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군 60년>
①빈손에서 선진 정예강군으로
[연합뉴스] 2008년 09월 28일(일) 오전 08:01
<※편집자주 = 국군이 10월1일 건군 60주년을 맞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전차와 전투기 한대 없었던 국군은 1948년 건군 이후 60년이 지난 현재 첨단무기로 무장한 선진 정예 강군으로 탈바꿈해 세계 평화유지를 위한 역할 확대방안을 검토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연합뉴스는 우리 군의 현재 모습을 조망해보는 기획특집으로 빈손에서 선진 정예강군으로, 막강한 무기체계, 의(衣).식(食).봉급체계 변천사, 육. 해. 공군. 해병대 名將 등을 마련해 송고합니다.>
선진 정예군으로 '우뚝'..세계 평화임무 수행
베트남전 이후 40여년 파병역사 간직
(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1948년 창설 당시 거의 빈손으로 출발한 것과 다름없었던 국군은 60년 만에 국방비 지출 규모에서 세계 9위의 선진 정예 강군으로 우뚝 섰다.
5만여 명의 병력과 일본군이 두고 간 99식 소총 등 재래식 병기를 기반으로 탄생한 국군은 6.25전쟁과 휴전 뒤에도 계속된 북한의 도발, 베트남전 참전, 무장간첩, 서해교전 등 온갖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고 정예 68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국군의 뿌리는 1940년 9월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군과 연합해 미얀마에서 심리전 활동을 펼쳤던 광복군은 미국 전략사무국(OSS)과 협약을 맺고 특수공작 훈련을 받은 뒤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이 계획은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광복군은 이후 1946년 6월 미군정에 의해 해체됐으나 일부가 같은 해 6월15일 창설된 조선경비대 요원으로 참여해 대한민국 건군에 기여했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국군도 새롭게 탄생했다.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방부가 설치되고 이어 국군조직법과 국방부 직제령이 공포됨에 따라 정식으로 통위부가 국방부로 개칭됐다. 이어 조선경비대와 조선해안경비대가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편입, 법제화돼 국군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그러나 소총 한 정, 탄환 한 발까지도 미국의 원조 없이는 확보할 수 없었던 국군의 현실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1949년 국민 성금으로 구입했던 당시 해군 최대 규모의 전투함 백두산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연안 경비용으로 운용했던 450톤급의 PC-461 초계정이었다.
1949년 창설된 공군은 6.25전쟁 발발 전까지 단 한 대의 전투기도 보유하지 못했고 육군 역시 105mm 수준의 야포 정도만 확보했을 뿐이었다. 전차는 전무했다. 그러나 6.25전쟁은 이런 우리 군에 엄청난 시련인 동시에 성장의 기회였다. 북한 인민군은 우리 군의 3배가 넘는 병력과 소련제 탱크 등 월등한 장비를 앞세워 1950년 6월25일 새벽 38선을 넘어 침공했다. 군은 1953년 휴전 때까지 30만여 명의 인명피해를 겪으면서도 영토와 자유를 수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했다.
휴전협정으로 잠정적 평화가 찾아왔으나 휴전선을 넘나드는 각종 도발과 병력증강, 신무기 도입, 무장간첩 남파 등 대남 적화야욕을 포기하지 않는 북한군과 대치하며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긴장의 연속선상에서 우리 군은 수없는 도전과 응전을 되풀이해왔다. 이런 와중에도 군은 1965년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1990년대부터는 소말리아 등에 유엔평화유지군(PKO)을 파견하기 시작해 외국으로부터 '꾸리(한국) 넘버 원', '평화유지활동의 본보기'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64년 9월11일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과 태권도 교관에 이어 1965년 3월 비둘기부대, 1965년 10월 청룡부대의 베트남 파병을 거쳐 2004년 자이툰부대와 다이만부대의 이라크.쿠웨이트, 2007년 동명부대의 레바논 파병까지 연결되면서 40여 년의 파병역사를 가지게 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군 장병이 파병된 곳이 연평균 5개국을 넘어설 정도로 분쟁지 평화유지가 우리 군의 중요 임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는 장병의 모습은 건군 60주년을 맞은 우리 군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선진 군대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우리 군은 1994년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한 데 이어 2012년 예정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이양에 대비하기 위해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전작권 전환을 위한 이행계획도 예정대로 추진돼 우리 군이 주도하는 한미 합동군사연습도 이뤄지고 있다.
