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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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선(東朝鮮)과 서조선(西朝鮮) 그리고 광동조선(廣東朝鮮)
글쓴이:한부울
들어가며
안중근의사 유해찾기
거북선 찾기
대조선(大朝鮮)은 다원적사회
광동조선(廣東朝鮮)이란.
동조선(東朝鮮)이란.
서조선(西朝鮮)이란
나오며
들어가며
한반도 역사가 왜 엉터린가.
이런 비유를 해서는 안타깝지만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찾기와 안중근(安重根)의사 유골 찾기는 한반도 역사를 그대로 들어내는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다.
두 건의 역사사건의 유물들을 그렇듯 찾고자 했지만 오리무중으로 남아 오히려 수수께끼같은 더 많은 의문만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태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반도 식민사관으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글쓴이가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 한반도 역사사실 무엇하나 지형적으로, 지리학적으로 또는 기후 환경적으로 기존 역사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큼 한반도 역사가 불신을 하게 만든 것이다..
때문에 한반도 역사를 진실이라고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역사사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처럼 사건장소가 다르고 주어진 공간이 그렇듯 차이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이와같은 역사 사실에서 수많은 괴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우리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데 서글픔이 있다.
안중근의사 유해찾기
우리가 안중근 의사 유골찾기에 연관될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 한다고 여겨지는 사건은 바로 1904년에 발생했다고 하는 바로 러일전쟁이다.
일본에서는 일로전쟁(日露戦争)으로, 영어로는 "Russo-Japanese War"이라 한다.
이 당시 서양세력들의 기상천외(奇想天外)한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을 우리가 들여다 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첫째 러시아란 국가의 실체가 무엇으로 둔갑했을까 하는 점이다.
근대사를 인용하면 서기 862년 노르만인 류리크(Rurik:Rørik)가 속하는 부족 루스인의 이름을 따서 루소 또는 루시(Rus)로 불리게 된 러시아는 17세기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283-1547)를 거쳐 그 영향권을 발트 해 부근까지 확장하였고 이반 4세(Ivan IV:1533-1584)때부터 차르국(Tsardom of Russia:1547-1721)이라 하여 로마조프왕조(House of Romanov:1613-1917)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러시아제국이라고 한다 하였기 때문에 일단 북유럽 발트해 국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루스(Kievan Rus)는 1240년 킵차크한국(金帳汗國:Golden Horde:1243-1502)에게 멸족당했다고 한 사실이 있어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일찍이 사라지고 없는 종족을 지칭하며 이것은 마치 지금의 중국의 주요 종족이라고 하는 한족(漢族:Chinese)이 번족으로 인해 멸족당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재 버젓이 한족이 수억명이라 하는 모순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멸족된 루스(Rus)를 러시아제국이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러시아 "Russia" 단어의 "r" 앞에 "p"가 붙은 프로이센(Prussia:Preußen)과의 역사정체성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그것과 함께 연관지울 수 있는 역사명칭에서도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 1707)으로 사라진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 깃발(Saint Andrew's Cross)을 사용하던 스코틀랜드(Scotland)과도 엮여 있으며 이 깃발은 바로 러시아제국 해군깃발(Ensign of the Russian Navy)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4 "에서 말하길 "루소(Russo)"는 Russo is an Italian surname meaning red-haired. Another variant is Rossi (Central and Northern Italy). It is derived from the nickname "rosso", meaning red,
본 블로그 글 "홍모인과 일본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 "에서 홍모인을 알아보았듯이 이탈리아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붙는 성(姓)으로서 집안 대대로 붉은 머리를 지닌다는 뜻이있고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지역에서 "Rossi" 라 하는 것 역시 붉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미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르과이, 칠레, 프랑스에게는 로시가 일반적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쨌거나 북부사람임을 나타낸다.
이것에 반해 주로 유럽남부에서는 일반적으로 "o"로 끝나기 때문에 북부에서는 일반적으로 "i"로 끝나는 것으로 나타나는 "Rossi" 와 다르고 유럽북부 루스 보트피플" Rus people"에게 쓰이며 키에프 루스(Rus)는 갈리치아 볼히니아 공국(Galicia–Volhynia), 체르니고프 공국(Chernigov), 블라디미르수즈달공국 (Vladimir-Suzdal), 모스크바 대공국(Grand Duchy of Moscow:1283-1547), 루스 차르국(Tsardom of Russia:1547-1721)까지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노르딕국가(Nordic countries)로 알려진 지역의 이름이다.
즉 로시"Rossi"는 1721년까지의 노르딕국가 발트제국의 역사주체들임을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루소 즉 일본인들이 말하는 루소"Russo"는 이탈리아계 남부를 말하는 것으로 사실상 로마노프왕가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러시아의 시원이라고 하는 루스는 보트피플출신들이며 "Rus"의 어원은 '노를 젓는 사람'이라는 뜻의 고대 노르딕어계통의 발트해제국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이와 같다.
그렇다면 발트제국이라고 하는 프로이센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러일전쟁이란 삽화를 보면 당시 일본병사들은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아니라 금발을 하고 푸른 눈동자(靑眼), 벽안(碧眼)의 서양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역사서는 호인(胡人)이라고 하였고 호인은 청나라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상 백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열도 동양계 일본인이 어떻게 금발을 한 서양인이 될 수 있는가.
일본은 또 어떤가.
스코틀랜드가 1707년 연합법으로 사라지고 난 후 모든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를 주도하는 것은 바로 잉글랜드인데 이 잉글랜드왕실이 바로 일본의 왕실이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1920년까지 조선황실이 존재한 사실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때까지 영국이나 일본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왕실은 잉글랜드왕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의 상징적인 것이 바로 3차(1902, 1905. 1911)에 걸친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바로 그것이다.
이 영어명칭에서 영국을 정식명칭 잉글랜드(England)라고 하지 못하고 당시협약서에 영어로 앵글로(Anglo)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스스로 국가체제가 갖추어지지 못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 블로그에서 미국 역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고 이야기한 바가 있다.
적어도 1902년에서 또는 1911년까지 영국이라 하여 "England"의 정식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상황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으며 1776년 미국독립전쟁당시의 식민지제국이었던 브리티시 역시 앵글로의 잉글랜드가 아니라는 사실도 동시에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이 잉글랜드 왕실은 유대인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가(Mayer Amschel Rothschild:1744-1812)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고 정치적으로도 유대자본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러일전쟁당시 일본군은 잉글랜드 왕실의 용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러일전쟁의 루소"Rosso"는 분명 북유럽 즉 발트 노르딕국가가 아닌 붉은 머리의상징을 나타내는 반란성의 상징성이 더해지며 북아메리카대륙 백인이민자로써 이탈리아인의 역사의 땅 시칠리아 섬을 본 블로그 글 "4.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7 대한제국(6편)[2]황금향 지팡구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에서 말하길 그곳에 1차려몽일본원정(1274)이 있었던 곳이라 하였고 루이지애나와 텍사스는 옛 스페인부왕령에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러일전쟁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백인이민자(미국)들이 침범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의 정체성은 바로 앵글로 잉글랜드 왕실이다.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露日戰爭)의 시작은 아서항(Port Arthur)이라고 하는 여순항에 대기하던 러시아제국의 극동함대와 대한제국 제물포항의 정박한 러시아전함 2척을 일본해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는데 이 장소가 현재 동아시아대륙 극동지역 요동반도의 요녕성(遼寧省) 대련(大連:Dalniy/Dairen/Dalian)이 아니라 영문명칭으로 포트아서(Port Arthur,Порт-Артур)라고 하는 여순항이기도 한 멕시코만(灣:Gulf of Mexico)과 그것에 인접한 군항 쿠바의 하바나(Havana)에서 공격을 감행한 택사스(Texas)의 제퍼슨 포트아서(Jefferson Port Arthur)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숨져 묻힌 여순 감옥이 존재한 곳은 지금의 요녕성의 대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거북선 찾기
또 한 가지는 바로 거북선찾기이다.
2011년 경상남도가 1천500億원 가량을 들여 추진했던 '이순신(李舜臣)프로젝트’에서 원형 복원은 고사하고 거북선(龜船)잔해 조차 찾지 못하고 이 사업 자체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실제로 거북선이 침몰했을 법한 장소에 잔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 실체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역사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매우 단순하고 간단한 결과임에도 거북선 실체를 찾을 수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이야기며 한반도인으로써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은 분명 한반도에서 벌어져 마무리되었다고 하였고 일본군과 해전이 발생한 남해(南海)에 상당한 숫자의 거북선이 침몰하여 어딘지 간에 거북선의 잔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지는 것을 당연한 일임에도 전혀 거북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틀림없다.
