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사료로 본 corea, korea 연원"
구절구절 민족주체성이 묻어나는 글이라 관심이 간다.
그러나 아시아고려, 대륙조선 관점에서 좀 첨가하고 덧 붙어야 할 부분이 존재하기에 글쓴이가 주장하고자 하는 뜻을 손상치 않는 범위에서 아시아고려, 대륙조선과 관계되는 기록부분만 발췌 붉은 글씨로 보충하여 본다.
현재 반도사관이 아시아고려 대륙조선이란 실체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지금까지 감추고 눌러 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현실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실체를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아래 첨가 내용이 아시아고려와 대륙조선의 실체를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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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史料로 본 Corea, Korea 연원
[신동아 2009.4월 독자논단]
‘Corea’ 되찾아야 민족 주체성 회복
남한의 영문명은 ‘Republic of Korea’다.
북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표기한다.
남북한 모두 Korea라는 영문 국호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남북한 어느 쪽도 스스로 인정한 적 없다. Corea에서 Korea로 뒤바뀐 이유와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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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년 장 당빌의 지도에는 조선이 ‘Tchao Sien’과 ‘Corea’로 함께 표기돼 있다.
필자는 1997년 ‘남과 북의 통일방안 비교고찰’이라는 글에서 ‘코리아 연방공화국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 방안 중 하나로 우리의 국호를 조선도, 대한민국도 아닌 한글과 영어 공히 ‘코리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2002년 6월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한일월드컵대회 당시 ‘오-필승 꼬레아’의 함성을 듣고, 또 경기장 가득히 ‘Corea’라 쓰여진 피켓과 플래카드가 휘날리는 것을 보고 새삼 필자가 제안했던 ‘코리아’는 ‘꼬레아’로, ‘Korea’는 ‘Corea’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언제부터 Corea 또는 Korea로 서방세계에서 불리고 또 쓰여 졌던 것일까.
四季 뚜렷한 신라는 ‘이상향’
이슬람 문화 전문가 이희수 교수(한양대·문화인류학)가 쓴 ‘한·이슬람 교류사’에 따르면 847년(신라 문성왕 9)에 출간된 후르다드베(Ibn Khurdadbeh)의 ‘제 도로와 왕국 총람’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중국 저쪽에 산이 많은 ‘Shila’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고 물 맑고 공기가 좋아 한번 간 무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후르다드베 이외에도 9명의 아랍학자가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이 신라의 역사기록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로마형 유리, 카펫, 세공예술, 공후(악기), 사자춤, 가면극 등 신라의 유물 속에서 이슬람 문물의 유입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신라시대에는 이슬람계 사람 상당수가 수도 경주에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880년경에 나타난 색목인(서방인) 같은 ‘처용’이 바로 아리안계 무슬림으로 간주되고 있다. ‘처용가’는 처용과 신라여인과의 남녀관계를 읊은 노래다. 고려가 935년에 신라를 점령하고 통일을 이룬 후에는 아랍 상인들이 고려의 수도 개경 인근에 있는 예성강 포구 벽란도를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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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많고 금이 풍부한 곳은 과연 어딜까?
한반도는 작은 산은 많으나 그렇다고 결코 거대한 산이 많다고 할 수 없다.
산이 많다고 할 곳은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 티벳 일대이다.
그리고 금 역시 풍부한 곳이 못된다.
금이 풍부한 곳 (일본자료)
남아프리카공화국 341,485 (14.1%)
오스트레일리아 259,000 (10.7%)
아메리카 합중국 258,000 (10.6%)
중화 인민 공화국 215,000 (8.8%)
페루 173,219 (7.1%)
러시아 169,273 (7.0%)
캐나다 128,504 (5.3%)
우즈베키스탄 93,000 (3.8%)
인도네시아 92,936 (3.8%) (cipango 동쪽으로 뻗어져 있는 땅, 황금향이 많은 곳 Indies)
파푸아뉴기니 73,000 (3.0%)
가나 (2.0%)
(참고) 일본 8,021 (0.3%), 세계 합계 2,440,000kg
콜롬버스가 서인도제도를 인디즈(Indies)라고 착각 할 정도의 군도를 이룬 곳은 어디일까?
바로 인도네시아 자바해협이 아닐까? 그곳에 콜롬버스가 꿈꾸던 cipango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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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가 뚜렷한 곳을 한반도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난센스 이다.
지도그리드(GRID)를 보면 사계가 뚜렷하다고 여기는 한반도 위치가 북위33도에서 북위43도 사이라면 아시아 동서를 동시에 관찰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굳이 한반도만 국한 할 것이 아니라 위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시계를 넓혀 아랍권에서 빈번하게 왕래가 가능한 곳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남부 등 아래 제시한 지도에 표시된 북위33도에서 북위43도 사이지역을 감안하고 관찰하지 않으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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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다라 강과 아무다라 강(혹은 옥서스강)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다.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풀려고 한다면 반도사관을 무조건 추종하여 한반도에 대입하고 끼어 넣으려하지 말고 상식적인 면과 실현 가능성 쪽으로 냉철하게 판단하여 똑같은 우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랍상인들이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장사꾼이라면 시간도 경비라고 하였을 때 아랍본거지인 아라비아반도에서 측정거리가 한반도까지 직선거리로 8000㎞, 리(里)로 따진다면 20,000 리나 되는 머나먼 곳으로 장사하러 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한반도에 있는 예성강 포구라면 말이다.
