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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Genocide)

한부울 2006. 8. 26. 00:34

 

                                            제노사이드 [Genocide]

 

(인종과 살생을 합친 말. 특정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로 코소보 분쟁 등에서 발생)

 

제노사이드는 인종을 뜻하는 그리스어(genos)와 살생을 뜻하는 라틴어(cide)의 합성어이다.

특정의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제노사이드는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이 만든 용어인데, 그는 1944년 국제법에서 집단 학살을 범죄로 선언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사용했다. 제노사이드를 공식적으로 처음 범죄로 인정한 것은 1945년 2차 대전 직후에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을 기소할 때였다.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노사이드에 관한 협약이 승인되었으며 특정 국가, 종족, 인종 또는 종교 집단을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사를 갖고 자행하는 행동을 제노사이드 범죄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는 인류의 문명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역사책을 들추어보면 제노사이드가 빈발했다는 증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리스와 트로이, 로마와 카르타고,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전쟁을 하면서 주민을 학살했다. 성지 회복을 겨냥한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유태인을 교회당으로 밀어 넣고 태워죽였다. 유태인은 여러 차례 제노사이드의 과녁이 되었다. 14세기에 기독교도에 의해 흑사병의 속죄양으로, 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우크라이나 사람에 의해 볼셰비키 위협의 속죄양으로,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에 의해 인종 차별의 속죄양으로 몰려 떼죽음을 당했다.


유태인 못지않은 제노사이드의 희생자는 인디언이다. 희생자가 100만 명을 넘는 학살이 세 건이나 발생했다. 서인도 제도에서 스페인 사람에 의해(1492~1600), 중남미에서 역시 스페인 사람에 의해(1498~1824), 그리고 미국에서 백인에 의해(1620~1890) 수백만 명의 인디언들이 죽어 갔다. 북미 대륙을 점령한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연마한 잔혹한 수법으로 인디언을 몰살했다. 백인들은 인디언의 마을과 야영지를 기습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죽였다. 미국 정부가 인디언을 사냥하는 살인자에게 인디언 머리 가죽의 수에 따라 보상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인디언 사냥꾼들은 사지를 잡아당겨 찢거나, 말에 매달아 끌고 다니거나, 불에 태우는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죽였다.


태즈매니아의 비극


인디언 학살처럼 충분히 계획된 제노사이드의 잔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태즈메니아 원주민의 몰살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남동쪽으로 150마일 떨어진 태즈메니아 섬은 1642년 네덜란드 선원에 의해 유럽에 알려질 때까지 거의 1만년 동안 외부 세계와 격리되어 있었다. 5000명가량의 원주민에게 불운이 들이닥친 것은 1만년의 고립이 끝나면서 부터였다.


1772년 두 번째로 섬에 상륙한 유럽인들은 수 시간 동안에 몇 명의 원주민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돌아갔다. 태즈메니아의 비극을 예고하는 총질이었다.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태즈메니아 점령은 1790년대 중반부터 몰려온 영국의 바다표범 사냥꾼, 탈옥수, 군인 등의 도착으로 그 막이 올랐다.

섬의 원주민과 영국인만큼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지구상에 없었다. 이들의 조우는 곧바로 피바람을 일으켰다. 백인들은 극도로 잔인했다. 어린애들은 노예로 부려먹고, 여자들은 강간하기 일쑤였으며, 사내들은 병신으로 만들거나 죽였다. 여자들을 통나무에 묶어서 장작불로 태워 죽였으며 금방 잘라 낸 남편의 머리를 아내의 목에 걸어 주기도 했다. 남자의 생식기와 고환을 절단하거나 주검을 절벽 아래로 내던지기도 했다. 백인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으나 흉악범으로 처벌 받은 영국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1828년에는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어 유럽인의 정착지에 얼씬거리는 원주민은 즉시 사살해도 좋다는 살인 면죄부가 공식적으로 발급되었다. 한 명의 경관이 다섯 명의 죄수를 인솔하는 수색조가 편성되어 원주민을 짐승 사냥하듯 살해했다. 생포를 조건으로 현상금까지 나붙었기 때문에 태즈메니아 원주민 사냥은 백인에게 큰 돈벌이가 되었다.