어찌하여 거북선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가 냉정하게 지형상황을 다시금 살펴 볼 때 한반도의 남해(南海)는 다도해(多島海)는 맞으나 솔직히 얕은 바다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서해(西海)라고 하는 황해(黃海)역시 전부가 대륙붕(大陸棚)에 해당되어 수심 100m에서 최고 깊이가 200m미만임을 알 수가 있다.
동아시아대륙의 신중국과 한반도사이에 있는 바다 즉 황해(黃海)는 가두어진 만(灣:Gulf)으로써 내해(內海)라 할 수밖에 없는 곳이다.
남해는 평탄한 대륙붕으로, 동지나(東支那)쪽으로 나아가야 대륙사면(大陸斜面:continental slope)이 나타나는데 최고 깊이가 228m 라고 자료에 나타난다.
이 정도의 수심은 우리나라 해저탐사기술력으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영역임을 물론이다.
수심이 이정도라는 것은 4,000m 내지 거의 10,000m 이상의 태평양해저와는 비교가 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유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해류가 문제인데 한반도 사이의 해류는 거의 순환될 뿐 큰 바다로 나아가질 않는다.
대만(臺灣)의 남쪽에서 시작(始作)하여 일본(日本) 열도(列島)의 근해(近海)로 흐르는 쿠로시오(黑潮:くろしお)난류와는 비교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심이 얕은 남해에 침몰했다고 하는 거북선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다.
한반도 사람들은 신비롭기까지 하는 전설의 거북선 찾기에 대단한 기대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이미 한반도 역사가 임진왜란이라 하여 사실화 한 역사사실이 증명되기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남해에서 거북선의 잔해조차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실로 날벼락인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가.
돌이켜 보면 1976년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역에서 발견된 신안보물선, 가칭 신안선(新安船)은 14세기 침몰한 중국 원나라 무역선으로 신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寧波)항에서 출발하여 일본으로 가던 배로 알려지고 1976년부터 1984년까지 10차례에 걸쳐 도자기를 포함한 중국 송(宋:960-1279), 원대(元代:1271-1368)유물 22,000여점이 발굴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신안선이 침몰한 시기가 1323년으로 알려져 당시 거북선 찾기 사업 년도 2011년을 기준으로 한다 하여도 688년이 지났지만 결과물을 우리가 목격했듯이 실제로 멀쩡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시기가 1598년이니 2011년을 기준으로 할 때 413년이 지나 산술적으로 신안적발견시점과 270년이란 시간 차이가 나 오히려 신한선이 더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700년이 지난 침몰선은 해저에서 멀쩡한 상태로 찾았지만 400년 남짓한 거북선 잔해를 남해전체를 그토록 샅샅이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위 2가지의 역사유물찾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난맥상은 결론적으로 역사기록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북선 침몰장소가 한반도 남해가 아니라 다른 역사장소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논리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만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한반도 역사가 말하고 있는 임진왜란 해전장소가 한반도 남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자체가 다 이런 식의 의문투성이의 난맥상에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다시 거론하지만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도 형편은 거북선찾기와 다를 것이 없다.
모두 아는바와 같이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安重根)의 유해(遺骸)찾기는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요동반도의 요녕성(遼寧省) 여순(旅順)감옥, 즉 러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오늘날 대련(大連)이라고 알려진 장소에서 순국했다는 현대사(現代史)의 기록을 근거로 1980년대부터 동아시아대륙에 속한 신중국 여순(旅順) 즉 대련을 답사하며 유해 매장지역을 추적해왔고 마침내 여순(旅順)감옥 동쪽에 위치한 감옥묘지를 안중근 유해매장지역으로 확신하면서 해당 지역에 대한 발굴을 요구해오다가 중화인민공화국정부(中華人民共和國政府)의 허락을 마침내 받아 2008년 4월에 발굴에 들어갔으나 묘역 추정지에 아파트공사가 진행되는데다 발굴과정에서 중국정부의 통제가 심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알려진다.
신중국정부는 왜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을까?
신중국에서 안중근의사를 반일혁명투사라고 하여 오히려 우리보다 더 존경하고 받들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국 정부가 왜 안중국 유골찾기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알려지지 말아야 한다던가. 아니면 알려지는 결과가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혹 조작된 사실에 대해 백일하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역사자체를 의심하게 하는 요인으로 파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유해매장지가 여순 감옥 뒷산인지, 감옥 오른쪽의 동산파인지 조차도 파악할 수 없다는 실정임을 감안 할 때 이것은 신중국 정부가 방관하거나 방치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결코 안중국의사의 유골이 그곳 어디에 존재한다면 그들이 스스로 밝혀 내는 것을 마다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본 블로그가 추정한 사실과 아마도 일치한다는 것이다.
역사진실 게임으로 넘어가는 자체가 두려운 것이며 동아시아역사뿐만아니라 세계사까지 진위논쟁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발굴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실제로 대련에서 안의사의 유해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된다.
이것은 전자에 언급한 거북선 문제처럼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역사문제임을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조선(大朝鮮)은 다원적사회
거대한 제국일 수록 다원적사회로 나타난다.
지금부터 한반도 사관이 아닌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으로 조선(朝鮮)사회가 단일민족사회인지 아니면 다원적(多元的)사회인지를 밝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한반도역사학자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단일민족사회가 확실하다면 한반도 역사가 주장하는 것이 맞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에 조선사회가 다원적 사회라고 한다면 한반도 역사는 본래 역사와 다르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가 확실하고 지금까지 역사사실을 속이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해방(解放)후 70년이 흐른 현 시점에서 보면 단일민족 사회라고 주장하는 식민지사관은 이미 고착화가 되어 상식이 되었고 식민지역사 환경이 사회저변에 깔려 정체성에서 상당한 갈등과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일민족체제에서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때문에 4개 조선(朝鮮)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크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놀라울 이야기가 아니다.
단일민족사관이 실제로 조선역사에서 존재했었다면 4개 조선의 형성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래 대표적인 일제어용학자(日帝御用學者)들의 논조(論調)를 바탕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진단해보면 분명 조선은 근원적으로 단일민족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식민사관에 의해 각인된 단일민족이라는 역사프레임를 벗어 던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한반도에는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 언어, 그 토대위에 중국이란 대국을 섬기고 중국의 문화라고 하는 성리학을 지식자와 관리들이 습득함으로써 사대주의와 모화사상을 키워 실리를 따지지 않고 정신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명분을 내세워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중시하여 대의를 잃고 당파와 파벌싸움으로 체제를 약화시켰다는 논리는 친일파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며 이와같은 덧 씌우기가 바로 식민사관의 주류를 이룬다.
때문에 5000년 역사가 비록 끊김없이 지속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종속되어 조선국왕은 허수아비와 마찬가지로 허약했다는 주장은 덧 씌우기 뿐만아니라 터무니 없는 날조라는 사실이다.
한반도 사관과 마찬가지로 당시 일제어용학자들도 조선은 하나의 민족인 단일민족이란 사실을 전제하고 위와 같은 논리 속에 특이하게도 혈관에 검푸른 피가 흐른다고 유전자(DNA)까지 거론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 해도해도 너무 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아래 3명의 일본역사학자들이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설파한 내용에서 일률적인 주장들을 볼 수 있는데 즉 조선인들에게 정상적인 붉은 피가 아닌 특이한 검푸른 피가 흘러 식민지시대를 촉발하게 한 원인으로 유전적으로 분열과, 시기심, 질투하는 심리가 강하여 급기야 4대 당파를 낳았고 그것들이 서로 주야장천(晝夜長川)파벌싸움만 하여 나라가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누군가가 이를 바르게 제어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누군가의 제어가 바로 일제의 압제를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한 3명의 어용학자들을 보면 첫째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대한제국 학부참정관(學部參與官)으로 부임해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입안했던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1870-1953)가 있다.
그는 1907년에 쓴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에서 말하길 "조선인의 오늘날의 작태를 이해하려면, 그 원인을 과거의 역사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 역사적 사실의 근원으로 고질적인 것은 당쟁(黨爭)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라고 일갈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이 30세 나이 때인 1900년에 부임한 직책은 분명 대한제국(大韓帝國:1879-1910)에서 초빙(參與)한 3등 교육관리이다.
