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동물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한부울 2018. 12. 1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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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글쓴이:한부울

 

서문

서양인들은 왜 17세기부터 조선을 배회했을까?

고서(古書)로 본 고래

석탄보급소
고래가 인간과의 만남 그리고 절멸
서양인들의 끝없는 물욕
양키의 등장
벤자민 터커의 운명과 역사위치
양키들이 사냥한 고래종류와 분포지
마무리

 

서문

    

오래전부터 이글을 써 올리려 했지만 자료가 만만치 않았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쓰지 못했던 고래(whale)역사에 대한 세계삼한역사관적 분석의 이야기다.

고래에 대한 이야기는 한반도 역사만 놓고보면 우리 역사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고서에는 고래자료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이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 서식했다고 인지하고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결코 한반도의 동해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일본보다 고래를 많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일본 동쪽 바다, 즉 서태평양에는 엄청난 고래들이 많이 서식하고 종류도 다양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래와 접촉이 많다고 하는 것은 바다와 접하기 때문이며 그 바다는 대양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비하면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동해바다로는 협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巖刻畵)만 보면 한반도 동해에 접근하는 고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대왕고래, 혹등고래, 향고래뿐만아니라 북극고래,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 대다수 종들이 북극과 남극을 종횡한다 할지라도 동해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와 열도사이 해안선을 타고 통로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서식처라고 할 수 없음에도 암각화에는 매우 다양한 고래 종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더욱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의문스러운 것은 암각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고래종을 보면 한반도 역사 기록에도 그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을 법하지만 정작 고래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

고대에는 고래가 많았지만 조선시대에 넘어오면서 고래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래는 인간들에 의해 절멸한 것이 아니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습성적으로 서식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설인데 비이주성 범고래는 사라졌다가 해마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암각화에 고래의 다양한 종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지금도 동해바다에 이 고래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일본인만큼 한반도인들이 고래에 대한 집착이 덜 하다.

때문에 마구잡이 포획을 하여 절멸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역사고서에는 고래의 자료가 없고 현실적으로도 일본인 보다 고래를 접하기가 쉽지 않는, 동해가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역사연속성의 괴리는 크다 할 것이다.

이것에서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상황을 읽을 수 있으며 기록이나 눈에 띄는 유물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만큼 어느 시점 큰 변혁기에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알 수 없도록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글쓴이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영해 동해바다에 태산 같은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다는 사실을 빈약한 고서에서 그나마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이야기다.

동해 고래가 태산(泰山)같다는 표현은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 52권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고래가 태산같다는 표현에 걸 맞는 고래들은 대왕고래, 큰고래, 보리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참고래, 북극고래 등 많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대로 고래가 서식하는 환경이 조성 되려면 적어도 열도일본처럼 대양을 직접적으로 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범고래나, 북극고래의 이동 통로 정도의 역할을 하는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동해가 결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반도 동해에서의 고래활동이 적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포경금지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없는 근원에 의한 지리적, 생태환경적인 문제가 그속에 내재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멀쩡한 역사를 서양세력들이 난도질 한 후 그것을 고래 상황을 인지하려 하기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해야 맞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한반도가 아닌 역사의 땅 동해에는 세계 온갖 다양한 고래가 태고적부터 들끓었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은 단언하는데 바로 대서양이다.



본래 일본인들은 고래에 집착이 강하다.

그것은 아메리카대륙 서부쪽에 거주하면서 삶과 어우러진 습관적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서 손쉽게 잡힐 수 있는 많은 량이 포획이 된다면 지금의 독도분쟁은 지금보다 몇 십배 증폭이 되어 갈등이 첨예화되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가 있다.

한반도 동해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고래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은 지금도 연구목적으로 잡는 고래가 매년 1000 마리 이상으로 알려졌다.

연구라는 것은 개체 수를 임의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인데 속내가 보이는 이야기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關)시나 고래고기 음식이 발달한 나가사키(長崎)현 등에서는 음식 문화의 차이를 부정한다 하여 포경을 막고 있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주장한 조선 영해의 동해바다에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을 것이라고 예상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은 이글을 대신하고자 한다.

한반도 포경역사에 있어 가장 권위자라는 모학자의 흥미로운 주장에서 보면 "17세기부터 한반도에 찾아 든 이양선은 대부분이 포경선(捕鯨船:catcher boat)이었다"는 사실이다.

포경선이라 함은 고래잡이 배이다.

이 말에는 결국 조선 영해에 포경선이 많았다는 이야기며 그 포경선들은 모두 이양선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한반도 동해는 포경선이 득실거릴 정도로의 고래서식지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 오류에 의한 착각속에서도 어떤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분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인으로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별하게 지리적 자원이 없었던 한반도에 17세기부터 해양세력 즉 해적들이 이양선을 몰고 벌떼처럼 몰려 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들의 실제 추구하였던 포인트를 정확히 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부터 서양세력들은 고래를 상업포경에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이양선은 바로 1627년(인조5년)10월에 네덜란드 3인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653년(효종4년)8월에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De Sperwer:160톤)"가 제주도에 표착하는 것을 깃점으로 고래사냥이 성행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이후 18세기 후반 프랑스대혁명에 임박하면서부터 프랑스함대가 출현하는데 1787년 부솔호(La Boussole:500톤)와 아스트로라베호(La Astrolabe:500톤)가 제주도를 측량하고 울릉도까지 접근하는 등 배회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후 영국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지휘한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406톤)가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사실이 있으며 1801년에는 서양선박 정체를 알 수 없는 1척이 제주도 대정에 표착하고 서양인 5명을 상륙시키는 등 행태가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한 개의 마스트로 세로 돛을 가지는 소형 배, 슬루프형(Sloop)406톤 밖에 되지 않는 함선을 끌고 수만키로(km)를 넘나들었다고 하는 사실도 신기한 것이며 북태평양 탐험선이라고 하는 것도 탐험선이 아니라 포경선이 분명하여 그렇다면 북태평양에는 알레스카(Alaska),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 회색고래, 큰고래, 북극고래를 포획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포경과정에서 어떻게 한반도 동래 용당포에 표착하였는지가 분명하지가 않다.

그들의 개략적인 기록을 보면 종전처럼 승무원들이 마카오에서 겨울을 나기 전에 홋카이도(Hokkaidō)의 해안을 조사했던 것처럼, 아시아(?)로 항해했고 1797년 5월 16일 오키나와 남쪽의 미야코 지마(宮古島) 산호초를 들이받아 파괴되었을 때 천우신조로 돛대가 두개인 작은 스쿠너(schooner)를 구입하였고 선장 브로이튼(Broughton)과 그의 선원들은 이 작은 스쿠너(schooner)로 동북아시아를 탐험하고 난 후 1799년 2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떻게 천우신조로 작은 스쿠너를 구입했고 오키나와에서 어디로 구조되어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것인지도 연결되는 자료가 없고 동북아시아를 탐험을 어떻게 했다는 사실도 솔직히 알길이 없다.

더욱 의심스럽게 하는 것은 천우신조로 구입했다고 하는 이 스쿠너가 100톤 미만의 배로써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대서양을 누볐던 배라는 사실이다.

정말로 이양선들이 전부 포경선이었다면 별로 대형이지 않은 그런 배가 태평양을 횡당했다고 볼 수 있고 포경선이기 때문에 그들의 고래 포획지역에서 많은 표류자가 생겼으며 표착하여 조선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다반사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들이 포경활동한 지역이 어딘가 하는 점이다.


서양인들은 왜 17세기부터 조선을 배회했을까?


지금까지 알아본 결과는 그들이 조선을 찾아 배회하는 이유는 해양세력들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래서 고가(高價)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고래(whale)를 잡아 큰 이윤을 남기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곳은 동해(東海)이어야 맞다.

그러나 그들은 한사코 북태평양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왜 동해라 하지 못하고 북태평양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실예를 들어보면 1653년 160톤의 상선(商船) 스페르웨르호(De Sperwer)가 제주도에 표착한 사건에서 하멜(Hamel, Hendrik:?-1692) 포류기만 하더라도 그들은 동인도회사의 상선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화물선, 또는 화객선 정도로 생각하여 전혀 조선에 해를 끼칠 수 없는 것임을 알리고자 했지만 이 배 역시 고래잡이 포경선이라고 할 때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당시 조선이 그들을 대우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미개하다고 비난하지만 당시 16세기말 임진왜란이란 큰 사건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농간 때문에 곤욕을 치룬 조선입장에서 똑같은 서양인인 네덜란드인이라고 특별하게 대우했을리가 만무하다.

