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瀚海)는 고비사막이 아니다.
한해(瀚海)는 고비사막이 아니다.
글쓴이:한부울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101권, 선조 31년 6월 12일 乙丑 3번째기사에 도독 진인이 접반사를 통해 전달된 물품 일부를 되돌려 준다고 도독(都督) 진인(陳璘)이 게첩을 보냈다.에서 보면
將使頓奴, 隻是不歸, 一帆不返, 永絶爭桑之患, 肅淸瀚海之波。
앞으로 저 흉악한 왜노로 하여금 한명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한 척의 전함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쟁상(爭桑)의 근심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한해(瀚海)의 파도를 맑게 하겠습니다. 한 것에서 보면 국사편위(國史編纂委員會)가 해석한 역주[譯註]에 설명하길 한해(瀚海)는 사막(沙漠)을 말하기도 하고 북해(北海)를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일본을 가리킨 말이라고 하여 한해란 개념자체가 한반도 역사에서 정사를 주지하는 조선왕조실록 해석 조차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백과사전이 정의한 것을 보더라도 한해(瀚海)는 여러 설이 있다는데, 우선 몽고의 항원산(杭爰山)에 대한 음역(音譯)으로 한(漢)나라 때 곽거병(霍去病)이 이곳에 여섯 번 출정하여, 멀리 사막을 건너고 봉선(封禪:하늘 제사)을 행하며 이곳에 등림(登臨) 즉 산에 오르기도 하고 물에 가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고 했으며 한서 곽거병전(漢書 霍去病傳)일설에는 왜국으로 갈 때 지나는 바다를 가리킨다고 하였는데 “대방(帶方)으로 해서 왜국에 이르자면, 바다를 따라가서 조선을 지나 남쪽과 동쪽으로 7000 여 리를 지나서 한바다를 건너고, 다시 남쪽으로 1000 여 리를 가서 한바다를 건너면 1000 여 리나 되는 넓은 곳이 있는데 이것이 한해이다.”라는 내용이 있다하여 백과사전에서 조차 한해에 대한 개념 정리가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8월 18일 丙申 2번째기사의 수어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광주부(廣州府)를 승격시켜 유수(留守)를 두다. 에서 보면
國初兵制亦然。 三府爲二司, 二司爲五衛, 衛有五部, 部有四統, 而宰樞十人爲摠管都副, 分釐之, 歲周則遞而已。 如河敬復、黃衡、崔潤德、魚有沼諸人之受脤啓行, 遠出沙漠, 梁瀚海而銘燕然。 功在盟府, 名留簡編者, 何常髣髴於近日五營之爲, 而有是哉? 此所以初元朝參, 問汰冗足食之策也, 首及於五營, 拈出守摠二營之存罷, 而雜議於廷臣者也。
우리 나라 초기의 병제(兵制) 역시 그러하였다. 3부(府)가 2사(司)로 되고 2사가 5위(衛)로 되었는데, 위에는 5부(部)를 두고 부에는 4통(統)을 두었으며 재추(宰樞) 10인이 도총관(都摠管)도 되고 부총관(副摠管)도 되었다가 1년이 되면 체차(다른 사람으로 갈아 바꾸다)되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가령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맹부(盟府)에 공이 기록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자를 보건대 어찌 근래 5영(營)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서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는가. 그래서 바로 즉위 초기에 조참(朝參)을 행하면서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식량을 풍족히 할 계책을 물어 보았을 때에 맨 먼저 5영을 언급하면서 수어청과 총융청(摠戎廳) 2영의 존폐 문제를 끄집어내어 조정 신하들에게 의논해 보도록 한 것이었다.