그럼에도 이런 소리를 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깍아 내리려 하는 것이 터무니 없어 보인다.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반도 식민지사관과 마찬가지로 민당(民黨)이나 붕당(朋黨)의 개념이 아닌 파당과 당파싸움으로 인한 정치적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말하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근원이 일천한 것은 알지 못하고 이렇듯 망발하는 것은 근본을 망각한 왜구 한 학자의 주장치고 너무 도가 넘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한사람은 역사가 가와이 히로다미(河合弘民:1872-1918)라는 사람인데 그의 <붕당사화의 검토>라는 책에서 "나는 혈액이 굳어버린 채 흐르지 않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朝鮮)사람의 혈액에 이처럼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다는 것도 조선(朝鮮)의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시비(是非)를 함께 궁구(窮究)해 둘 필요가 있다면서 여하간 대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色),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 없고, 수천 년 수백 년에 걸쳐 육성된 인격 또는 국격(國格)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바꾸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비록 검푸른 피가 흐르지만 굳어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방은 아니더라도 시간을 두고 바꾸기가 어렵지만 노력하고 지속할 수 있으면 고쳐질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다.
참으로 가당찮은 헛소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일제가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면 붉은 피가 흐르게 만들 수 있다는 헛소리를 지꺼린 것이다.
이런 식의 발언은 지금의 사이코 같은 열도정치인들의 릴레이식 망발과 흡사하다.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일본이 검푸른 피가 흐르는 조선인들을 식민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무리 유능한 총독이나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쉽사리 본래 피는 새롭게 만들 수가 없을 것이란 주장에서 인간개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나 특이하게 “...대영웅도 하룻밤에 그 국민의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色), 눈동자의 빛을 바꿀 수 없고...”의 글에서 은연 중 다인종(多人種)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즉 그들은 조선(朝鮮)을 하등동물(下等動物)사회로 격하시켜 영구히 지배하길 원하지만 다원적 사회의 구성원들을 하루아침에 통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며 가능한 한 오래동안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1908년에 설립된 조선연구회(朝鮮硏究會)대표 호소이 하지메(細井肇:1888-1934)는 분열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민족성이 당쟁의 원인이고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기질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다고 쐐기를 박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된 주장들은 거의가 비슷하고 당시 일본이 조선(朝鮮)사회를 단일 민족사회로 본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1900년대 초 대한제국에 건너온 일본 지식인들은 한국을 식민지로 전락시킬 방법으로 한국의 고서 원본을 수집, 간행하여 한국 전래의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였고 간행 서적 중에서 어려운 것은 일본어로 번역까지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특히 영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투자를 한 것처럼 조선의 풍속과 민정을 알아야 하는 것은 식민지 경영의 시대적 요구라고 보았기 때문에 대한제국에서 초빙을 강제하여 스스로 이런 업무에 몰입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목전에 두고 있는 정한론의 최후 결과물을 만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은 영국과 일본이 동일한 선상에서 많은 연결이 가능하고 결과적으로 영국과 일본은 종속관계를 가지며 조직적으로 조선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상한 흐름은 미국이 태동하기 전 1902년에 맺은 일영동맹(日英同盟:Anglo-Japanese Alliance)을 거론케 하는데 일본과 영국은 러시아제국을 공동의 적으로 생각하고 맺은 동맹이라고 하며 이것이 공교롭게도 1902년, 1905년, 1911년 3차에 걸쳐 도모한 것이 완성된 시점에서 새롭게 조약한 사실과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를 내세워 스스로를 크게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주요 갈등상황에서는 스스로 회피하여 그 자리를 피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대신에 일본이 이 상황에서 적극대처하는 개체로 나타나며 미국의 태동이 시작된 1920까지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한다.
여기서 잠시 일본이란 실체를 파악하고 4개 조선으로 들어간다.
일본으로 파악되는 영국은 사실상 지금의 잉들랜드 왕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레이트브리튼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이 아님이 밝혀졌고 영국연방(英國聯邦:Commonwealth of Nations)을 영국(British)을 뜻하는 '브리티시'가 영어명에서 생략되었다는 것은 유대인 자금으로 만들어진 영국 또 하나의 왕족 구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어쩌면 3차례의 걸친 영일동맹(1902, 1905, 1911)에는 같은 부류의 프랑스, 러시아, 독일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럼에도 다시 10년 동안 영일동맹을 연장하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강대해진 미국에 의해 1921년에 워싱턴 회의(Washington Conference)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빠진상태에서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체결한 동맹조약이 성립되면서 영일동맹은 폐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서세의 국가체제가 영일동맹으로 존속되다가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4개국이 체결한 동맹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본과 영국이 동일한 체제 속에 존재한 공화국형태의 제정국가라는 것과 나중에 미국도 이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려와 조선을 포괄한 삼한대한제국이며 영국과 일본은 각각 분리된 황실로 존재하고 대신 1921년부터 미국이 주도된 국가체제로 나선 것이라고 풀어 볼 수가 있다.
대신 1917년에 이은 1926년 11월 19일에 영국총리(1902-1905)를 역임한 아서 벨푸어(Arthur Balfour:1848-1930)가 유대인국가설립 선언에 서명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영국 귀족(Peerage) 로스차일드 남작(Baron Rothschild) 월터 로스차일드(1868-1937)의 자금을 지원받아 52개의 서세국가와 식민지로 형성된 연방국(Commonwealth of Nations)을 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조선체제에서 동양계제정국가들이 몽땅 빠진 상태로서 서세들만의 연방이며 이와 별도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종주국(宗主國)의 지위는 1918년 사라진 러시아제국과 프로이센으로부터 미국이 이를 차지하여 일본제국으로 기문둔갑술을 부렸을 것이란 판단을 하게 한다.
광동조선(廣東朝鮮)이란.
본 블로그 글 "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5 "에서 충분히 밝혀 알아본 내용이지만 사실상 친일사관으로 찌들어 버린 한반도 구성원들 누구라도 동인조선(東人朝鮮), 서인조선(西人朝鮮), 남인조선(南人朝鮮), 북인조선(北人朝鮮)이란 명칭에 낯설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지형에서 4개 조선(朝鮮)을 구분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을 이야기다.
이 게시한 지도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동서(東西)가 짧고 남북(南北)이 긴 한반도 지형에서 남조선(南朝鮮)과 북조선(北朝鮮)을 구분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그것 동시에 동(東)조선과 서(西)조선을 넣고 구분하기가 순식간에 애매해져 버린다.
본 블로그 글 "서변(西邊)의 의미와 오대해(五大海) http://blog.daum.net/han0114/17050809 "에서 기존 역사와 한반도 지형이 얼마나 차이가 있고 근원적으로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밝혀 알아보았던 사실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한계를 깊숙하게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다.
동서가 짧은 지형에 굳이 동조선과 서조선을 나눌 필요성이 무엇이었을까?
광동조선(廣東朝鮮)도 만주와 시베리아를 합쳐 광동이라 하였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들은 일단 1920년대 동아일보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사실상 한반도에서 동서를 구분하더라도 한반도 북부지역인 지금의 만주에 도달하여서는 동서가 구분이 될 수도 없는 것이어서 그것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긴지 알 수가 있다.
만주지역이 북조선 압록강에서부터 두만강까지 포괄하고 있는 지금의 지형형태를 만주와 시베리아를 합쳐 동조선이라 하면 서조선을 도대체 어딜 말하는 것일까?
서조선(西朝鮮)은 북경(北京) 하북성(河北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광동조선이라는 의미는 매우 센세이션(Sensation)할 이야기며 충격적인 것이다.
도대체 지금의 신중국 대륙 남부 광동(廣東)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선과 중국이 하나의 영역에서 또는 합체된 지형속에서만 가능한 지명이다.
광동조선(廣東朝鮮)과 광동성(廣東省)의 차이
1926년 6월 28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在廣東朝鮮革命軍人會)라는 것은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한 군사조직인데 바로 만주(滿洲)와 서백리아(西伯利亞:西比利亞:Siberia)방면에서 비밀이 학생1,000명을 모집하고 광동조선북벌군(廣東朝鮮北伐軍)에 가담시키려한다는 보도내용임을 알 수 있고 광동조선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포함한 지역임을 말하고 있으며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의 교장인 장개석(蔣介石)의 양해를 얻어 재학 중인 조선인 장교와 학생120명으로 혁명군인회가 조직되어 광동북벌군에 가담시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감학교는 조선인들의 군사교육기관임을 알 수있는데 지금은 조선을 싹 빼버리고 국민당군사교육기관으로 알려진다.
