있다.
독립당시 7백만의 이주민들이 국경을 넘었다.
이것이 파키스탄이 지나야할 첫 번째 관문이었다. 7백만의 이주민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며 정착시켜야 했다. 파키스탄은 인도아대륙의 자산을 나누어 소유하게 되었다. 훨씬 큰 나라가 된 인도는 모든 부분에서 많은 것을 차지하고는 파키스탄은 살아남거나 의지하기도 어려운 적은 자원만을 갖게 되었다.
당시 인도아대륙에는 약 560개의 주(State)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인도나 파키스탄에 가입해야 했다.
1947년 8월 특별열차가 이주민들을 파키스탄으로 수송하였다.
그러나 그중 4개의 주, 주나가드(Junagadh), 하이더라바드(Hyderabad), 조드푸르(Jodhpur)와 카슈미르(Kashmir)는 그 분리독립의 원칙을 무시하였다. 힌두인이 다수인 앞의 세 개의 주는 강제로 인도에 의해 합병되었다.
마지막까지 거만했던 카슈미르에는 마하라자 하리 싱(Maharaja Hri Singh, The maharaja of Kashmir, Hari Singh)이라는 힌두 통치자가 있었는데 백성의 대다수는 무슬림이었다. 그가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인도 혹은 파키스탄에로의 가입을 결정하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지역 주민들은 마하라자로 하여금 파키스탄으로 가입하게 하기 위해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대규모의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카슈미르 지역
Kashmir 카슈미르. 지도에서 녹색은 파키스탄의 영토, 갈색 부분은 인도의 잠무 카슈미르 주이다. 악사이친 지역은 중국 영토에 속한다. [위키백과]
마하라자는 힌두 군대를 동원하여 대응하였고 수백명의 무슬림을 희생시켰다. 두 달 뒤 다른 파키스탄인들이 카슈미르를 침공하자 마하라자는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인도는 카슈미르가 인도에 가입하는 조건하에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무력적인 씨름은 막바지에 이르게 되었고 카슈미르의 분할을 초래하였다.
1948년 8월 13일,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즉각적인 정전과 UN 통제하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를 요청하였다. 1949년 이래 정전은 유지되고 있지만 국민투표는 아직 실시되지 못하였고 카슈미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48년 4월 1일, 인도는 자국 영역안에 있는 두 개의 물공급원으로부터 파키스탄으로의 물공급을 차단하였다.
아름다운 치드랄 계곡(Chitral valley)
인더스 물 협정에 의하여 젤룸, 체나브, 인더스 강은 파키스탄에 주어졌다.
이 문제는 IBRD(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의 중재하에 만들어진 인더스 물 협정(Indus Water Treaty)을 1952년 양국 정부가 승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위대한 지도자(Quaid-i-Azam) 혹은 파키스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무함마드 알리 지나(Muhammad Ali Jinnah, Mohammed Ali Jinnah)가 첫 번째 파키스탄의 총독(대통령)이 되었고 1948년 9월 11일에 죽을 때까지 통치를 계속하였다. 후에 파키스탄의 첫 번째 수상이자 충실한 그의 동료였던 리아캇 알리 칸(Liaquat Ali Khan)이 알리의 뒤를 이었다.
Quaid-i-Azam Muhammad Ali Jinnah
Liaquat Ali Khan
1951년에 리아캇 알리 칸이 암살된 후, 정치상황은 급격히 변화되었다. 1956년 3월에 파키스탄을 이슬람 공화국으로 선언하면서 파키스탄의 첫 번째 헌법이 발효되었다.
지나가 죽은 뒤 총독(대통령)이 된 카와자 나짐우딘(Khawaja Nazimuddin)
리아캇이 암살된 후 카와자 나짐우딘이 수상이 되고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가 총독이 되었다.
아유브 칸이 계엄령을 선포할 때 이스칸더 미르자(Iskander Mirza)가 대통령이었다.
아유브 칸 장군(General Ayub Khan)
1958년에 육군원수 아유브 칸(Ayub Khan, Mohammad Ayub Khan)에 의해 계엄령이 발효되었고, 1962년에 스스로 대통령이 되면서 새로운 헌법을 발표하였다. 1965년, 쿠치 란(the Rann of Kutch : 인도서부, 파키스탄 남동부지역) 지역에서 인도와 무력충돌이 발발하여 전쟁으로 확전되었고 그 해 9월 23일 UN의 원조아래 정전이 이루어졌다.
1969년에 대통령 아유브 칸은 정권을 야히아 칸(Yahya Khan, Agha Mohammad Yahya Khan)에게 넘겨 주었고 그는 1970년 10월에 선거를 하기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동파키스탄의 심한 홍수로 그해 12월까지 연기되었다.
인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진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야히아 칸 장군(General Yahya Khan)
한편, 동파키스탄은 권력구조의 편중으로 인해 점차 불만이 쌓여갔는데 그 선거의 결과는 서파키스탄에서는 줄피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의 파키스탄 국민당(Pakistan People's Party ; PPP)이, 동파키스탄에서는 셰이크 무집(Sheikh Mujib, Mujibur Rahman)의 아와미연맹(Awami League)이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어느 당이 정부를 구성해야하는 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불협화음이 일어나면서 동파키스탄에서는 거리 시위, 비협조 운동 등이 일어나게 되었다.