위 기록에서 가령 하경복(河敬復)·황형(黃衡)·최윤덕(崔潤德)·어유소(魚有沼) 같은 사람들을 보면 제사드린 고기를 받고서 길을 떠나 멀리 사막 지방에 출전하여 한해(瀚海)를 건너기도 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상을 받기까지 하였다.라고 해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반도 역사가 역사학자들의 생각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에서 벗어나는 기록이 있다면 무조건 중국을 가져다 붙인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본 블로그 글 "한해(瀚海) 원정출진을 명한 정조대왕의 조칙(詔勅) https://han0114.tistory.com/17049683"
에서 밝혔듯이, 1799년(정조 23) 정조대왕의 문집으로서 이만수(李晩秀) 등이 편집하기 시작하여 총 190편으로 정리하였으며, 정조 사후에 말년의 저술들을 덧붙여 심상규(沈象奎) 등이 1801년에 재편집하였고 1814년에 간행되었다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제28권에 보면 어명을 받들어 출정에 나서서 멀리 사막을 원정하고 한해(瀚海)를 건너 연연(燕然)에 다 자신의 공을 새겨 맹부(盟府)에 공이 있고 간편(簡編)에 이름을 남긴 것으로 말하자면, 어찌 일찍이 요사이 오영(五營)에서 하는 것과 같이하여 이렇게 된 것이겠는가. 라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의 역주에서는 애초 한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불분명한 것은 물론이고 얼토당토하지 않게 "銘燕然"을 중국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어디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지 묻고 싶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銘은 새기다로 해석할 수 있으나 연연(燕然)을 어찌 중국으로 볼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혹 당나라의 태종이 설치했다고 하는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을 앞뒤자르고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행태가 참으로 기괴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조시대때 사실상 사막 뿐만아니라 한해까지 영역을 하고 있었음에도 한반도를 벗어나면 무조건 중국영역이라고 하는 최면에 걸려 이성을 잃은 것이고 마찬가지로 아시아대륙 즉 동북아시아대륙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한반도사관에 찌들어버린 국사편찬위가 저지르는 만행이 아닐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해(瀚海)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그 근원적으로 따져보자.
먼저 우리나라 백과사전을 보면 한해는 우선.사막으로 나오고 두번째 해석으로는 고비 사막의 옛 이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지 자세히 살펴보자.
국한 명문신옥편(國漢明文新玉篇)
위는 1982년 2월 01일에 편찬한 국한 명문신옥편에 나오는 한(瀚)자를 볼 수가 있다.
그 의미를 광대모호(廣大貌浩), 질펀한 한으로 나타내고 북해명(北海名)이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이은 해석 아래 원표시에 물수변(水:氵)이 빠진 한(翰)를 표시하고 있는데 이 한(翰)은 날개 한, 편지 한, 그 외 산 새, 빠르게 날다, 높이 날다, 높다, 길다, 줄기 기둥, 깨끗하다 등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한의 근어 즉 원어라면 이것들은 깨끗하다거나 높다, 또는 기둥 등으로 의미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어 절대로 사막을 지칭한 한자(漢字)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즉 명문신옥편(國漢明文新玉篇)이 해석한 그대로 보면 한해(瀚海)는 광대모호(廣大貌浩) 즉 넓고 크고 어마어마하게 광대하다는 의미가 깊이 새겨 있으며 특히 형태적으로는 질퍽질퍽한 저지대 지역의 범람원 또는 질퍽한 습지, 늪지, 진흙땅, 부드러운 모래땅, 특히 단단한 얼음 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여기서 사막이란 해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더하여 광대모호(廣大貌浩)란 단어에서 모(貌)는 형상(形象) 또는 겉보기, 외관, 표면 등으로 해석할 수 있고 호(浩)는 넓을 호, 호한히[浩汗]이 (기본의미)이미 물이 질퍽질퍽한 넓은 땅으로 해석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한반도 사학자들이 즐겨히 인용하는 중국의 기록도 살펴보자.
먼저 소개 할 것은 1763년에 청나라 대창직예주진양현(太倉直隸州鎮洋縣)사람인 이석찬(李錫瓚)이 편집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인데 총 8권으로 이루어져 있고 중국에서는 초학(初學)의 교본으로 삼고 있다 한다.
이 이석찬은 명청(明淸) 시대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으로써 거인(舉人)이라고도 칭하였다.
먼저 당시삼백수에 나오는 잠참(岑參)의 백설가<白雪歌>이다.
잠참(岑參:715~770)은 조적(祖籍) 또는 본이 남양(南陽)으로 강릉(江陵)에서 출생하였다.