중국자료에는 본래 명칭이 1924년 6월 16일에 설립한 광동성(廣東) 광주(廣州) 황포(黃埔)의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하고 1929년에 개칭하였는데 국민당혁명군황포군관학교(國民革命軍黃埔軍官學校)로 명칭하였고 황포는 번우현(番禺县)에 속했다고 하며 성도(省都:省會) 광주(廣州)역시 192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다섯 선인(仙人)들이 오색(五色) 옷을 입고 오색양(五色羊)을 타고, 한 줄기(一茎) 육출(六出)의 이삭(穀穗)을 들고 광주성으로 와서, 이삭을 성 안에 넘겨 준 뒤에는, 날아올라가서, 다섯 마리의 양(五羊)이 되었다고 전해진다.그러므로 광주도 줄여서 이삭(穗)이라고 부른다.
고려(高麗)곡수(穀穗)는 화홍(火紅)이라 하였고 고려곡수(高麗穀穗)는 바로
본 블로그 글 "조선에서 아열대 작물인 수수(高粱Sorghum)가 재배되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49 "에서 밝힌 것과 같이 바로 수수(蜀黍:Sorghum bicolor)이다. 경기 / 광주목/금천현(衿川縣), 양주도호부 / 고양현(高陽縣), 함길도(咸吉道), 강원도(江原道)의 토의(土宜:唐黍)이다.
광주는 양(羊)이 많고 수수가 많이 재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기후가 아열대의 메마른 땅이나 습한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경기도 광주(廣州)라는 것도 알 수가 있으며 특히 양(羊;sheep)은 1607년에 북미 버니지아(Virginia)에 양을 수송했다고 알려지고 1662년에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워터타운(Watertown)에 처음으로 양털공장이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에서는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라 하였지만 신중국 자료에는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 사실과 차이가 있다.
실제 황포군감학교가 황포에 설립된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광동(廣東)은 광동조선(廣東朝鮮)이라 하였으며 광동조선지역에 설립된 학교임을 알 수가 있어 장개석(蔣介石) 역시 국민당(國民黨)을 창건한 손문(孫文)과 함께 조선(朝鮮)내의 정치세력임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은 내용들은 현재 신중국 남부지역의 지명, 광동(廣東)과 관계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그렇다면 광동조선은 만주(滿洲)와 시베리아방면을 포함시켜 부르는 지명인데 현재는 신중국 광동(廣東)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러한 광범위한 동조선(東朝鮮)을 지금의 한반도지형으로 도저히 나타낼 수 없는 것이기에 이렇듯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한반도 지형으로는 애초부터 도저히 수용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4대조선의 생성역사에서 어떻게 4대 조선(四大朝鮮)이 조선에서 가능했던 것인가에 대해 근원적으로 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
동조선(東朝鮮)이란.
한반도를 조선(朝鮮)이라고 하는 한반도 역사에 따르면 실제로 동조선(東朝鮮)이란 1925년 2월 27일에 보도된 동아일보(東亞日報)기사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그 이전부터 동조선(東朝鮮)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고 말해지는 것인데 한반도 지형 상 동조선(東朝鮮)은 어딜 말해야 하며 지도에는 어떻게 표시가 가능한지 도무지 판단이 안되고 또한 그렇게 구분짓기가 애매하다.
솔직히 한반도 지형 형태상 그렇게 나눔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번 보시라.
아무리 쥐어짜도 한반도 지형은 동서가 짧은 형태이기 때문에 동조선(東朝鮮)이나 서조선(西朝鮮)을 나뉠 만한 지형의 규모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한반도는 가로 형태가 좁고 세로가 긴 지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동서를 나눔자체가 곤란하기도 하고 표시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도 못느끼며 그럴 공간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서를 나누려는 영토를 보면 대체적으로 넓고 광역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동조선(東朝鮮)과 서조선(西朝鮮)을 기어코 나누는 이유는 동과 서가 너무 넓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형 환경상 행정적으로 나누지 않으면 곤란하기 때문이며 때로는 명확히 구분되어야 할 민족과 인종, 언어적으로 현격하게 다르거나 종교 사회적 형태가 지역적으로 확연히 다를 수도 있는 조건에서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동조선사람, 서조선사람 식으로 호칭할만 환경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때문에 동인조선(東人朝鮮), 서인조선(西人朝鮮)이라 한 사실은 정말로 위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대함을 우리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더욱 정확히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조선이나 서조선이라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종(人種)이나 민족(民族)간의 구분이 필요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아래는 1925.02.27. 동아일보의 원산 2대안 진정(元山二大案陳情)이란 기사제목의 기사내용이다.
원산 2대안 진정(元山二大案陳情)
1925.02.27. 동아일보
원산상업회의소(元山商業會議所)에서는 연구(硏究)중(中)에 있던 동조선(東朝鮮)과 일본(日本) 나고야(名古屋), 동경항로(東京航路)의 개시(開始)와 조선철도(朝鮮鐵道)의 화물운임제정(貨物運賃制定)의 2대 중요문제(重要問題)에 대하여 평의원회(評議員會)의 결의(决議)에 의하여 전자(前者)는 19일(十九日附)로 후자(後者)는 18일(十八日附)로써 관계관청(關係官廳)을 경유(經由)하여 제등총독(사이토:齊藤總督)에게 진정서(陳情書)를 제출하였다고 한다.(元山(원산))
위 기사내용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먼저 원산(元山)은 동조선(東朝鮮)이라 했다는 사실이고 원산상업회의소(元山商業會議所)가 동조선(東朝鮮)과 일본(日本)나고야(名古屋)를 연결하는 동경(東京)항로(航路)에 대한 개시(開始)문제와 조선철도(朝鮮鐵道)의 화물운임제정(貨物運賃制定)의 관한 안건 등을 당시 3대 조선총독인 사이토 제등총독(齊藤總督)에게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하는 보도이다.
이정도의 기사라면 분명 조선에 동조선이란 지명이 공식화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1]衰退(쇠퇴)?發展(발전)?
1926.06.06. 동아일보 컬럼
원주(原州) 1기자(記者) 지방논단(地方論壇)
보는 것과 같이 현재의 원주(原州)는 정말 대원주(大原州)이고 장차 동조선(東朝鮮)의 대도시가 형성될만한 요소가 충분한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시대(韓國時代)에도 강원도관찰사를 원주에 설치하였고 일한합병(日韓合倂)이후에도 수비대(守備隊)와 헌병분대(憲兵分隊)를 둔만큼 중요한 곳이다.
20년 전에는 읍내(邑內) 호수(戶數)가 400정도에 불과하고 외국인(外國人)호수가 10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현재까지 조선인(朝鮮人)호수(戶數)가 800정도의 4600명의 인구를 계산하고 일본인(日本人)호수가 40정도 호(戶)에 250명이며 중미불(中美佛)등 외국인 호수(戶數)가 50정도 호(戶)에 200명을 계산하는 영서(嶺西)의 유일한 대도시이다.
또 그 뿐만아니라 건등면(建登面) 문막시장(文幕市塲)을 보면 원주읍(原州邑)의 호수 인구와 발전의 비례를 보면 그 증가율은 실로 등차급수(等差級數)로 급속함을 볼 수가 있다.
10년전에 문막은 여지없이 50정도 호의 소촌락이었던 것이 현재는 400정도의 호에 달한다.
이와같이 호수와 인구에 발전되는 근거가 무엇에 있는가 하면 원주(原州)는 지대(地臺)가 지대(地臺)이다.
동(東)으로 천산물(天產物)이 집중한 강릉(江陵)이 있고 서(西)로는 경기도(京畿道) 남(南)으로는 충북(忠北), 북(北)으로 평야(平野)를 이룬 횡성(橫城)에 접하고 또 문막강(文幕江)이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최고 원천(源泉)으로 도경(道境)을 이루어 항구(港口)가 되어 산미개량(產米改良)과 곡물검사소입상조합(糓物檢査所叺産組合), 수리조합(水利組合)등이 있어서 영서(嶺西)의 농산물이 대개는 이 강(江)으로 들어 경성(京城)으로 수출(輸出) 즉 실어서 내보내며 경성(京城)의 포목잡화(布木雜貨)는 원주(原州)를 거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산배(散配)되는 동시에 해산물(海產物), 농산물(農作物),포목잡화(布木雜貨)등 상품이 시도 때도 없이 산적(山積)되어 경향(京鄉)사이에 대무역상가(大貿易商家)들은 끊이질 않고 운집(雲集)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수원(水原), 원주(原州)간 철도시설(鐵道施設), 수원(水原)에서 여주(驪州)까지의 기차선로(汽車線路)를 인취(引取) 즉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일, 구룡폭(九龍瀑)에 수력발전(水力電氣)를 시설하는 등 장래에 얼마나 전망이 있겠는가.(생략)
위 기사내용을 그대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1926년 시기의 원주(原州)는 정말 대원주(大原州)라 할 수 있고 장차 동조선(東朝鮮)의 대도시가 형성될만한 요소가 충분한 것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다 하였다.