아랍상인들이 본거지인 아라비아반도와 예성강포구가 지척 간에 두고 있지않으면 그렇듯 빈번하게 왕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다. 때문에 아랍 근거지인 아라비아반도와 중앙아시아 근처 어느 곳에 예성강 포구 벽란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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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 의하면 1024년(고려 현종15)과 그 다음해에 열라자, 하선 등 대식국(아랍) 상인 100여 명이 현종에게 공물을 바친 사실이 있다. 그 후 1040년(고려 정종 6)에도 보나합 일행이 수은, 용치, 점성향 등을 정종에게 바쳐 후대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라비아쪽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1154년(고려 예종 8)에 출간된 아랍의 저명한 지리학자 이드리시(Al-Idrisi)의 저서 ‘극지횡단 모험가의 산책’에서 확인된다. 이 책에 “Shila(당시는 고려)에 온 여행자들은 좋은 기후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열사의 지대에서 온 그들에게 사계가 뚜렷한 신라는 이상향(理想鄕)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몽골군이 이란(페르시아)을 정복하고 세운 일한제국(1256∼1353)의 의사이자 역사가 알딘(Rashid-al-Din, 1248∼1318)이 역사서인 ‘종합사’에서 처음으로 고려를 Kaoli로 표기했다. 그는 고려를 원나라의 1개성으로 분류하면서 Kaoli와 Kao Kauli(고구려)로 구성돼 있으며 임금을 왕이라 부르는 변방이라 했다. 이 저서는 1300년대 초에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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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후세에 기록을 수정하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식적이고 이치적인 수순에서 보아야 문제이다. 고려는 이미 국가 건국 시점부터 (960~1392) 연합국이었다.
高麗는 “유나이티드 코리아” 고려 연방 국가였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6399
근세소련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도 고려를 모방한 국가체제이다.
union 결합, 합동, 합병
united 연합[합체, 결합]
아랍인들이 말하는 Shilla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정말 중요한 대목이다.
shilla를 후에 송(宋)고려 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다 잘 알다시피 고려는 918년에 왕건태조가 궁예의 후고구려와 통일신라 그리고 후백제를 합체 병합한 후 개경(송악)에서 건국한 나라이다.
그러나 연합형태로 등장한 실제 고려는 960년부터이다.
바로 송나라 기원과 일치하는 것이다.
1276년 송나라가 몽고군에게 패망하는데 그때 몽고에게 고려가 침탈된 것이라 아니라 송이 침탈당하여 그 실권을 몽고에게 빼앗기고 패망한 것이다.
결국 고려는 그와 같은 대상에서 빠진 것이다.
왜냐하면 몽골고려이고 원고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도역사에는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지대에서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 그 시기가 1231년이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고려-몽고전쟁이다. 또한 몽고가 고려를 8차례나 침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도 고려는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몽전쟁이 발발된 불과 2년 후 1233년에 몽골군이 금나라의 수도 開封을 함락하였고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마지막 황제 애종(哀宗)을 송(宋)나라 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金)나라가 멸망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송은 몽골에 이용만 당하고 1276년 망한다.
고려를 대표하는 중앙정부가 바뀐 것이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나라 저나라 모두 공격할 수가 없다.
그러한 짓은 한마디로 기름을 지고 불 섶으로 들어가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몽골과 원나라가 고려보다 먼저 망한다는 사실이다.
고려는 처음부터 몽골공격 대상이 아닌 지존이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중원을 통제하고 있는 연합적 하늘의 황제 나라였기 때문이다.
서구와 일제가 띄우는 몽골은 고려연합에 소속된 중앙조정인 것이다.
신라를 종전처럼 한반도 동쪽 경상도지방 한정된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려역시 그 신라를 통합한 한반도 고려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사실을 밝힐 수가 없을 것이다.
신라의 유물 속에서 이슬람 문물의 유입흔적을 발견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유라시아와 아시아전역에 걸쳐 신라가 존재하였고 이슬람문물을 동질성으로 어느정도 받아들렸다고 인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한 나라가 고려에 모든 것을 양위하고 합체, 결합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고려의 실체를 어느 정도 상상을 할 수 있게 하는 점이다.
거란(kitai)고려, 요 고려, 금 고려, 송 고려, 원 고려 등...
[원본클릭1640]
다시 말해 고려는 유라시아에서 지금의 중국대륙(한반도포함)까지 포괄적으로 연합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데도 실제와 다른 것은 서구와 일제가 합작한 역사음모인 것이다.
서세는 인도 남부에 무질서하게 모여 동남아 해안과 대륙해안등지로 약탈과 살인 노략질등으로 생계하던 왜구무사집단들을 항해시대의 방해꾼으로 두지않고 잘 이용하여 대륙조선을 멸망케 하는 앞잡이로 활용하여 대륙조선을 마침내 붕괴시키고 만 것이다.
그 댓가로 서세들은 대륙조선의 영지인 열도를 왜구무사집단들에게 넘겨주고 신생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찍이 신라가 고려에게 모든 것을 양위 한 것처럼 고려역시 조선태조에게 양위하여 정통성을 잇게 하였던 대륙조선을 왜구는 서구세력과 합작하여 조선을 대륙사에서 몰아내고 지금의 열도를 양도받아 신생국 일본으로 만들면서 거대한 음모의 소산인 새로운 아시아역사를 태동케 하고 재편한 것이 지금의 세계사이고 동양사 인 것이다.
그러한 틀(아시아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대륙사에서 아예 삭제하였고 그 빈자리에 거란, 요, 금, 송, 원, 명, 청등으로 채우고 감쪽같이 한반도로 분리 하였던 것이다.