1830년에는 싹쓸이가 시작된다. 30 마일 떨어진 무인도로 원주민 전원을 추방한 것이다. 이송 도중에 대부분이 죽어 200여 명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감옥처럼 운영되는 숙소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성가를 부르면서 기독교도로의 개종을 강요받았다.


문명화를 용이하게 한답시고 아이들을 부모와 격리시켰다. 그러나 바람 많고 물이 부족한 무인도였기 때문에 100여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병들어 죽었다. 호주 정부는 관련 예산을 삭감하기에 이르렀다. 모두 죽기를 바란 셈이었다. 1847년 47명의 생존자가 태즈메니아로 돌아왔다. 그들은 5000명 중에서 용케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1869년에는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으로 겨우 세 명이 살아남아 있었다. 이들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왜냐하면 유인원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가 이행되는 중간 과정에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남자가 1869년에 죽자마자 과학자들은 서로 경쟁을 하면서 교대로 그의 시신을 파내고 되묻곤 했다. 몸의 일부를 절단해서 훔쳐 가기도 했다. 한 사람은 머리를, 다른 사람은 손발을, 또 다른 사람은 귀와 코를 기념품으로 잘라갔다. 심지어는 피부로 담배쌈지를 만들기까지 했다.


태즈메니아 최후의 사람은 1876년에 죽은 노파이다. 최후의 남자처럼 사후에 시신이 찢기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바다에 수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녀의 부탁은 소용이 없었다. 해골은 1947년까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사후 100년이 지난 1976년에 비로서 화장되어 바다에 흩뿌려졌다. 어쨌든 이 여인의 죽음으로 태즈메니아 원주민은 공식적으로 완전히 멸종된 것이다.


20세기에는 같은 민족 살육


제노사이드는 무기의 발달로 대량 살상이 용이해짐에 따라 희생자의 규모에 있어 신기록이 갱신되었다. 특히 20세기에는 희생자가 1000 만 명 이상 되는 사건이 두 번 발생했다. 한 번은 러시아 정부가 공산 혁명의 마무리를 위해 11년간(1929~1939)에 걸쳐 같은 민족인 2000만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숙청했으며, 다른 한 번은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유럽 점령지에서 유태인과 집시를 잔혹하게 죽였다. 희생자가 100만 명 이상 되는 제노사이드는 세 건 있었다.


1915년 터키인의 아르메니아인 살육, 1971년 파키스탄 군대의 벵골인 학살, 1970년대 후반 캄보디아 혁명정부의 동포 살해이다. 10만 명 이상인 사건은 여덟 건에 이른다. 1941~1945년 크로아티아인의 세르비아인 학살, 1943~1946년 러시아의 소수민족 학살,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의 살육, 1955~1972년 수단에서 북수단인의 남수단인 학살, 1965~1967년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자 학살, 1971~1979년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에 의한 동족 학살, 1972~1973년 부룬디에서 투치족에 의한 후투족 학살, 1994년 르완다에서 후투족의 투치족 학살.


20세기 제노사이드는 그 대상에 있어 그 전의 사건과 구별된다.

19세기까지는 종교와 인종 문제로 대부분 다른 민족을 살해했지만 20세기에는 정치적 갈등으로 같은 민족을 대량 학살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반 체제자 숙청을 비롯하여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수 십 만 명의 공산주의자 살해, 우간다에서 독재자 이디 아민이 벌인 수 십 만 명의 동포 살육, 캄보디아에서 공산 혁명 세력인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수백만 명의 캄보디아인 숙청이 좋은 예이다.


캄보디아의 경우, 미국 예일 대학은 1995년부터 2개년 계획으로 국무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크메르 루즈 정권이 저지른 제노사이드의 현장 조사를 실시했다. 치밀한 계획으로 동포를 살육한 당시 권력자들을 재판에 회부하려는 목적이었다. 1~2만개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공동묘지에는 평균 100~250명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희생자의 전체 규모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크메르 루즈는 약 2만 명을 학살했다고 강변했지만 1978년 성탄절에 캄보디아를 기습하여 크메르 루즈 정권을 붕괴시킨 베트남 당국은 330만 명으로 발표한 바 있다. 예일대 조사반은 적어도 200만 명은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1975년 당시 약 7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30퍼센트 가까이 학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