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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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글쓴이:한부울
무산계급혁명설정의 오류
노동자계급생성환경
블랙벨트 사회주의혁명 흔적
적색공포가 주는 역사이동
1.무산계급혁명설정의 오류
세계삼한역사찾기가 이제 무산자(無産者) 프롤레타리아혁명(proletarian revolution)까지 다달았다.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프롤레타이아혁명은 하나의 체제가 붕괴되고 자본제국주의가 태동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삐뚤어진 역사 아젠다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서양인들은 이를 필연적으로 만들면서 하나의 체제가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였을 것이고 역사기술을 본질과 다르게 왜곡적 시각에서 다루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문제점을 제시하면 첫째 노동자와 농노에 대한 구분이다.
한쪽은 부르조아자본이 부리는 노동자를 이야기할 수 있고 한쪽은 봉건지주가 부리는 농노를 이야기 할 수가 있다.
공통점은 잉여가치의 착취와 무산계급이다.
그런데 한쪽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고 명명한 것이고 한쪽은 노동자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법제개선활동이다.
그리고 제도적인 것에서 한쪽은 국가나 제정체제를 상대로 한 혁명이나 반란이며 한쪽은 경제산업체 개별적으로 파업과 노동(勞動) 쟁의(爭議)를 이용한 반발이다.
역사가 어느쪽이 무겁는가?
그렇다. 체제를 전복하려고 혁명이나 반란을 유발한 쪽이 무거운 것이 사실이고 이것은 제정러시아의 말기의 역사기록으로 남아 있다.
반면 같은 시기에 파업과 쟁의는 가벼운 반발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미국의 경제역사기록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가?
하나의 체제에서 분리된 역사 불합리다.
프롤레타리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기초 즉 토대가 되었던 것은 자본속성에 의한 빈부격차라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속성적으로 무정부상태를 요구한다.
빈부격차는 무한자본을 추종하게 하는 도구로서 충분한 이유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노예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도구가 되는 순간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빈부격차가 잉태할 수밖에 없는 자본을 괴물로 만든 세력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바로 못된 유대인들이다.
18세기 초기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시발케 한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 면을 보면 유대인이라는 종족이 가진 근원적인 개념을 알게 하는 것이다.
"유태인의 종교는 기만과 같은 악행을 부추긴다. 그와 같은 종교는 당연히 그 추종자들에게 위험하고 부도덕한 성향을 심어준다. 100년 동안 유태인을 프랑스에 가만 놔둬보라. 그들은 모든 마을에 자신들 만의 종파를 만들 것이며 자신들끼리만 뭉칠 것이다. 그들은 폴란드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에서도 행할 것이며 그들 없이도 이제 것 문제없이 상업에 종사해왔던 사람들로부터 생계를 앗아갈 것이다. 지금 독일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양심적인 소상인(burgher)들은 결속된 유태인들의 조직적인 경쟁에 당할 수가 없어 점차 도태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위험한 종족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잘난 사회주의 사상을 만든 자들의 면면을 보자.
전통적인 라빠(또는 랍비:rabbī)후손으로서 유대인 사회주의 이론가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는 자본주의 체제가 고도로 발전될 수록 주기적인 공황에 매우 약하여, 이윤율 저하 되는 경향이 초반 공황에 비해 매우 잦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사이클이 반복되어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 정권이 전복되면서 프롤레타리아 정부가 건설된다고 주장하였는 사실들은 여느 백과사전이든 간에 쉽게 접할 수가 있는 사실들이다.
다시말해 자본주의는 주기적인 공황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지적인 공황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세력이 누구인가?
좀 더 많은 이윤과 독점적 자본 축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공황을 유발시키는 형상이 자본을 지배하는 세력들로부터 만들어진다.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이 개입할 수 있는 환경까지 그들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공황에 취약하다는 것은 또 하나의 불확실한 자본속성에서 또 다른 불확실한 자본속성을 만드는 것으로 이것에 대한 빌미를 제공하는 이론일뿐이다.
위대한 자본은 언제든지 상황을 조정할 수 있고 불손한 의도에 의해 공황이 기만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여지가 남긴것은 1936년 2차세계대전을 촉발시킨 대공황을 발생시킨 것으로 이것에 의해 종전보다 더 흉칙한 괴물이 엘리트독점금융자본가로 탄생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이론가 일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 갈길까지 열어준 것이다.