물론 완전하게 없애기가 힘들어 마지못해 고려와 조선을 한반도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고 보이며 한반도고려 한반도조선으로 편집한 것이 지금의 반도사이다. 몽골역사와 아시아역사 세계사 역시도 이러한 틀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수정되어 순수성을 잃어버린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키타이 서(書)
이 책에서 중국은 키타이(kitai) 즉 고려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 고려를 서술된 명칭만 하여도 무수히 많다.
Kao Kaul, Kaoli, Caule, Corai, Couray, Corey, Corei, Core, Corea, Coree...
무엇 때문일까?
너무나 거대하고 광범위하였으며 수많은 나라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무쿠리칸들의 계보와 영역이란 글에서 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그리고 문자왕 3대(392~512)걸쳐 이룩한 영토가 몽골인 역사 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한다고 한 것에서 그들이 우리의 역사를 몽골역사라고 주장하는 엉뚱함이 있지만 그들이 자랑으로 삼고 영웅으로 여기는 징기스칸이 13세기에 이룩한 영토영역보다 더 넓었다고 하는 것은 그냥 흘려버리기엔 새롭고 귀중한 역사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무쿠리칸(고구려 한)들의 계보와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5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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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해석을 반영이라도 하듯 고려는 원(元)의 부마국이 되어, 원 세조의 딸 후드르칼리 미쉬(제국공주)가 충렬왕비가 된다. 충렬왕비는 고려로 올 때 아랍인 시종 삼꼬(삼가)를 데리고 왔다. 이 삼꼬가 고려여인과 결혼해 귀화하자 왕은 장순용이라는 성명을 내리는데, 그가 덕수 장씨의 시조다.
이후 개경에는 아랍인이 많이 살게 돼 이슬람 사원과 회회(아랍)인 상점도 생겼다. 고려사 ‘악지’에 실린 가요 ‘쌍화점’은 만두가게 회회인과 고려여인과의 관계를 풍자한 자유분방한 노래다.
고려를 Kaoli로 표기한 두 번째 저서는 오스만투르크(터키)제국(1298∼1924)의 학자 아크바르(Ali Akhbar)가 1516년에 편찬한 중국여행기 ‘키타이서’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고 100여 년이 지난 후였지만 그는 고려가 중국의 12지역 중 하나로 상업이 발달하고 풍요로우며 상인들이 아랍인을 우대한다고 썼다.
중국 동쪽의 ‘Cauli’라는 나라
유럽인들은 고려에 대해 아랍인들보다 훨씬 뒤에 간접적으로 알게 됐다. 하지만 고려에 대한 기록을 출간해낸 것은 아랍보다 조금 빨랐다. 그 첫 기록은 로마교황 이노첸시오 4세가 1253년 몽골의 칸에게 보낸 프랑스 수도사 뤼브뤼크(G.de Rubruck)의 글이다. 그는 1255년(고려 고종 41)에 유럽으로 돌아와 쓴 여행기에서 “중국의 동편에 섬나라 ‘Caule’가 있다”고 기술했다.
두 번째 기록은 1271년, 이탈리아 베니스의 상인 폴로(Marco Polo)가 육로로 몽골에서 중국까지 24년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1295년(고려 충열왕 21)에 돌아와서 출간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라는 책이다. 그는 반란 기도를 평정하고 실권을 잡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에 있던 고려 사절에 대해 기술하면서 중국의 동편에 ‘Cauli’라는 나라가 있다고 적었다. 그가 이탈리아의 제노바감옥에서 루스티첼로에게 구술한 것을 적은 필사본 이후 첫 인쇄본은 180여 년 후인 1477년(조선 성종 8)에 독일어 번역본으로 나왔다. 그후 이 책은 각국의 언어로 출간돼 널리 읽혔다.
이 과정에서 각국의 언어 특성에 따라 고려가 Cauly, Kaoli, Kauli로 표기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럽인의 세계지리 인식은 전적으로 아랍인의 항해술이나 탐험자료와 연구성과에 의존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가지고 있던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유럽에 알려졌을 수 있으나 이는 확실치 않다. 또한 폴로의 여행기가 1500년대 후반에 조선 근해를 드나들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인에게 얼마만큼 알려졌는지도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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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유럽인과 고려가 왕성하던 때 유럽은 차이가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종교개혁(Reformation:1450-1650) 이전 역사에서 유럽인들에게 기대할 것은 없었다고 해야 옳을 성 싶다.
아마도 이와 같은 기록을 보더라도 아랍인들 보다 오히려 정보나 사실관계가 현저하게 뒤 떨어져 참고하고 자료로 삼을 것은 없었다고 정의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오히려 사실적인 면에서 아랍인들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 때 유럽인들 입장에서 바라 본 중국이란 개념과 중국을 과연 어디에 놓고 보았으며 동쪽(east)이라는 의미개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결코 한반도만을 국한하여 동쪽이라고 지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숨기고 싶은 역사가 많다.
그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중국도 그들에겐 막연한 동쪽일 순 없다.
그들이 바라 본 중국을 지금의 중국대륙을 지목한 것이란 짐작은 이제부터 하지 않는게 좋다.
굳이 그들이 동쪽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옆 동쪽일 수도 있고 그 동쪽에 중국이 있었으며 아시아 전역을 놓고 보면 동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면에서 아시아 서쪽 서아시아를 말한 것은 아닌지 되 새겨 볼 말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마르코 폴로가 실제 중국황제라고 하면서 대면한 인물도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아니라 고려 충렬왕일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선다.
