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尹斗緖: 1668-1715)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묘화(描畫)와 모사{模寫), 모방의 천재들이란다(?)
가보지도 않는 곳을 상상으로 그리고 꿈에서 본 듯한 사물을 사실처럼 그리며 대륙화가들을 흉내 내거나 모사{模寫), 모방을 잘 하기 때문이란다.
이와 같은 것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명망 있는 사학자들이 하는 작품해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가 현실적으로 한반도에서 보고 느꼈을 법한 그리고 언제든지 찾아가서 확인하고 볼 수 있는 풍경이나 정경을 그린 산수화는 없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코 한반도에 풍물을 그려 후세에 많이 남겨 그곳에 풍미를 후손들이 느끼도록 했어야 함에도 전무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음모 속에 우리가 빠져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고려 조선시대 유명화가들의 산수화는 하나같이 한반도정경이나 풍경하고는 거리가 먼 대륙풍경이고 이질적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두 하나같이 우리나라 즉 한반도에 실존하지 않는 형상을 그렸다.
이상하지 않는가?
반도사관에 따르면 고조선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두가 한반도이다.
그렇다면 유명화가들의 작품 속에 한반도 오래된 풍경이 그려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눈 딱고 보더라도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풍경이고 정경이다.
반도사관을 머릿속 가득 암기한 역사학자들이나 고고유물분석학자들은 한반도에 없는 풍경이나 정경을 그렸다면 무조건 모사{模寫), 모방한 것이고 묘화했다고 결론 지워버린다는데 문제가 있다.
과연 그러한 결론짓기가 타당한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산수화가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재능을 발휘한 내 노라 하는 불세출의 명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두 졸지에 사이비가 되어버렸다.
바로 모사{模寫), 모방이나 하고 묘화나 일삼는 사실적이지 못한 사이비가 된 것이다.
베껴 그리는 화 쟁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정말 어리석고 천하에도 없는 폐륜이며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못된 딱지붙이기 가 아닐 수 없다. 아니 거짓 역사사실만 머리에 쳐 넣고 있던 어리석은 자손들이 종내 조상님들 얼굴에 똥칠하고서도 죄의식을 가지지 않은 무지렁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의 명가들은 일상적으로 보고 평상시에 느낀 것을 바탕으로 사실화를 그렸음에도 어리석은 후세 역사학자들이 반도사관에 물들어 모사{模寫), 모방하고 묘화했다고 모함을 하고 독창적인 작품을 베껴 그린 사이비 화 쟁이 취급까지 하는 행태이고 보면 오늘날 천리(天理)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래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이다.
한반도에 그림에 나타난 우뚝 솟은 산 모습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라!
또 다시 모사{模寫), 모방하고 묘화했다고 하겠는가?
풍속화이다.
풍속은 무엇인가?
옛적부터 전해 오는 습관이나 버릇 또는 그 시대의 유행과 풍습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풍경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다.
윤두수가 그린 그림에 있는 산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윤두서는 사실주의 극치라고 하였다.
사실주의를 근간으로 한 작품을 추구했다면 모사{模寫), 묘화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사{模寫), 묘화라고 하는 것은 후세 얼빠진 자들의 음모이다.
철저한 사실주의에 입각한 풍속이고 산수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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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애도' 속에 나타난 공재의 풍속화
[오마이뉴스]07.03.05 18:01
생활속에서 추구한 가풍 우러나
▲ 풍속화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공재의 '채애도(나물캐는 여인)' ⓒ 녹우당
채애도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는 농가 여인의 생활을 담은 풍속화이다. 비스듬히 흐르는 언덕에서 나물 캐는 여인을 그렸는데, 아래쪽의 여인은 망태기와 칼을 들고 캘 나물을 찾는지 허리를 굽힌 모습이다. 위쪽의 여인은 서서 고개를 뒤로 젖혀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다. 이 여인들은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저고리에, 일하기 편하도록 치마를 걷어 올려 묶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있다. 지금도 시골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일하는 여인의 모습이다.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였지만 나물 캐는 여인네의 특징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인물은 사실적인 반면 가파른 산은 매우 관념적이다. 산과 여인이 있는 건너편 허공에는 새 한 마리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공간에 균형을 이루며, 화면의 크기를 무한히 확장시켜 준다. 인물화에 뛰어난 윤두서의 재치와 기량을 잘 볼 수 있으며,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점이 뜻 깊다.
고산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조선후기 3재로 불릴 만큼 뛰어난 화가였다.
이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들 중에서 독특한 실학적 화풍을 남긴 이가 공재 윤두서다. 이러한 화풍엔 그가 평소 생활 속에서 추구한 실학이 담겨있는데, 해남윤씨가의 가풍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밑바탕으로 공재의 미술세계는 사실주의와 풍속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갔다.
@BRI@풍속화의 선구자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살았던 시대는 숙종 시대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고 지식계급은 분열됐다. 선비들은 낙향하여 벼슬을 멀리하게 되었으며, 양반사대부들도 지배체제 내부의 모순에 대하여 비판의식을 싹틔우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 현실성을 상실한 학문을 바로 잡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입각한 실제적인 사고를 위해서 새로운 학풍인 실학이 일어나고 있었다. 숙종 시대는 이러한 실학사상의 발생과 더불어 신문물이 유입되고 각 방면에서 진취적인 기상이 엿보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그동안 주자학의 관념성에 회의를 느끼고 실사구시의 학문적 경향을 보인 학자들이 사물과 자연에 대해 사실적인 묘사를 강조하게 된다.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묘사하기보다는 개개 자연의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하는 경향이 대두하게 되는 것이다.