왜란같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조선은 안정된 체제를 위해 색안경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생존자를 구금과정에서 폭압적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 판단이 되어야 마땅하고 만약 단순한 표류가 아닌 무단 포경활동이나 첩보활동의 의심을 받는다면 엄격한 조사와 감시가 따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구했고 나중에 탈출했다고 하지만 무사히 귀환한 것으로 만족해야 함에도 글을 남겨 비난하게 하는 것은 서양역사만들기 차원에서 한반도 역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한계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밖에 없다.

정제된 역사만 알고 그시대를 경험하지 않는 우리가 세세하게 알 수 없지만 당시 조선을 들락거리던 서양인 즉 해양세력들은 믿을 수 없을 족속으로 알려져 있었고 사교(邪敎)를 남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손한 세력이라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기록들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사람들에게 그들은 좋은 이미지를 제공하지 못했다는 잘못도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 영국인들 같은 경우는 어느날 불현듯 나타나 침탈하는 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도 측량이니 해안조사니 하는 따위의 주제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 프랑스니 영국이니 하는 따위에 국가 개념자체가 의심스러운 것도 그들이 정식적인 외교관계가 있었다면 절대 이런 식의 방자한 짓거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 글쓴이의 냉정한 판단이다.

자신들의 이런식의 무단침입을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이 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핑계를 대며 범법행위를 정당화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으며 감히 불손한 그들에게 개방을 하지 않는 것을 마치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미개인 취급하면서 조선을 가르치려 했다는 것도 한반도 역사의 한계이다.

한반도 역사가 역사스스로를 반드시 비판과 비평을 할 수 있을 것임에도 전혀 조선역사 편이 아닌 것처럼 매우 주관적으로 오히려 서양인들을 대변하는 기록이니 어찌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당시에 얼마나 무도한 것인가를 보면 1868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상인이자 자칭 인류학자라고 하던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球)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실을 세상에도 크게 알려진 큰 사건으로 보도까지 되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비난은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당시 제도로써 엄청난 범법행위이고 체제가 그를 국제체포단을 구려 붙잡아 사형을 시켜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역사에는 그러한 움직임조차 읽을 수가 없다.

당시 서양인들은 돈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천하에 부끄러움도 없는 망충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서세동점시기에 선교사는 스스로 조선사회에 침투하는 전초병(前哨兵), 첨병(尖兵)을 자임하였고 솔직히 성스럽고 순수해야 할 종교를 바탕으로 체제 깊숙히 파고들어 민심을 이반시키며 혼란을 야기시켜 체제를 흔들리게 하였으며 불순한 세력들을 끌어들이고 세를 불려 조선을 더욱 곤욕스럽게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미국북장로회(PCUSA)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모아 보면 1881년 제대로 힘한번 써 보지 못하고 내부로부터 몰락한 조선체제의 원인을 알 수가 있으며 집요하게 체제전복을 염두에 두고 벌였던 그들의 모든 행위가 결국 결실을 맺은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이어 현시대까지 구성원들은 그들에게 관대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이고 그러한 자세를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본 블로그 글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2"에서 조선 현종(顯宗, 1641-1674 재위:1659-1674)9년(1668)에, 1000톤급의 '코리아호'를 건조하였다는 사실을 네덜란드가 발행한 식민지문서 제255호에 나타나 알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의 설명을 보면 당시 동인도회사가 조선(朝鮮)과의 직교역을 검토하면서 1년 후인 1669년 새로 만든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했다고 하는 사실을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행까지는 안했는 것 같다.

하멜의 말대로 조선(朝鮮)에서 구금기간동안 그의 인권이 현격하게 유린되고 참혹하고 미개한 처우를 받았다면 그래서 당시 네덜란드가 조선(朝鮮) 위에서 군림하고 조선(朝鮮)을 불리하게 할 수 있었다면 무엇때문에 1666년 9월 14일에 필사적으로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한 하멜 일행의 불편한 호소를 무시하면서까지 동인도회사는 1000톤급의 '코리아호'를 건조하고 조공까지 할 생각을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 영해에 찾아 든 이양선을 보더라도 1000톤이 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당시에 1000톤이라면 가장 큰 선박이 아닌가 한다.

인도회사가 조선(朝鮮)을 상대로 무역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무역선을 건조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했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혹은 일본 막부쇼군이 막았다는 설도 있다.

조건을 좋게 만들기 위해 코레아호를 명명했다거나 아니면 코레아호를 건조하여 조공식으로 바치려 했다면 조선의 당시 입지에서 보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한반도 역사는 네덜란드가 조선과 무역하는 것이 조선을 위한 것처럼 하는 한반도 역사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코리아호를 건조하여 명명하고 무역을 하려 했다는 것은 장사꾼인 더치(Dutch)동인도회사가 장기적으로 무역거래 상황을 읽고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위한 수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고래를 포획하기 위함이라면 조선과 관계개선 뿐만아니라 고래를 포획할 수 있는 권한과 영역확대를 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조선에 마구 침입하는 것도 모자라 해양측정이니 조사니 하는 따위를 늘어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에서 또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 "에서 밝혔듯이 현대도 그렇지만 엄청난 거리의 조선내륙 해안경계가 엄격했다 하더라도 작은 도서나  굴곡이 심하고 미로(迷路)와 같은 해안선 주변에 수없이 많은 섬에는 경계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가파른 절벽(steep), 낭떨어지기(bluff:high cliff)처럼 돌출된 곶(岬)과 같은 지형에 해적선인 정크선(junks)들이 숨을 수 있는 작은 만(灣)도 수없이 많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 숨어 들어갈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이 암암리 숨어들수 있는 방법 찾기에서 조선이 아무리 경계해도 이것을 막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육지에 침투하는 방법도 예수회선교사들 경우를 보면 교묘하게 위장하거나 은밀하게 침입한 사실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사실도 그들이 먼저 기록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사건이 되어 조서가 만들어진 것들은 예외라 하겠지만 무수히 많은 고래잡이 포경선 경우는 이를 일일이 나타내기가 힘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반도 독도에 과연 프랑스 포경선이 도착한 것이 맞는지 아닌지 여러분은 알겠는가.

그들이 그렇다고 기록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알게 된 경우이다.

이와같은 이야기가 특히 한반도역사에는 비일비재하는 것이 또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파수꾼 100명이 도둑 하나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은 이와도 같은 이야기며 종교적으로도 지금의 천주교라고 하는 기독교전통교회가 서양인들에 의해 변질된 것이라고 용기있게 말할 수는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끝난 경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이나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스며들 때 과정에서 지켜야 할 것이 있는데 어느나라이든지 그나라의 전통종교를 존중을 해주고 자극하거나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같은 종교인들로서 지켜야 할 덕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세기에 서양종교는 그러한 덕목은 안중에도 없었고 그저 깔아 뭉게고 승리하는 것에만 집중을 했기 때문에 비난은 감수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형태가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지나고 역사를 뒤돌아보니 그러한 모순이 보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포경역사의 권위자가 한 주장처럼 조선에 표착한 이양선들이 전부 고래잡이 포경(捕鯨)과 관계되는 선박이라는 사실은 한반도 역사 관점에서 이해 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부분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동해에 고래가 많아 서양인들의 포경선이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일이다.

옛 조선 영해(領海)에 서식하던 고래들을 포획하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던 이양선들은 이제 사실을 진실로 말해 줄 때가 되었다고 본다.

그들이 출현한 곳은 바로 한반도처럼 갇힌 바다가 아니라 삼면(三面)이 바다라는 것은 확트인 거대한 대양을 접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곳에는 무수히 많은 다양한 종의 고래가 서식하기 좋은, 넓고 깊은 바다가 존재하여 그곳에 고래잡이 포경선들이 마구잡이로 고래를 포획하기 위해 떼를 지어 항해를 한 사실을 밝혀 이제는 알릴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고서(古書)로 본 고래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54)로는 고래의 근원을 밝힐 수 없는 한계의 기록이라는 것이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일부 잡서라고 알려진 사서(史書)기록에서 의외로 아주 작은 마치 숨겨놓은 듯한 증거들을 어렵게라도 찾을 수가 있어 다행이다.

꼭꼭 숨겨놓은 것 같은 것은 아무래도 고래에 대해 한반도 역사는 말하길 꺼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조선 영해(朝鮮領海)에 고래가 서식한 사실을 왜 숨겨야 했을까?
고래에서 추출되는 향유기름, 고래기름, 고래수염, 고래고기 등 이러한 것들이 공물, 혹은 토산물로 정리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 52권에 보면 시귀 "又不見東海鯨鯢大如岳 또 못 보았나 동해의 고래는 크기가 태산 같아서~"의기록을 보면 분명 동해(東海)에 태산같은 고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 필자 미상의 연경사행기인 계산기정(薊山紀程) 제3권 / 관사에 머물다[留館] ○ 갑자년(1804, 순조 4) 1월 22일(임자) 큰 눈. '옥하관에 머물렀다'.란 글을 보면,“경어(鯨魚)는 동해(東海)에서 나기는 하나 본래 수족(水族) 중에 거물로서 낚시에 걸려드는 예가 드뭅니다.”했다.란 글귀도 찾을 수가 있다.