충렬왕은 반도사관이 만든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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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했던 서양인들
폴로가 여행기를 쓴 이후 250여 년 동안 한반도에 관한 서양세계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 가마가 동방해로를 개척한 후 1513년엔 중국 광동에, 1542년에는 일본 히라도에, 또 네덜란드인들은 나가사키에 각각 교역지를 확보했다. 1548년부터는 그들의 항해일지에 일본의 북서쪽에 있는 섬 나라(조선)를 Corai, Couray, Corey, Corei, Core, Corea, Coree 등으로 표기했다. 조선 근해를 항해한 네덜란드인 존반 린쇼텐은 1596년에 출간한 항해기에 나가사키 북서편에 있는 나라를 ‘Insula de Core(인슐라 데 코레)’라 했고 지금은 ‘Chau Sien’이라고 한다고 썼다. 그때까지 서양인들은 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589년(조선 선조 16) 영국인 하클류트의 저서 ‘주요 항해로와 영국민의 발견’에 수록된 수도사들의 서한에는 조선의 남단이 ‘Cape Corea(케이프 코레아)’로 표기되어 있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3년)는 스페인 선교사 체스페데스가 일본인 천주교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고니시 유기나가 장군을 따라 조선에 와서 1년여를 머물렀던 적이 있다. 그를 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꼽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기록을 남긴 게 없다.
1627년(조선 인조 5)에는 3명의 네덜란드 선원이 표류했는데 당시 조선은 외방인이 들어오면 억류하고 송환하지 않는 쇄국정책을 썼다. 이들은 훈련도감에 배치돼 총포제작 등의 일을 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2명이 전사했고 생존한 존 벨테브레는 귀화해서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는 조선여자와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역시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1653년(조선 효종 4)에는 네덜란드인 헨드리크 하멜 일행을 태운 선박이 제주도 앞바다에서 난파했는데 일행 중 36명이 살아남았다. 이때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붉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박연이 통역으로 고국의 선원들과 만났다. 하멜 일행 8명이 조선 억류생활 13년 만에 일본으로 탈출한 후 쓴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landois)’가 1668년(조선 현종 9)에 출간되면서 드디어 조선은 서양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 책에서 하멜은 조선을 Coree(첫 번째 e 위에 악센트가 붙은 Corea의 불어식 표기)라고 썼다. 표류기는 그 후 각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는데 독일판본에 Corea와 Korea가 혼용된 것 외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판본에선 모두 C로 시작하는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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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e Corea?
한반도남단이라면 제주도를 말하는 것인데 일단 cape라고 하면 항로에서 중요한 위치가 되어야 하고 빈번하게 왕래가 가능하면서 일단 체류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어느 정도는 갖추어야 마땅하다.
서양인들이 cape corea 란 나라 이름을 붙였음에도 과연 그 당시 제주 남단이 그러하였는지 우리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반도역사에 보면 제주도는 죄인들의 귀양지로 알려져 있을뿐이다.
케이프타운은 다 알다시피 아프리카 남단 남아프리가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1652년에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동남아시아로 항행하는 배의 보급 기지로서 식민을 시작한 케이프식민지에 유래한다. 이 케이프 식민지에서 Ceylon섬을 경유해 동남아시아로 항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cape라 하지 않겠는가?
1589년이라면 63년 전인데 cape라고 한 제주도에 지금 무엇이 남아있는가?
그들이 cape corea 라고 지정한 지역이라면 싱가포르 또는 홍콩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고려와 한반도조선을 만들기 위한 서구명칭 갇다 붙이기이다.
실제 Cape Corea가 지금 한반도 제주라고 한다면 벌써 홍콩정도 수준의 항구도시가 제주도에 존재하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다.
하멜을 말하자면 할 말이 많다.
그의 저서로 인하여 조선은 졸지에 원시인들이 사는 형평없는 나라가 되었으며 우리가 왜구라고 하여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던 일본을 한껏 미화하여 문명국취급 한 것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표류한 위치가 대륙이 아니라 한반도란 사실을 각인시키는데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 결과 서세와 일제가 합작하여 만든 반도사관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가 표류하여 익사직전 어쨌던 목숨을 구하고 생명을 이어가게 하여 나중에 떼돈을 벌게 하였음에도 조선을 필요이상으로 폄하하고 원시인 취급을 하였던 것은 모함을 넘어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였다고 하여도 무엇인가 음모와 불의에 타협한 기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신빙성자체가 상당히 떨어지는 기록이라고 판단되지만 불행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찌 그를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정작 하멜은 정상적으로 그리고 사실대로 조선을 흠모하면서 서술하고 그렸지만 후세 일제와 서구세력들의 거대한 음모에 희생물이 되었다면 그의 본뜻과 상관없이 내용이 수정되고 바뀌치기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던 그 당시 유럽에서 너도나도 배를 타고 나가면 일확천금이나 숨겨진 보물뿐만 아니라 한밑천 크게 축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넘쳐나던 항해시대였기 때문에 시정잡배들이 모의하여 한탕주의식 물욕으로 생성된 항해기록이 금전과 이해관계가 얽혀 타협하고 그것을 이용한 음모세력들이 지금의 잘못된 역사가 되게 하여 몇 백 년이 흐른 지금 결국 진실 되지 못한 역사가 난무하고 정사처럼 고정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다.
고로 하멜은 반도사 생성을 위한 확실한 증인으로 이용당했다고 보아야 할 일이다.