한국시대(韓國時代) 즉 대한제국시대에도 지방장관 또는 지방총독이라 하는 강원도관찰사를 원주에 설치하였고 한일합병(韓日合倂)이후에도 수비대(守備隊)와 헌병분대(憲兵分隊)를 둔만큼 중요한 곳이라고 설명한다.
관찰사(觀察使)는 1895년 기존 8도(道)의 23부제(府制)개편과 이듬해(1896년) 13도제(十三道制)개편을 거치면서 계속 '관찰사'라 불렸는데 20년 전 즉 1906 년에는 읍내(邑內) 호수(戶數)가 400정도에 불과했고 외국인(外國人)호수가 10정도에 불과하던 것이 현재까지 조선인(朝鮮人)호수(戶數)가 800정도의 4600명의 인구를 계산하고 일본인(日本人)호수가 40정도 호(戶)에 250명이며 중미불(中美佛)등 외국인 호수(戶數)가 50정도 호(戶)에 200명을 계산하는 영서(嶺西)의 유일한 대도시라 하였는데 조선인의 호수가 배로 불어났고 외국인들의 증가는 거의 10배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일본인이 40정도 호수에 중미불, 즉 중국, 미국, 프랑스 등 외국인 호수가 50호정도라 하였는데 사실상 서세의 대표격이 영국 즉 잉글랜드가 빠져 있다.
왜 영국이 빠졌을까?
바로 일본이 영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냉정하게 우리가 관찰해야 하는 것은 일본의 실체이다.
또 그 뿐만아니라 건등면(建登面:沙堤) 문막시장(文幕市塲)을 보면 원주읍(原州邑)의 호수 인구와 발전의 비례를 보면 그 증가율은 실로 등차급수(等差級數)로 즉 복리계산으로 급속하게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 하였고 10년전에 문막(文幕)은 여지없이 50정도 호(戶)의 소촌락이었던 것이 현재는 400정도의 호(戶)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호수와 인구에 발전되는 근거가 무엇에 있는가 하면 원주(原州)는 지대(地臺)가 어떤 공통적인 특성으로 묶이는 일정한 구역 지대(地臺)라는 사실이다.
동(東)으로 광산물, 임산물, 해산물 따위의 천산물(天產物)이 집중한 강릉(江陵)이 있고 서(西)로는 경기도(京畿道) 남(南)으로는 충북(忠北), 북(北)으로 평야(平野)를 이룬 횡성(橫城)에 접하고 또 문막강(文幕江)이 한강상류(漢江上流)의 최고 원천(源泉)으로 도경(道境)을 이루어 항구(港口)가 되어 산미개량(產米改良)과 곡물검사소입상조합(糓物檢査所叺産組合), 수리조합(水利組合)등이 있어서 영서(嶺西)의 농산물이 대개는 이 강(江)으로 들어 경성(京城)으로 수출(輸出) 즉 실어서 내보내며 경성(京城)의 포목잡화(布木雜貨)는 원주(原州)를 거쳐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산배(散配)되는 동시에 해산물(海產物), 농산물(農作物),포목잡화(布木雜貨)등 상품이 시도 때도 없이 산적(山積)되어 경향(京鄉)사이에 대무역상가(大貿易商家)들은 끊이질 않고 운집(雲集)한다 하였는데 위 글에서 현재 한반도 사정과 많은 것이 달라 보인다.
당시 1926년에 신설되고 있는 수원(水原), 원주(原州)간 철도시설(鐵道施設), 수원(水原)에서 여주(驪州)까지의 기차선로(汽車線路)를 인취(引取) 즉 우리나라에 들여오는 일, 구룡폭(九龍瀑)에 수력발전(水力電氣)를 시설하는 등 지금은 아니지만 장래에 상당한 전망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외 동조선에 대한 기사들이 많은데 동아일보 1936.05.22 일자 기사를 보면 강릉군(江陵郡) 신리면(新里面) 주문진리(注文津里)는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동조선(東朝鮮)의 굴지의 배가 드나들거나 머무르기에 좋은 항구 양항(良港)으로 현재인구가 1000호(戶)에 가까운 도시라고 하였는데 시(市)도 아니고 주문진리(注文津里)의 가구호수가 1,000호라고 하면 한가구당 4.5인을 계상하면 약 4500명의 인구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홍수가 나면 배수가 곤란하고 각종 어류의 내장등 부하물에 의해 악취와 파리등이 증가하여 전염병의 매개물이 번식할 수 있어 기자는 하수구설치가 급선무라고 하고 면민(面民)의 주머니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어업조합(漁業組合), 수산조합(水産組合)등 제기관을 동원하여 예산을 만들고 하수구설치를 할 수 있도록 종용하는 기사이다. 1937년 4월 1일에 신리면이 주문진면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 11월 1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 221호(1940년 10월 23일)에 따라, 주문진면이 주문진읍으로 승격되었다.
또 1939.06.08 에 이런 기사도 있다.
조선도렛지광업(朝鮮ドレッジ鉱業) 자본금 350만원과 동조선광업회사 자본금200만원은 3월 10일 각각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합병을 결의하였으며 조선도렛지광업은 해산하고 자본금 550만원의 동만주관업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런 기사도 있다.
본 함흥부(咸興府) 홍원(洪原)의 지세는 동(東)은 북청(北靑), 서는 함흥(咸興), 북(北)은 신흥(新興)과 각가 산맥으로써 분계 되어 있고 남방일대(南方一帶)는 동조선(東朝鮮)해(海)에 따라 연(沿)하였으나 남북(南北)은 협(狹) 좁고 산맥은 대개 북(北)으로 부터 남(南)으로 내달았으며 동북부는 고악(高嶽) 높이 솟은 산이 병렬(竝列) 나란히 늘어섰다. 해안선은 경사가 완만하고 평지는 주로 동서(東西) 양쪽 대천(大川)의 유역과 바다에 잇닿아 있는 연해(沿海)지대에서만 볼 뿐이다.
이러한 동조선과 서조선이란 명칭을 대한민국정부수립 후 1949.12.17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조선해협(朝鮮海峽), 동조선만(東朝鮮灣), 서조선만(西朝鮮灣)을 각각 대한해협(大韓海峽), 동한만(東韓灣), 서한만(西韓灣)으로 고처부른다고 하였다.
[2]發展(발전)?衰退(쇠퇴)?
1926.05.01. 동아일보 컬럼
사리원(沙里院) 1기자(一記者) 지방논단(地方論壇)
보는 것과 같이 현재 사리원(沙里院)은 정말로 대사리원(大沙里院)이고 장차(將次)도 서조선(西鮮)의 하나의 큰 도시(都市)가 형성(形成)될 만한 요소(要素)가 충분히 보이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실례(實例)를 거론하면 지금으로부터 약(約) 20여년(餘年)전이다. 그때의 사리원(沙里院)이야말로 하나의 농촌(農村)에 불과하였다. 당시 호수(戶數)로 말하면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겨우 200~300백 호(戶) 미만이었고 외국인(外國人)이라고는 그림자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한적(閑寂)한 소사리원(小沙里院)이었던 것이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를 부설(敷設)코자 공사에 착수할 당시에 사리원(沙里院)과 영천(靈泉面) 수역포(壽域浦)간에 임시철도(臨時鐵道)를 부설(敷設)하고서 침목(枕木)등을 운반(運搬)하던 때부터서야 비로소 사리원(沙里院)이라는 곳이 점점발전 될 색채(色彩)가 농후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없던 당시(當時) 헌병대분견소(憲兵隊分遣所)로부터 경찰서(警察署)를 설치하기 까지 하였으며 동시에 봉산군청(鳳山郡廳)을 이전하는 등 장족(長足)의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제법 도시(都市)의 기운이 떠돈다. 현재의 호수(戶數)만 보더라도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3,187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5,584명이고 일본인(日本人)의 호수(戶數)가 440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242명, 중국인(中國人)이 83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343명이다. 과거 20년전 호수에 비하면 물경(勿驚) 20배 이상의 대발전으로 근 4,000호(戶)에 달하는 도시(都市)가 되었다.
1926.05.01.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첫 번째로 사리원을 서조선(西朝鮮)이라 했다.
현재 한반도 지형상 사리원시(沙里院市)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서부에 있는 시(市)이자, 도 소재지이며 행정구획 상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沙里院邑)에 속하며 서쪽 재령강(載寧江)연안에 위치하고 있다.
