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한부울 2014. 5. 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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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글쓴이:한부울

 

서두

1848년 북아메리카대륙 수송선 라인 태동과 거대선박출현
한심한 반도역사
18,000톤급 코리아(korea)호 탄생과 대공화국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항로
태평양 횡단의 여부 확인과 마무리

 

서두

 

세월호참사!국민의 한사람으로 안타까움과 그 비통함은 말할 수조차 없다.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황당한 사건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놀라움과 그들을 구할 수 없었다는 좌절감과 무능력에 따른 자괴감이 온 나라에 퍼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어른들이 어린 자식들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감을 저버리는 행태로 나타나는 것으로 언제까지고 벗어날 수 없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에 대한 존경심이 한꺼번에 무너지게 하는 나쁜 행태의 사고임에 틀림이 없다.또한 세계에 이 창피스러운 사고 뉴스가 세세하게 알려지면서 그동안 어렵게 구축한 한국인들의 나름대로의 이미지와 대한민국의 명성에도 한꺼번에 금이 가게 한 사고이다.미국에서는 배를 버리고 선장이 도망간 사실에서도 비난을 하고 나섰는데 선장의 전통이 무너지는 행위라고까지 하였다.실로 창피스럽고 민망하기가 그지 없다.세월호는 여객 화물 겸용선(Ro-ro ship)으로 1994년 6월 일본 나가사키의 하야시카네 선거(林兼船渠)에서 건조한 배수량 6,835톤, 전장145m, 선폭22m, 속력최대 21노트, 정원921명, 구명보트 46대를 장착하고 있던 배란 사실이 밝혀졌다.이 여객선이 2014년 4월 16일에 진도군 해상 관매도 서남방 약 2.7 km 해상에서 침몰하여 수많은 어린 귀한 목숨을 앗아간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대한민국에서 발생하였다.때문에 대한민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침통할 수밖에 없다.세월호 참사는 사회 이윤추구에 눈이 먼 비도덕적인 상업술이 만든 재난이라고 한다.언론에서는 사회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관료부패에 의한 관리부족에 따른 일탈(逸脫)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언론들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익히 다 잘 아는 이야기다.이 사건에 가장책임이 있는 비도덕적인 상술을 부린 업체의 직간접적인 관계자와 직무유기 및 과실이상의 죄를 면할 수 없는 선장 및 승무원들은 법에 따라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들과의 유착관계를 가지고 있는 관료들도 발본색원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치 않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비도덕적인 상술이나 책임의식도 없는 선장의 직무유기에 따른 사고라 할지라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명피해가 발생된 것은 국가의 안전 관리 부족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가까운 일본예를 들 필요조차 없다.사고 당시 일사분란한 구출체계가 만들어지지가 않았던게 문제였던 것이다.사고 지점에서 해양관할지인 목포 서해지방해양경찰청도 직선거리 약 76km 정도로 가깝고 2006년에 세워진 진도해상관제센타는 도대체 무얼하였는지 알 수가 없으며 실제로 이렇다면 해양경찰청이라는 조직은 존재가치가 없다.배가 전복된 뒤에도 한시가 급한 위급한 상황에서 유명무실한 해경만 믿고 국가가 손을 놓고 방관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또한 안타깝고 지극히 걱정스러운 것이다.좀 더 서둘러 적극적으로 모든 국가 조직이 임했더라면 아까운 생명 단 한명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드는 것은 무리한 희망사항이었을까. 만약 단 한명의 목숨이라도 구할 수 있었다면 그나마 슬픔에 쌓인 유가족들과 국민들이 위안을 가질 수도 있었을 터인데 애석한 마음 금할길이 없다.

 

1848년 북아메리카대륙 수송선 라인 태동과 거대선박 출현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산업 혁명(産業革命)에 의한 기계 발달이 가져다 준 것은 바로 운송수단인 기차와 기선의 발달이다.1814년에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1781-1848)에 의해 1830년부터 철도가 개설되고 증기기관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결국 북아메리카대륙 골드러시가 시작된 1848년부터 화물과 승객들을 실어나를 수 있는 기차와 수송선이 적시에 필요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모든 물질문명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기차는 철로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에 일단 제약을 받지만 수송선은 강이나 바다를 이용하기 때문에 그렇지가 않다.당시 북아메리카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특별한 교통로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골드러시(Gold rush)가 있었던 서부 해안을 따라 이동할 수 있는 연안항로가 개발되었고 금(gold)을 위주로 하는 화물과 승객들을 실어날으는 수송선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던 때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반면에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는 캘리포니아 주의 세크라멘토(Sacramento)에서 늦은 1863년에 시작되어 2,826km 거리의 종착역인 네브래스카 주(Nebraska州)의 오마하(Omaha)를 잇는 철도가 완성된 시기가 1869년이다.때문에 1869년까지는 연안항로 운송수단인 수송선 라인(line)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이 사업을 제일 먼저 시작한 사람이 뉴욕 상인 윌리엄 아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인데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으로서 1848년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1848–1866, 1872–1874), 오리건호(SS Oregon:1848–1861), 파나마호(SS Panama:1848–1861) 3척을 건조하여 운송을 시작한 것이 바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이다.이렇게 수송선과 여객선의 선박기술은 점차 날로 발전하게 되는데 바로 1902년에 가서는 종전에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사상최대 규모인 18,000톤급을 건조하게 되었고 이것의 이름이 놀랍게도 "코리아호(Korea)"라는 것이다.