이것은 글쓴이가 장담하건데 서양역사학자들이 아마도 이를 역사에 교묘히 이용한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1847년 같은 유대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1895) 역시 마르크스와 함께 자본론(資本論:Das Kapital)을 완성시켰다는 것도 시대흐름에서 어쩔 수 없는 두 유대인이 등장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이에 더한 충격적인 것은 이 두사람의 이론을 추종하던 같은 유대인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1870-1924)도 가세하여 약속이나 한듯 그들의 이론을 실험을 거쳐 실행에 들어가 러시아 10월 혁명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이다.
이는 잘 짜여진 틀에 넣어져 역사사건이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잘 짜여진 유대인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비행삼각편대가 출동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유대인들의 삼각편대가 이처럼 치밀했더라도 "하나의 체제"라고 볼 수 있었던 제정군주국이었던 로마노프왕조 즉 제정러시아가 붕괴하는 과정은 그들의 이론과 거리가 먼 것으로서 군주국이었고 제정국가였지 유럽이라고 하는 서세의 자본제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당시 근대사를 바탕으로 할 때 거의 빈민국을 못 벗어나는 동유럽국가와 함께 러시아가 공존한 사실에서 러시아를 자본제국으로 볼 수가 없다.
근대사는 여기서 결정적인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밝혀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하나 유대인 마르크스의 이론이 절대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은 마르크스 자신이 1844년에 쓴 [유태인 문제에 관하여(On The Jewish Question)]에서 그가 말하길 "유태인들은 프랑스혁명(1789-1794)을 통해 사적으로 해방된 것이지 인간으로서 해방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사적소유와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필요하다"라고 전제한 것은 어떤 목적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가 목적한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그들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고 부르짖는 러시아 10월혁명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하나의 체제였던 조선과 고려 전체의 역사를 노렸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프랑스가 시민혁명으로 왕을 처형되었다는 것은 조선의 쇠락을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그 이후 로마노프왕조가 10월혁명으로 무너졌다는 것은 고려 즉 대한제국의 또 한번의 흔들림을 이야기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조선과 고려가 프랑스와 러시아로 변형된 것은 만들어진 유럽사와 연결시킨 것이다.
2.노동자계급생성환경
그렇듯 화려하게 등장시킨 유대인 삼각편대의 종말도 쓸쓸하기만 하다.
마르크스는 1881년 12월 그의 아내의 죽음 후에 감기로 인해 15개월동안 병으로 앓다가 결국 기관지염과 늑막염으로 1883년 3월 14일에 런던에서 쓸쓸이 죽음을 맞이 하였고 그때까지 그는 무국적(無國籍:Statelessness)자였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엥겔스 역시 1895년 8월 5일에 식도암(食道癌, esophageal cancer)으로 마르크스와 똑 같이 런던에서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화장된 유골을 이스트본(Eastbourne)가까이에 있는 비치 곶(串)에 수장하였다고 한다.
서양사에서 역사를 숨길만한 인물들은 수장하였다는 이야기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풍신수길과 같은 동일인물로 의심받고 있는 잉글랜드 해적왕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40-1596)의 시신을 납(lead coffin)으로 만들어진 관에 넣어져 수장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같다.
수수께끼같은 근대사의 정체에 대해서 구구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러시아의 10월 혁명이야기는 본질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며 이를 서양학자들은 이를 위해 각색하였거나 본질을 숨기기위해 역사자체를 수정가필하였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레닌역시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8년 1월 14일에 그에 대한 1차 암살시도가 있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서 카톨릭신자이며 스위스혁명가 프리츠 플라텐(Fritz Platten:1883-1944)에게 공격받았고 2차암살시도는 1918년 사회혁명당(Sotsialisty Revolyutsionery)당원이었고 같은 유대인이었던 파니 카플란(Fanny Kaplan:1890-1918)이란 여자가 쏜 총에 턱, 목과 팔에 맞아 크게 중상을 입었으며 이 총상 휴유증으로 앓다가 매독과 폐질환 등의 질병들이 겹치고 고혈압에 이어 마지막 1년은 실어증까지 겹치면서 1924년 1월 21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 부르주아(bourgeois)가 일으킨 혁명을 시민혁영이라 하였고 프랑스혁명(1789-1794)과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은 유대인들에게 개인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사실을 말한 부분에서 상당히 종족적개념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하나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철학적 도구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자본론은 이러한 철학적 도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체제를 전복시킬 도구로서 역사적으로 정당화되었고 이론화되었으며 결국 이것을 바탕으로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된 것이라고 서양사는 깊게 적고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유대인들의 자본속성에 대한 사상적 증오심은 제정러시아에서 절정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다.