기사내용을 보면 사리원(沙里院)은 정말로 대사리원(大沙里院)이고 장차(將次)도 서조선(西鮮)의 하나의 큰 도시(都市)가 형성(形成)될 만한 요소(要素)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대략 20여년 전 1906년에는 사리원(沙里院)이야말로 하나의 농촌(農村)에 불과하였고 당시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겨우 200~300백 호(戶) 미만이었고 외국인(外國人)이라고는 그림자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한적(閑寂)한 소사리원(小沙里院)이었으나 경의선철도(京義線鐵道)를 부설(敷設)코자 공사에 착수할 당시에 사리원(沙里院)과 영천면(靈泉面) 수역포(壽域浦)간에 임시철도(臨時鐵道)를 부설(敷設)하고서 침목(枕木)등을 운반(運搬)하던 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여 전에 없던 당시(當時) 헌병대분견소(憲兵隊分遣所)로부터 경찰서(警察署)를 설치하기 까지 하였고 봉산군청(鳳山郡廳)을 이전하는 등 장족(長足)의 발전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제법 도시(都市)의 기운이 떠돈다고 말하고 있다.
1926년 현재의 조선인호수(朝鮮人戶數)가 3,187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5,584명이고 일본인(日本人)의 호수(戶數)가 440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1,242명, 중국인(中國人)이 83호(戶)에 남녀인구(男女人口)가 343명이다.
과거 20년 전 1906년에 비하면 20배 이상의 대발전으로 약 4,000호(戶)에 인구가 17169명, 호수 즉 가구당 4.29명의 도시(都市)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동조선의 원주 약 조선인과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900호 남짓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도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이 경의선으로 인해 많은 거대한 도시가 생성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경의선(京義線)의 역사를 보면 1904년 러일전쟁(日露戦争:Russo-Japanese War)을 시작으로 일본은 서울(京城)~신의주(新義州)구간 군용 철도를 부설코저 임시군용철도감부를 설치하였고 서둘러 1904년 3월 용산(龍山)~개성(開城)구간의 노반공사에 착수하여, 1905년 평양(平壤)~신의주(新義州)구간이 완공되어 용산(龍山)~신의주(新義州)구간에 직통운전이 시작되었으며,1906년 청천강, 대동강 철교가 준공되면서 전구간이 개통되었고 1920년대에 서울역(京城驛)을 기점으로 하여, 신촌(新村)을 지나 가좌동(佳佐洞)에서 합류하는 신선(新線)이 개통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아여 1926년에는 소사리원에서 대사리원으로 발전되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외 서조선의 보도를 보면 1922.09.05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서조선(西朝鮮)에 또 홍수(洪水:flood)라고 하여 작일밤부터 비가 시작되어 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지방에는 다시 홍수가 창일(漲溢) 물이 불어 넘쳐 재령군(載寧郡) 삼지강(三枝江)면과 봉산군(鳳山郡) 서종면(西鍾面)의 일대가 홍수에 묻혔고 재령과 사리원(沙里院)간의 교통은 전부 끊어지고 재령과 신천(信川)사이의 통로도 교통이 막혀 우편물도 전송이 정지되었다 하더라(재령특파원발전)
1922.09.28 기사를 보면 조선(朝鮮)에서 제2의 평야(平野)라 지하고 서조선(西朝鮮)의 부고(富庫)라 칭하는 이 "나무리 평야"는 전술한바와 같이 최초(最初) 많은 개인들의 노력으로 개척하기 시작하여 점차로 개척한 범위가 확대되매 이에 촌락(村落)을 이루고 일편으로는 동(垌) 큰 뚝을 완축하여 토지와 주민의 안전을 보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척된 토지는 상당한 수확을 보게 되고 주민은 비로소 안락한 생활을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토지가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물론 현대 사람의 관념 같으면 또 현대의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産制度)같았으면 어떠한 수단으로든지 또 어떠한 방법으로 든지 이것을 가장 튼튼하고 또 완전(完全)하게 자기의 소유가 되도록 하였을 것이며 또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의 관념으로는 토지소유제도(土地所有制度)가 아직 분명치 못한 당시의 형편으로는 그 토지를 왕족이 사는 궁가(宮家) 즉 육상궁(毓祥宮)에 위탁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하여 그 토지전부를 동궁(同宮)에 위탁하게 되었다[연대미상], 그러나 소위 청백치 못한 양반이나 세력가라는 자들이 자기의 소유토지를 궁가(宮家)에 위탁하고 그를 빙자하여 모든 편의를 얻고 또 결세(結稅)를 면제(免除)케한 사실이 있고 또한 토지소유의 안전을 도모하는 대신 생산하는 일부를 도지(賭地)사용료, 토지명의 차료(借料)로 납부하면서 생산수익(收益)과 권리이전(權利移轉), 경작권(耕作權)까지 자기들의 자유로 처분하여왔기 때문에 궁가에 위탁하는 이 평야, 즉 개척한 토지들은 당연히 궁가와 경작자간의 관계로 보더라도 이 토지의 평야는 궁가와 그 개척자의 공유가 되어야 하지만 당시의 소유제의 불명확함과 궁가(宮家) 대 세민(細民)의 관계, 그들의 막강한 지위가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제도가 변하고 상리(常理)가 안전지 못하여 모든 지위가 한낱 일장춘몽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결국 대한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2년(1908)에 제실재산정리국(帝室財産整理局)이 설립되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가 창립되면서 제실재산은 주식불입금으로 납입되어 이렇게 궁가와 개척자간의 남겨진 토지들이 모두 동양척식주식회사소유로 넘어가 버렸다는 기사이다. 이것이 대표적인 일제의 토지 갈취이야기다.
그외도 상당히 많은데 나중에 기회 있을 때 올리도록 하고 위의 글에 대해 잠시 이야기 하면 사실상 일제(日帝)가 조선의 영토를 전쟁없이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위 기사내용을 보면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다.
위 기사에서 안타까운 것은 조선인들이 서조선에서 거대한 평야를 개척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연대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이 매우 안타깝다.
그러한 땅이 철도업자들에게 야금야금 잠식당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다.
광활한 땅의 제실재산(帝室財産)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돈(화폐)으로 환산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마치 1803년 완료된 루이지애나 매입에서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을 미국정부가 반란의 괴수의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로부터 2,147,000 km2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달러에 사들였던 사건이라 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구매 중 하나라고 하면서 들어내는 상황과 같은 논리이다.
대대로 이어온 조상의 땅이며 당시 제정(帝政:imperial government)의 땅을 마음대로 팔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상대적으로 프랑스가 무력적인 면에서 약한 것도 아니다.
또 한가지는 마찬가지로 18세기에 국가로 존재하지도 않았을 미국이 대조선인 브리티시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는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게 서쪽으로 개척을 나간다는 설정인데 이때부터 서부는 무법천지의 세상이 되었고 그들은 꺼리낌 없이 강도질 즉 개척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거대한 벽이라고 생각햇던 루이지애나 식민지 영역을 반란 괴수로부터 매입한 사실을 빌미로 역사적으로는 동부식민지 확대의 장애물을 제거한 것이고 중부와 서부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북미역사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하나의 체제의 비주류로 존재하던 아메리카원주민 땅을 빼앗는 것으로 설정하고 '서부개척시대'라고 만들었지만 전부 20세기초 독점자본으로 토지를 강매하게 만들거나 착취한 사실을 그럴 듯하게 풀어 놓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해양세력들이 주식회사제도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날개를 달았다는 사실인데 19세기부터 생성된 부르주아세력과 이은 도금시대(鍍金時代:Gilded Age) 자본제국주의 자들의 무차별적으로 벌어들인 추악한 자본을 이용하여 기발한 주식회사를 만들고 황실의 재정을 틀어쥐었으며 황실권한을 제압하면서 허수아비 황실을 만들었고 마침내 황실 즉 제실의 땅과 재산을 몰수하고 착취했던 사실이 위 기사에 고스란히 들어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는 세계에서 5번째 목화(木花, Gossypium)생산국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56 "에서 어멀리 켐프의 ‘The face of Manchuria, Korea, & Russian Turkestan(1911)’ Korea is the fifth largest cotton producing country in the world, and now that it is opening up to trade, with fresh facilities of transport by land and sea, it is likely to make rapid progress.한국은 세계 5위의 면화 생산국으로, 육상과 해상에서 새로운 수송 시설을 갖추어 무역을 개방하고 있어, 급속한 진전이 있을 것 같다고 말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 현대 과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성을 20세기의 주요한 제조업이었던 목화산업을 이야기 한다.
즉 자본주의의 상징성을 목화산업 즉 면직물산업이라고 한 것이다.