고래는 낚시로는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영조 1년 을사(1725) 9월 10일(갑진) 기사에 보면 "내수사에서 고래의 눈을 징납하는 일로 경상 감사 조영복이 상소"란 제목에서 "내수사(內需司)의 첩정(牒呈)에 고래[鯨魚]의 눈과 수염을 조금 보냈다는 일로 인하여 감세관(監稅官)을 형배(刑配)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고래의 눈은 다만 하찮은 물품이고 원래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아닌데.."라고 하여 고려 수염과 눈을 징납(徵納)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고려수염과 눈은 하찮은 물품으로 조선관리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반대로 왕실제정을 관리하는 내수사(內需司)의 첩정 즉 첩보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고래 부속물이 서양인들에 의해 암암리 거래되고 있는 상황을 내수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영조 23년 정묘(1747) 9월 12일(기해)기사에 서지수가 말하길 "...경유(鯨油)에 대해 말씀드리면,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의 7촌 숙부인 서명연(徐命衍)은 본래 청백하다고 일컬어졌는데, 해읍(海邑)의 수령으로 있었을 때 경유를 팔아 시집가는 딸의 혼수를 장만했다 합니다..."라 하고 있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래 고래가 조선 동해에 서식하였기 때문에 고래기름을 일반에서 생산을 하였다는 사실까지 유추할 수가 있어진다.

솔직히 한 두마리 한반도에서 잡았다고 하여 고래기름을 생산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한 두마리가 아니라 대량으로 고래가 포획되었다고 한다면 고래기름을 추출할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한 고래기름 추출 회사들은 많았을 것이다.

향유기름은 마리 당 최고 8배럴, 지방 등에서 채취되는 고래기름은 최고 40배럴로 나타난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았을 때 조선 영내에 특히 동해에 태산같은 고래가 서식했고 고래눈과 수염 그리고 고래기름까지 생산이 가능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조선(朝鮮) 동해(東海)에 태산(泰山)같은 고래(鯨)가 서식했다는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근세기에 독도지명이 되어버린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De ancourt)가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하여 리앙쿠르트 바위(Liancourt Rocks)라 한 사실은 한반도 독도와 함께 무거운 역사로 앞으로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많다.

18531[철종 4(음력 18521221; 양력 1853129)], 미국의 포경선 606톤급의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고 조사에서 그들 스스로 미리계, 며리계라 한 사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동생 박선수가 교정하고 김윤식이 편집하여 1911년 간행하였다고 하는 아래 게시한 환재집(瓛齋集)기사에서 보면 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조선에서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를 한국고전번역원의 해석에서 아래 '함풍(咸豐) 5년(1855)의 일'은 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구해주었던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환재집(瓛齋集)조선 말기의 문신 박규수(朴珪壽:1807~76)의 시문집
제7권 / 자문(咨文) 자문을 살펴보니 모두 15편인데, 방물(方物), 범월어채(犯越漁採), 전변(展邊) 등에 관한 의례적 자문 8편을 제외하고, 서양 선박 사건 관련 자문 7편만 수록하였다.
미국의 봉함을 전달해 준 것에 대해 답하는 자문〔美國封函轉遞咨〕
弊邦三面濱海。凡遇遭難來泊之別國客船。或助粮給需。候風歸去。或船破不完。旱路護送。以達皇京。轉歸本國。各隨其願。並無阻礙。莫非仰體我聖朝天地覆載。無物不遂之至仁盛德。而其爲藩邦之定規成憲。由來久矣。且擧美國難民之拯救護送者。曾有咸豐五年同治四年同治五年。先後三次移咨。俱在貴部。而事非久遠。則該國之人。亦應見聞攸及者也。遠人之經涉風濤。出沒艱險。在所矜恤。安有殘害之理哉。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입니다. 다른 나라의 객선(客船)이 조난을 당해 정박하면 양식과 물품을 제공하고 바람을 기다려 돌려보냈고, 혹 배가 부서져 온전치 못하면 육지로 호송하여 황경(皇京)으로 보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등 각각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며 전혀 저지함이 없었습니다. 이는 우리 성조(聖朝)의 천지처럼 덮어주고 실어주며 어떠한 사물도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함이 없는 지극한 인과 성대한 덕을 본받은 것이며, 이것이 번방(藩邦)의 정해진 법도가 된 지도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또 미국 난민을 구조하고 호송한 일을 거론하면, 함풍(咸豐) 5년(1855), 동치 4년(1865), 동치 5년(1866)에도 있었습니다. 전후 3차례 보낸 자문이 모두 귀부(貴部)에 있을 것이며, 오래된 일이 아니니 그 나라 사람 또한 응당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입니다. 먼 나라 사람이 풍랑을 겪어 위험에 빠진 것은 가련히 여길 일이니, 어찌 해칠 리가 있겠습니까.


위 기록에도 나타나지만 양키라고 하는 미국인을 일본인들은 '메리켕'이라고 하였고 이는 미리견(米利堅), 미리견(彌利堅)이라고 하는데 이 포경선원인 미국인들과 인간적으로 엮이는 사실들이 나타난다.

1855년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의 선원을 구해준 일, 1865년 경상도 연일(延日)을 거쳐 강원도 삼척에 표류해 온 미국인을 돌려보낸 일, 1866년 서프라이즈호 선원을 구조하여 호송한 일을 말하고 있는데 미국 포경선들이 풍랑에 못이겨 좌초할 때 매번 조선에서 그들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연결해보면 유독 조선 주위에서 양키 포경선이 많이 들락거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양키 미국은 1820년대부터 홋카이도에 포경선 전진기지를 세우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고 알려지고 역시 일본을 개항시켰다고 하는 페리 제독은 이러한 고래를 쫓아 포경선과 함께 극동지역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도 새롭게 검토되어야 할 문제인데 전자에서 언급하였듯이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태평양까지 도달하려면 석탄보급지가 있어 1000톤 안되는 증기선 항로에 지장이 없어야 하지만 1857년까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들이 한반도나 일본열도에 들락거렸다는 것은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석탄보급소와 페리 임무


잠시 미국(양키) 흑선(黒船) 함장 매슈 캘브레이스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에서 보면 그는 우라가(横須)에 입항한 1853년에 정식관직은 '동인도소함대지휘관(Commander of the East India Squadron)'으로 'Squadron'이라 함은 '소수의 군함'으로 구성된 함대라는 것인데 한반도인들이 말하는 '태평양함대제독'이란 거창한 명칭과는 거리가 있고 태평양(太平洋:Pacific Ocean)이 아니라 동인도(東印度)라 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또 하나의 사실은 매슈페리를 '증기함대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Steam Navy)'란 별칭을 붙이고 있는 것도 당시 증기선을 건조하는 감독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있어 정식 해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끌고 일본 우라가(浦賀)항으로 들어간 증기선은 연안용에 불과하다.

4척의 증기선을 세세히 보면 1)모선인 증기호위함 미시시피호(Mississippi) 3,272 ton(톤), 스피드 8노트, 필라델피아해군창(Philadelphia Navy Yard) 1842년 건조하고 1863년에 침몰시겼으며, 2)슬루프형 포함(砲艦) 플리머스호(Plymouth) 989 ton(톤) 보스톤해군창(Boston Navy Yard)에서 1843년 건조:1861년 납포를 방지하기 위해 침몰시킴, 3)슬루프형 포함(砲艦)인 사라토가호(Saratoga : Schuylerville) 882 ton(톤) 메인주의 키터리(Kittery, Maine)의 포츠머츠 해군창(Portsmouth Navy Yard)에서 건조하고 해양 학교 선박으로 사용하기 위해 펜실베니아 연방에 임대(1890-1907)되었으며 1907년 폐품으로 판매, 마지막으로 4)증기호위함 서스퀘해나호(USS Susquehanna) 2,450 ton(톤) 뉴욕해군창(New York Navy Yard)에서 1847년 건조:속력10 노트(knots) 1868년 조각으로 판매 한 것으로 나타난다.

1), 4)번함은 그나마  3,272 ton(톤), 2,450 ton(톤)으로 크지만 나머지 두 척을 천톤도 안되는 소함이다.