이 강릉(江陵)이란 지명도 중국과 삼한이 가지는 공통성을 지닌 지명 중 하나이다.
잠참은 천보(天寶) 3년(744)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천보 8년(749)에 안서사진절도사(安西四鎭節度使)이고 고구려사람인 고선지(高仙芝)의 막부에서 장서기(고려시대 7품 지방관직)를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몇 차례 종군하여 오랫동안 막부에서 보좌하였고 멀리 윤대(輪臺), 정주(庭州)에 주둔하였다가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비로소 귀환하였다고 나온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당은 중앙정부형태에서 고려의 편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체제이며 고선지가 당나라 장군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안사의 난으로 이러한 중정체제가 잠시 와해되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고구려가 그때까지 존재했을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깊이 연구해야 할 대상이다.
고적(高適)의 변새시(邊塞詩)가 주로 동북 지역의 전쟁 상황을 묘사하였다면 잠참의 필촉(筆觸)은 신강성(新疆省) 총령(葱嶺) 내외의 대서북 산천까지 확대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지역들도 동아시아대륙 역사에 영향을 받아 전해내려온다고 볼 수밖에 없다.
唐詩三百首(1)당시삼백수(卷二七言古詩059 白雪歌 送武判官…
〈白雪歌 送武判官歸京〉
岑參
北風卷地白草折
胡天八月卽飛雪
忽如一夜春風來
千樹萬樹梨花開
散入珠簾濕羅幕
狐裘不暖錦衾薄
將軍角弓不得控
都護鐵衣冷難着
瀚海闌干百丈冰
愁雲慘淡萬里凝
中軍置酒飮歸客
胡琴琵琶與羌笛
紛紛暮雪下轅門
風掣紅旗凍不翻
輪臺東門送君去
去時雪滿天山路
山回路轉不見君
雪上空留馬行處
[集評] ○ 此詩連用四雪字
第一雪字見送別之前 第二雪字見餞別之時 第三雪字見臨別之際 第四雪字見送歸之後
字同而用意不同耳 - 淸 章燮, 《唐詩三百首箋注》 卷2
〈백설가:서울로 돌아가는 무판관을 보내며〉
잠삼
북풍이 대지를 말듯 몰아쳐 백초 꺾이고
오랑캐 하늘 팔월에 벌써 눈이 날리어
홀연 하룻밤 새 봄바람 불어 와
천만 그루 나무에 배꽃이 피어난 듯
주렴 안으로 날아들어 장막 적시니
여우 갖옷도 따뜻하지 않고 비단 이불도 얇기만 하네
장군은 角弓을 당길 수 없고
도호는 쇠 갑옷 차가워 입기 어렵네
큰 사막엔 百丈되는 얼음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시름겨운 구름 참담히 만리에 엉켜 있네
중군에서 술상 차려 돌아가는 객과 마실 적에
어우러지는 호금과 비파 그리고 강적 소리
저녁 눈 어지러이 軍門에 내리고
바람 몰아쳐도 붉은 깃발 얼어 펄럭이지 않네
윤대 동문에서 그대 떠나 보내는데
갈 때 천산 길에 눈 가득하구나
산은 돌고 길은 굽어 그대 볼 수 없는데
눈 위에 부질없이 남아 있는 말 지나간 자국
역주8 瀚海闌干 : ‘瀚海’는 큰 사막을 말한다. ‘闌干’은 종횡으로 어지러이 널려 있는 모양이다.
위 시(詩)구절에서 보면 "瀚海闌干百丈冰 큰 사막엔 百丈되는 얼음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라고 되어 있다.
신기하지 않는가.
사막에 얼음이라니?
백장(百丈)이라는 것은 1장은 10척 길이를 말하고, 1장이 3.58m 이니 백장이면 358 미터(m)이다.
실제로 이러한 얼음덩어리라면 빙하(Glacier)라고 해야 맞다.