이 시기에 유대인 과격테러분자들에게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기인 1881년 알렉산드르2세에 대한 암살테러를 포함한 제정러시아의 많은 관리들은 무수히 암살당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적대감은 사회주의 혁명이론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것이다.
자본제국이 아닌 제정군주국인 "하나의 체제"를 붕괴시킬 목적으로 들어낸 끝없는 증오심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제정군주국인 고려가 로마노프왕조라면 이를 파괴하고 부농(富農), 부상(富商)의 자식들인 유대인 부르주아(bourgeois)들의 세상천지를 만들기 위한 극단적인 그들만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움켜쥐고 있는 거대한 자본은 금융자본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도구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1907년부터 유대인들이 장악한 고리대금업인 금융(金融:finance)이 국제적으로 양성화되고 독점적 위치를 장악하는 과정은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1907년 경제공황파동이후 유대인 모건, 록펠러, 로스차일드 3대 고리대금업 가문들 중심으로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를 신설하기로 하고 중앙은행법을 입안하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이 법안이 의회 입법부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주도하여 만들었다는 사실자체이다.
때문에 유대인 금융장악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국가화폐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가 설립되는 과정을 보면 1910년 11월 모건 별장이 있는 조지아주 연안 휴양지 지킬섬(Jekyll Island)에서 비밀회의를 주관한 것은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문의 대리인 바로 독일계 유대인이었던 폴 모리츠 와버그(Paul Moritz Warburg)였다.
그것의 결과물은 물론 국가가 아닌 금융독점자본조직이다.
연방준비제도의 7인 이사회의 명단을 보면 (1)로드아일랜드 포스터출신 넬슨 올드리치(Nelson W Aldrich:1841-1915)상원의원, (2)인디애나 라포트 출신의 재무부차관보 아브람 앤드류(Abram Piatt Andrew, Jr.:1873-1936)재무장관, (3)록펠러 쿤롭계열인 뉴욕의 내셔널 시티은행의 일리노이 오로라출신의 프랭크 밴더립(Frank Arthur Vanderlip, Sr.:1864- 1937), (4)로스차일드 쿤롭사(Kuhn, Loeb Company)의 동업자 유대인 독일 함부르크출신의 폴 모리츠 와버그(Paul Moritz Warburg:1868-1932), (5)J. P.모건의 동업자 펜실베이니아 트로이출신의 헨리 데이비슨(Henry Pomeroy Davison:1867-1922), (6)모건계열인 뉴욕 퍼스트 내셔널 시티은행의 뉴욕출신 찰스 D. 노턴(Charles D. Norton:1851-1916), 역시 (7)모건계열인 뱅커스 트러스트사의 뉴욕 피쉬킬 출신의 벤자민 스트롱(Benjamin Strong, Jr.:1872-1928)등의 면면을 보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임을 알 수 있고 이들을 알루미나티(illuminati)의 회원이다.
이 조직이 다분히 유대인적이라는 것도 과거 중앙은행이 정부지분을 20%인정한 것에 비해 100% 민영자본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정부의 역할을 단절시켰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결과 1차세계대전에 엄청난 자금 방출을 통해 유동성을 공급 한 후 세력을 확대시킨 것은 물론이고 1920년부터 차용한 자금회수를 시작하여 그 결과 5,400개가 넘는 은행이 도산하였다는 것은 독점적금융자본을 위해 은행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소수 금융엘리트들의 독점적 지위가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918년 제정된 연방준비법에 따라 발족이 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eral Reserve Board)는 이들 소수 금융엘리트들에 의해 재정비되면서 유대인자본에게 완전히 장악된다점도 확인할 수가 있는 일이다.
존 피어폰트 모건의 아들 모건 주니어(J. P. Morgan, Jr.:1867-1943)은 1차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전쟁부담금 조건을 조정한 사실이 있다.
물론 이러한 유대인들의 금융장악은 모건에 의해 세계금융시장을 본래 런던에서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뉴욕으로 옮길 수 있었고 뉴욕이 비로소 세계경제중심지로 떠 올랐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대기업 산업체가 금융시장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것이라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욕을 중심으로 노동착취에 의한 노동자계급이 생성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노동잉여가치를 착취하던 부르조아들에 대한 극단적인 노동투쟁이 있었을 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917년 프롤레타리아투쟁이라고 하는 볼셰비키 혁명(Bolshevik Revolution)이 발생한 로마노프왕조 즉 제정러시아에는 과연 대자본시장이 본래 존재하였던 곳인가 하는 문제와 세계금융시장이 뉴욕이었다는 사실에서 러시아가 현재 동유럽을 근거한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근대사는 동유럽에 존재하고 자본제국이 아닌 제정군주국일 수밖에 없는 제정러시아에서 대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투쟁이 벌어졌다고 하는 주장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대지주에 의한 농노들의 반발이란다.