연안용(沿岸用:for coast)으로 건조된 1000톤 미만의 증기선(蒸氣船:steamship)이 2척이나 딸려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소형함을 가지고 거칠고 위험한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근세기 서양역사가 얼마나 웃기는 것이냐 하면 상황이야 어떻든 조건이 어떻게 되었던 간에 동양을 설정하여 무조건 항해했다면 모든 것이 거침없이 해결됨은 물론이고 반증이나 검증이란 절차도 없이 고스란히 역사로 인정되는 사태를 지금 우리는 정확히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식의 주장은 얼마나 뻔뻔하고 무모한 것인가를 그들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서양사가 말하고 있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매슈 페리'의 본래임무가 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포경선을 관활하는 책임자의 임무와 일본에게 개방을 요구하고 답을 얻으려 한 것은 일본의 고래잡이 구역을 넘겨받으려 했다는 것과 그곳에서 포경활동을 하고 있는 양키 고래잡이 포경선을 지원하기 위해서라 한 사실이고 더하여 그곳 아시아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실행될 수 있는 잠재적 석탄보급지의 독점화를 막기위해서라 했다.

석탄이라 하니 또 할 말이 많아 진다.

석탄소비는 산업혁명이 발생하기 전에는 소비자체가 미미했다는 것은 거의 공론적인 이야기다.

그러나 1760년에서 1820년 사이에 발생한 산업혁명은 기술의 혁신과 새로운 제조 공정(manufacturing process)으로의 전환되면서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력(에너지)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때를 마추어 1769년 제임스와트에 의해 증기기관이 개량됨과 동시에 1776년 산업용증기기관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석탄소비가 증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산업의 쌀'이라고 하는 철강산업에서 18세기에 비로소 목탄 대신에 석탄(Cokes)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증기기관의 발달은 1803년 증기기관차가 등장하게 만들었으며 1829년 스티븐슨에 의해 '로켓트호'가 상업적으로 가능성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철도산업에 불을 붙였고 강이나 호수를 항해하기 위한 증기선은 1802년 시운전에 이어 1807년 미국공학자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에 의해 여객선에 마침내 이용되었으나 본격적으로 범선에서 증기선으로 바뀌는 것이 1848년부터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철강산업은 철도산업을 만들고 육지와 해상 운송산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철도산업에 의해 우후죽순처럼 뻗어나가는 철로는 증기열차를 분주하게 왕래하도록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철도산업과 이어 1869년에 완공된 대륙횡단철도에 의한 운송산업은 엄청난 것이었고 철로가 완성이 되면서 오히려 연안 여객선들도 소형규모에서 대형으로 교체되기 시작하였다.

1848년부터 증기선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고 증기선이 1000톤 정도의 규모였으나 1850대부터 3000톤에 육박하고 점점 대형화추세에 놓이게 된 것을 본 블로그 글 "1902년 당시 최대 18,000톤급의 코리아(korea)호 http://blog.daum.net/han0114/17050702 "에서 밝혀 본 사실이고 처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연안항로을 이용 수송선 라인(line)만들면서 운송사업을 시작한 뉴욕 상인 윌리엄 아스핀월(William Henry Aspinwall:1807-1875)은 초보적인 스팀선인 1,000톤급 규모의 사이드외륜선(side-wheel steamer)인 1848년 캘리포니아호(SS California:1848–1866, 1872–1874), 오리건호(SS Oregon:1848–1861), 파나마호(SS Panama:1848–1861) 3척을 동시에 건조하여 운행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이 증기선(스팀선)이 항해한 곳은 대양 횡단은 엄두도 못냈고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남부 연안항로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연안항로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며 그외 대다수는 북아메리카대륙 각 강이나 호수를 이용하는 여객선으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본격적인 석탄수요는 기존 무역항로가 빈번하게 집중이되던 북아메리카대륙의 운송 수단을 위한 증기기관이 필요한 연료로 모든 것에서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석탄 수요는 폭발적인 것이 되었다.

예를들어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밝혔지만 오늘날 1850년대 미국자료가 자꾸 태평양을 항해했다고 하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 것이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미시시피강을 태평양으로 보고 그것을 깃점으로 서부를 아시아라고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러한 역사사실은 숨기고 태평양이라고 하면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곶(Cape Horn)을 휘돌아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처럼 만들고 도착한 곳을 오늘날 아시아대륙이라 설정한 것이어서 근세기에 무조건 항해를 하면 무사하고 아시아대륙을 별 걱정없이 왕래했다고 각인 시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과장의 역사조작이라는 것이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이 시대상황이 전통적으로 조선(朝鮮)에서 모든 제반산업을 주도하고 문화를 이끌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석탄 소비가 조선에서 많았을 것이고 중국이라고 하는 개체가 조선 내에 경사(京師), 그리고 경기(京畿)로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그곳에는 정치적인 외교관계가 협의적으로 진행되는 공간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한정하여 보지 않을 수 없고 지하자원이나 산업생산물을 싣고 들락거니는 곳은 조선의 각 지방 주요한 항구라고 할 때 그곳에서 경제특수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러한 역사 결과물은 현재 우리에게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정확하게 풀어 볼 수는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분석을 마다 하지 않는 것이다.


석탄은 증기선 운항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가를 알아보자.

초보적인 증기선을 이용하기 위하여 무역항로의 중간 깃점에 석탄의 공급지가 건설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곳을 선점하고 독점한다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에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어야 하고 무역 거래 공간은 그곳에서 가까운 멕시코 또는 중앙아메리카, 더 나아간다고 할 때 카리브해제도나 버뮤다섬, 남아메리카대륙 동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아래 그림은 1870년부터 1914년까지 브리티시가 설치한 각 운행 중간 깃점에서의 석탄보급소 지도이다.


Figure1.3 Map showing British coaling stations in relation to those of foreign powers, 1870-1914. Foreign stations are shown in gray.


일본인들은 1853년 미국(양키)를 보고 '메리켕'이라고 하였다.

이는 미리견(米利堅), 미리견(彌利堅)이라 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1853년 1월에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한 606톤급의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의 포경원이 말한 것과 동일하다.

어쩌면 동일한 시간이니 페리가 조선에 표착한 사우스 아메리카 포경선의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일본과 선을 닿고 있는 조선에 연락하고 외교적으로 풀려고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다음에 "양키 고래잡이 상황"을 다루는 글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겠지만 증기기관이 발명 된 후 증기선에 대한 석탄공급이 원활해야 운행이 가능하지만 사실상 배에 적재할 수 있는 공간은 한정 되어 얼마간의 연료만 충당할 뿐 오랜 시간을 바다에서 항해가 이루어진다면 항해 로선 중간 깃점에 석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기지가 반드시 필요하였지만 1853년 페리가 일본을 향해 항해할 때만 하더라도 미국(양키)은 영국에 비해 석탄공급소가 전무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만약 이러했다면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주의 노퍽(Norfolk)에서 출항하여 석탄 공급없이 어디까지 항해가 가능하였겠는지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시아대륙에서 거점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독점을 빼앗기면 안된다고 하는 것은 마치 아시아지역에서 잠재적 석탄공급지를 지키려는 의도를 말하고 그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인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것은 1860년에 설비되었다고 하는 태평양 하와이의 호놀룰루 석탄기장을 의식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전자에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석탄보급소(Fueling stations)라는 것은 증기 발생을 위한 석탄의 사용 때문에 석탄 연료 충전소가 선박이나 철도 기관차를 위한 석탄 공급을 보충하기 위해 각 중가지점에 건설되었으며 이 용어는 종종 군함(range of warships)의 항해 범위를 넓히기 위한 수단으로 석탄(역)충전소를 사용한 브리티시 블루 워터 해군(blue water navies)과 관련되며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지배항구와 반드시 연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브리티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잉글랜드가 아니다.

브리티시는 대조선일 가능성이 많고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과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조선은 거대한 전선을 92척이나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때문에 곳곳에 조선은 석탄보급소를 보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여러가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역사를 대입하여 생각하게 되어 사실 접근이 곤란하게 하고 퍼즐이 맞춰지기가 힘든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세계삼한역사관점에 가능하면 담담해질 수 있어야 한다.
19세기 후반,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선은 해양 수송을 위한 주요 추진 수단으로서 범선(sailing ships)을 대체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는 것이니 만큼 석탄 소비는 날로 증가했을 것은 뻔하다.
위 지도에도 나타나지만 이때 대서양에서의 브리티시(British)석탄공급지를 보면 온타리오주 남부의 포트윌리엄(Fort William), 퀘벡(Quebec), 북미동부연안 킹스턴(Kingstone), 캐나다 동북 헬리팩스(Halifax), 세인트존스(St. Jones), 동부에서 먼바다 버뮤다(Bermuda), 바하마(Bahamas), 카리브해 자메이카(Jamaica), 안티과(Antigua), 세인트루시아(St Lucia), 바베이도스(Barbados), 트리니다드(Trinidad), 그리고 서대서양 시에라 레온(Sierra Leone), 감비아(Gambia), 케이프 코스트 케슬(Cape Coast Castle), 나이지리아의 라고스(Lagos), 비아프라(Biafra)만(灣)의 페르난도포(Fernando Po), 어센션(Ascension), 세인트 헬레나(St Helena)등이다.