연중 강수량이 250mm 이하로 적은 데 비해 증발량이 많아 초목이 거의 자랄 수 없는 불모의 토지라고 정의된 사막에 백장[358m]크기의 얼음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고 하고 있는데 사막 평균온도가 40~50℃ 날씨에 도대체 빙하라니 이런 괴변이 또 있겠는가.
우리가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는 것은 어떤 대륙이든지 빙하가 나뒹구는 곳까지 조선시대 정조대왕의 영역이었다는 사실이며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당시삼백수의 2번째 시는 바로 주로 동북 지역의 전쟁 상황을 묘사했다는 고적(高適)의 연가행(燕歌行)이다.
고적(高適)은 자가 달부(達夫)이다. 발해(渤海)지역 수(蓨)성의 경현[景懸]사람이다.
이 고적이라는 사람도 고선지처럼 고구려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연가행(燕歌行)은 웅장하면서 쓸쓸한 변방 요새의 풍경과 군인들의 고달픈 생활,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정신을 그린 작품으로 정조(情調)가 비장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삼백수(1)卷二七言樂府 燕歌行 幷序
〈燕歌行 幷序〉
高適
開元二十六年 客有從御史大夫張公出塞而還者 作燕歌行以示適 感征戍之事 因而和焉
漢家煙塵在東北
漢將辭家破殘賊
男兒本自重橫行
天子非常賜顔色
摐金伐鼓下楡關
旌旆逶迤碣石間
校尉羽書飛瀚海
單于獵火照狼山
山川蕭條極邊土
胡騎憑陵雜風雨
戰士軍前半死生
美人帳下猶歌舞
大漠窮秋塞草腓
孤城落日鬭兵稀
身當恩遇常輕敵
力盡關山未解圍
鐵衣遠戍辛勤久
玉筯應啼別離後
少婦城南欲斷腸
征人薊北空回首
邊庭飄颻那可度
絶域蒼茫更何有
殺氣三時作陣雲
寒聲一夜傳刁斗
相看白刃血紛紛
死節從來豈顧勳
君不見沙場征戰苦
至今猶憶李將軍
[集評] ○ 適詩多胸臆語 兼有骨氣 做朝野通賞其文 至如燕歌行等篇 甚有奇句 - 唐 殷璠, 《河岳英靈集》 卷上
○ 此詩多對偶句 功力深筆力亦到 非他人可及 卽李頎古從軍行亦覺遜色也 - 現代 劉開揚, 《高適詩集編年箋注》, 中華書局, 1981
〈연가행 병서〉
고적
개원 26년(738), 어사대부인 장공을 따라 변새로 출정하였다가 돌아온 객이 있어 〈연가행〉을 지어 나에게 보였는데, 출정하여 수자리 살던 일에 느낀 바가 있어 화답한다.
한나라의 동북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나
한나라 장군은 집 떠나 잔악한 적 물리쳤네
남자는 본래 전장에서 종횡무진하는 것 중시하니
천자가 특별히 총애함에 있어서랴
징을 치고 북 두드려 산해관으로 내려가니
깃발들은 갈석산 사이에 연이어져 있네
校尉의 羽書는 사막을 날듯이 건너오고
單于의 사냥하는 불빛은 낭산을 비추는구나
산천은 황량하여 변방 끝에 달했으니
오랑캐의 기병들은 비바람 몰아치듯 침범한다
병사들은 軍陣 앞에서 태반이 戰死하는데
미인들은 장막 안에서 여전히 춤추며 노래하네
큰 사막은 가을이 깊어 변새의 풀들 시들어지고
외로운 성에 해 지는데 싸우는 병사 드물다
몸은 나라의 은혜 입어 항상 적을 경시하지만
병사는 온 힘 다해 관산에서 싸워도 포위를 풀지 못한다
철갑옷 입고 멀리 수자리 사니 고통과 수고가 오래되었고
아내는 옥같은 두 줄기 눈물 이별 후에 응당 흘렸으리라
어린 아내는 城南에서 애간장 끊어지려 하는데
원정 간 남편은 薊北에서 공연히 고개만 돌려보네
변방은 아득하니 어찌 건널 수 있으랴
넓고 먼 외딴 땅에 무엇이 있으리오
殺氣는 하루 종일 서려 戰雲을 만들어내고
밤새도록 차가운 조두 소리 전해오네
바라보니 흰 칼날에 혈흔이 군데군데
예로부터 절개에 죽지 어찌 공훈을 돌아보랴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사막에서 싸움하는 고통을
지금도 여전히 이장군을 그리워하고 있다네
역주11 瀚海 :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동북부의 대사막 즉 고비사막이다. 唐代에는 奚人에 의해 점령당한 곳이었다.