이것을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고 하고 볼셰비키혁명이라고 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프랑스혁명은 시민혁명이고 부르주아(bourgeois)민주혁명이지 노동자계급투쟁이 아니라 했다.
제정러시아에서 발생한 혁명은 유대인들의 반동이며 반란으로서 하나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 이외 노동자계급투쟁이라고 볼 수없는 것이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이 유대인사상가들에 의해 확대포장되고 마치 제정러시아가 노동자취취의 본거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역사혼란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유대인 테러세력들에게 암살당한 알렉산드르2세에 의해 이미 1861년에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고 농노가 없어진 마당에서 거대한 자본에 의해 노동착취가 발생하면서 노동계급투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흐름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다.
유대인 사회주의 사상가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혁명이라 함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논점에서 보면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에 의해 정립된 자본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투기 가능한 화폐, 우리가 돈이라고 하는'자본'이 양산되고, 그것으로 하여금 자본회전을 통하여 효율적인 임금 이상의 가치, 잉여가치를 착취 이윤창출과 동시에 생산수단이 자본가의 손안에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이윤생산을 목적으로 운용되며, 토지와 노동력을 사고팔 수 있는 시대의 사회체제를 말한 것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계급이 노동자, 농민과 같은 무산계급이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부르주아 민주제(프랑스혁명에 의해 생성)는 말 그대로 부르주아들만의 자유권과 참정권이 있는 시대였다는 것으로서 사회주의혁명이 완성된 후 프롤레타리아민주제 역시 무산계급만이 자유권과 참정권을 가져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알고보면 이 자본주의 체제가 역설적으로 마르크스가 프롤레나리아혁명의 바탕으로 한다는 프랑스혁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며 그의 주장이 자기주의에 맞게 잘짜여진 괴변에 가깝다는 것은 프랑스혁명이 국가체제의 발전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사적으로 억압되었다가 해방된 것이라 인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유대인들이 사적으로 해방된 것 말고 더 이상 것을 차지하거나 만들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의 체제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자기모순(自己矛曆)이다
그리고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기 기간에는 혁명에 반대하는 '반동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암살과 학살, 테러 등 폭력을 정당화하여 니콜라이2세 일족을 무참히 학살하였고, 공산당선언에서는 자본가 및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층과의 화합을 할 수 없다는 것과는 달리 유대인들은 자본가와 부르조아에 의해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중적으로 진실을 감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혁명 사상론 어느 곳에서도 제정주의,즉 군국주의에 대한 반체제 활동 이야기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기이함이 존재한다.
유대인사상가들의 사회주의혁명이 신흥유대자본에 대항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제정주의 몰락과 하나의 체제에 대한 파괴만을 염두에 둔 것으로 결과적으로 볼셰비키혁명이라는 것은 매우 자기적이라는 것이며 그것에 의해 사상적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발생한 제정러시아가 과연 자본제국인가? 다시묻는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동아시아대륙의 보잘 것 없는 열도일본세력에게도 혼쭐이 난 것처럼 그렸으며
러시아제정이 빈약하여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하는 자금도 프랑스에 의존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대자본국가나 자본제국이라 할 수가 없다.
무엇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발생하게 하였을까?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노리던 자본속성들은 18세기말부터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서양세력들에 의한 거대한 금융자본이 굴러다니던 그리고 세계독점적인 유대자본이 활개를 치던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혁명사건이다.
농노이던 노동자이던 노동문제의 심각성도 따지고 보면 동유럽에 있었던 제정러시아가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산업군지역에서이다.
수많은 곳에 노동조합이 활동하였고 노동쟁의가 빈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적으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뇌관은 프롤레타리아 반동세력이 활개를 치던 곳이다.
사건주기가 약 2년 차이가 나지만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861년과 1863년사이에 발생된 북아메리카대륙의 링컨 노예해방선언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르2세의 농노해방령을 같은 관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간단한 논리를 근대사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이 여기서 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야기다.