을지포커스렌즈연습(UFL)에서 이름을 바꿔 올해 처음 실시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연습은 우리 군이 주도하고 미군이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으며 이런 방식의 연습은 전작권을 환수하는 2012년 초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국군의 위상은 연간 국방비 지출 규모 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방백서에 따르면 2005년 10월 기준 한국의 연간 국방비 지출은 157억 달러로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독일, 중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9위 수준이다.
군 관계자는 "그간 일부 선배들의 정치군인화, 쿠데타 등 어두운 역사를 딛고 순수 직업군인으로 환골탈태했다"며 "소총 한 정조차 외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우리 군이 60년 만에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선진 정예 강군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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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막강한 무기체계 갖춰
[연합뉴스] 2008년 09월 28일(일) 오전 08:01
이지스함ㆍF-15K전투기ㆍ차기전차 등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기자 = 우리 군은 건군 6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최첨단 무기체계를 갖춘 막강한 군대로 눈부신 변화를 이뤘다.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시절 일제가 남기고 간 38.99식 소총과 M1 소총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던 우리 군이 꿈의 구축함으로 불리는 이지스함과 동북아 최강의 F-15K 전투기, 차기전차(K-2) 등 첨단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작년 1월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KDX-Ⅲ.7천600t급)을 진수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5번째로 이지스함을 보유한 국가로 기록됐다. 2012년까지 이지스 구축함을 2척 더 확보할 계획이어서 해군의 작전반경과 작전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예정이다.
세종대왕함은 국내에서 개발한 함대함 유도탄으로 150km에서 적 수상함을 공격할 수 있고 5인치 함포로 25km에서 적 함정을 격파할 수 있다. 장거리 대잠수함 어뢰와 경어뢰를 탑재, 수십 km 거리의 함정과 잠수함도 공격할 수 있다. 특히 5인치 함포로 120km 떨어진 육상의 적 핵심시설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육. 해. 공군의 통합작전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함에 장착된 다기능 위상배열 레이더(SPY-1D)는 1천54km 밖의 비행물체 900개까지를 동시에 탐지, 추적하면서 17개를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함은 길이 166m, 폭 21m에 최대 30노트(55.5km)의 속도를 낼 수 있다. 함대공. 대유도탄방어. 함대함 유도탄과 장거리 대잠수함 어뢰, 경어뢰 등 근접방어무기체계인 골키퍼(Goal Keeper)를 장착하고 있다. 대잠수함 및 구조용 헬기 2대가 탑재된다.
아시아에서 가장 큰 수송. 상륙함인 독도함(1만8천800t급)도 우리 군의 자랑거리다.
헬기나 수직 이착륙기 20여대를 탑재할 수 있고 상륙작전 때는 헬기 7대와 전차 6대, 상륙돌격장갑차 7대, 트럭 10대, 야포 3문, 고속 상륙정 2척, 상륙군 700명을 태우고 작전을 수행한다.
유사시 지상. 공중. 해상 통합군의 지휘함으로 활용하기 위해 지휘통제장치를 비롯, 미사일 방어용 RAM 대함 유도탄 방어 미사일과 대공포인 골키퍼도 장착되어 있다. 공군은 F-15K와 적의 동굴진지를 격파할 수 있는 JDAM(정밀유도폭탄)을 갖추고 있다.
2011~2012년에는 360도 전방위 감시가 가능해 공중, 해상, 지상으로 침투하는 적의 어떤 항공기와 함정도 탐지할 수 있는 공중조기경보통제기(AWACS:일명 Peace Eye) 4대가 도입된다. F-15K는 AWACS의 지원을 받으면 자신의 레이더 탐지범위 밖의 적기에도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게 된다.
F-15K에 장착될 최신 장거리 정밀타격용 공대지 유도탄(JASSM) 수백여 기도 도입된다. 최대사거리 400여km인 JASSM은 미사일 탄두에 목표물 자동 위치 식별. 탐지 기능을 갖춘 일종의 순항미사일로, 유사시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기지를 타격할 수 있다.