 

 

 

 

 

코리아호가 건조되고 난 후 불과 10년만인 지금으로부터 102년전 1912년 4월 14일에 발생한 타이타닉(ROYAL MAIL SHIP:Titanic) 침몰사고를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것은 대서양횡단에 따른 사고이다.초창기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뀌는 것이 1848년이라면 이때부터 1899년까지 스팀선 10,000톤을 초과하지 못하다가 1900년부터 경쟁적으로 대형선박 건조가 시작되면서부터 1911년에 50,000톤을 넘는 타이타닉 건조에 이르니 선박건조술 발달이 한마디로 눈부시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에서는 10,000ton 이상의 배를 1898년부터 건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코리아호가 건조되던 시점인 1902년경에 이 회사에서는 켈틱호(RMS Celtic)가 20,904(톤)규모로 건조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거대한 힘, 크다. 거대하다(great force or power, big, large) 뜻인 여객선 타이타닉(RMS Titanic)은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보다 앞선 1845년에 창업한 영국의 화이트 스타 라인(White Star Line)소속으로 이 배는 1909년에 건조하기 시작하여 1911년에 진수하였고 1912년 취역한 52,310톤급 배로서 전장길이 269m, 전폭28m, 홀수 19.7m로 엔진추진은 증기터빈형식의 속력 20knots 이며 정원이 3,327명으로서 당시 실로 엄청난 규모의 여객선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이 여객선은 [자료2]에서 볼 수 있듯이 1912년 4월 14일 잉글랜드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출발하여 프랑스 셰르부르(Cherbourg), 아일랜드의 퀸즈타운(Queenstown)에 거치고 최종 기착지 뉴욕(New York)을 향해 항로가 시작되어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빙산경고를 무시한 통신사의 태만으로 빙산과 충돌한 사고라 한다.사고 당시 탑승한 승객은 2,435명이었으며 구명정 20척의 정원 1,178명으로 구명정으로는 승객의 반도 태우지 못할 숫자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처음부터 어쩔 수 없이 배가 침몰하게 되면 구명정을 탈 수 없는 나머지 사람들은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당시 왜 이처럼 사고에 완벽하게 대비할 수 없었는지 지금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고 시간은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에 빙산과 충돌한 기록이 있고 때문에 충돌한 주갑판 우현에 구멍으로 물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익일 15일 오전 2시 20분에 완전히 침몰하고 만다.
빙산과 충돌한 후 정확하게 2시간 40분만에 침몰한 것이다.
총원 2,224명 중 구명정 20척 중에 16척이 내려져 710명이 구조되고 결국 1,514명은 배와 함께 사망하였으며 구조된 인원에서 여자가 74%이고 남자는 20%였으며 1등실 여자승객의 97%가 구조가 되었다는 사실과 승무원 908명 중 구조된 인원은 212 명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선장은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고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다만 이 타이타닉이 1911년에 출현된 것을 보면 50,000톤급을 넘는 배가 그 때부터 건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000톤급을 최초, 최대선박이라고 한지 불과 10년만에 타이타닉(Titanic)이름처럼 대형선박이 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선박건조기술에서 1900년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의 전환기였다고 할 수 있다.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것은 본래 초강대국의 이름이 붙기 마련이다. 근세기 서양세력들이 설치기 전 하나의 나라가 존재했다면 근세기에 들어 갑자기 생성된 질서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나라가 생성되고 하나에서 조각조각 나누어지게 시작한 것이라면 하나의 나라이름은 거의 종교같은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현대에 들어 가장 큰 배를 이야기 한다면 단연 항공모함으로서 30knots 속력과 101,000 to 104,000 tons(톤)의 다목적핵추진“CVN 77 -조지 부시함(USS George H.W. Bush)”을 들수가 있다.

물론 소유는 최강의 세계경찰국인 미국이기 때문에 그들 통치자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이것의 전통인 것은 1929년 달러회사(Dollar SS Co)에 의해 당초 만주리아호와 몽골리아호를 미국대통령 이름으로 바꾸면서부터 시작된 전통이겠다.

그렇다면 선박건조기술의 전환기인 1902년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어 명명한 이름의 국가가 한반도에서 사방 각축을 견디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기 일보직전에 있는 그래서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국가명이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korea” 란 이름은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죽은 이름이 아니라 1900년까지도 세계에서 종교같은 존재로 건재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바로 반도역사가 말하는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일 수밖에 없다.

 

 

 

위 그림엽서[자료3]은 제비꼬리 모양에 5개의 수평인 줄무늬의 레드, 화이트, 블루, 화이트, 레드색의 깃발은 1949년에 공식적으로 폐쇄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의 깃발이다.

 

 

                                        

 

마치 1차대전 당시 중국(CHINA) 깃발과 흡사하다.

이것을 차이나 리퍼브릭 네숀날이라고 하였는데 당시 공화국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대만으로 쫓겨간 세력인 장개석 군벌이지 역사를 가진 나라라고 볼 수 없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은 바로 "그레이트공화국(Great Republic)"이다.

이 깃발아래 사진은 바로 1901년에 건조된 최대규모의 선박 수송선인 코리아호(KOREA)의 모습이다.

 [China Republic national flag, 1912-1929]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무엇때문에 무슨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길래 1848년 설립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그것도 최초의 기념비적인 18,000톤급을 건조하고 "코리아(KOREA)"란 선명을 붙였는지 반도역사 상식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심한 반도역사

 

그렇다면 반도역사상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은 19세기부터 불어닥쳤다고 하는 서세의 일방적인 개방이다.

서양세력들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엽에는 덩달아 일본군벌세력들까지 나서 이 개방이란 용어를 사용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요구한 개방이 무엇을 뜻하는지 잠시 알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

사전적으로 개방(開放)이란 문(門)이나 어떠한 공간(空間)따위를 열어 자유롭게 드나들게 만들거나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어떤 측이 일방적인 요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문제가 단어속에 분명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반도역사는 이러한 요구의 이유를 당시 천주교 종교탄압과 힘없는 조선 권력이 조치한 쇄국정책을 비판하는 것으로서 나타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서세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개방을 요구하는 측과 개방을 요구받고 개방하지 않겠다는 측의 쌍방간 무엇이 주된 것인지 알지 않으면 안된다.

솔직히 어느나라든지 나라를 한꺼번에 흔들 수 있는 외세를 선뜻 좋아 할 턱이 없다.