3.블랙벨트 사회주의혁명 흔적
본 블로그 글 "철도 궤(車軌)로 보는 러시아와 인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2"에서
러시아궤(1520mm.1524mm)가 영국이 취한 표준궤(1435mm)와 다른 것은 군사적으로도 궤간차이에 의해 이웃 국가간 방위목적도 있다는 사실들을 짚어 보았다.
이와같은 사실은 참으로 이해할 수없는 것으로 영국은 서유럽 섬에 있는 나라이므로 유럽동부에 있는 러시아가 철도궤를 다르게 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그렇게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런데 이러한 난해한 부분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영국이란 세력과 러시아란 세력이 같은 육지에 동거한 것이라면 러시아가 굳이 표준궤와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의 지도에 보듯이 러시아 궤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지역 온전체를 차지하는 것으로 러시아궤 철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러시아 역사가 존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최소한 러시아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러시아궤를 기본으로 하는 철도가 부설된 곳에 어떤 식으로든지 러시아주체가 존재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더군다나 위 지도에 나타나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철도상황에서 5 ft (1,524 mm) 궤간 즉 러시아궤간이 부설된 곳은 남북전쟁당시 남부동맹철도(rail network in the Southern United States:1861)라고 명명되었다는 사실이 더하고 있다.
이것은 러시아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존재한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가 없게 하는 것이다.
이 지역을 보면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을 이동쪽으로 하여 미시시피주(Mississippi), 앨라바마주(Alabama), 조지아주(Georgia),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rolina), 노우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 그리고 플로리다주(Florida), 캔터기(Kentucky)와 테네시(Tennessee)까지 범위로 하며 위 지도에서 초록색으로 표시한 철로가 확연하게 들어난다.
문제는 이 광범위한 러시아궤 철도지역이 바로 블랙밸트라고 불리는 어두운 곳과 어쩔 수 없이 합치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역사의미를 추정케 하는 것이다.
즉 러시아에 옮겨진 본래 사회주의 땅이라는 말이며 필연적으로 사회주의가 생성될 수밖에 없는 어두운 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블랙 벨트(Black Belt)
과연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블랙밸트라고 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a crescent-shaped region about 480 km long and up to 40 km wide,
블랙 벨트(Black Belt)는 원래 조지아주 가장자리에서 앨라바마 동쪽을 통과하고 테네시 남서부를 거쳐 동중앙부 미시시피주까지 펼쳐지는 대초원과 오크 히코리 산림( prairies and oak-hickory woods)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혹은 초승달지역이라 하는 것이다.
오크히커리산림지대(Oak-hickory forest)에서 생물학적 판단을 하면 오크(Oak)는 참나무(橡, 橡樹) 또는 상수리나무라고 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세종지리지에 경기도 양주도호부 적성현(積城縣)에 토공(土貢)으로 상수리(橡實)가 난다 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터키 오크(American Turkey Oak)는 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 남부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있음을 본 블로그 글 "참나무(橡, 橡樹, Oak)와 메티스인(metis or Anglo-Mét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69"에서 충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아메리카에 터키이름은 동부와 동남부를 지칭하는 것일게다.
히코리(hickory)라 함은 바로 핵도(核桃)를 말하는 것으로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총론(總論)에 조선국의 토산으로 핵도(核桃)를 이야기 하였으며 과류(果類)편에는 신라의 송자는 필점국(畢占國)의 핵도인(核桃仁)과 같이 맛이 시다라고 되어 있어 오크 히코리 산림지대는 생물학적으로도 삼한역사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곳은 19세기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의 비율이 높아지며 지역적으로 빈곤, 낮은 교육 수준, 높은 범죄율, 실업률 등이 특징되어 미국남부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오랫동안 이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또다른 어두운 면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1920년부터 자메이카의 혁명가 및 언론인인 마커스 가비(Marcus Garvey:1887-1940)에 의해 자메이카 원주민 침례 자유교회(Jamaica Native Baptist Free Church)와 같은 종교운동들의 보급과 함께 퍼져나간 아프리카 중심주의(Afrocentrism, Afrocentricity)성향의 흑인발전협회(UNIA:Universal Negro Improvement Association)같은 조직이 완성되고 에티오피아(Ethiopia)적 세계관이 형성된 지역이라 하였으며 라스타파리 운동(Rastafari Movement)이나 흑인민족주의(Black Nationalism: BN)와 흑인 분리주의(black separatism), 범-아프리카주의(Pan-Africanism)가 나타난 지역임을 알리고 있다.