▲ 목기를 깎는 모습을 그린 공재의 풍속화 ⓒ 녹우당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활동한 윤두서는 조선 양반사회에서 하층민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이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새로운 장르의 풍속화를 창조한 화가라 할 수 있다.
그가 그린 그림은 <자화상>으로 대표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과 함께 풍속화의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 중에 <채애도(採艾圖)>, <짚신짜기>, < 시차도(施車圖)>, <석공도>등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풍속화는 본격적인 조선시대의 풍속을 다룬다는 점 뿐만 아니라 농공(農工)과 서민생활을 그림의 소재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 출신이었던 윤두서가 이처럼 민중적인 것을 소재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공산기예(工産技藝)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가졌던 그의 실학성과 박학(博學)을 추구하는 집안의 학문경향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까지 회화에 나오는 인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선비와 신선 아니면 고작해야 미인 정도였던 것을 볼 때 이러한 서민을 중심으로 한 인물의 등장은 조선시대 회화사에 중요한 전환점 역할을 하였다.
공재에 이르러 나물 캐는 아낙네와 짚신 삼는 농부가 선비의 자리, 신선의 자리를 밀어내 당당히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재의 <짚신삼기>와 <나물캐기>는 조선 사회에서 서민의 위치가 전과 다르게 주목되고 있고, 그러한 시대조류를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진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공재가 보고 배웠다는 중국의 남종문인화의 그림을 엮은 '고씨화보' ⓒ 녹우당
공재는 기존의 전통적인 화법과 필법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자신의 그림과 글씨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글씨에 있어서는 옥동 이서와 함께 이른바 <동국진체>를 창안하였다. 그림에 있어서는 당시 새로이 대두하는 남종문인화를 수용하고 사실적 묘사를 강조하면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선구를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공재는 변혁기의 새로운 변화를 창조하였던 선구적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명확히 인식하면서 대담한 자기 결단과 자기 갱신으로 종래의 화가들은 생각지 못한 '속화(俗畵)'까지 그리면서 18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길을 열어갔다. 중국에서는 남종문인화의 성과를 목판본으로 담은 각종 화보(畵譜)가 발간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고씨화보>이다. 고씨화보는 명나라 때인 1603년에 고병(顧炳)이 편찬한 그림책으로 그 원명은 <고씨역대명공화보>이다.
공재는 1614년 공재의 처 증조부인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을 통해 <고씨화보>의 내용을 알았다고 한다. 미수 허목은 <고씨화보>에 실린 문징명 그림을 보고서 그림의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고씨화보>가 제작되고 수입된 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공재가 처음으로 이 화보를 통해 남종문인화라는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재는 화본을 무작정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자기화하고 대상을 직접 사생하며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사실주의의 극치 '자화상'
▲ 서양화법의 기법을 느끼게 하는 사실주의의 극치 공재 자화상 ⓒ 녹우당
공재의 그림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자화상'은 자화상 중 가장 빼어난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극 사실주의적인 그의 그림을 서양화법에 대한 이해와 시도로 보기도 한다. 공재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중시하였는데 그는 실학적인 학풍을 통해 사실주의에 입각한 회화의 세계를 열어간다.
공재의 회화는 철저한 사실주의 정신에 의해 그려졌으며 이는 현실을 직시하고 실용을 중시하였던 해남윤씨가의 학풍을 이어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재가 그린 여러 인물화 가운데 자화상은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한 인간의 외면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공재 자신의 내면적인 미묘한 정신세계가 훌륭하게 표출되어 있다. 볼륨 있는 얼굴, 움직이는 듯한 수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는 그의 정신세계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의 자화상은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윤두서가 평생 추구한 실득의 결과였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이처럼 실사에 비추어 증험하고자 하였던 그의 사생정신을 보여준 작품이자 서양화법을 실험한 작품이기도 하다. 자화상을 보면 얼굴부위를 정면으로 부각시켜 직접적인 인상을 강화시키고 얼굴의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윤곽석 부위에 선염(渲染)처리를 하였다. 이것은 서양화의 음영표현과 유사하여 서양화법의 영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말을 좋아한 공재의 마벽
▲ 유하백마도. 마벽이 있을만큼 공재는 말을 좋아하고 즐겨 그렸다. ⓒ 녹우당
공재의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은 대상이 된 것 중에 하나가 말 그림이다. 마치 말 애호가라도 되는 듯 여러 형태의 말 그림을 찾아 볼 수 있다. '공재공 행장'을 보면 그는 일찍부터 마벽(馬癖)을 갖고 있어 항상 준마를 길렀다고 하는데, 자제들이 교외나 먼 곳에 출입하더라도 말을 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공재가 멀리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겼으나 말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말을 빌려 타고 가야했다. 그가 여행 도중에 말의 주인을 물으니 말이 역마(驛馬)인줄 알게 되자 그 말을 즉시 돌려주고 걸어서 다녀왔을 만큼 말을 함부로 타지 않고 사사로이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재는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만큼 말의 모습을 그릴 때 한참이나 관찰한 후에 그 성질을 파악하여 그렸다고 한다. 말은 보통 무(武)를 상징하기 때문에 조선 사대부가에서 말을 사랑한다는 것은 독특한 취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특히 백마를 대상으로 한 것은 자신이 추구한 하나의 이상적 대상이기도 하였다.
공재는 말이 지닌 굳셈, 충직, 희생과 더불어 백마의 상서로움, 당당함과 의연한 풍모를 지닌 백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최고의 서화 비평가였던 남태응(南泰應, 1687~1740)은 공재의 말을 아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 중에 '유하백마도'를 보면 강변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하얀 말이 한 마리 서 있는데 말의 자태가 당당하고 기품 있게 잘 그려져 있어 이러한 모습을 잘 엿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오마이뉴스 정윤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