이러했으니 적어도 조선은 충분히 커버 할 수 있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미국(양키)은 뒤 늦게 석탄보급소를 나름대로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1857년에서야 플로리다주 키웨스트(Key West, Florida)에 있는 석탄기지가 유일하며, 1860년대에 호놀룰루(Honolulu)에 석탄 기장을 설립하였다지만 태평양이라는 설정은 어쨌든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미국(양키)은 남북전쟁이후 수십 년 동안 주로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이때까지 미국(양키)은 정식 국가로써 행세가 원활하지 못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모자라니 보충한다고 분명한 것은 미국(양키)은 남북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대양에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먼저 한가지 집고 넘어 갈 것은 바로 1860년 설립했다고 하는 호놀룰루 석탄기장에 대한 지리적 위치다.

만약 그곳을 진주만이라고 했다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진주만은 지금의 하와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있게 말 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다음 글에서 정리할 수 있도록 하겠다.

페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만약 태평양으로 미국(양키)함선이 들어가려면 반드시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곶을 휘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곳 버지나아 노퍽에서 태평양 호눌룰루까지의 거리가 자그마치 30,000km 가 넘는다.

그러한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석탄공급소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며 증기선을 운행하면서도 미국은 이러한 석탄공급소가 1857년까지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기나 긴 태평양 항로를 소화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만화이며 가공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전자에서도 지적한 사실이지만 페리가 운행한 포경선이나 그외 양키들의 당시 고래잡이 포경선이라 해봤자 거의가 1,000톤 정도이고 미만이었다.

이런 배들을 몰고 석탄보급소도 없이 북태평양으로 무조건 들어갔다고 하면 다 되는 역사이니 얼마나 황당한가.

호놀룰루석탄기장이 아니라 오히려 브리티시와 지배가 겹쳐지는 버뮤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1880년대부터 미국(양키)은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체적으로 석탄 수급없이 먼 거리를 운행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기 시작하였는데 이 대형증기함선 건조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883년에 강철 방호순양함(Protected Cruiser)인 3,240 ton(톤) 애틀랜타호(USS Atlanta:1884), 3,240 ton(톤) 보스턴호(USS Boston:1884), 4,600 ton(톤) 시카고(USS Chicago:1885)가 건조되었고 그 이후 더 큰 함선장갑순양함(装甲巡洋艦:Armored cruiser)이 건조되는데 6,789 ton(톤) 메인호(USS Maine:1895), 2등전함(second-class battleship) 6,417 ton(톤) 텍사스호(USS Texas:1892), 9,043 ton(톤) 뉴욕(USS New York:1893), 6,694 ton(톤) 올림피아(USS Olympia:1895)와 같은 전함들이 줄줄이 건조된다.


고래가 인간과의 만남 그리고 절멸

 

고래가 인간과의 만남은 한마디로 불행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자료를 보면 19세기에만 거의 236,000 마리의 고래가 포획되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였다.

몸무게가 거의 100톤 이 되는 대왕고래 등이 처음 인간에게 버거운 것이 되었다가 증기선이 발명이 되고 엄청난 작살기가 만들어지면서 19세기부터 크고 작고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남획되었다는 사실이다.

Since the 1982 moratorium on commercial whaling, few countries still operate whalers, with Norway, Iceland, and Japan among those still operating them. Of those, the Nisshin Maru of Japan's Institute of Cetacean Research (ICR) is the only whaling factory ship in operation.

1982년에 국제포경위원회(IWC:International Whale Committee)는 상업적인 포경에 대한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채택했지만 포경선을 그대로 운영하고 있는 국가는 특별하게도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일본이다.

이 중에서도 일본 수산청 소속 일본고래연구소(日本鯨類研究所)가 운영되며 1987년 건조된 8,145톤의 속력 29.6(km/h)인 니신 마루호(Nisshin Maru:日新丸)가 그 연구소에 의하여 현재까지 운항 중인 유일한 포경선이라 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인들의 비뚤어진 이기적인 골통 사고를 알 수 있는 단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고래를 포획할 수 없다고 하는 국제규범을 지키지 않고 관습이란 핑계로 고래잡이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모자라는 역사상식만큼 참으로 뻔뻔하고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연구는 한낱 치장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이 관습이라고 주장하는 사실의 근거가 모호하기 짝이 없고 그들이 남에게 폐를까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처럼 지극히 관습처럼 행동하지만 그것은 이익과 손해 사이에 아주 좋치 않는 독단적인 습성에 의한 가식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들의 양식인 것처럼 하지만 가식만큼 역사인식도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인들의 어리석은 면도 있겠지만 2세계대전 후 조작된 일본을 존재하게 한 미국의 책임도 크다.

지금까지 미국에 의해 생성된 일본인들은 스스로 어긋난 역사 간격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소수 정치인들의 음흉함과 간교함은 그들이 불리함을 느낄 때 더욱 그러한 속성이 강해진다는 것이 걱정이다

오늘날 열도 일본인들이 고래에 집착하는 것은 그들이 역사와 맞추려고 하지만 절대 바람직한 행동이아니다.

해양세력인 서양일본연합체라면 몰라도 1952년 4월 28일에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급조된 열도일본인들이 주장하기에는 스스로의 역사 인식이 너무나도 모자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는 고래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우리나라 한반도에는 고래고기가 일반적이지 않다.

일본인들은 왜 달라야 하는가. 


본 블로그 글 "범고래(:Orcinus orca)와 북아메리카대륙 서북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7 "에서 보았듯이 살인고래라고 알려져 있는 범고래는 1971년에 발견된 한반도 동해안 울산반구대의 고래암각화의 암면조각(岩面彫刻:petroglyph)에 나타나는 것처럼 범고래와 닮았다는 사실에서 한반도에 범고래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외 수염고래, 작살맞은 고래,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등도 존재했다고 믿고 있다.

우리의 전통 기와지붕의 치미가 범고래 등지느러미의 모양으로 만들어 올렸다고 하였고 그 칭호가 호와(鯱瓦) '범고래 기와'였다는 사실에서 한반도에 범고래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이야기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온갖 고래가 등장하는 조선영해 동해가 한반도 동해라는 착각은 우리가 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지형의 동해는 가끔식 눈에 띄이는 고래 유영 항로인 것은 틀림없다.

현재 해양탐구연구원들에 의해 발견되는 동해고래를 보면 대다수 일반적인 고래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 종류가 참돌고래, 밍크고래, 낫돌고래, 상괭이 등인데 연구자들은 "4월과 5월 참돌고래 2000~3000마리가 공중을 날아다니고 두세 바퀴 회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희열을 맛봤다"고 말하고 "지난해 12월에도 낫돌고래 300~500마리가 해상에 출몰해 장관을 연출했다"고 말하면서 학계에서는 동해를 중심으로 위와 같은 고래 종 1만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동해에 나타나는 고래들을 분류체계적으로 보면 참돌고래는 범고래속이 포함되는 참돌고랫과 참돌고래속(Delphinus)의 긴부리참돌고래(Delphinus capensis)이고 밍크고래는 귀신고래가 속하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의 수염고랫과 대왕고래속(Balaenoptera)  북방쇠정어리고래(Balenoptera acutorostrata)이고 낫돌고래는 참돌고래과  낫돌고래속  낫돌고래(Lagenorhynchus obliquidens)그리고 상괭이는 참돌고래상과 (Delphinoidea)에 포함된 쇠돌고랫과  상괭이속 (Neophocaena) 상괭이 (Neophocaena phocaenoides)로 나뉜다.