세계5위의 면화생산국이었던 코리아가 자본주의 생성 근원을 제공한 국가주체임은 분명하고 세계5위의 면화생국으로써의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거대한 영토를 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으로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나오며
위에서 보듯이 동조선은 원주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서조선은 사리원을 말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적어도 한반도지형에서 처럼 직선거리 229km 남짓하게 떨어져 있는 도시들이 아니며 동조선, 서조선이라 하였으니 상방간 도시의 방향이 정동서가 되어야 하겠지만 위 한반도 지형지도에서 보듯이 서북과 동남을 가르킨다.
웃습지 않는가.
어떤 독자의 표현대로 한반도 지형의 도시들은 어색함의 극치이다.
최근 인터넷 신문을 보면 일본네티즌들은 스스로 '일본은 동조선(東朝鮮)'이라 하고 중국네티즌들은 스스로 '중국은 서조선(西朝鮮)'이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2010년대 들어 일본 네티즌들이 자국을 비하하는 의미로 동조선(東朝鮮)이란 신조어를 사용하였고 이어, 최근 중국 네티즌들도 자국 비하의 의미를 담은 서조선(西朝鲜)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다고 기사화하고 있다.
이런 신조어를 만드는 일본 혐저민(嫌儲民)들은 “일본은 열등국가이므로 동조선이란 표현이 어울린다”며 “일본에서 주장하는 일본해도 동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중국을 서조선(西朝鮮), 러시아를 북조선(北朝鮮), 미국을 미조선(美朝鮮) 등으로 지칭하고 또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므로 중앙조선(中央朝鮮)으로 부르자는 주장까지 제기된다고 하고 있다.
한편 최근엔 중국에서도 혐한(嫌韓)성향의 중·일 네티즌들이 퍼뜨린 용어 ‘서조선(西朝鲜)’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자국의 열등적인 면도 없지 않겠지만 한국을 혐오하는 세력들이 비아냥거리는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지칭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명확한 사실은 이러한 지칭들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조선이 얼마나 크길래 이렇듯 4개조선이 존재했을까?
그것을 근원적인 역사 사실로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 하지 않을 수 없었을까?
일제는 해양세력이어야 하고 서세이어야 하며 자본제국주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제도 반자본주의 세력들에게 반란을 당했고 그러한 세력들은 정확하게 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제는 철저한 자본주의체제의 정치조직이다.
그리고 조선과 대한제국을 합병한 후로 특이하게 일제정치제도가 중국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조선과 대한제국이 중국이었다는 말과 같다.
사이토 마코토(齊藤 實)은 조선총독이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1850-1924,재임:1916-1919)가 3.1운동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그 뒤 잘 알려진 1920년 3개 신문발행 허가를 조치하는 조선(朝鮮)에서의 문화통치자로 알려진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1858-1936,재임:1919-1931)가 하세가와 후임으로 취임하여 1931년에 퇴임한다.
당시 조선총독은 일본제국의 내각총리보다 더 비중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도 참 특이하다.
사이토 제등총독이 일본 내각총리에 인선되던 시점의 일본제국 정부사정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과 마찬가지로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시장 대폭락장세인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로 촉발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1929년 세계대공황(Great Depression)의 여파가 강타하여 일본 경기가 후퇴하고 기업도산이 잇따랐으며 사회 불안도 확대되는 와중에 내각에서는 중국환상에 빠져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정작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부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지만 내각은 만주사변 실책까지 묵인하면서 동시에 1930년에는 런던 해군군축조약을 체결한 것과 맞물려 불만을 고조시켰으며 새롭게 취임한 호헌파의 중진 내각총리가 노골적으로 군의 축소를 지지하는데 큰 불만을 가지면서 총리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 禮次郞:1866-1949)가 수상에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세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1855-1932)가 수상에 취임하자 1932년 5월 15일 일본제국 해군 내 극우 청년 장교를 중심으로 한 5.15 쿠데타사건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극우청년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의 해동은 반 자본주의 세력들이다.
쿠데타 세력들은 경제공황을 발생케 한 재벌타도를 목표로 정우회본부, 경시청, 일본은행 등을 습격하고 총리관저에 침입하여 내각총리대신 쓰요시를 사살하고 체포되었다 하였으며 주모자 11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전국적인 구명 운동과 35만 명의 서명으로 사면되었다고 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국민대다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과 같다.
이러한 사건들은 늘 하는 이야기지만 북아메리카대륙의 미국(US)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사건일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
바로 워싱턴(Washington D.C) 또는 시카코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총독부 출신이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추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도 제3대(1919-1927), 제5대(1929-1931)조선총독부(朝鮮総督府)총독으로 근무한 사이토 마코토(斎藤 実:1858-1936)는 제47대 외무대신, 제41대 문부대신, 제30대 내각총리대신, 제9대 태정관(太政官)의 내대신(内大臣)까지 역임을 하였고 온건노선에 호응하여 황족세력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1849-1940)와 중신들이 개별적으로 만나 회의한 결과 일제의 총리에 임명 된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일본제국 관직명에서 특이하게 훈독(訓讀)을 사용하였고 옛 중국이라고 하는 수당(隨·唐)에서 사용하였던 율령제도(律令制度)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한 사실과 당명(唐名)과 중국의 품계제 위계(位階)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실상 이러한 행위들은 중국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스스로 중국체계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조선의 위치를 그대로 답습하고자 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박견(狛犬)으로 본 사자상(獅子像)은 고려(高麗)의 상징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12 "에서 일본에서는 주로 ‘고려개’라 하여 박견(狛犬)이라고 하지만 때론 '고양이'라 하여 박묘(狛猫)라고도 하며 또한 고려 박(狛)이 아닌 당묘(唐猫)라고도 하였다는 자료와 우리나라 사전에서도 박견(狛犬)을 고려견(高麗犬), 당사자(唐獅子)라고도 하고 고려(高麗)가 당(唐)이고 중국(中國)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본 블로그 글 "나가사키(長崎))항과 데지마(출도)는 어디에 있었는가?"에서 말하길 카라(から)는 한자(漢字)로 눈에 띄는 3가지가 바로 "韓, 漢, 唐"이라는 명칭을 훈독(訓讀)한 것이고 삼한을 카라(から)라고 하였으며 통일삼한을 당(唐)이라 한 사실을 밝혔다.
다시말해 1910년 한일병합에 의해 일본제국의 이러한 율령제도와 품계, 위계사용은 그토록 소원했던 마침내 정한론(征韓論)을 실행한 것이 되었고 삼한을 다 가졌으니 바로 수당(隨·唐)과 같은 중국(中國)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극일을 위해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중국(中國)이란 타이틀을 놓고 장개석의 신중국과 일본제국이 마침내 치열한 전쟁을 벌렸다는 사실도 알수가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滿洲事變)과 1937년의 중일전쟁(中日戰爭:Second Sino-Japanese War)이다.
본 블로그 글 "텍사스 롱혼(Texas longhorn)과 청일전쟁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8 "에서 1894년부터 1895년 사이에 벌어진 청일전쟁(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은 고려(高麗)와 일본이 충돌한 전쟁이라는 사실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근대사가 감추고 있지만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차례로 일본이 정복했다는 사실은 정한론을 성취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옛 삼한을 통일한 고려(高麗)를 당(唐)이라고 하였으니 그들 스스로가 당명(唐名)을 사용하여 위계질서를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추정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훈독은 한자음 만의 훈독(訓讀)이라고 하겠지만 이것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독일어, 러시아어화하여 포괄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소위 옛 1870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Prussia:Preußen)이 가졌던 유럽종주국 권한을 그대로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때문에 일본제국은 유럽세력들의 중국(中國)이었던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유럽은 빼버리고 용병들만 채워놓은 것이 오늘날 열도일본이다.
그러니 삼한의 종주국이었던 대조선(indies, 大朝鮮)과 대한제국(COREA)은 세계유일한 통치국이며 세계 종주국으로서의 거대한 영토와 막강한 주권을 가졌던 역사체제라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우리를 정말로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은 대조선 체제내에서 벌어진 사건임에도 유럽종주국싸움이라고 하는 보불전쟁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중 파리에서 폭동 일어나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든지 이후 프랑스의 제3공화정부가 입각하고 또한 프랑스인 학살과 기독교교회방화 등이 발생하였던 천진사건 즉 천진교안(天津敎案)이 발생하며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서원을 철폐하였다는 사실들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사에서 이런 사건들을 분리키셔 독립적인 사건으로 만들었지만 이 사건들이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고 철폐되었다고 하는 이 서원(書院)은 유교서원이 아니라 바로 카톨릭교회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100여 년 전 안동에는 성경과 기독서적을 판매하는 기독서원(基督書院)이 존재했고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중국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수학하면서 1887년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고 하며 무슬림교회 역시 서원(書院)이라 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종교교회(琮橋敎會)라 하였고 오래전부터 중국에서는 교회서원이라 하였는데 서학동점기(西學東漸記)에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 전통 서원에서 ‘서원(書院)’이란 명칭을 멋대로 취해 설립한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구라고 설명하고 있다.