1917년에 있었던 이스트세인트루이스 인종폭동(East Saint Louis Race Riot)은 일리노이주 동부세인트루이스에서 일리노이 백인들이 군수사업에 새로 고용된 흑인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최악의 사건으로서 흑인들을 무차별하게 칼로 찌르고 곤봉으로 때리거나 목을 매달았고 거주지역에서 6,000명의 흑인을 쫓아냈던 것으로 유명하다.
흑백갈등이 조성되었고 더군다나 남부흑인들이 북부로 이주가 증가함에 따라 대립이 절정을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흑인들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투쟁이 소극적이었다는 잘못된 인식이 있을 수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1863년 링컨에 의해 노예해방령(奴隷解放令:Emancipation Proclamation)이 발표되면서부터 흑인(African Americans)들의 프롤레타리아투쟁의 현장에 뛰어든 꼴이며 혁명 가능성은 늘 잠재된 것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알렉산드르2세가 발표한 농노해방령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인적자원에 의해 볼셰비키혁명가능성을 무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북아메리카대륙 남부 블랙벨트 역시 흑인들이 상당수가 거주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프롤레타리아계급은 부르조아계급에서 늘 상존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당시 유럽경찰국으로 행세한 니콜라이1세를 뒤를 이어 알렉산드르 2세(Alexander II :1818-1881,재위:1855-1881)는 1861년 3월 3일에 농노제도를 폐지하고 과감하게 농노해방령(農奴解放令)을 시행한 것은 농부의 노동자율권을 보장하였다는 이야기다.
물론 자본가가 많은 미국에서도 많은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자신의 땅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소작농들 역시 러시아 농부와 상황이 결코 다르다고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땅을 소유하더라도 규모의 따라 빈곤해질 수도 있으며 미국역시 대지주도 빈곤을 면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볼 때 황제가 토지세를 부가하는 것이나 미국정부가 토지세를 부과하는 것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도 예측할 수가 있다.
때문에 농노가 해방되고 노예가 해방되었다 하더라도 상대적인 빈곤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러시아농노들은 다시 지주밑에서 소작인이 되었다는 것을 제정러시아에만 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러시아나 미국이나 땅을 버리고 도시로 가서 공장 노동자가 되는 등 농노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러한 경제틀에서는 똑같이 노동자로서 잉여가치를 착쥐당하는 빈곤은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문제는 세계산업자본이 활발하게 움직이던 지역은 제정러시아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흑인노예가 해방되는 시점에 국가공유지를 철도가 건설되는 지역에 무상으로 공여했다.
토지만 공여한 것이 아니라 그 토지담보로 한 금융대출까지 허가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미국사정을 보면 절대로 이 모든 것들은 국가가 한 짓이라고 볼 수가 없다.
일개철도회사들이 모든 국가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가 이런 위험부담을 안고 토지를 공여했을 것이고 만약 철도회사 공사를 포기하고 중도에 부도를 내거나 달아나면 국가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소위 대조선이던 대한제국이던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지역 영토를 고스란히 미국에게 빼앗긴 것이 사실이라면 이와같은 자본속성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이란 경제조직은 이러한 자본속성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것이 틀림없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역시 똑같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고, 미국 헌법 수정 제13조의 통과시켜 노예제의 폐지를 이끌었다는 것은 수많은 노동자를 양성시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들의 노동조건만 개선으로 잉여가치의 착취를 막을 수 있었고 빈부격차에 의한 불만을 해소시켰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본 블로그에서 이 문제를 깊게 숙의한 적이 많은데 놀랍게도 미국대통령으로서 링컨이 재임하기 전 전임자인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1791-1868,재위:1857-1861)이 1861년 3월 4일에 사망한 것은 이러한 사실의 상징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마치 로마노프황제의 농노해방령(農奴解放令)을 발표하던 시점 1861년 3월 3일 다음날 농노가 사라지는 것과 공교롭게도 의미가 같게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러시아라고 하는 로마노프왕가의 농노해방령이나 미국링컨대통령이 처리한 노예해방선언은 엄밀하게 따진다면 큰 차이를 이야기 할 수 없으며 기어코 다르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의 사회주의 생성과정은 어떨까?.