그것은 당사자가 선진국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차원이라면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듯 반도역사가 서세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서세편에서 만든 역사라는 것이 증명이 일된 되는 것으로 서세가 종교탄압이나 쇄국정책의 문제라 한 것은 오히려 문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는 개방을 요구하는 측이 매우 불손한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이미 파악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코리아는 골드러시의 발원지며 은(銀)도 대량으로 산출되었다는 사실이 명명백백 밝혀져 있다는 것을 무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코리아에서는 불손한 의도의 개방을 원치않았던 것은 당연하다.

개방을 요구하는 세력들이 체제전복이나 그들의 물욕에 의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어 마치 반도역사가 대변하듯 종교탄압이나 쇄국정책을 원인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젯밥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서세가 원하는 것으로 허울 좋은 개방일 뿐이지 코리아입장에서는 결코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의 장사속은 이문을 최대한으로 높여 일확천금을 벌어 자본력을 축적하는 것이며 최대한 독점적 이문과 이윤을 노린 과욕에서 나온 매우 이기적인 요구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한쪽은 국가 재산인 자원을 보호하고 지켜려 하였다면 한쪽은 그러한 자원을 갈취하거나 탈취하려는 세력이라고 할 때 분명히 자잘못이 가려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도역사는 어쩔 수 없이 일제가 만든 역사이기 때문에 자잘못을 가릴 수 없는 역사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1868년 독일인 유대계 상인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입국을 막았음에도 무단으로 침범하여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을 일으킨 사실만 보더라도 그들의 목적이 본래 무엇인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에도 용인될 수 없는 문화재나 유물 또는 보물등을 탈취하고자 하는 범죄행위이다.

이러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반도역사는 냉정하게 따질 수 없었던 것인지 비통하고 한심하다는 것이다.

서세가 일방적으로 개방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조작이다.

이것을 반도역사는 역사라고 가르친다.

개방하라고 요구하고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남의 나라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유물을 도굴했다는 것은 현재 시각으로도 비난받기에 충분한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행위이다.

아마도 현재 경찰국인 미국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범죄행위를 덮어두고 응대하였을리가 없다.

개방을 하라고 해서 문이나 공간을 열어주면 나라전체를 혼란에 빠뜰릴 수 있는 위험한 족속들이기 때문에 아예 상대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쇄국정책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 일방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힘이 없는 나라라 할지라도 불손한 세력들이 무조건 쳐들어와 위와같이 마구잡이 침탈과 탈취행위를 한다면 개방이 아니라 도둑질을 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이처럼 간단한 이야기 하나만 보더라도 반도역사가 얼마나 조작되고 엉터리같은 역사인지 알 수가 있다.

또한 기가 막히는 것은 서세가 이렇게 요구하는 것을 정당화하여 똑같은 방법으로 일제도 개방하지 않는 조선에게 강압의 수단으로 함포위협을 가한다는 장면의 한심한 설정이다.

이것은 1853년 존재하지도 않은 일본역사를 동아시아대륙 열도에 만들면서 시작된 것으로 근세기 역사라고 하여 명치정권이 태동한 배경을 미국의 함포위협을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 할 수 있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이것들 모두가 가공된 것이라고 인식할 수밖에 없다.

대조선 속국으로 존재하던 강호시대(江戸時代) 막부정권(幕府将軍)에서 명치정권으로 바뀌는 상황설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는데 서세의 자본주의가 형성된 시점은 대체로 1853년에서 1877년이라고 하였고 시작되던 1853년에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1794-1858)가 흑선(Blackship)이라 칭하기도 하는 2,450톤급의 전장길이 78 m, 폭 14 m, 홀수 6.25 m, 스팀엔진(Steam engine)장착에 속력은 10knots(19km/h)로서 북아메리카·서인도 함대(North America and West Indies Station)소속인 프리깃함 미시시피호(USS Mississippi)를 몰고 열도 우라가(浦賀)에 입항하여 함포사격을 가한 때부터라고 설정한데서부터 개방이라는 용어가 파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다시말해 쇄국정책을 대조선이나 막부정권이 똑같이 하고 있었으나 자본주의가 형성되어야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방이 필요하여 강제적으로 함포위협을 한다는 식이다.

근세사는 서양세력에 의해 마치 이것이 정당한 것처럼 몰아가지만 자본주의 형성과 개방이라는 것은 무단으로 침입하여 자원강탈과 문화재 침탈을 강행하고 물리적 시위에 의한 강압적 강제 교역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실제로 미시시피호가 현재 열도 일본에 있는 우라가에 입항했는지에 대해 거의 회의적인 시각이 없지 않다.

이 배가 본래 버지니아 주(Virginia)노퍽(Norfolk)이 기항임을 알 수 있고 멕시코 미국전쟁(Mexican-American War:1846.4.25–1848.2.2)에도 참여했으며 1849년부터 1851년까지는 지중해(Mediterranean Sea)를 돌아다녔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국 아주 초보적인 스팀선으로 과연 이것으로 태평양을 횡단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산처럼 쌓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마찬가지로 근대사는 한꺼번에 똑같은 패턴으로 몰아감을 알 수 있는데 서세가 일본에서 무력시위한 것처럼 그대로 반도역사에서도 1874년 4월 20일 부산에 입항한 일본의 운양호(雲揚號)가 무력시위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운양호(雲揚號)의 규모를 살펴보면 미국 미시시피호에 미치지도 못할 규모임을 알 수 있다.

고작 119척(36m)의 길이에, 폭24척(7m), 배수량 245톤, 속력10knots, 엔진2기통 왕복동기관 1축 추진(1-shaft Coal-fired steam engine)을 탑재하고 무장으로는 160mm전장포1문, 140mm포1문을 장착한 것으로서 승무원 65명인 기선과 범선 양용목조선(木造船)에 1870년 영국(Alexander Hall and Sons)회사에서 건조된 거의 소형규모에서 흉내만 낸 것이다.

무슨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운양호는 건조된 후 7년만인 1877년 5월 14일에 동강내어 팔아버렸다고 나온다.

내가 보았을 때 흔적 지우기로 보일 뿐이다.