그러나 울산 암각화에 나타난다는 이 범고래의 생물학분류체계를 보면 고래하목(Cetacea), 이빨고래소목(Odontoceti), 참돌고래과(Delphinidae Gray, 1821)의 범고래속(Orcinus)으로 살인고래 혹은 오르카(killer whale:orca)하는 학명(Orcinus orca Linnaeus, 1758)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의 분류를 보면 1821년 영국생물학자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1800-1875)에 의해 향유고래(sperm whale)의 향고래과(Physeteridae)와 분리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본래 항유고래와 분리시켰다는 것은 종이 다를 뿐이지 서식처가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읽을 수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본래 고대 로마시대에 사람들이 사용한 올카(Orc)는 추측이지만 고래 어원이 그리스어 오루크스(Orcus)에서 파생하였고 앵글로 색슨족에서 유래한 악마라는 의미라 하였으며 라틴어 오르카(Orca)는 로마인의 별칭(a Roman surname)으로 나타나고 고래속명 오루시누스(Orcinus)는 라틴어 저승의 의미를 가진 ‘Orcus’ 와 접미사‘-inus’의 합성어로 이미 고대 로마시대 때부터 이 범고래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상징인 바다포식자로 알려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 고래토템숭배시대에는 '어른(魚人)''어르신(魚人神)'의 어원이 어인(魚人) 즉 어른 또는 어인신(魚人神), 어른신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것도 고래를 사람들이 신성한 어신(魚神)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어서 전통적으로 고래사냥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일본연합체 소속 무역업자들은 본격적으로 17세기부터 포경선을 사들이고 고래를 사냥하기 시작하였는데 시기는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인들의 고래잡이가 극성스러웠고 이어 양키들이 바톤을 이어 받게된다.

 

서양인들의 끝없는 물욕

 

고래가 상업에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주로 해양을 무대로 삼고 활보하던 서양인들에게 포획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바다에서 늘 상 생활하는데 고래가 특별해 보이는 것도 잠시고 어쨌거나 고래를 많이 잡아 떼돈을 벌고자 했던 것은 의심할바가 아니다.

어쨌거나 서양세력들이 자신들의 역사문화 근원의 모토(motto)로 삼고 있는 고대 로마시대에 사람들 조차도 올카(Orc)라 하여 저승사자, 죽음의 상징처럼 여겼던 고래였고 동양오린엔탈 문화로 고래토템숭배사상을 중하게 여기며 숭앙했던 고래라 할지라도 장사꾼인 그들에게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직 자본주들에 의해 상업용으로 보였고 많이 잡아 그들은 최대한 이윤을 남겨야했고 그래서 거대한 자본주가 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넘쳐나는 물욕을 고래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특히 고래는 환금성이 용이하고 이기의 재료가 되었으며 미식가들을 미혹하게 하고 더군다나 향유고래의 토사물과 배설물로 만들어진 용연향(龍涎香:Ambergris)은 고가의 거래가 되는 그야말로 황금, 노다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앰버그리스(Ambergris)란 말은 옛 프랑스어가 라틴화된 것인데 '황색 그리스', 혹은 '회색 호박'에서 유래되었고 엠버라는 단어는 13세기 유럽발틱지역에서 화석화된 나무수지에 적용되어 왔다고 한다.

옥스포드사전에는 왁스물질인 향유고래 창자 분비물인데 열대바다에 떠 있다가 발견되는 향수제조용이며 중기영어단어 '노란 호박(amber jaune)'에서 유래한 것인데 프랑스의 '회색호박'호박과 구별된다 하였다. 

이것은 황색호박이라는 의미와 같다.

2015년 9월 25일 영국 매클즈필드(Macclesfield)의 한 해변에서 발견된 1.1kg(2.4lb)의 용연향덩어리가 프랑스매수자에게 11,000파운드(GBP) 한화로 1,568만원에 팔렸다 하였고 호주해변에서 14.75Kg의 용현향이 발견되었는데 시가가 우리돈으로 7억원이 넘는다 하였다.

그뿐만아니다.

고래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부속물들은 더욱 부를 증가시키는 것들이다.

이러한 환금성의 고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고래가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래잡이는 17세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본격적으로 고래가 상업용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는 것을 이미 전자에서 언급하였고 서양세력 중에서도 가장 큰 함선을 몰고 다니는 더치(Dutch) 즉 네덜란드 해양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음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시작한 고래잡이는 18세기 프랑스와 영국에 의해 실행되었고 이어 19세기 양키로 이양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은 북극고래와 남방고래를 주로 포획하였다고 하며 고래의 소멸로 점차 줄면서 1859년에 영국 선박에서 나온 고래기름의 마지막 화물이 런던에 상륙했다고 하며 프랑스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가 쇠퇴하면서 1790년 태평양에서 포경을 시작하였고 남양포경을 주로 하였지만 영불전쟁이후 세를 크게 잃어 마지막 포경선도 1868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고 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네덜란드 즉 더치의 포경활동이 끝나자 마자 미국 양키들이 대서양 영역의 고래를 거의 독점하다시피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히 향유고래는 오랜 상업적 이용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규모 사냥은 전초기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매사추세츠주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와 난투켓(Nantucket)에 근거지를 둔 북대서양에서 1712년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하게 이곳은 네덜란드 포경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뉴베드퍼드(New Bedford)를 "an industrial port city in southeastern Massachusetts, on Buzzards Bay, a noted 19th-century whaling center" 매사추세츠주 남동부 버저즈만(Buzzards Bay)에 있는 산업항구도시이며 19세기 유명한 포경 집하장(whaling center)이라고 하고 또 난투켓(Nantucket) 역시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으로 18.19세기 중요한 포경 집하장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부터 포경활동에서 고기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용연향(ambergris)과 경뇌, 경랍(鯨腦,鯨蠟: spermaceti)만을 위해 무차별 포획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작살기가 약할 때는 큰 고래는 엄두도 낼 수 없고 그대로 방치했지만 강력한 동력 작살기가 발명이 되면서부터 엄청난 고래가 학살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경뇌, 경랍유(鯨腦,鯨蠟:spermaceti)는 향유고래 머리 부분에 존재하는 기름을 냉각, 압축하여 얻어지는 황색의 비린내가 나는 고체랍이며 정제품은 백색 무취인 납과 비슷한 모양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다.

이것으로 양초, 비누, 화장품, 기계유, 기타 특수 윤활제, 램프 오일, 연필, 크레용, 가죽방수, 녹 방지 재료, 그리고 많은 제약 화합물과 같은 다양한 상업적 응용에 사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런 용도의 고래잡이는 1830년대에 정점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왕조실록 영조 23년 정묘(1747) 9월 12일(기해)기사에 서지수가 말한 ...경유(鯨油)의 이야기는 시장성으로 보았을 때 초반기의 경우라 할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알타이(altai)가 어딘가?-용연향(龍涎香, ambergris)

http://blog.daum.net/han0114/17050533"에서 언급한 내용이지만 17세기부터 특히 향유고래 잡이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명나라 가정연간(嘉靖年間1522-1566)에 몇몇 방사들이 용연향을 불사약 만세향병의 주요원료로 썼다고 하면서 소위 불사약은 실제로 춘리라 하여 조정에서는 전국에 명을 내려 이 용연향을 수집하도록 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잉글랜드의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House of Stuart)가문의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재위:1660-1685)의 좋아하는 요리는 달걀과 용연향이라 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 이용되었고 어떤 문화권에는 진통제로 사용되었으며 중세 유럽인들은 두통과 감기, 간질, 그리고 다른 질병의 약으로 용연향을 사용했으며 유럽의 흑사병기간동안 사람들은 용연향 환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공기 중 나쁜 공기를 차단하는데 사용했다고도 한다. 

러니 동서양 할 것 없이 이 용연향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고 쓰임새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6세기후반 17세기부터 고래잡이에 동원된 포경선들이 한마디로 난리가 난 것이 틀림없다.

또한 본 블로그 글 "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9

"에서 인용한 자료에 보면 고래는 당시 사람들에게 고기뿐만 아니라 많은 유용한 것들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16,17세기 땐 집의 기둥을 세우는데 필요한 고래 턱뼈가 필요했으며 18,19세기 땐 오일램프나 마가린, 비누를 만드는데 원료가 되는 고래기름(鯨油:Whale oil)과 나무대용, 우산대, 칼라 깃(Collar stay), 여성용 코르셋(corsets)과 크리놀린 스커트(crinoline skirts)와 같은 강도가 있고유연성을 필요로 하는 제품의 원료로 고래수염(baleen)이 사용되었다 하였고 무엇보다도 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고래배설물이며 세계 3대 향료이고 불사약 만세향병의 원료로 사용된 용연향(龍涎香:Ambergris)임을 알 수가 있는데 당시에 엄청난 고가로 팔렸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물론 명조 황제가 찾았으니 수요처(需要處)는 분명했고 서양 부르주아(bourgeois)들은 이것을 따라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 후 자본주들을 튼튼하고 큰 선박을 구입하였고 서양 고래잡이 전문 사냥꾼들을 모집하여 무차별 포획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8세기 프랑스혁명에 이어 산업혁명과 더불어 수공업 기계자원의 활용이 넓어지고 생활이 풍족해짐에 따라 늘어나는 오일램프 연료 공급원으로 막대한 수급이 필요했다.