摐金伐鼓下楡關
旌旆逶迤碣石間
校尉羽書飛瀚海
單于獵火照狼山
징을 치고 북 두드려 산해관으로 내려가니
깃발들은 갈석산 사이에 연이어져 있네
校尉의 羽書는 사막을 날듯이 건너오고
單于(흉노추장)의 사냥하는 불빛은 낭산을 비추는구나
이 시의 해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해(瀚海)를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동북부의 대사막 즉 고비사막이라 한 것처럼 산해관이나 갈석산은 현 동아시아대륙역사에 근거하는 지명으로써 그곳 가까이에 고비사막을 겨냥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한해가 질퍽질퍽한 습지, 늪지, 진흙땅, 부드러운 모래땅, 단단한 얼음, 즉 빙하라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이러한 지명들은 모두가 조작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貞觀政要集論(2)
정관정요집론(2)제12편 規諫太子
貞觀五年에 李百藥이 爲太子右庶子러니
時太子承乾注+이 頗留意典墳注+이나 然閑讌之後에 嬉戲過度어늘
百藥이 作贊道賦以諷焉하니 其詞에 曰
下臣이 側聞先聖之格言하고 嘗覽載籍之遺則호니
伊天地之玄造와 洎皇王之建國에 曰人紀與人綱이 資立言與立德하니
履之則率性成道하고 違之則罔念作忒하여 望興廢如從鈞하고 視吉凶如糾纆注+이니이다
至乃受圖膺籙하고 握鏡君臨하얀 因萬物之思化하여 以百姓而爲心하고 體大儀之潛運하여 閱往古於來今이니이다
盡爲善於乙夜하고 惜勤勞於寸陰注+이라
故能釋層冰於瀚海하고 變寒谷於蹛林注+하며 總人靈以胥悅하고 極穹壤而懷音이니이다
貞觀 5년(631)에 李百藥이 太子 右庶子로 있었는데,
당시 태자 李承乾이三墳과 五典에 뜻을 두었지만 한적하게 지낼 때 유희를 즐기는 것이 과도하자 이백약이 〈贊道賦〉를 지어 풍간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先聖의 바른말을 살며시 듣고 지난 典籍에 들어 있는 법칙을 일찍이 열람하니,
하늘과 땅이 창조되고 제왕이 국가를 건설할 때 인간의 紀와 綱이 임금이 세운 말과 확립한 덕에 힘입었으니, 이를 실천하면 本性대로 실천하여 道를 완성하고, 이를 어기면 생각하지 않아 사특한 일을 하여 그 흥성과 폐망이 마치 저울 무게처럼 정확함을 보게 되고, 吉과 凶이 먹줄과 똑같음을 보게 됩니다.
圖(그림)를 받고 籙(책 상자,장부)에 부응하여, 거울을 잡고 임금으로 임하게 되어서는 만물의 변화에 따라 백성으로 마음을 삼고, 大儀의 조용한 움직임을 체득하여 지나간 과거를 현재에서 들여다보았습니다.
한밤에 선을 행할 것을 극진히 헤아리고, 寸陰(아주 짧은 시각)의 시간을 아끼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瀚海에서 쌓인 얼음들을 녹이고, 蹛林(흉노추사의 거처)에서 추운 골짜기를 변화시켰으며, 온갖 신령과 백성들이 서로 기뻐하고, 온 누리가 그 말씀에 교화를 받았습니다.
역주9 瀚海 : 翰海로, 고비사막의 옛 이름이다.