육군은 차기전차(K-2)와 K-9 자주포 등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다.
작년에 개발된 K-2는 양산 준비기간을 거쳐 2011년에 실전 배치될 예정이며 K-9 자주포는 이미 전력화되어 있고 터키 등에도 수출되고 있다. K-2는 깊이 4.1m의 물속에서도 기동할 수 있는 전차다. 포탑까지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 전차는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처음 개발했다. 올해 4억 달러의 기술료를 받고 K-2 전차 기술이 터키에 이전됐다.
1999년 생산이 시작된 K-9 자주포는 최대 사거리 40km로 분당 2발을 지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으며 북한의 170mm 자주포를 격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K-9 자주포와 K-2 전차는 한국이 개발한 세계적인 '명품무기'로 꼽히고 있다. 이와 함께 일제가 남기고 간 38.99식 소총과 M1 소총은 M16과 K-2 소총으로 각각 대체됐다.
적진 상공에서 터지는 공중폭발탄을 발사할 수 있는 '차기 복합형 소총'(차기소총)이 내년부터 야전부대에 실전 배치되면 이들 소총도 사라질 전망이다. 이런 유형의 복합소총은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병사가 적 병사들이 숨어있는 곳을 겨냥해 소총에 달린 레이저거리측정기를 이용해 레이저 빔을 발사하면 복합 광학계산기가 거리를 자동 계산해 조준점을 화면에 표시해 준다. 이어 방아쇠를 당기면 공중폭발탄에 거리가 자동으로 입력되면서 적진 3~4m 상공에서 자동으로 폭발할 수 있도록 한 게 차기소총이다. 군 관계자는 "창설 60주년을 맞는 우리 군의 전투능력은 창군 당시보다 600배 이상 신장됐다"면서 "온 국민들의 관심과 지원이 없었으면 실현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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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의(衣). 식(食). 봉급체계 변천사
[연합뉴스] 2008년 09월 28일(일) 오전 08:01
디지털 군복에 2020년엔 카멜레온 군복 등장(서울=연합뉴스) 유현민 기자 = 우리 군의 군복, 급식, 급여 등 의(衣).식(食).봉급체계도 60년간 확 달라졌다. 먼저 군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제복, 즉 군복은 지난 60년간 국방색에서 얼룩무늬로 바뀐 뒤 이제 디지털무늬로 점차 진화하고 있다.
건군 이후 6.25전쟁 때까지는 우리 손으로 제정되고 마련된 군복이 없어 일본군과 미군의 국방색 군복에 한국군의 표지를 달아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던 것이 휴전이 되면서 안정된 제복을 착용하려는 노력으로 1954년 복장규칙이 정비되면서 한국군 군복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원조로 받은 원단을 국내에서 미군 전투복의 디자인을 모방해 가공했기 때문에 기존의 재활용 미군복과 별 차이가 없었다.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베트남전 파병을 계기로 한국군의 군복은 점차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전투력 증강을 위한 전술훈련의 강화와 야전 진지 보강작업 등으로 작업복의 정비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병사에 한해 1965년부터 쉽게 마모되는 부분인 어깨, 팔꿈치, 무릎, 엉덩이 등의 부위에 같은 재질의 천을 덧붙인 작업복이 생겼다.
그러나 외출복이 따로 없었던 당시 현실에서 품위가 떨어져 보인다는 이유로 1967년 1월 병사 작업복이 종전의 형태로 환원되고 아울러 호칭도 '작업복'에서 '전투복'으로 바뀌었다. 같은해 8월에는 장교 전투복에 한해 상의에 아랫 깃이 없는 '오브롱 칼라'를 도입하고 어깨에는 견장대가 부착됐다.
1971년에 제작된 군복은 베트남전에서의 경험을 살려 활동에 편리하도록 상의를 밖으로 내어 착용하도록 디자인됐지만 군기가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1973년 새 군복으로 교체됐다. 주머니를 작게 만들고 상의를 하의 안으로 넣어 입는 형태로 제작된 이 군복은 1990년까지 우리 군의 상징이 됐다.