아무리 꽉 막힌 그래서 쇄국정체를 하였다는 한반도에 갇혀 세상 물정을 모를 수밖에 없는 허접한 조선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이런 따위 규모의 함선을 몰고 들어와 함포사격을 가한다고 나라 전체가 공포에 떨었다고 할 수 있으며 무력 시위한다고 조선국왕이 덜컥 겁을 먹고 조작투성이인 임진왜란식의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된 것처럼 만들어 개방을 허락하였다고 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한편에 잘 다듬어진 소설이다.

정한론(征韓論)은 열도 일본이 한반도를 잡겠다는 주장이 아니라 서세신흥세력들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있는 삼한을 정복하겠다는 말로 풀이 될 용어이지 감히 열도 일본세력이 사용할 용어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어찌보면 안타깝지만 결국 정한론은 이미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서세신흥세력들이 현재 삼한역사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들의 역사를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도역사는 조선 역사라고 하고 있으니 실로 굴욕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866년에 침입한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가 개방을 요구하고 무단으로 평양까지 침범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배의 규모가 614톤 또는 더 작은 강(江)이나 연안(沿岸)용인 187톤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 선박의 이력을 보면 최후 폐선된 사실에서 전혀 위 사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또 병인양요(丙寅洋擾)사건에서 프랑스의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가 양력11월17일에 프리깃함 게리에르(Guerrière)를 포함한 7척의 군함과 도합 800명가량의 해병대를 동원해 강화도 부근 물치도(勿淄島)까지 진출했다고 한 사실에서도 프리깃함 게리에르(frigate Guerriere)의 전함을 밝혀보면 게리에르란 전함기록으로는 딱 두 척이 있는데 하나는 1508톤의 길이가 53m로서 1814년에 필라델피아조선소(Philadelphia Naval Shipyard)에서 건조되어 1841년에 부서졌다는 것이 있고 나머지 한척은 명확하지 않으나 약 2700톤급으로서 길이가 97m, 속력 13knots로서 1865년에 보스톤조선소(Boston Navy Yard)에서 건조되어 미국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때 사용되었으며 1872년에 팔렸다고 하는 범선형 프리깃함을 들 수가 있다.

프랑스에서 직접 건조한 배가 아닌 것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의 행방역시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적절하게 한반도용으로서 꾸민 한심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시기적으로는 후자의 배가 맞을 것 같지만 놀랍게도 이 배는 프랑스의 로즈가 항해했다는 것과 달리 팔리기 전까지 1871년 4월 7일부터 지중해의 트리폴리에서 이집트, 레바논, 이탈리아, 프랑스의 포트를 누볐다고 나오며 주로 뉴욕근역에서 취항했음도 알 수가 있다.

정체가 모호한 것이다.

 

[사진자료:위키] 

 

Admiral Roze (centre) and a quarter of his sailors, on the frigate Guerrière. Circa 1865 photograph, during a visit in Nagasaki harbour.[병인양요에 참가한 프랑스 해군]

 

위의 사진은 구즈가 그의 행동대원들과 사진을 촬영했다고 하는데 바로 일본 나카사키 항구(Nagasaki harbour)에서다.

나카사키는 쿠바 하바나(Habana)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가 없다.

결국 무엇으로도 이들이 강화도에 도착한 사실의 행방을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여기서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Pierre-Gustave Roze,1812-1882)가 함대를 몰고 들어간 곳은 결코 동아시아대륙 한반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거의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와 미시시피강이란 지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듯 특히 18세기부터 시작된 동아시아대륙 서세활동에서 근원적으로 판단할 것은 해적들의 마구잡이식 또는 위험을 무릅쓴 모험적 항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기록에 남길 수밖에 없는 태평양 횡단(Trans-Pacific)사실은 결코 없었다는 판단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1912년 타이타닉이 침몰한 것을 볼 때 대형선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1900년부터 대서양횡단이 가능했다고 보이지만 아마도 여객선으로 운항한 것은 타이타닉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태평양횡단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에 단적인 예가 바로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으로 손에 넣은 것이 1900년 4월 30일이다.

결국 동아시아대륙을 빈번하게 오고갔다면 이미 벌써 하와이를 합병했어야 했다.

왜냐하면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넘어 들어가기 위해선 하와이의 호놀룰루(Honolulu)가 필수 기항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라가에 입항한 1853년 경부터 하와이를 합병할 수 있는 운행기록이나 합병을 암시하는 사건들이 나타나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암시가 샌포드 돌(Sanford B. Dole)에 의해 하와이혁명으로 나타난 시기는 늦은 1893년이다.

그렇다면 1895년에 발생하였다고 하고 동시다발전쟁이라고 하는 미서전쟁(美西:Spanish-American War)도 결코 동아시아의 필리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일본 우라가 입항뿐만 아니라 서양세력들이 동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들락거렸다는 사실 모든 기록들이 거짓이고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1848년 설립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 절대 아니다.

 

물론 당시 동아시아대륙 알타이산맥에서 금이 나와 골드러시가 파생된 것이라면 가능한 이야기다.

미안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알타이산맥도 북아메리카대륙 금이 산출된 로키산맥이라는 것도 이미 본 블로그의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 "에서 밝힌 마당이니 결국 골드러시는 세계에서 단 한 곳 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란 사실이다.

이렇게 생겨 난 것이 바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이니 이것이 바로 역사이다.

 

반도역사가 만들어낸 한심한 이야기가 또 있다.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건립되고 난 후 1902년 말 해군창설과 함께 군함을 도입하였다는 사실에서 보면 일본 미쓰이(三井)회사로부터 화물선을 급히 개조한 것으로서 비용 250,000圓(250,000 Korean Won, or 550,000 Japanese Yen:환율1:2)을 들여 3,500t(급)인 양무호(楊武號)라는 명칭의 군함을 도입하였으나 경비만 들어가 폐기하였다지만 이상하게 이것이 다시 1905년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1904-1905)당시에 일본이 사용하였다는 사실이 참 희한하게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대한제국에서 폐기한 것을 일본이 다시 전쟁에 투입한다?