18세기말엽부터 더치가 쇠퇴하자 프랑스와 영국의 이어 양키들에게 포경산업을 이어 받게 되었으며 산업혁명으로 자본을 축적한 양키 자본주들은 포경산업을 장악하고 고래를 잡는 기구와 모선을 더욱 발달시켰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면서 윤활유, 오일램프나 마가린, 비누를 만드는 원료인 고래기름(鯨油:Whale oil)같은 것들이 더더욱 고래의 효용가치를 높게 했으며 인간들의 고래를 이용한 끝없는 탐욕은 석유가 등장하고 다른 대체 재료가 생산이 되면서 부터 고래수요가 감소되었고 20세기에 들어 1927년 미국의 포경선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조정기에 들어갔음도 알 수가 있다.


양키의 등장


우리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먼저보면 양키 포경함대지휘관인 '매슈페리'가 일본 '우라가'에 입항하던 년도인 18531월에 미국의 포경선 606톤급의 사우스 아메리카(USS South America)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고 2년 후 1855년에 미국의 포경선 투브라더스호(Two Brothers)의 선원들이 표류한 것을 조선(朝鮮)에서 구해주었다는 사실에서 양키들의 많은 고래 포경선들이 조선(朝鮮)에 들락거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이들은 1820년대부터 홋카이도에 포경선 전진기지를 세우고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했다고 알려지지만 이상한 것은 이미 1797년에 홋가이도에는 잉글랜드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406톤)가 측량하던 적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미국 즉 양키들이 홋가이도에 전진기지를 세우면서 잉글랜드와 특별한 마찰은 없었는지 내용을 찾을 길이 없다.

어쨌든 1853년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여 개항시켰다고 하는 미국인 포경함장 페리(Matthew C. Perry:1794-1858)의 일본방문은 홋카이도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리는 것이며 먼저 측량조사한 잉글랜드와는 관계없이 일본에게 근해 고래어업권을 요구하는 등의 제반적인 상황을 종합해볼 때 특히 이 시기에 미국양키 포경활동이 매우 번성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지만 처음부터 잉글랜드나 미국 양키나 동아시아대륙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Definition of Yankee (Entry 1 of 2)
a : a native or inhabitant of New England 
b : a native or inhabitant of the northern U.S.
Word origin of 'Yankee'
C18: perhaps from Dutch Jan Kees John Cheese, nickname used derisively by Dutch settlers

in New York to designate English colonists in Connecticut.


양키의 어원을 보면 여러가지 설이 있다.
기록에 양키를 처음 사용한 것은 17세기라고 알려지며 북아메리카대륙에 더치(Dutch)해적이 방문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고 더치 즉 네덜란드 사람을 존 치즈'Jonh Cheese'라고 부르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Jonh Cheese. 는  더치말로 'Jan Kaas(Jan Kees)' 인 것으로 이것이 영어 'Jan Kees'가 되었다는 설인데 그렇다면 더치인들을 양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네티컷(Connecticut)의 영국 이주민들을 지명하기 위하여 뉴욕의 네덜란드 이주민들에 의하여 사용된 별명이라 하기도 하고 잉글랜드인들이 더치인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양키라 했다는 설도 있어 뒤죽박죽같은 별칭임을 알 수가 있다.

영어사전에서는 뉴 잉글랜드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인들에게 붙여진 별명이라고 하며 양키들의 고향이라고 알려지는 곳은 매사추세츠(Massachusetts)라고 알려진다.

매사추세츠의 역사를 보면 서양인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잉글랜드, 네덜란드인들인데 그들이 닿는 곳마다 질병이 따라다니고 그곳의 원주민 역시 전염병으로 약 75%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들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전염병에 약한 원주민들이 스스로 죽임을 당했기때문에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일게다. 

그렇게 보면 매사추세츠는 1628년 프로테스탄트들이 도착할 때부터 시작된 것이 세일럼(Salem)조직이되고 이것을 찰스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추인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으니 이것은 서양세력의 발판으로 볼 수밖에 없어 이들전체를 양키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래와 연관되는 것 중에 양키 캔들 회사(Yankee Candle Company)가 있고 이 양초회사에서 생산되는 고급양초는 고래기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고래를 잡는 전문사냥꾼들을 양키라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돈을 밝히는 이미지로 묘사 되는 것은 처음부터 더치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으나 미국인들이 축적된 자본으로 부각된 면에서 미국인들에게 경멸에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커 20세기 미국인들에게 자수성가의 상징인 엉클 샘(Uncle Sam:US)과 비슷하게 사용된 것은 아닌가 한다.

어쨌거나 자본주를 상징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한번 더 인용하지만 본 블로그 글 "미국국명과 코리아(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5"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부가 코리아(COREA)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밝혀 보아었다.

18531[철종 4(음력 18521221; 양력 1853129)]기사에, 미국의 고래잡이배가 부산 용당포(龍塘浦)앞바다에 표착했을 때 부산첨사 서상악(徐相岳)과 동래부사 유석환(兪錫煥)지휘한 훈도 김기경(金耆敬)과 별차 김정구(金鼎九)와 소통사 김예돈(金藝敦)등이 선원들의 국적과 입국한 경위 등을 조사했으나 언어불통으로 실패하였다 하고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그들의 두발이 고슴도치머리 같았고, 자신들을 가리키며 '며리계(㢱里界)'라고 여러 번 지껄였다고 했으며 그들이 쓴 글자가 여운여화(如雲如畵)로서, 전서(篆書)도 아니고 언서(諺書)도 아니어서 말과 글 모두가 불통했다"는 사실이 있다.

며리계, 또는 미리계라 한 것은 일본인들이 '메리켕'이라 한 사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들이 양키미국인인 것은 틀림없는데 조선에서는 언어불통이었음에도 일본은 이들과 다음해인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을 맺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통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언가가 달랐겠지만 특히 이 미리계 즉 미국인들이 사용한 언어와 조선에 표착한 고래잡이선원이 사용한 언어와도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며 1854년 미일화친조약(日米和親条約)시 일본 자료를 보더라도 그들도 통역이 불가피하여 영어와 네덜란드어(더치) 두 개의 언어를 서로 섞어가며 통역을 했다고 알려진다.

'며리계(㢱里界)'말이 영어가 아니라는 설과 네덜란드어가 일본어가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네덜란드어가 아닐지라도 더치어(Dutch language)일 가능성은 있고 더치와 며리계는 통했을 것이란 뉘앙스가 있다.

양키들의 말과 더치어와 최소한 친숙했다고 하는 주장에서 보면 미국 8대 대통령이며 첫 네덜란드(Dutch)계인,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1782-1862)이 미국대통령이면서도 제1어가 영어가 아닌 네덜란드어였다고 알려진다.

양키들은 더치(네덜란드)어와 영어로 대화가 되었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9년 동안 언어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여송국(呂宋國)사람들의 경우와 동일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서양일본연합체가 구성되기전 밑바닥에서 기생한 이런 저런 이력도 없는 집합체가 모여 세상에 나타난 것이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The success of a voyage

When the New Bedford whaler, Benjamin Tucker, returned to home port in 1851, she carried: * 73,707 gallons of whale-oil; * 5,348 gallons of sperm oil; * 30, 012 pounds of whalebone (baleen).

How the profits were divided

After expenses, the net profit of the Benjamin Tucker’s voyage was $45,320. The usual share for the owners of a ship was between 60 and 70 percent. In this case, between $13,596 and $18,128 would have been left to be divided among the captain and crew for several years of work.

When the Ship Milton returned to port in 1836, the captain received a lay of 1/17th or $5,882; the first mate 1/22nd or $4,545; the boatsteerer (harpooneer) 1/75 or $1,333; and the blacksmith 1/140th or $714. The best paid seaman earned $800, while the worst paid received $571. on another voyage of the Milton, one of the ordinary seamen earned only $10.10.

 

위 자료는 본격적으로 양키 포경산업자들에 의해 포경행위가 최고조에 달할 시기 1851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 베드퍼드(New Bedford)소속 포경선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가 항구로 귀항하였을 때 이 배가 싣고 온 고래생산물(Whale products)과 그에 따른 수익분배상황, 그리고 중요한 그들이 사냥한 고래 종류(Varieties), 고래사냥하는 방법, 가공하는 방법 등을 기록한 항해일지의 일 부분인데 이를 기초로 다음 글을 연결해보려 한다.