아니 어쩌면 가공된 인물일 수도 있다.
마르코 폴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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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a의 연원과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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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년 마티누스 마티니가 그린 지도. 섬이 아닌 반도에, 이름은 COREA로 표기돼 있다.
고려를 뤼브뤼크가 Caule로, 폴로가 Cauli로 표기한 것은 몽골-중국인들이 한문으로 쓴 高麗를 ‘꼬우리’ ‘까오리’로 발음한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들은 그 발음에 가장 가까운 라틴어계 불어로 그렇게 쓴 것이다.
알딘과 아크바르가 쓴 Kaoli는 라틴어를 이해하는 오늘날의 중국인이 고려를 Gaoli로 쓰는 것에 더 가까운 표기이다. 조선 근해를 드나들던 유럽인들이 Corai, Corey, Coray로 표기한 것은 일본인들이 고려를 ‘고라이’라고 발음한 데서 비롯했다.
1500년대 후반은 고려왕조가 끝나고 조선이 개국한 지 150여 년이 지난 뒤인데도 일본인들이 여전히 조선을 ‘고라이’로 불러온 것과도 무관치 않다. 이는 신라시대가 끝나고 400년이 지나서도 아랍세계가 고려를 Shila로 쓴 것과 비슷한 이치이나 학자들이 옛 저서를 그대로 답습한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아랍이 조선을 고려로 지칭하지 않고 ‘Chausien’이라고 쓴 것은 조선에 대해 좀더 알게 된 유럽인들이 중국 사람으로부터 들은 ‘차우시엔’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다.
한편 ‘Chosen’은 일본인들이 한문으로 쓴 朝鮮을 ‘조센’으로 발음하는 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Corea로 굳어져 있었다. Corai, Corey, Corei 또는 Core 등으로 표기되던 것이 Corea로 끝에 ‘아(a)’가 붙고, 불어에서는 e가 붙어 Coree로 정착됐다. 라틴어에서 고유명사에 접미사로 a 또는 ia가 붙으면 그 땅 또는 나라를 의미하며 여성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고려라고 알려진 지역이 하나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돼 첫 글자가 C로 시작되는 여러 표기에 a가 붙어 Corea(고려국)로 정착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는 옛 진(晋)에서 유래된 중국의 영문명 지나(Chin-a), 몽골(Mongol-ia), 아르헨티나
(Argentin-a) 등이 불어에서는 Chine, Mongolie 등으로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국, 미국, 독일은 앞서 표기한 나라의 사례를 따라 Corea로 쓰다가 180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에 영어권과 독일어권 및 러시아권 일부에서 Korea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영어나 독어, 노어에는 ㄱ,ㄲ에 가까운 자음이 K이기 때문에 Korea로 쓰게 됐던 것. 중국인 발음에 따라 쓴 뤼브뤼크나 폴로의 Caule, Cauli 또는 알딘과 아크바르의 Kaoli가 어떻게 Corea로 정착되는 데 기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유럽인들이 일본인 발음을 따라 뒤늦게 쓴 Corai, Corey, Corei, Core 등이 Corea에 더 가까워 보이기는 하나 그 유래를 정확하게 짚어내기가 힘들다.
결국 이들 표기에 대한 상관관계가 명확히 밝혀져야겠지만 Corea는 유럽인들이 쓰기 시작한 Corai, Corei, Core 가 변형되고 변화되면서 정착됐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서양 지도에 쓰인 Corea와 Korea
우리나라가 표시된 최초의 세계지도는 이슬람 지리학자 이드리시가 1154년(고려 예종 8)에 만든 지도다. 그는 신라를 중국 동남부 옆에 있는 6개의 섬들로 그려놓았다. 그 후 400여 년의 공백기를 지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인이 조선 근해를 드나들던 1500년대 후반부터 다시 조선이 서양 지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남가주대학 동아시아 도서관 소장의 옛 지도 172편, 박대헌의 ‘서양인이 본 조선’에 수록된 11편, 한국학 학자 헤니 사브나이에의 ‘서양지도에 나온 한국’ 144편 등 총 327편의 지도 중 우리나라 표기가 돼 있고 출간년도와 나라가 기재된 226편을 분석한 결과다.
1500년대 말과 1600년대의 지도
1595∼96년(조선 선조 28∼29)에 출간된 지도 4편은 모두 우리나라를 ‘바로 세운 홍당무’ 모양의 섬으로 그렸다. 네덜란드인 텍세이라, 메텔루스, 오텔리우스의 지도에는 ‘Corea Insula’로, 랭그렌의 지도에는 ‘Ilha de Corea’라는 섬이라고 명기돼 있다. 서양인들이 조선을 섬으로 그리고 있을 때 우리 선조들의 지도학 수준은 어땠을까.
일찍이 중국을 드나들며 외부세계를 알게 된 조선인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李?) 등이 1402년에 만든 세계지도를 1470년과 1500년대 초에 모사한 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다. 이는 동방에서는 유일하면서 가장 오래된 지도인데 이슬람 지도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포함한 뛰어난 수준의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이 지도에 조선은 커다란 반도로 잘 그려졌다. 이 지도를 참고로 해서 1555년 나홍선의 ‘광여도’가 나왔고, 다시 중국에서 선교하던 수도사 마테오 리치가 이 지도들을 보고 1602년에 ‘곤여만국전도’를 출간했다. 1600년대의 지도는 모두 27편인데 그중 15편은 조선을 섬으로, 10편은 반도로 그렸다. 나머지는 불명한 것들이다. 1606년(조선 선조 39) 네덜란드인 혼디우스가 만든 지도는 조선을 섬으로 그리고 Corea로 표기했는데 그 옆에 “본래는 Caoli로, 일본인은 Corai로 부른다”고 썼다.