국방색 군복이 지금의 얼룩무늬 군복으로 바뀐 것은 1990년 11월. 1970년대부터 기갑부대 등 일부 특수부대에서 착용한 얼룩무늬 군복이 이때부터 전군에 보급됐다. 얼룩무늬 위장색은 한국의 4계절과 삼림, 토양 등 기후와 지형의 특성을 고려해 검은색 20%, 녹색 30%, 갈색 30%, 모래색 20%로 구성됐다.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지역에 파병되는 장병에게는 황토색을 기본으로 하는 사막용 얼룩무늬 전투복이 지급됐다.
2006년 공개돼 특전사에 한해 보급된 새 군복은 기존 얼룩무늬 형태에서 위장막 형태의 더욱 조밀한 무늬(일명 디지털무늬)다. 기능성 재질을 사용해 땀 흡수율과 방수 기능이 향상됐고, 신속한 착용과 활동 편의성을 고려해 전투복 상의를 하의 밖으로 내놓고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지난해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UNIFIL)에 파병된 동명부대 장병도 이 군복을 지급받았다.
국방부는 앞으로 이 군복을 전 군으로 확대 보급할 방침인 가운데 군 연구기관을 통해 2020년을 목표로 주위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색상을 바꾸고 자동온도조절장치,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과 원거리 통신망을 갖춘 첨단 군복을 개발하고 있다.
군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급식은 창군 이래 부대별로 제각각 이뤄지다가 1949년 육군본부에 병식과가 설치된 이후 각 부대에서 균형된 급식이 이뤄졌다. 그러나 초기에는 일부 군 간부들의 부정행위로 당시 1인당 하루 6홉이었던 급식량마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950년대 육군 수도사단장과 감찰감, 훈련소장 등을 역임했던 한 예비역 대장은 회고록에서 "1956년 육군 맹호부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모든 장병에게 6홉의 밥을 급식하게 돼 있었다. 병사들은 한창나이 때라 6홉의 급식으로도 부족한 상태였는데 몰지각한 일부 간부들의 부정행위로 정량 급식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군 급식은 이후 군 자체적인 정화 노력과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차차 개선되면서 제 틀을 갖추게 됐고 1976년부터 1식 3찬 급식이 시행됐으며 그 이듬해에는 메뉴의 다양화를 위해 카레가 급식 메뉴에 포함됐다.
1982년부터는 매년 주곡의 혼식비율이 조정돼 흰쌀 소비율이 점차 증가했으며 1990년대엔 우유나 육류 급식이 크게 늘었고 2000년대에는 삼계탕.불고기 등과 같은 메뉴뿐만 아니라 후식으로 과일 주스가 편성됐다. 현재 국방부는 쌀 외에도 병사들의 선호에 맞춰 1년에 빵 84차례, 떡국 18차례, 자장면 4차례, 냉면 2차례, 스파게티 2차례, 쫄면 2차례, 생우동 2차례 등 114차례에 걸쳐 분식을 급식하고 있다.
군의 봉급체계는 정치, 경제, 사회의 발전 상황과 그 맥을 같이하며 작전이나 근무환경, 인식 등의 변화를 수용하며 변천해 왔다. 최초 회계연도인 1948년 4월 1일 기준으로 시행된 계급별 단일 봉급제에 따르면 월 봉급액은 소위가 1만 원, 대장이 3만 원이었다.
당시 백미 1가마(100ℓ)가 1만7천400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결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6.25전쟁과 전후 복구시기를 거치는 동안 악성 인플레이션을 동반한 화폐가치의 급락과 세출ㆍ세입의 불균형으로 봉급 정액이 13차례에 걸쳐 바뀌는 등 혼란을 면치 못하다가 1962년 최초로 계급별 호봉제가 시행됐다.
공무원 보수규정에 준용해 지급됐던 군 급여는 1963년 군인보수법 및 시행령 등의 제정으로 안정된 급여체계로 전환됐고 1966∼1970년 5년 동안 봉급이 평균 2∼30%씩 인상했지만 역시 실질 생계비 보장에는 미흡한 실정이었다.