이것에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대한제국이 비용을 들인 것 만큼 만족할 수 없었던 배이었거나 아니면 일본이 적당하게 사기를 쳐 폐기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1902년이니 이때 이미 18,000톤급 코리아호가 건조될 때 이므로 3,500톤급정도는 군함으로서의 가치가 반감된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대한제국에서 폐기한 선박을 전쟁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은 당시까지 낙후된 국가였음을 알 수 있고 러일전쟁이라고 하지만 허접한 선박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지역간 이권이나 신진 군벌간 세력 확보로 인한 충돌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 대한제국은 이렇게 한번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체 반환하는 사태가 있었음에도 재차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는데 일본의 가와사키조선(川崎造船)에서 건조한 광제호(光濟號)를 훨씬 비싼 가격인 350,000(圓)을 투입하고 1904년 11월에 마침내 대한제국 정부가 인도 받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군함이라고 하는 광제호(光濟號)다.

놀랍게도 이 배의 규모를 보면 오히려 폐기한 양무호보다 작은 것으로서 전장 220척(66.7m), 너비30척(9.1m), 선심21척(6.4m)에 화물적재량 540t(톤), 총 톤수 고작1,056t(톤)이며, 주기관은 3연성 레시프로기관(Recipro Engine)2대, 출력은 2,483마력, 최대속도는 14.77노트(knots)이고 무장은 3인치포 3문을 장착한 당시의 조선술로는 최신의 기선이라고 하고 있지만 어쨌던 폐기한 양무호 규모의 1/3 수분밖에 되지 않아 1850년대 수준의 뒤떨어진 선박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904년에서까지 대한제국에서는 최초의 군함을 자체기술로 건조하지 못했다고 하는 설정은 반도역사 설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04년에 일본인 회사에게 맡겨 인수한 것이 고작 1,000톤 수준이며 이것을 최신의 기선이라고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반도역사가 우릴 끝까지 우롱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래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선이 코리아(korea)이름으로 진수된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지기 때문이다.

 

18,000톤급 코리아(korea)호 탄생과 "대공화국"

 

위 반도역사를 생각할 때 참으로 이것은 꿈같은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이야기의 명확한 사실확인을 위해 아래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두 지면의 보도[1],[2]를 게시한다.

 

            [샌프란시스코만 골든게이트를 통과 밖으로 향하며 넘실되는 정기선:코리아호]

 

 

 

 

 

[1]루이스턴 데일리 선(The Lewiston Daily Sun)  

 

 

 

 

 

[번역]오늘 뉴 포트 뉴스에서 증기선 코리아호가 진수되었다고 한다. 조선소에 따르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대서양의 연안에 있는 최대 규모의 스팀 선박에서 최고의 것이다. 길이 572피트 4인치 빔 길이 63 피트의 배는 27 피트의 흘수에서 1만8천 톤의 배수량이다. 코리아호의 크기의 일부 아이디어는 이 배의 레일 주변의 거리가 선체 위에서 바닥까지의 거리가 40 피트로서 거의 4분지 1 마일이다. 18~20 노트에서의 속도로 추진하기에 충분한 : 18,000 마력의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코리아호는 1400명의 편의를 제공할 것이며 누구든지 200개의 1등선실의 승객 될 수 있다. 이 배는 샌프란시스코와 홍콩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기 위한 태평양 우편 증기선 회사의해 설계되었다. 

 

[2]미국함선공학회신문

Journal of the American society of naval engineers.

May. 1902

THE PACIFIC MAIL STEAMSHIP KOREA. by Lieutenant Charles K. Mallorv. U.S.N.

******

The new 18,000-ton steamer korea, built at the works of the Newport News Shipbuilding and Drydock Company, Newport News, Va., for the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 has completed a successful trial, during which it is estimated that a speed of 20 knots was obtained:the contract called for 18 knot, but the builders expected to exceed this amount.

The Korea and her sister ship, the Siberia, the latter not yet completed, are intended for both passenger and freight traffic on the line between San Francisco and ports of China and Japan.

In the design of these ships especial attention has been giver to sanitary items in vessels making the long run across the Pacific.

Accommodations are provided for 220 first-class passengers: 54 white steerage, and 1,144 chinese: should the latter not be carried, the unoccupied space will be used for additional cargo.

Provisions are made for the ship's complement as follows: Nine deck officers, 10 engineers, 41 deck hands, 111 in engineer's force, and 63 stewards.

 

[번역]1902년 5월 미국함선공학회신문(Journal of the American society of naval engineers)에 따르면 “태평양우편증기선 코리아”란 제목아래 최초 18,000톤급의 코리아 증기선은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의 의뢰로 버지니아 뉴포트 뉴스 조선소와 수리 조선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속도는 20노트(knots)까지 달성한 것으로 본래 계약은 18 노트(knots)였는데 건조업자는 이것에 초과할 것으로 예상되고 그동안 시험까지 완벽하게 마쳤다고 하였다. 코리아호의 자매 배로서 시베리아(Siberia)호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그리고 차이나포트(ports of China), 그리고 일본(Japan)사이에 왕래하는 승객과 화물을 운송할 수 있도록 모두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운송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디자인은 태평양을 건너는 긴 시간동안 선박위생 항목에 대해 만들어 졌다. 220개의 일등 승객들을 위한 숙박시설, 54개의 깨끗한(백인?)삼등선실, 1144명의 차이나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제공된다. 그리고 추가적인 화물을 위해 빈공간이 사용되어 운반하는데는 차질이 없다. 선박의 보완을 위한 준비를 보면 9명의 갑판장과 10명의 엔지니어, 41명의 갑판원, 111명의 수리인력, 63명의 승객도우미 집사가 있다.

 

위 그림[자료8]와 같이 1901년 3월 25일자 발행 "루이스턴 데일리 선(The Lewiston Daily Sun)"의 보도와 1902년 5월 발행 "미국함선공학회신문(Journal of the American society of naval engineers)"의 보도를 보면 [1]은 건조시작 할 때 보도이고 후자[2]는 진수가 될 때의 보도임을 알 수가 있다.