조선이 반도로 그려진 최초의 지도는 1655년(조선 효종 6) 네덜란드인 신부 마티누스 마티니가 만든 중국지도첩이다. 리치 신부의 특별초청으로 당시 마르티니가 중국에 와서 만든 것인데 지리학에 조예가 깊던 그도 조선을 Corea Insula로 썼다. 우리가 엄연히 반도로 인식하고 있는 조선이 오랫동안 아랍인들과 서양인들의 지도에 섬으로 그려졌던 것은 한편 이해가 간다. 우리나라는 백두산 꼭대기의 작은 부분만 대륙과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 넓은 지역이 서와 동으로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인해 대륙과 분리돼 있다. 그래서 홍당무 끝이 대륙에 닿을 듯 말 듯하게 그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1670년을 끝으로 우리나라는 모든 지도에 섬이 아니라 반도로 그려졌다.
27편의 지도에 쓰인 이름은 Corea 12편, Corai 6편, Corey 3편, Corei, Coray, Coria, Cory가 각 1편으로 Corea가 월등히 많았다. 이 시기가 서양인들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발견하기 시작한 때이므로 여러 이름으로 쓰였다고 본다. 대부분이 일본발음을 따른 Corai 계통이지만 Caoli 같은 중국계 발음을 따른 것도 3편이나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모두 C로 시작한 것이 주목되는 부분이다.
1700년대와 1800년대의 지도
1700년대의 지도는 모두 140편으로 표기는 Corea 58편, Coree 41편, Coree, Kaoli, Koue를 혼용한 것 6편, Corea, Caoli, Koue를 같이 쓴 것 3편, Corea와 Chausien, Caoli와 Kauli를 혼용한 것이 각 3편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24편은 Korea로 표기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우선 1500∼1600년대 이름에 따라 붙던 Insula(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 지도에 Caoli, Kaoli, Kauli 같은 표기가 나타난 것은 알딘이나 폴로의 저서에 대해 알게 되었거나 아니면 Chausien이 쓰인 것처럼 중국인으로부터 고려 발음을 들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고려나 조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1735∼37년(조선 영조 11∼13)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이 중국의 ‘황여전람도’를 참고로 작성한 조선지도는 조선반도 전체가 처음으로 한 장의 독립된 지도로 그려졌다. 이후 이 지도는 150여 년간 별다른 변화 없이 복사되었다. 특기할 일은 1743년(조선 영조 19) 영국인 토머스 키친에 의해 처음으로 Korea로 표기된 지도가 나왔다는 것. 이때부터 1799년까지 16명의 저자가 24편의 지도에 Korea를 썼다. 지도 출간국별로 보면 영국은 총 70편 중 20편, 미국은 5편 중 3편 그리고 독일은 1편에서 Korea로 기록했다. 49편을 출간한 프랑스는 Coree로만 썼다.
또 다른 추세는 우리나라 이름이 1781년부터 Corea, Coree 아니면 Korea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Corea나 Coree등 C로 표기된 지도는 총 171편 중 110편이었고 Korea는 24편이다. 1800년대의 지도는 총 55편이었는데 Corea로 쓰인 것이 41편, Coree 7편, Korea 4편, Corie 1편 그리고 Korea와 Tschao Sian이 같이 쓰인 지도가 2편이다. C로 쓰인 지도가 49편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도 출간국으로 보면 프랑스는 8편이고 영국과 미국이 55편 중 42편을 출간했는데도 단지 4편에만 Korea로 기록돼 있다. 미국이 출간한 지도 20편중에서는 단 2편만 Korea로 쓰고 나머지 18편은 Corea로 쓴 것 또한 흥미로운 대목이다.
지도 출간국을 시대별로 보면 1500∼1600년대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1700년대에는 영국과 프랑스, 1800년대에는 영국과 미국이 대부분의 지도를 출간했다. 이들 지도에 한반도는 처음부터 Corea나 Coree 등 C로 시작되었고 Korea는 총 226편 중 28편에 불과했다.
1787년(조선 정조 11) 프랑스 탐험가 페루스가 조선(Coree)의 해안을 탐사한 이래 유럽 각국이 잇따라 조선에 통상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또 선교 목적으로 조선에 들어온 서양 선교사도 점차 많아졌다. 개방을 거부하는 조선에 서양인들이 강제 상륙한 사건 중 두드러진 것은 1866년(조선 고종 3) 평양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청하다 격침된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다. 당시 사건에 대한 미국 측 기록에는 조선이 Corea로, 때로는 Korea나 Chosen으로 쓰였다. 같은 해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40일간이나 점령하고 문화재(규장각 도서 포함)와 금은괴를 약탈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는데, 프랑스측 기록에는 조선이 Coree로 표기됐다. 1871년 미국은 셔먼호 사건에 대한 응징과 조선에 개항을 압박하기 위해 강화도에 포격을 하고 상륙해서 조선인 350여 명을 살해한 신미양요를 ‘Corean War’라고 표기했다. 이런 일련의 사태 이후 조선은 1876년 외부세계에 개항을 허락했다. 그 후 서양인들의 항해기, 여행기 등 조선에 대한 저서가 본격 출간되기 시작했다.