사회주의는 1789년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초래한 변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비판하고 유물론 체계를 한 사회주의 이론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제시된 '과학적 사회주의'는 1848년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마르크스주의(Marxism) 이론에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다음 단계이며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계급 억압이 차츰 약해짐에 따라 최종적으로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로 정리된다.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사회주의의 한 계열이라는 것이다
1인터내셔널(First International)는 1865년에서 1872년까지의 기간에 국제노동자협회(國際勞動者協會,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의 활동을 말하며 카를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의 결성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는 등 제1인터내셔널의 결성을 적극 지도했으며 1870년에는 마르크스파가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제2인터내셔널(Second International)는 1889년부터 1912년까지 제9차 (1912년) 바젤인터내셔널 노동자대회를 끝으로 1916년해체된다고 나타난다.
이것들이 모두 카를 마르크스에 의해 지도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18세기 초기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1772-1837)의 사상에 영감을 얻은 청교도 분파인 세이커 교도(Shakers:공동생활과 정화의식을 실천하는 종파)와 초기 아나키스트 조시아 워렌(Josiah Warren:1798-1874)을 주축으로 진행되었다.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Saint-Simon:1760-1825)과 달리 유물론에 영향을 받은 사상가였으며, 그 이론의 수준도 그 후에 등장한 카를 마르크스와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체제전복을 노리는 이론적 사상으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1876년 영국, 독일, 유대인 노동운동가들이 미국에 이주하여 미국 사회주의노동당을 창당했다.
반면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 Plekhanov:1856-1918)는 처음에는 농노를 해방시킨다는 인민주의자였다가 1880년 제네바에 정착했을 때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했고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노동해방단(Osvobozhdenie Truda)을 결성했다고 알려진다.
4.적색공포가 주는 역사이동
이렇게 볼 때 사화주의당을 결성한 것은 미국에서가 먼저이다.
1879년 정치혁명을 최우선시하며 테러리즘을 가장 중요한 투쟁수단으로 삼는 “인민의 의지파”와 다소 온건한 노선을 취하는 “흑토(黑土) 재분할파”로 분열됐는데, 플레하노프가 이끈 흑토 재분할파가 사회민주노동당의 모체가 되었으며, 토지와 자유당이 점차 테러리즘으로 기울자 플레하노프는 반(反)테러리스트 분파 그룹을 결성하여 대중선동을 계속했다고 나타난다.
훗날 1901년 미국 사회주의노동당은 미국 사회당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의 대표 단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사회주의노동당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시카고 노동자들의 집단 파업인 헤이마켓사건(Haymarket affair)에 참가하여 노동자를 도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도 보면 러시아는 인민주의자가 되어 테러리스트가 되었고 미국은 노동제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는 이야기다.
한쪽은 테러를 할 수 있는 체제나 제정에 대한 조직적 대항임을 알 수 있고 미국은 제도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흑토(黑土)를 블랙벨트(Black Belt)라고 하지 않았을까?
또한 러시아에서 플레하노프가 이끈 흑토재분할파라는 것은 마치 블랙밸트를 칭하는 것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Eugene Debs (front right) and Martin J. Elliott (center rear) in prison together after Pullman strike.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된 볼셰비키와 미국의 사회주의자로 노동운동 지도자 유진데브스(Eugene V. Debs:1855-1926)의 연관관계를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된다.
1894년 감옥에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와 프하라(Prague, Austrian Empire)출신 독일사회민주당 이념가 카를 카우츠키(Karl Kautsky:1854-1938)의 사상을 추종하게 되었다고 나타난다.
미국 인디아나 테레 호테(Terre Haute, Indiana)출신인 유진 데브스(Eugene V. Debs)가 미국 사회당의 당수인 시절,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1차 대전에 반대했으며, 반전평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이 대가로 이들은 1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때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서 분열돼 나온 다수파(多數派) 볼셰비키(Bolsheviks)와 동급으로 취급당하여 탄압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사회당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이른바 1917년 1920년 제1차 적색공포(赤色恐怖)시대 또는 레드 스케어(Red Scare)라고 하는 것으로 적색들을 미국에서 몰아내기 작업이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한 무정부주의자가 자유의 여신상을 파괴하려는 모습,1919]
1차 적색 공포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와 제1차 세계대전(1914-18)중에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무정부주의자와 좌익의 정치적 폭력과 사회적 불안으로 현존하는 사회적·정치적 긴장이 악화되었으며 이를 선두에서 여론화 한 것은 보수주의 신문사들이 급진적 무정부주의 다수가 대중적 빈곤에 대한 답이 사회주의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극한 불안감과 그에 따른 외국인 혐오증으로 악화되었고 끝내 추방이 대세를 이루었다.