서세들이 이런식으로 취한 것이라면 동양역사의 장점들을 그들이 씨도 빼지않고 그대로 삼켰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서구에서 이런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자 1871년 1월에 주체가 된 프로이센체제에서 독일제국(帝國)이 성립되고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재위:1861-1888)황제가 즉위하면서 신미양요(辛未洋擾:1871.06.01)가 발생한다.
어쩌면 오늘날 프랑스는 철저한 선교사 집단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것들은 동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 흐름이다.
그렇게 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지적으로 청일수호조약(清日修好条規)이 맺어지는데 1871년 9월 13일에 천진(天津)에서 일본과 청조(淸朝)사이에서 처음으로 맺어진 대등한 조약이라 하는 것으로써 이 천진사건은 동양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조약사건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미래에 매우 전망이 어두울 수 있고 활동이 부자유스러워져 곤란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귀결 된다.
물론 이를 조정코저 한 청조는 바로 고려(高麗)의 명령을 하달받는 하부관리의 지배구조이다.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1871년 2월 26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아돌페 티에르(Adolphe Thiers:1797-1877)와 독일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1815-1898)가 베르사유조약(Treaty of Versailles, 1871)을 맺게 되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승복하는 불평등 조약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조선의 귀족사회계층간 심한 갈등을 가졌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청일수호조규(清日修好条規)역시 조약당사자가 일본인 다테 무네나리(伊達 宗城,1818-1892)와 청조 외교관 이홍장(李鴻章:1823-1901)이라 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천진사태를 동서간 진정시킬 수 있는 하부관리의 조약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구체적이고 광범위하게 풀어내야 하는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말하고자 하지만 잠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보불전쟁전쟁(Franco-Prussian War:1870∼1871)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제국의 비스마크크 철상의 등장과 조선시대 대원군의 등장이 처해진 정치적상황과 체제속에 위치하는 권력입지와 상대적으로 대원군이란 지위 현황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베르사유조약은 고려가 아니라 조선의 입지를 강화하고 고려가 담당했던 북부 자유무역지역을 조선이 직접 관할 하는 조치가 아니었는가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독일프랑스강화조약 체결이라고 하며 알자스와 로렌(Alsace-Lorraine)북부를 할양하는 것과 성격상 비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즉 고려의 권한이 그만큼 약해지고 조선에서 모든 통제가 가능하도록 권한 위임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풀어 볼 수 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1-1898)은 철종(哲宗:1831-1863,재위1849-1863)의 전가족이 몰살한 상황에서 이듬해 1864년부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으며,1866년에 천주교탄압으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고 1871년 6월에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발생하자 1873년 11월에는 명성황후(빅토리아황후)와 유학자 및 신안동김씨(하노버왕족), 풍양조씨(호엔촐레른 왕가), 여흥민씨(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에 의해 축출당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년 12월 31일까지 빌헬름 1세의 대리청정을 직무 수행하였고 수상 취임 후 첫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철혈정책(鐵血政策:Eisen und Blut)연설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철혈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하여 1864년 덴마크를,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제압하였고 이후 일으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普佛戰爭:1870-1871)에서 승리하여 독일제국을 선포하고, 독일통일을 이룩하였다고 하는 인물이다.
이후 비스마르크는 1871년에서 1890년까지 독일제국의 제국수상(Reichskanzler)으로서 유럽외교무대를 주도하면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위해 노력했고 1877년 러시아-투르크 전쟁(Russo-Turkish Wars)이 발발하자 베를린회의(Congress of Berlin)를 주관하여 '공정한 중재자' 역할도 하였다.
즉 국제조정자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중앙지배세력인 종주국의 재상(宰相)행위와 같다.
국내적으로 1872년부터 남부독일의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벌였던 것도 흥선대원군의 카톨릭탄압과 동일한 것이며 1878년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를 억압하였다는 것은 홍경래의 난과 1862년 진주농민항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개혁정책을 실시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걸쳐서 반(反)가톨릭과 반(反)사회주의 법률을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독일정치문화에 불신과 분열이라는 파괴적인 유산을 남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후두암(喉頭癌, Laryngeal cancer)에 걸린 빌헬름2세와 황후인 빅토리아공주와의 정책 갈등으로 사직, 정계은퇴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고종의 황후 명성황후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한 사실과 같고, 1898년 7월 30일 사망했는데 대원군의 사망년도가 동일하다.
그러나 명성황후를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Victoria Adelaide Mary Louise:1840-1901)이라고 단언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바로 고려와 조선에서 분리된 군주와 군후들이 존재했을 것이란 짐작이 들기 때문이다.
코리아의 여왕의 사진들이 우리의 모습과 다른 것은 아무래도 고려와 조선인들의 사회가 다원적 사회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우리가 비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시 정수리에 꼬챙이가 달린 투구 피켈하우베(Pickelhaube)를 한반도 역사에서 고종과 순종이라 한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 투구는 1842년도에 프로이센이 채택한 군모이고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군인이 사용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다.
광동조선(廣東朝鮮)이라 한 것도 그렇다.
광동의 있는 조선으로 불어 볼 수 있고 조선에서 광동지방의 조선을 말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던 모두가 동쪽에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광동이라 하였으니 조선의 동쪽 영토는 매우 넓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반도에서 그러한 징후는 찾을 길이 없다.
무엇때문에 광동조선이라 했을까?
한반도를 보면 절대로 광동조선이란 명칭이 생성될 수 없다는 것은 바보천치가 아니면 알 수가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의 신중국 대륙 남부에 광동(廣東)이란 지명이 있다.
이 광동과 광동조선은 다를까?
왜 헷갈리게 역사지명을 이렇게 명명했을까?
여러가지 의문이 든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이런 지명은 두개일 수가 없다.
바로 하나이며 동일하게 볼 수밖에 없다.
서두에서 이야기 했지만 동아일보 기사에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在廣東朝鮮革命軍人會)라는 것은 황포군관학교 재직자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한 군사조직인데 바로 만주(滿洲)와 서백리아(西伯利亞:西比利亞:Siberia)방면에서 비밀이 학생1,000명을 모집하고 광동조선북벌군(廣東朝鮮北伐軍)에 가담시키려한다는 보도내용임을 알 수 있다.
조선 동쪽에 있어야 할 넓은 광역과 만주와 시베리아를 묶어 이야기 할 때 한반도 지형에서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황포군감학교(黃浦軍監學校)의 교장인 장개석(蔣介石)의 양해를 얻어 재학 중인 조선인 장교와 학생120명으로 혁명군인회가 조직되어 광동북벌군에 가담시켰다는 기사 내용에서 1924년 6월 16일에 설립한 광동성(廣東) 광주(廣州) 황포(黃埔)의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中國國民黨陸軍軍官學校)라하고 1929년에 개칭하였는데 국민당혁명군황포군관학교(國民革命軍黃埔軍官學校)로 명칭한 사실에서 이 학교가 분명 국민당을 이끈 장개석이었다고 중국자료에도 나타난다.
황포가 번우현(番禺县)에 속했다고 하며 성도(省都:省會) 광주(廣州) 지명 역시 1921년에 건립되었다고 하고 있다.
사실상 미국이 암묵적으로 등장하던 시기 1920년부터 모든 역사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으며 장개석(蔣介石) 역시 국민당(國民黨)을 창건한 손문(孫文)과 함께 조선(朝鮮)체제 내의 정치세력임을 알 수가 있고 신중국 남부지역에 광동(廣東)이란 지명은 우리의 광동조선과 동일한 선상에서 판단해야 할 지명임은 물론이다.
안중국의사 유골찾기, 거북선잔해찾기에 물음에서 한반도는 우리에게 아무런 말이 없다.
다원적인 체제에서 수많은 인종과 민족이 함께 공존했고 많은 종교를 포용하면서 서로 갈등이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언어체계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도록 정치적으로 배려한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같은 사회가 바로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 속에서 동조선, 서조선, 남조선, 북조선이 존재했고 또한 광동조선도 존재했다.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는 퍼즐을 맞추면 맞출수록 더 심한 안개가 덮어버리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실을 향해 쉼없이 나아가고 또한 밝혀야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책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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