세계대전 전후 Korea 사용국 늘어
서지학자 박대헌씨의 ‘서양인이 본 조선’이라는 서지에 따르면 1668∼1945년 사이에 서양에서 발간된 조선관련 서적은 200여 권. 그 중 제목에 Corea, Coree, Korea 등의 명칭이 들어간 책은 106권이었다. 1668년의 ‘하멜표류기’로부터 1804년 영국인 브로우튼(W. R. Broughton)이 쓴 ‘북태평양 항해의 발견’까지 136년 동안 나온 저서 중 조선을 언급한 것은 총 6권인데 저서의 내용에는 Coree가 5권에, Corea가 1권에 쓰였지만 책제목에 명칭이 안 쓰였기 때문에 이번 분석대상에서는 제외됐다. 1817∼99년까지의 82년 사이에는 30권, 1900∼45년까지 45년 사이에는 76권의 책이 나온 것으로 조사됐고, 1900년대에는 1800년대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기간에 두 배 이상의 조선 관련 저서가 나온 것으로 분석됐다.
1800년대 저서 30권 중 Corea나 Coree로 표기된 것은 20권, Korea 9권, Choson은 1권이었던 반면, 1900년대 저서 76권 중 Corea는 1권, Coree 7권, Chosen 3권, 그리고 Korea가 65권으로 완전히 뒤바뀐 현상을 보였다. 이에 대해서는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이 한반도 근대사에 깊이 관여하고 또 1, 2차 세계대전 전후에 미국과 독일의 대두로 인해 Korea가 더 많이 쓰여 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 시기의 저서 중 가장 널리 읽힌 것은 1882년 미국 출신 목사이며 동양학자인 그리피스의 ‘Corea, the Hermit Nation’(꼬레아, 은둔의 나라)과 1886년 미국인 외교관 로웰의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조선: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며 특히 후자에서 처음으로 Korea라는 표현이 나왔다. 1900년대에 출간된 영어와 독어권 책들은 거의 모두 Korea로 썼다. Daihan(대한)이라는 표기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16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우리나라를 일컬어 대부분 Corea나 Coree로 썼고 Korea라는 표기는 1800년대말 미국의 일반사회에서부터 시작해 1900년대에 거의 공식화됐던 것 같다.
필자는 국제외교적 차원에서 조선이 공식적으로 어떻게 표기돼왔고 또 어떻게 변이해갔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조선이 외국과 체결한 첫 번째 외교문서인 1876년 강화도 조·일수호조규를 비롯해 1910년 일본에 병합되고 1945년 해방되기까지 조선과 대한정부가 맺은 모든 조약과 각국 공·영사관과 교환한 문서, 기타 자료 등을 섭렵했다.
조선시대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를 비롯해 일본과 맺은 여러 조약들에 서양어문은 없다. 서방국가와는 1882년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서명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여기에는 조선이 Corea로 표기됐다. 조약의 내용에는 Kingdom of Corea와 Chosen이 혼용돼 있는데 조선이 서양어로 Corea로 쓰여진 최초의 공식 외교문서인 셈이다.
미국공사관은 1885년까지는 Corea를 쓰다가 그 후 Korea와 Corea를 번갈아 썼다. 1891년 알렌 공사가 Korea로 쓰기 시작한 후 1905년 철수할 때까지 그대로 사용했다.
다음해 맺어진 조·영조약에도 대조선국을 Corea로 표기했다. 영국 영사관은 한때 조선을 Chosen이라 쓰지 않고 Corea로 쓰는 것을 조선정부로부터 승인받은 기록이 있으며 1905년 철수할 때까지 Corea로 썼다.
1883년에 체결한 조·독조약의 영문본에는 Corea로 되어 있고 독일어 원문에서는 Korea로 썼다.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연합왕국과 체결한 조약은 제목에 선 Korea로 표기하고 조약내용에는 Corea로 표기했다. 1884년에 이탈리아와 체결한 조약은 모두 Corea로 썼고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의 노문 원문 외에 영어번역본에는 조선국 대군주를 King of Corea로 표기했다. 1886년 프랑스와 체결한 조약과 스위스와 맺은 조약에서도 Coree가 쓰였으며 오늘날도 이들 나라에선 대한민국을 Coree로 쓰고 있다.
미국과 수교한 다음해 갓 쓰고 두루마기 입은 채 당당하게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報聘使) 일행(민영익)을 미국은 Tah Chosun(대조선) 정부를 대표하는 Corea의 전권공사며 특사라고 표기했다. 미국의 서울주재 공사관은 ‘Legation of US, Seoul, Corea’로, 공사는 ‘US Minister to Corea’로 썼다. 영국 총영사관은 Consul General in Corea로, 독일 영사관은 독일어로 Konsulat fur Korea로 썼지만 영문으로는 Corea로 썼다.
1894년에는 청·일전쟁의 전운이 드리우자 서울 주재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공사가 공동으로 청국과 일본에 편지를 보냈는데 여기에 조선을 Korea로 표기했다. 기록들을 개괄해보면 조선시대에 Choson이라는 명칭은 없었고 공식적으로는 Corea로 쓰였다.
대한(제국) 시대
1897년 조선정부가 국호를 대한으로 개칭한다는 것을 각국 공사관에 한문으로 통보했다. 이에 대한 각국의 답신을 보면 조선의 국호가 ‘Taihan(대한)’ 또는 ‘Daihan(대한)’으로 변경된 것을 인지한다면서도 미국은 여전히 Korea로 표기했고, 영국은 Corea로, 독일은 Korea로 사용했다.