공히 18000톤급의 "코리아호(Korea)"라 하였으니 진짜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에 반해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이란 자료에서는 톤수가 11,276톤으로 줄여져 있고 이것이 1916년에 일본에 매각되어 이름이 "코리아 마루(Korea Maru)"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같은 배인지 확실하지 않다.

매각된 시점이 1차세계대전 막바지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미국에서 그냥 코리아(korea)란 이름을 붙였을 뿐인데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당시 한반도 상황으로 보았을 때 획기적인 규모의 기획적으로 만든 최대 운송선을 만들어 놓고 난데 없이 곧 식민지국가로 전락해버릴 또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코리아(KOREA)"란 이름을 선명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곧 반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리아"란 이름이 주는 파워가 당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의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에서 밝혔듯이 1668년에 당시에 최대의 선박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의 범선을 네덜란드가 건조하여 바쳤다는 1,000톤급 코레아(core)호와 역사적인 의미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삼한역사관점이다.

실제로 네덜란드가 당시 코리아호를 건조하여 바쳤을 수밖에 없는 세계질서환경을 이 글에서 분명하게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질서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없다면 적어도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점까지 그리고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에도 대한제국 세력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을 수 있으며 최소한 1차세계대전에서 신흥세력에게 굴복할 때인 1918년까지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가 있다.

 

덧붙여 1902년이라면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거의 20주년인 것을 감안 할 때 분명코 "코리아호"를 건조할 수밖에 없는 어떤 정치적인 환경조건이 있었다고 보이며 이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848년에 설립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의 설립자 뉴욕 상인인 윌리엄 아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이 만약 대조선인이거나 삼한인이었다면 그리고 존속하던 대한제국이나 삼한제국으로부터 전폭적으로 비호나 지원을 받았던 경영인이었다면 그의 이와같은 실행적인 사업활동은 지극히 이해할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가령 예를 들면 대조선이 해체되는 1881년 상황을 보면 군주국 또는 제정국가로서의 체제가 해체되었을 뿐이지 공화국으로서의 면모가 변해하는 과정에 있었지 않았는가 한다.

때문에 대한제국이라 함은 공화국으로서 "대공화국(가칭:Great Republic)"이라고 불리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것을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의 깃발에서 언급한 사실이다.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그래도 삼한제국들이 서세의 냉혹한 자본력 공격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때 또한 1차세계대전(World War I:第一次世界大戰:1914-1918)에서 연합국과 충돌한 세력들이 삼한세력이라고 할 때 그래서 대한제국이 "대공화국(가칭:Great Republic)"의 이름으로 존재하였다면 대공화국의 선박회사가 1901년에 코리아호와 시베리아호(Siberia:11,284t) 그리고 1904년에 몽골리아호(Mongolia:13,639t)와 만주리아호(Manchuria:13,639t)의 이름으로 운송선을 만들어 삼한역사에 의거한 대통합을 목적으로 하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비록 해적신분을 바탕으로 한 신생세력들에게 자본력에 밀린다고 하지만 1차세계대전까지 기존 삼한역사주체라고 할 수 있는 호엔촐레른 왕가의 제2제국(German Empire:1871-1918) 그리고 합스부르크왕가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제국(Austria-Hungary:1867-1918), 그리고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1299-1923) 그리고 그리스해군(Hellenic Navy)은 그때까지 각 대륙에 건재했기 때문에 대동단결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 아닌가 세밀하게 관찰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은 대공화국으로서 실제로 삼한역사를 통괄하던 세력이라 할 수 있고 건조기술력도 대단했다고 한다면 1901년 당시에 코리아호를 건조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1차세계대전까지 오스트리아가 보유한 군함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규모가 달라 다른 배라고 생각할 수도 잇겠지만 코리아호가 일본에게 매각되는 시점이 1916년이라면 이 대공화국의 지원이나 비호를 받던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어떤 또 다른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고 보이고 그것은 1차세계대전 막바지였다고 할 때 역사적으로 당시 매각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할 것이다.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항로

 

 

 

무진장 산출되는 금을 확보한 미국의 다음같이 실행하는 상황을 한번 볼 필요성이 있다.1846년에 벌어진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1846-1848)에서 미국은 군사비 지출을 9,800만 달러($)정도를 소모하고 기존 미국 영토의 약 15배에 달하는 뉴멕시코(New Mexico), 캘리포니아(California), 콜로라도(Colorado), 애리조나(Arizona), 네바다(Nevada), 유타(Utah)주를 할양받는 대신 겨우 1,825만 달러($)만 멕시코에 지급한 것으로 나타난다. 멕시코 주체세력들이 금 노다지가 나오는 땅을 그냥 할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스페인 땅이나 멕시코 땅이라고하지만 또 다른 역사적으로 본래의 소유주체가 사라지고 없는 공백상태에 있었다는 이야기다.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이 정리되자 이후 곧 바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생겨나는데 1848년 윌리엄 헨리 애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에 의해 파나마(panama)와 오리건 (Oregon)사이에서 우편을 배달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허가받아 이해 4월에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우편수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그러다가 1865년에는 경쟁회사인 애틀랜틱우편증기선회사(Atlantic Mail Steamship Company)를 인수하여 서부만의 항로를 벗어나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루트를 확장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바로 위 지도그림[자료9]의 항로 루트이다.