동파키스탄의 분리요구, 1971년
서파키스탄에서는 줄피카 알리 부토(Zulfikar Ali Bhutto)의PPP가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인도와 동파키스탄의 힌두인들은 파키스탄의 진퇴양난을 완전히 활용하였다. 그들은 동파키스탄 영역에서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를 분리독립시키는 일을 지원하였다. 결국 1972년 1월에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게 되었고, 1974년에 파키스탄은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줄피카 알리 부토가 1971년에 수상이 되면서 기간산업, 은행, 보험사 등을 국유화하였고 인도로부터의 위협에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일환으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초우앙라이(Chou En-lai)와 함께 걷고있는 줄피카 알리 부토, 1972
부토정권은 1977년 총선 부정선거에 대항하는 야당들의 시위로 인해 몰락하게 되었다.
무함마드 지아울하크(Muhammad Zia-ul-Haq) 장군
지아울하크(Zia-ul-Haq, Mohammad Zia-ul-Haq) 장군에 의해 1977년에 계엄령이 발효되었다. 줄피카 알리 부토는 PPP 반체제 정치인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라호르 고등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후에 대법원에서 원심을 확정하고 1979년 4월 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대통령이 된 지아울하크
지아울하크의 계엄령 기간동안 민간분야에서 순조롭게 경제가 성장되었고 정치, 법제, 경제적인 구조를 이슬람화하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1980년대 초, 소련의 아프간 침공으로 수백만의 난민들이 파키스탄으로 몰려들었다.
천막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프간 소녀들
1979년 12월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에 따라 파키스탄은 미국으로부터 가장 지원을 많이 받는 나라가 되었다. 발루치스탄과 북서변방주(NWFP, North-West Frontier Province)으로 넘어 온 4백만의 아프간 난민을 돕기 위해 방대한 양의 군수물자와 원조가 파키스탄에 지원되었다.
1985년 계엄령이 철회되고 국회편성을 위한 선거가 비정당 방식(non-party basis)으로 이루어졌다.
무함마드 칸 주네조(Muhammad Khan Junejo)
지아울하크에 의해 설립된 민원조사관(Ombudsman)의 사무실
무함마드 칸 주네조(Muhammad Khan Junejo)가 수상이 되었으나 1988년에 지아울하크가 그를 면직하고 같은 해 11월에 새로운 선거를 하기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1988년 8월 17일에 바하왈푸르(Bahawalpur)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다섯명의 장군들과 함께 사망하였다
1988년 11월의 총선에서 파키스탄 국민당이 승리하여 줄피카 알리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가 파키스탄의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2년이 채 못되어 1990년 8월에 그녀의 정부는 부정부패로 기소당하고 대통령 굴람 이샤크 칸(Ghulam Ishaq Khan)에 의해 해산되었다.
대통령 굴람 이샤크 칸( Ghulam Ishaq Khan)은 8차개헌법의 권한을 사용하여1990년에 베나지르 부토를 그리고 1993년에 나와즈 샤리프를 면직하였다.
1989년 8월 14일 국기게양식에 서 있는 수상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두 달 후, 1990년 10월에 선거가 열리게 되었고 이슬라미 잠후리 이테하드(Islami Jamhuri Ittehad)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되었다. 전 펀잡주 총리였던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Mian Muhammad Nawaz Sharif)가 새 수상이 되었다.
잠소로(Jamshoro) 열발전소의 완공식에 참석하고 있는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 1991년
베나지르 부토(Benazir Bhutto)
1996년에 베나지르 부토를 다시 해임시킨 사다르 파루크 아마드 칸 레가리(Sardar Farooq Ahmad Khan Leghari) 대통령
이 정부는 사유화 정책과 경제 회복정책을 폈으나 1993년 부정부패를 이유로 대통령 굴람 이샤크 칸에의해서 해산되었다. 이듬해 10월에 다시 베나지르 부토와 PPP가 재선되었다.
베나지르 부토의 정부가 또 다시 1996년에 부정부패의 책임으로 해산되고 1997년 2월에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파키스탄 무슬림 리그(Pakistan Muslim League ; PML)가 압도적으로 다수석을 차지하게 되었고 미안 나와즈 샤리프가 다시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파키스탄의 전 수상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 (Mian Muhammad Nawaz Sharif)
대통령 Muhammed Rafiq Tarar와 Chief Executive General Musharaf Pervez, 2000년 3월 23일 파키스탄의 날
나와즈 샤리프의 정부는 나와즈의 지나친 권력욕과 부정부패를 이유로 1999년 10월 12일 무샤라프 장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전수상 나와즈 샤리프는 2000년 4월에 국가반역과 납치에 대해 유죄를 인정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현재(2000년 6월)에도 부정부패와 탈세의 혐의로 재판 중이다.
총사령관(Chief Executive)로 불리는 무샤라프는 현재 파키스탄의 최고 실세이다. 그는 쿠데타 이후 헌법을 초월하는 특별법을 만들었고 파키스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법원은 무샤라프에게 3년간의 국가회복기간을 부여하여 그의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주었으며 무샤라프는 이 기간내에 국가재건과 민주주의 회복을 할 것을 발표하였다.(끝)
[K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