1919년 위 삽화그림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자유여신상을 파괴하려는 유럽무정부주의자라고 하였지만 사회주의혁명가 이거나 유대인테러리스트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이 1916, 1917년 몇 번의 노동자파업을 초래했는데 언론은 이를 미국 사회의 급진적 위협이라고 표현하였고 보수주의 언론사들이 합법적 노동자파업을 “사회에 어긋나는 범죄”나 “정부타도의 음모” 또는 “공산주의 수립 계획”이라고 확대하여 전달하여 여론을 부추겼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18년 토마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탐탁지 않은 정치적 인물들을 강제 추방함으로써 전시의 사기를 지키기 위해 반(反)이민, 반 무정부주의 1918 치안 법을 입법하도록 미의회에 압력을 가하고 적색 공포로 부터 미국국민을 차단하고 보수적 지배계층은 미국국민들의 심리적 공허감을 이용해 ‘비미국적 요소’를 가진 모든 개인과 집단들을 새로운 적으로 만들어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관용으로‘적색 공포’를 조장하면서 전(全) 국민적 공포 히스테리 열풍으로 확산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중국인을 몰아내는 조치를 취한 것이 바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이라는 것인데 1882년 5월 6일에 체스터 앨런 아서(Chester Alan Arthur1829-1886,재임:1881-1885)미국대통령에 의해 발효된 것으로서 10년 후 다시 1892년 게리 법(Geary Act)에 의해 10년이 갱신되었고 190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추방령조치는 지역적인 지배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적색공포(赤色恐怖:Red Scare)역시 이와같은 연장선상에서 바로볼 수 있는 것으로 1차기간 1917년부터 1920년동안에 찌라시 언론을 총동원하여 미국내 사회주의 공산세력에게 정부전복기도가능성을 보도하였고 이에 대한 히스테리 공포가 미국 전역을 강타하여 사회주의자와 미국건립역사에 반하는 세력들은 무조건 추방되거나 혐오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더우기 2차 적색공포(赤色恐怖:Red Scare)기간인 1947년부터 1957년까지 10년간은 신중국대륙에 국공내전(1946-50)이 발발하였고 이어 한반도에는 한국전쟁(1950-53)이 발생하여 마무리가 된 시기이다.
이시기에 북아메리카대륙 동양인들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또는 삼한인이라는 이유로 쫓겨 신대륙과 한반도에 어쩔 수 없이 대대적으로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유럽인과 러시아인들은 각각 지그의 영토로 강제 이동되었을 확율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내의 움직임이 지금의 세계역사틀이 되었을 것이란 예측은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근대사만큼 불확실성이 이렇듯 난무한 역사는 없었던 것 같다.
근대사는 따져보면 결코 역사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미국태동과 상관없이 사회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생성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 뿐만아니라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선구적인 사회주의자 로버트 오웬(Robert Owen:1771-1858)까지 굳이 미국에 새로운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1825년 인디에나 남부에 뉴하모니 운동을 전개했고 1841년에 브룩 농업공동체를 조직하여 초월주의, 사회주의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이러한 운동은 로버트 오웬이 영국에서 자신의 공장을 기점으로 노동자 공동체를 만들었던 상황과 비슷하게 초기엔 재정적 여유로 큰 효과를 보았으나 1840년대 중반부터 재정적 압박이 가해졌고 결국 1847년 이러한 운동은 재정 파탄으로 실패한다고 되어 있다.
또한 1853년엔 프랑스철학자 에티엔느 카베(Étienne Cabet:1788–1856)주도로 모험적인 이카리안(Icarian)운동이라는 새로운 공동체가 나왔으며 이들은 샤를 푸리에의 이론과 비슷한 방법으로 공장을 공유화해서 텍사스, 일리노이 일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나 이 운동은 내부 이론가들의 분열로 인해 해체되었다고 알려진다.
미국의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소공동체주의적인, 무정부주의 아나키즘(anarchism)적인 사회주의의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 좋게만 보려는 경향이 있으나 본래 사회주의 자체가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게 한다.
때문에 미국남부 블래벨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의 비율이 높은 지역이라는 면도 있지만 본래 농노들이 많아 빈곤했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수준과 높은 범죄율, 실업률등 어두운 부분이 각인되어 자연스럽게 불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또한 그곳은 러시아궤가 기준이 된 철로가 있어 러시아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곳도 다름아니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이어야 하는 이유도 이와같은 것이며 모든 진실된 본질의 역사는 감쪽같이 적색공포를 피해 본질과 다른 역사본거지로 옮겨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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