1970년대에는 1973년과 1975년을 제외하고는 꾸준히 봉급이 15∼45% 인상되면서 상여수당을 비롯한 각종 수당이 신설돼 군 보수 수준이 국민 평균소득 수준보다 높게 유지돼 군 급여체계가 실질적인 생활급여로 향상됐다.
1982년에는 공무원 보수제도 통합 운영 방침에 따라 군인보수법 시행령 전문이 폐지됐으나 국민 소득 수준 향상에 맞춘 적정수준의 보수가 보장되도록 1990년대 중반까지 봉급 인상률은 연평균 9%를 유지했다.
1997년 IMF사태 이후 1998∼1999년에 걸쳐 봉급이 동결되기도 했지만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봉급은 매년 평균 3% 이상 인상돼 2000년 148만7천500원과 99만9천300원 씩 지급되던 소장 1호봉과 중령 1호봉은 지난해 각각 312만7천900원, 210만900원 씩이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 보수는 군 조직에서 우수한 인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 있어 큰 영향을 미친다"면서 "공무원 보수규정으로 해소할 수 없는 군인 업무의 특수성을 반영하고자 거의 매해 중앙인사위원회와 협의를 거쳐 국방부령인 '군인의 특수근무수당에 관한 규칙'을 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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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육. 해. 공군. 해병대 名將-2
[연합뉴스] 2008년 09월 28일(일) 오전 08:01
◇손원일 제독 = 항일 독립투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1930년 중국 난징 중앙대의 항해과를 졸업했다. 1945년 11월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을 창설한 데 이어 1946년 해안경비대 교장과 총사령관을 지내고 1947년 초대 참모총장으로 취임했다.
6.25전쟁 중에는 백두산함 함장으로 대한해협해전, 인천 상륙작전, 서울탈환작전 등을 승리로 이끌었다. 1953년 6월 국방장관에 임명돼 군대 정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해군은 손 제독의 공훈을 기리어 첫 번째 214급(1천800t급) 잠수함을 '손원일함'으로 명명했다. 태극무공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함명수 제독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해사 1기인 그는 6.25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위한 첩보수집 'X-레이 작전'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 작전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1964년 제7대 참모총장으로 취임해 당시 고속 상륙구축함인 아산함과 웅포함, 해안방어용 레이더를 각각 도입하는 등 해군 전력증강에 기여했다.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지덕칠 중사 = 베트남전의 영웅이다. 1966년 9월 청룡부대 위생하사관으로 참전했다. 고인은 1967년 2월 베트남 `추라이' 부근에서 미해군 UDT(수중폭파팀)의 수심 측량작업에 경계 지원을 하던 중 적 1개 대대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지 중사는 치열한 교전 끝에 소대원 3명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자신도 왼쪽 어깨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러나 지 중사는 8발의 총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병들을 응급조치한 후 몰려오는 적들을 사살했다. 의무하사관이었던 그는 미군 헬기를 통해 부상한 동료 전우들을 먼저 후송시킨 후 마지막으로 헬기에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후송 도중 27세의 나이로 결국 눈을 감았다.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이태영 중령 = 1949년 첩보부대 파견대장으로, 납북된 미국 고문관의 전용보트를 되찾기 위한 몽금포 기습작전에 참가해 북한 경비정 1척을 나포했다. 6.25전쟁 때는 704함장으로 서해 봉쇄작전과 동해 경비작전에 참가, 제해권 확보에 기여했다.
1951년 원산 영흥만 봉쇄작전에 참가, 북한군의 야포 공격 속에서도 적 후방 교란작전 차 주둔 중이던 해병 중대를 지원. 보호하기 위해 접근하다 기뢰가 폭발하면서 승조원 57명과 전사했다. 1계급 특진과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현시학 소장 =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지원, 낙동강 최후 방어선 수호에 기여했다. 해사 1기생인 고인은 원산만에 부설된 3천여개의 지뢰를 제거하는 작전에 투입됐고 황해도 피난민 구출작전 때는 6만여명의 피난민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 1950년 7월 첫 번째 참가했던 서해안 봉쇄작전 때는 신병 70명을 출동 중에 훈련시켜 남하 중인 12척의 적 수송선단을 격퇴하기도 했다. 금성을지. 금성충무훈장이 수여됐다.