 

초창기에는 캘리포니아주(州) 남서부도시 샌디애이고(San Diego)에서 워싱톤주(Washington), 세일리쉬 해(Salish Sea)의 퓨젓사운드(Puget Sound)만(灣)까지로 한정된 코스로만 운행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설립되고 조선소 필라델피아의 찰스 윌리암 크람프(Charles and William Cramp, Philadelphia)에 의뢰하여 1848년 10월 6일에 처음 만들어진 1050(톤)급의 캘리포니아(SS California)호와 뉴욕(New York)에 있는 스미스 다이몬 조선소(Smith and Dimon)에서 1848년 12월 7일에 만들어진 1099(톤)급의 오리건(SS Oregon)호, 그리고 뉴욕 윌리엄 웹(William H. Webb, New York)에 의해 1849년 2월 15일에 만들어진 1087(톤)급의 파나마(SS Panama) 3척으로 한 루트(route)는 파나마 차그레스 강(Río Chagres)에서 뉴욕시(New York City)까지를 운행하게 하고 또 하나의 루트는  오레곤 아스토리아(Astoria, Oregon)에서 파나마(Panama), 콜롬비아(Colombia)까지로 운행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뉴욕까지 수송이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이 수송선 3척 중 대표적인 규모를 살펴보면 1050(톤)급의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1848)가 되는데 배의 전장길이가 62 m, 폭:10.2 m, 흘수(吃水)가 4.3 m로서 구식 증기선의 일종 패들외륜선(paddle wheels)이었으니 고만고만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아마 "코리아"땅에  출현한 배들도 이와 같은 규모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실제로 자료를 보면 1848년에 설립된 태평양메일증기선회사는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덕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고 30 %의 높은 실행 투자 연간 수익률과 당시 시대의 가장 수익성이 높은 기업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의 5년내 회사소유의 18척 증기선을 소유했고 1869년에는 23척을 운행하여 최고점을 달리고 있었으나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가 1869년에 완성되면서 파나마-캘리포니아 노선의 높은 수익은 점차 반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규모면에서 이 때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의 자료에 나타나는데 1881년부터 1899년까지 이 라인에서 활동하던 34척의 배가 10,000톤급을 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그러나 1900년부터 10,000톤이 넘어서기 시작하는데 1902년도에 진수된 18,000톤급은 사상최대의 규모의 선박이 된다.

 

초창기의 위 3척 운송선의 주 루트를 잠시 보면 오리건주의 아스토리아(Astoria)-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몬테레이(Monterey)-산타바바라(Santa Barbara)-샌디에이고(San Dieego)-멕시코 서부 해안 도시 마사틀란(Mazatlan)-산 블라스만(San Blas灣)-멕시코 남부해안 도시 아카풀코(Acapulco)-파나마(Panama)까지가 서부항로이다.이후부터 동부 아틀란틱 코스로 들어가자면 반드시 파나마를 횡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철도횡단철도가 1855년에 완성되기 전까지는 이어지는 강 지류들을 이용한 카누운송이나 때로는 밀림과 육지로는 노새를 이용한 도보 횡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1855년 완성된 파나마 횡단철도]

 

이렇게 카누와 노새등을 이용하여 서부항로에서 이어진 곳은 차크레스(Chagres)항구이다.차크레스(Chagres)에서 뉴욕으로 출발하는 또 하나의 루트는 북쪽으로 항해하면 뉴올리언즈(New Orleans)를 경유하여 쿠바 하바나에 도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로선은 곳바로 서쪽으로 항해하면 자마이카의 킹스톤(Kingston)에 도착하여 쿠바의 하바나(Havana)에서 하나의 로선으로 이어져-조지아주의 서배너(Savannah)-웨스트 버지니아주의 찰스턴(Charleston)-뉴욕(New York)까지 도달하는 루트이다.이렇게 루트(Route)는 태평양연안로선과 아틀랜틱로선이 파나마지협에서 이어지는 형태로 시작한 것이다.

  

 

                             

  [만주리아호를 승선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던 엽서이다.]

 

위 그림[자료11]을 보면 만주리아호를 승선하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던 엽서임을 알 수 있다.

만주리아호(MANCHURIA)를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자료에 보면 대한제국 광무호가 건조되던 시기인 1904년에 건조된 것으로서 13,639톤을 자랑하고 있으며 몽골리아호(Mongolia)와 같은 규모이며 두 척이 같은 해 건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사실이지만 만주리아호는 1929년 달러회사(Dollar SS Co)에 매각되었으며 이름은 먼로독트린( Monroe Doctrine)을 내세워 유럽세력들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몰아낸 업적과 알레스카를 매입한 업적을 가진 미국20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재위:1865-1869)을 따 "존슨대통령(President Johnson)"으로 바뀌었으

몽골리아호 역시 똑같이 1929년 달러회사(Dollar SS Co)에 매각되었으며 이름은 미국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Millard Fillmore,재위:1850-1853)를 따 "필모어대통령(President Fillmore)"로 바뀌게 되는데 이 필모아 대통령은 1853년 매슈 페리 제독을 일본 우라가항에 입항하게 하는 장본인이다.

두 사람다 처음 직장이 재단사였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우리가 먼로독트린( Monroe Doctrine:1823)에서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서양세력들이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먼저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으로 쫓겨난 것인지에 대한 판단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로 이 먼로독트린을 해석해야 할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먼로독트린은 미국내에 있는 유럽세력들을 유럽대륙 내쫓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대조선에서 시행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 후 내 쫓은 유럽세력들에 의해 1881년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그들은 중국인이라고 하여 대조선 잔여세력들까지 추방령이 내려지게 한다.

 

위 그림사진을 다시한번 보면 만주리아호(Manchuria)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풍경을 그려 엽서로 만들어 판매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엽서의 그림은 야자나무 코코넛(coconut)임을 알 수가 있다.

 

이 코코넛은 퍼스글로브(Purseglove:1968-1972)에 따르면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근원은 남아메리카대륙 북서부와 중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신대륙발견 때 코코넛이 발견된 곳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의 태평양연안 한정된 지역에 국한 된 것이라고 하였다.

 

때문에 위 그림엽서도 아열대나 열대지방의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위 분포지도를 보면 카리브해제도에도 나타나고 있다.

 

멕시코 남부 엘 알토(San Antonino El Alto)또는 오악사카(Oaxaca), 남부해안 오스투라(Ostula), 펠리페 카릴로 푸에르토(Felipe Carrillo Puerto), 니카라과 그라나다(Granada), 콜럼비아 고르고나섬(Gorgona lsland),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페루 엘 구아보(Peru El Guabo)등이다.