끝으로 예시하는 기록은 원 문종 지순(至順) 4년(1333)때 원나라 오징(吳澄)의 문인 과직(戈直)이 당나라부터 송나라까지 22명의 평론을 모아 당(唐)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적을 기록하고 출판한 정관정요집론(貞觀政要集論)이다.
이 기록역시 역주에서 한해를 고비사막이라고 해석하였음에도 한해(瀚海)에서 쌓인 얼음들을 녹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세편의 기록들을 보았지만 하나같이 고비사막을 인용한다든지 동아시아대륙 역사 지명과 위치를 그대로 따라 해석 주역을 달고 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제는 그만 어리석음에서 깨어날때도 되지 않았는가 한다.
여기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한해는 분명 사막이 아니라 얼음 덩어리가 나 뒹굴고 있는 곳, 한자로 해석을 하면 질퍽질퍽한 습지, 늪지, 진흙땅, 부드러운 모래땅그리고 백장(百丈) 단단한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나뒹굴던 옛 땅 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근대 자연환경을 보면 빙하 조차 녹아내려 과거 정조대왕이 지배하던 땅에 빙하들이 온데간데 찾을 수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인식되고 있는 사실들을 왜곡하고 조작하려는 행위는 중단되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우리는 긴 잠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우리의 역사는 찬란하고 거대했음을 우리는 알 때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곳은 절대 동아시아대륙의 고비사막도 아니요 더 나아 간들 북부 땅, 지금까지도 버려진 땅 시베리아라고 할 수가 없다..
그와 다르게 시선을 돌려 북아메리카대륙을 보자.
캐나다와 미국 사이는 얼음의 순상지로 알려진 곳에 로엔타이드 빙상이 있었다.
로렌타이드 빙상(Laurentide Ice Sheet)은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약 260만년에서 11,700년 전) 동안 북아메리카의 주요 빙하 덮개였다. 최대 범위는 북위 37도(오대호남부 일리노이주 카이로 오하이오강과 미시시피강 합류점)까지 남쪽으로 퍼져 1,300만km²(5,000,000 square miles) 이상의 지역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일부 지역에서는 두께가 2,400~3,000m(8,000~10,000 feet) 이상에 달했고 로렌타이드 빙상은 래브라도-웅가바 고원과 캐나다 북극 섬의 산악 지대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허드슨 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이 퍼지면서, 그 빙하 덩어리는 캐나다 동부와 미국 북동부의 고지대에 형성되었던 다른 빙원들과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로렌타이드 빙상(Laurentide Ice Sheet)의 경우 높이 3.2km라 한다.
로렌타이드 빙상은 북아메리카의 또 다른 거대 빙상인 코딜레란 빙상과 연결된다.
코딜레란 빙상(Cordilleran Ice Sheet)은 최근 빙하기에 북아메리카 서부 연안 산맥을 따라 미국 워싱턴주 북서부 퓨젓사운드 만에서 알래스카 서남부 알류샨 열도까지 4800km에 걸쳐 펼쳐져 있었다 한다.
급속하게 빙하가 녹았다는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현재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 변화 방지를 위한 전세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온난화가 지속되며 지구 빙하의 절반이 녹을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2016년까지 55년 동안 9625 기가(giga)톤(9조 6250억 톤)의 빙하가 녹아내렸다.
근대에 들어 가장 많이 빙하가 손실된 곳은 알라스카이며, 두 번째는 그린란드이고 이어서 남부 안데스 산맥의 빙하가 세 번째로 많이 녹았다고 하였으며 캐나다, 러시아 극지방과 스발바르 지역 빙하도 역시 크게 줄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땅은 빙하가 녹아 실제로 질퍽질퍽한 북아메리카대륙 북부 땅,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며 이 지역은 2.5 억년에서 42 억 년 사이에 생성된 캐나다의 순상지(楯狀地 :shield) 즉 약 200만 개가 넘는 담수호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563개가 면적이 100 (km²)가 넘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반도사학자들이 사막이라고 난리치던 한해(翰海)는 바로 이곳에서 찾아야 하고 역사의 올바른 지명들은 이곳에서 머지 않는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이러한 잘못된 현 역사 사실을 깊이 우리는 알고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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