◇최용덕 장군 = 해방 전까지 임시정부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과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과 참모처장, 총사령관 등을 지냈다. 1948년 초대 국방차관에 임명돼 국군조직법 제정에 참여, 공군 독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공군가, 공사교가 등을 작사했다. 1952년 공군총장에 보임된 이후 1956년 전역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이근석 장군 = 일본 소년비행학교 2기생으로, 전 일본 육.해군 대항 비행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조선인 최초로 비행교관 자격을 획득했다. 6.25전쟁 당시 공군비행단장을 맡아 항공기(L-4/T-6) 22대에 소형폭탄을 싣고 초저고도로 날면서 직접 손으로 적진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1950년 7월2일 F-51D 전투기 10대를 인도한 다음 날 중부전선으로 날아가 적 탱크 2대와 병사 35명 등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1950년 7월4일 대구기지에서 편대를 이끌고 안양 상공에 도달했을 때 적 전차부대를 발견하고 저고도로 강하해 공격하다가 피탄되자 그대로 적 탱크에 돌진해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공군 최초로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김영환 장군 = 1954년 3월4일 사천기지 단장 시절 강릉비행단 창단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F-51를 직접 몰고 강릉으로 향하던 중 실종됐다. 고인은 형수인 이희재 여사(김정렬 초대총장 부인)가 만들어준 자주색 비단 천을 목에 걸고 조종간을 잡았으며, 모든 조종사들이 그를 따라해 공군의 성장인 '빨간 마후라'가 탄생했다.
◇김성은 중장 = 1950년 8월17일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외신기자들은 이 작전 성공을 전 세계에 타전하면서 '귀신잡는 한국해병'이라고 표현했다. 1953년 9월 해병학교장에 임명돼 정예해병 육성에 주력했고 1957년 6월 해병 소장으로 진급, 해병 1사단장을 맡았다.
1960년 6월 해병중장 진급과 동시에 제4대 해병대사령관에 보임돼 1962년 7월 예편 때까지 복무했다. 1963년 3월 국방장관에 발탁돼 한국군 최초로 구축함을 도입하고 합동참모본부를 설치했다. 1968년 1월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 등으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다. 금성을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공정식 중장 = 해사 1기생으로 제6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1952년 6월 도솔산전투에 참전, 미 해병대도 이루지 못한 도솔산 고지를 탈환해 대한민국 해병의 용맹성을 만방에 과시했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이 전공을 기리어 '무적해병'이라는 친필 휘호를 하사했다. 해사 출신으로 최초의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그는 해병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살아있는 명장으로 불리고 있다. 금성충무훈장과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이인호 소령 =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꼽힌다. 월맹군(베트공)이 은거한 동굴진지를 탐색하다가 전사했다. 1966년 8월11일 이 소령은 4명의 부하를 이끌고 동굴진지 5m 전방까지 접근했고 이때 월맹군이 던진 수류탄 한발이 부하들 앞으로 날아들었다. 이 대위는 이 수류탄을 집어던질 여유가 없자 곧바로 온몸으로 감싸 안고 장렬히 산화했다. 소령으로 1계급 추서됐으며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다. 미국 역시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정경진 중령 = 베트남 짜빈동 전투의 주역으로, 1966년 베트남전 당시 대위로 청룡부대 11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짜빈동 작전에서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육박전, 기습공격 등으로 4시간 사투 끝에 243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는 베트남전 사상 중대 규모로는 최대의 전승 기록이었다. 이 전투는 해병대 6대 전첩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와 제1소대장 신원배 소위는 이 전공으로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중대급 부대가 하룻밤의 전투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한 영웅을 2명이나 배출한 사례는 건군 이후 단 한 차례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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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국방 약사(끝)
[연합뉴스] 2008년 09월 28일(일) 오전 08:01
▲1946년 6월15일 미군정, 한국광복군 해체.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16일 초대 국방부장관(이범석) 취임.
9월 1일 조선경비대(육군)와 해안경비대(해군) 국군에 편입.