미국에 망명해 살다 귀국한 서재필의 ‘독립신문’ 영어판 1897년 10월12일자에는 대한국 황제 고종의 즉위식에 즈음해 ‘The Korean Empire’라는 글이 실렸다. 영국측 외교문서인 제1, 2차 영·일동맹(1902, 1905년)에는 ‘Empire of Corea’로 쓰였다. 대한시대의 어느 문서에도 Empire of Daihan이나 Great Han Empire란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인접국 청(중국)과는 1899년에야 통상조약을 맺었는데 조약서에 Korea로 썼고 대한국 대황제를 Emperor of Korea로 표기했다. 그러나 그 후에 맺은 여타 조약에서는 Corea로 쓰였다. 1901년에는 벨기에와, 1902년에는 덴마크와 조약을 맺었는데 프랑스어를 쓴 원문은 물론 Coree로 썼다. 1903년 제네바조약 가입에 관한 사항을 일본에 알리는 문서와 1906년 한국의 지위에 관한 문서도 프랑스어로 쓰였는데 이때도 Coree였다.
1905년은 대한국 역사에 뼈아픈 해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 강탈야욕을 노골화하자 그해 7월16일 고종황제는 밀사 윤병구와 이승만을 미국에 보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했다. 이 청원서에 Korea로 썼다. 그해 7월29일, 일본이 대한을 지배하는 것을 미국이 동의한 일·미간 비밀협정(가쓰라-태프트조약)에도 대한을 Korea로 표기했다. 일본은 1905년 한일협상과 1907년 한·일 신협약을 맺은 사실을 9개 관련 국가에 통고하였는데, 그 문서에는 두 번 다 Corea로 표기했다. 1910년 8월22일 일본은 ‘조선병합에 관한 선언’을 일문으로 만들고 그 영역문에서 Corea 대신 조선을 Korea로 표기해 세계 여러 나라에 통고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총독부는 이때부터 각국 영사관과 교환한 문서에서 한국을 Chosen으로 표기했다.
일제시대와 해방 후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선언서에는
‘Korean Independence’라 표기돼 있다. 임시정부의 영어명칭은 상대국과 때에 따라
‘Provisional Government of Corea’나 ‘the Republic of Korea’로 쓰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이 융성함에 따라 불어가 국제어로 많이 쓰이던 것이 영어로 바뀌면서 Korea가 더 많이 쓰이는 경향을 보였다. 해방후, 대한민국인 남측도 Republic of Korea,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북측도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로 다같이 Korea를 쓰게 된다.
남과 북은 1991년 UN에 가입했다. UN에서 남과 북은 ROK와 DPRK로 약칭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자신은 국호의 외국어 표기에 대한 성찰 없이 외부 세계의 추세에 따라 남과 북이 모두 Korea를 쓰고 있다.
역사적으로 외부세계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던 고려의 위상에 힘입어 서방세계가 우리나라를 Corea로 부르고 세계가 처음부터 그렇게 사용해왔다.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도 외국과 체결한 외교문서에서 일관되게 Corea로 표기했다. 자의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바꾼 후에도 국제 칭호는 Corea를 썼다.
부드럽고 품위 있는 Corea
그러던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면서 Corea 대신 Korea로 쓰게 됐다. 우리가 Corea로 불렸을 때는 우리는 줄곧 한 나라였고 Korea로 불린 이후에는 분단돼 반목하며 지내왔다. 2000년 6월15일 역사적인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의 민족성원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주인인 우리끼리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제야말로 통일을 지향하며 민족자존과 주체성을 회복한다는 대명제 아래 그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Corea를 되찾아서 새 시대 새 나라에 걸맞은 국제어 이름으로 써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Korea는 ‘리’에 악센트를 넣어 ‘코리어’로 발음해야 한다. 이는 우리 언어 습성과도 다르기 때문에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반면 Corea는 ‘꼬레아’로 우리 언어 습성대로 자연스럽게 발음된다. Korea는 딱딱해 보이나 Corea는 부드럽고 품위마저 느껴진다. 또 알파벳 순서로 보면 C의 Corea는 K의 Korea보다 훨씬 앞에 선다. Corea를 되찾아 쓴다면 Corea로 쓰고 있는 라틴어권과 같이하게 되고 Coree로 쓰는 불어권과도 C로 통일되는 장점도 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그날이 오면 어차피 남과 북이 뜻을 같이해 잠정적이나마 정해야 할 나라 이름이기도 하다. 10여 년 전 남북이 한반도 단일기(통일기)를 합의해냈듯이 Corea 되찾기를 같이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吳 寅 東
● 황해도 옹진 출생
● 가톨릭대 의대 졸업
● 미국 정형외과 전문의 수료
● 하버드 의대 교수, MIT 생체공학 강사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및 고문
● Korea2000 연구위원 및 대표
“오- 필승 꼬레아-Corea”의 함성이 우리를 감격케 한 것은 우리 모두가 꼬레아-Corea의 청감과 시감에 간직되어 있는 고귀한 뜻을 예감한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남북의 문화 예술 학술 체육행사에서, 올림픽경기 입장식에서,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한반도 단일기(통일기)가 펄럭이고 그 허허한 깃발, 한반도 지도 밑에 언젠가는 남북이 동의해서 붙여야 할 나라 이름. 그 이름이 ‘Corea’가 되면 어떨까.
글: 오인동 의사, Korea2000 위원
발행일: 2003 년 11 월 01 일 (통권 530 호)
쪽수: 346 ~ 357 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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