 

위 원산지 중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와 일치하는 곳이 바로 만주일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로선은 위 로선그림에도 알 수 있듯이 북아메리카대륙 연안을 항로로 삼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코코넛야자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중앙아메리카대륙이나 카리브해 어디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on board SS Manchuria" 만주리아호를 승선하면~엽서같은 풍경을 볼 수있다는 간접 광고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바로 만주가 그 부근에 있었다는 이야기로 풀이 할 수가 있고 또한 몽고리아도 이 범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본 블로그에서 중앙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한다는 목구멍이라고 해석되는 후금(喉衿) 즉 만주(滿洲)가 있어야 할 위치을 말한 곳이고 장소인 것이다.

 

또한 만주리아호가 진행하는 항로 중 이러한 풍경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대체 동아시아대륙 만주 해변에 야자수가 자연스럽게 생장될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또 하나 위 엽서 그림에 덧 붙여 오려붙인 그림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오려진 그림이 바로 일본 "chionin temple kioto(知恩院:ちおんいん:Jion'in)" 교토에 있는 지은원이라고 알리는 듯 하지만 이것은 본래엽서에다 나중에 컴퓨터로 오려넣기 작업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래된 것 같은 흑백사진이 본래 그림에 있어야 할 카누를 탄 뒷 사람의 머리가 잘리도록 붙여버렸기 때문이다.

 

바로 그들의 본질역사를 감추기 위해 일본세력들이 조작하여 퍼 나른 그림임을 알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주가 있을 곳은 만주리아호의 항로이며 나아가 일본 역시 만주리아호의 항로일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동시에 코리아가 있었을 곳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태평양 횡단의 여부 확인과 마무리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운송회사들이 태평양을 횡단하였다고 볼 수 있는 시기는 대체로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Panama Canal)가 완성되고 난 후부터라고 보아야 맞다.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는 북아메리카대륙 횡단철도가 완성된 1869년 전까지 높은 수익을 발판으로 삼아 1865년에 경쟁회사인 애틀랜틱우편증기선회사(Atlantic Mail Steamship Company)를 인수하면서 대조선이 해체되는 시점부터 1881년-1931년까지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도 활성화 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처럼 잘나가던 회사는 갑자기 제동이 걸리게 되는데 명확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갑자기 1912년 미국의회에서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는 철도를 소유한 회사는 선박 소유를 할 수 없는 금지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 됨에 따라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소유하고 있던 선박들을 모두 1854년 페루(Peru)에서 윌리엄 그레이스(William Russell Grace:1832-1904)가 설립한 비료 및 기계장치제조회사인 그레이스 캄퍼니(W. R. Grace and Company)에 매각할 수밖에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때문에 심혈을 기울렸던 "코리아호","시베리아호","만주리아호","몽고리아호"와 그외 다수의 운송선도 동시에 넘어가게 되었고 이때쯤에 "코리아호"와 "시베리아호"가 1916년 일본에게 매각되었으며 이름이 "코리아 마루(Korea Maru)"그리고 "시베리아 마루"로 바뀐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 사태는 아마도 세계삼한세력과 신흥세력들의 충돌인 1차세계대전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기존 삼한세력의 군함을 제한한 것이나 아니면 군수물자를 수송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그레이스 컴퍼니는 1916년부터 운영이 시작되어 1925년까지 약 10년간 운영을 마치지만 마치 1차세계대전이란 과도기에서 신흥세력에게 불리하지 않는 선에서 총체적으로 관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차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난 후 그동안 미국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것을 이유로 1938년부터 이 모든 권한이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American President Lines)으로 넘어가게 되어 현재에 이른 것이라고 하고 있다.

 

때문에 아메리칸 프레지던트 라인은 태평양메일증기선회사가 전신임을 알 수가 있다.

 

 

태평양을 횡단한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며 따져 보니 1848년 수송업을 주도한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운영하면서 내건 모든 자료에서 분명하게 횡단(trans)이란 단어가 붙지 않았다는 것을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횡단이란 단어가 붙은 것은 아래에 스케줄처럼 늦은 1919년부터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1919-1921 운항스케줄]

 

대서양횡단은 타이타닉 침몰사고해인 1912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태평양 횡단은 1919년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때부터 비로소 회사가 부담을 안고 과감하게 횡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위[2]미국함선공학회신문 보도를 참고하면 코리아호(KOREA)의 자매 배로서 시베리아(Siberia)호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코리아호가 만들어질 때 완성되지 않았지만 두 척의 배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차이나포트(ports of China), 그리고 일본(Japan)사이를 왕래하는 승객과 화물을 운송할 수 있도록 모두 예정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태평양우편증기선회사(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가 아메리카대륙 서부해안 태평양연안을 항해한다는 뜻이지 동아시아대륙까지 넘나들겠다고 한 것은 분명이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코리아호와 시베리아호가 건조될 시점 1900년까지의 루트는 1848년부터 시작된 로선과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차이나포트와 일본 역시 아틀란틱 운송라인(The Atlantic Transport Line)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항로 기착점인 중앙아메리카대륙의 멕시코 서부 해안 도시 마사틀란(Mazatlan), 산 블라스만(San Blas灣), 멕시코 남부해안 도시 아카풀코(Acapulco), 파나마(Panama)에서 차이나포트(Port of china)를 찾아야 할 것이고 콜롬비아를 포함한 카리브해연안 자마이카의 킹스톤(Kingston)과 쿠바의 하바나(Havana)에서 일본을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

18,000톤급의 코리아호와 시베리아호는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거쳐 그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었던 차이나 항구 또는 요새, 차이나포트(Port of china)를 경유하고 또한 일본(Japan)을 거쳐 왕래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차이나 또는 일본이라는 명칭만으로 동아시아대륙이어야 할 지명이고 국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끝으로 한가지 더 부연한다면 적어도 파나마운하가 완성된 1914년까지 태평양을 횡단할 수 없었다는 것은 실제로 태평양에서 대형 선박침몰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가 태평양이라고 할 때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태평양을 수많은 배가 건넜다면 타이타닉과 같은 침몰사고처럼 그와 상응한 자연의 답이 분명하게 있어서야 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태평양 횡단이 결코 1914년까지 이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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