11월30일 국군조직법 공포.
12월 7일 국방부직제령 공포.
▲1949년 4월15일 해병대 창설.
8월 6일 병역법 공포.
10월 1일 공군 창설.
12월 6일 징병검사 최초 실시.
▲1950년 6월25일 6.25전쟁 발발.
9월 1일 여군 창설.
9월15일 유엔군, 인천상륙작전 전개.
9월28일 정부, 서울 환도.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
10월 1일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1954년 2월17일 합동참모회의 설치.
▲1956년 9월21일 국군의 날을 10월1일로 제정. 공포.
▲1958년 7월 1일 유엔군사령부, 일본 도쿄에서 한국으로 이전.
▲1961년 12월27일 향토예비군설치법 공포.
▲1963년 5월 1일 징발법. 군속인사법. 군인보수법 공포.
6월 1일 합동참모본부 설치.
▲1965년 10월 3~16일 청룡. 맹호부대 베트남 파병.
▲1966년 7월 9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1967년 1월19일 해군 56함(당포함) 동해 휴전선 근해서 북한 해안포에 피격 침몰(39명 전사).
12월28일 국방백서 최초 발간.
▲19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
23일 푸에블로호 피납 사건.
10월13일 제1차 포커스렌즈훈련 실시.
30일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창설.
20일 국방부 병무국을 폐지하고 병무청 창설.
▲1971년 3월27일 미7사단 철수.
▲1973년 3월23일 베트남 파병 한국군 철수 완료.
10월10일 해병대, 해군에 통합.
▲1974년 8월15일 북한 남파간첩 문세광, 영부인 피격 서거.
▲1976년 6월 7일 제1차 팀스피리트 한.미 연합군사훈련 최초 실시.
8월18일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1978년 11월 7일 한미연합사령부 창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 피격 서거.
▲1980년 4월 8일 최초의 국산구축함 울산함 진수식.
▲1982년 1월 1일 징집연령, 21세에서 20세로 하향 조정.
▲1987년 11월 1일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1989년 7월22일 육.공군본부 계룡대 이전 현판식.
▲1990년 3월24일 한국 해군, 환태평양훈련(RIMPAC) 첫 참가.
10월 1일 합동군제 합동참모본부 창설.
▲1991년 1월23일 국군의료지원단 걸프전 파견.
▲1993년 6월17일 해군본부 계룡대 이전 현판식.
7월30일 소말리아 유엔평화유지군에 공병대대 파견.
▲1994년 12월 1일 유엔군에 이양했던 평시작전통제권 환수.
▲1996년 9월18일 북한 잠수정 및 무장공비 강릉 침투사건.
▲1998년 6월22일 속초 북한잠수정 침투사건.
23일 남북 제1차 판문점 장성급회담 개최.
8월31일 북한 대포동(미사일) 1호 발사.
▲1999년 6월15일 제1차 서해교전.
▲2000년 9월25~26일 남북 제1차 국방장관회담(제주).
▲2002년 2월27일 미국 대테러전쟁지원 동의부대 파병.
6월29일 제2차 서해교전.
▲2003년 2월 6일 미 대테러전쟁지원 육군 다산부대 창설.
▲2004년 2월23일 이라크 파병 자이툰부대 창설.
▲2005년 8월10일 남북 군사 핫라인 개통.
▲2006년 1월 1일 방위사업청 창설.
2월 3일 국방기술품질원 창설.
12월 1일 국방개혁법 국회통과.
▲2007년 2월24일 한.미, 2012년 4월17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합사 해체 합의.
5월10일 남북, 열차시험운행 군사보장 잠정합의서 채택.
17일 남북 열차, 반세기만에 군사분계선 통과.
25일 한국 최초 이지스구축함 세종대왕함 진수식.
6월21일 레바논 유엔평화유지군 파병 동명부대 창설.
11월27~29일 남북 제2차 국방장관회담(평양). 경협사업 군사보장 등 합의.
▲2008년 6월 3일 한미 국방장관회담, 주한미군 2만8천500명 수준 동결 재확인.
8월18~22일 '한국주도-미국지원' 첫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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