고래사냥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이 수익분배상황인데 먼저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귀항한 것을 전제로 이 배가 싣고 온 물품을 보면 73,707 갤런(gallons)의 고래 기름(whale-oil), 5,348 갤런(gallons)의 향유기름(sperm oil), 30,012 파운드(pounds)의 고려수염(whalebone, baleen)을 말하고 있다.

이를 금전으로 환산하여 분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항해의 순이익은 45,320달러($), 일반적으로 선박 주인의 몫은 60~70% 라 하였으며 나머지 13,596달러($)에서 18,128달러($)는 수년간 작업을 한 선장과 선원 몫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다른 한 예로 1836년 밀턴(Milton)포경선이 항구로 돌아왔을 때, 선장은 1/17 또는 5,882 달러($)를 받았고 1등선원은 1/22 또는 4,545 달러($); 작살을 던지는 사람(harpooneer) 1/75 또는 1,333달러($); 대장장이는 1/140 또는 714달러($)을 받았으며 최고급 선원은 800달러($)를 받았고 최악의 선원은 571달러($)를 받았다고 나타난다. 밀턴 (Milton)의 또 다른 항해에서의 정규 선원 중 한 명은 단돈 10.10달러($)를 벌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A view of the New Bedford area in 1839


매사추세츠주에 고래잡이 유명한 항구가 2곳이 있었는데 뉴 베드포드는 잘알려져 있지만 페어헤븐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나중에는 뉴베드포드를 지원하는 물자수급처로 전락했다.

19세기 후반에, 고래기름은 미국에서 조명을 위한 연료의 주요 공급원이었다.

서양인들이 주도해온 포경산업은 200년 이상 동안 뉴잉글랜드 해안 지역사회에서는 경제 대들보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뉴잉글랜드 해안 보다 상대적으로 매사추세츠주의 해안은 좁다.

매사추세츠주의 유명한 포경항 뉴 베드포드(New Bedford)는 페어헤븐(Fairhaven)에서 아쿠쉬네 강(Acushnet River)건너편에 있으며 페어헤븐(Acushnet River)역시 고래잡이 항구였고 1838년에, 페어헤븐에서 24척의 배가 고래잡이를 위해 항해하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고래잡이 항구였으며 모비딕(Moby-Dick)의 저자인 허먼 멜빌(Herman Melville:1819-1891)은 1841년 포경선 아쿠쉬넷(Acushnet)을 타고 페어헤븐 항을 떠나 처녀항해에 나섰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포경산업에서 상대적으로 뉴 베드포드의 우세가 명백해지자, 페어헤븐의 경제는 그것과 직접 경쟁하기 보다는 새로운 베드포드 경제를 보충하는 것으로 발전했으며 조선공(shipwrights), 선구상(ship chandlers), 로프제조소(ropemakers), 통(barrels)제조(coopers), 그리고 돛을 만드는 사람(sailmakers)들의 도시가 되었다. 이 곳은 또한 선주(船主)와 선장(船長)들이 그들의 집을 짓고 아이들을 기르기 위한 보금자리가 되었다고 알려진다.


벤자민 터커의 운명과 역사위치


전자에서 말했듯이 벤자민 터커(Benjamin Tucker)매사추세츠주의 유명한 포경항 뉴 베드포드(New Bedford)소속의 포경선으로써 19세기 고래잡이 한창 피크를 이룰 때에 양키 포경선이다.


PHOTOGRAPHS OF WHALING VESSELS: PART II

Ships and Barks

PLATE IX

Ship Benjamin Tucker, 348 68/95 tons. Built at Mattapoisett, Mass., and registered at New Bedford, 1839. Burned by CSS Alabama, 1862. This daguerreotype shows her at Honolulu, 3 November 1856, following a severe storm.

Whaler Benjamin Tucker in Honolulu, by Dr. Hugo Stangenwald(독일인:1829-1899)

English: [Whaler] "Benjamin Tucker" in Honolulu. Ambrotype, 1/2 plate, cased. New Bedford Whaling Museum. Bark Benjamin Tucker at anchor in harbor in Honolulu. on her return passage from the Arctic, Benjamin Tucker encountered a storm which damaged her rigging. Captain Spencer commisioned this ambrotype depicting the damage to send to the vessel's owners. It is one of the earliest known photographs of an American whaleship. Other ships can be seen on either side of photograph.

 

뉴 베드퍼드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에서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의 설명을 보면 포경선 벤자민 터커는 약 348(68/95)(ton)의 크기이며 메사추세츠주(Massachusetts) 마타퍼세트(Mattapoisett)에서 건조되었고 1839년 양키들의 고래잡이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뉴 베드퍼드(New Bedford)에 처음 등록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규모의 포경선들이 당시 뉴 베드퍼드와 난투켓(Nantucket)에 자릴 잡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포경선 벤자민 터커는 1851년 고래잡이 항해뿐만 아니라 그 후 여러 번의 항해를 거치고 귀항했지만 위 기록을 보면 북아메리카대륙 남북전쟁 당시인 1862년에 남부연합해군(Confederate States Navy)스팀엔진 프로펠러 슬루프 전투함 1,050톤 앨라바마(CSS Alabama)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또 위 벤다민터커의 포경선 사진이 있는데 독일인 닥터 휴고 스타겐발트가 1856113일 촬영한 것으로써 어느 북극인지 알 수 없지만 북극에서 돌아오는 길에 폭풍을 만났고 배의 삭구(索具:rigging)가 망가져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호놀룰루(Honolulu)항구에 입항한 풍경을 촬영한 것이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호놀룰루를 당시 자꾸 하와이에 명칭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스펜서 선장(Captain Spencer)은 배 선주에게 피해를 입은 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촬영했다고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어떤 프레임에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벤자민 터커가 호놀룰루(Honolulu)에 입항하였다 하였으니 지금의 하와이(Hawaii)라 인식되고 북극이라는 것은 북태평양의 북극인 것으로 알게 한다는 점은 매우 상황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다음 글에서 의문이 있다.


 

CSS Alabama

Expeditionary raids(원정대 급습)

All together, Alabama conducted a total of seven expeditionary raids, spanning the globe, before heading to France for refit and repairs:

)The CSS Alabama's Eastern Atlantic Expeditionary Raid (AugustSeptember, 1862) commenced immediately after she was commissioned. She immediately set sail for the shipping lanes southwest and then east of the Azores, where she captured and burned ten prizes, mostly whalers.

 

위 고래잡이 항해에서 돌아온 시점에서 약  1851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뉴 베드퍼드(New Bedford)에 입항하고 다시 출항하여 북태평양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폭풍을 만나 1856113일 촬영한 것처럼 호놀룰루로 피난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을 시점인 1862년에는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서대서양 아조레스 제도(Azores)동쪽에 위치하여 고래잡이를 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위 '포경선 벤자민터커의 최후장소'그림자료를 보면 남부군 해군소속 앨라바마호가 북군 원정대를 급습한 공격이 7차례 있었고 그러한 활동에 의해 포경선 '벤자민 터커'가 불태워졌다고 하며 '벤자민 터커'가 불태워졌다고 하는 1862년 동안에 발생한 7번의 급습 중 첫 번째로 ‘CSS 앨라배마’가 동부 대서양 북군 원정대를 급습(18628~9)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서 좀 더 들어가 보면 1050톤(ton)앨라바마호(艦船)신임선장 라파엘 셈머즈(Raphael Semmes:1809-1877)에 의해 이 함선이 취역되자마자 1862년 8월 13일 리버풀을 떠나 그해 8월 20일 테르세이라 섬(Terceira)에 도착해 1862년 7월부터 1863년 9월까지 보급선인 아그리피나(barque Agrippina)가 가져온 각종 군수품과 350톤의 석탄으로 재정비를 하여 1862~64년 사이에 600만 달러 이상의 값어치가 나가는 82척의 북군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키고 불태우는 등 여러 차례 눈부신 활약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때 아조레스 제도(Azores)동쪽 항로를 향해 출항하였고 그곳에서 10()의 전리품(prizes)을 나포하거나 불태웠다고 하였는데 이 때 선박 대부분이 포경선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어 포경선 벤자민 터커의 최후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1862년에 주로 고래잡이 포경선이 활동한 지역은 태평양이 아니라 바로 대서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1851년 포경활동을 하고 귀항할때 고래들의 종류를 보더라도 대부분 대서양에 서식하는 종임을 알 수가 있다.

하여튼 태평양북국고래를 포획한 것은 그로부터 한 참 뒤에 이야기며 대서양의 고래잡이가 시들하기 시작하면서 범위를 넓혔다고 볼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호놀룰루(Honolulu)항구에 정박한 사실에서 북극(On her return passage from the Arctic-北極:Arctic)라 한 것은 북태평양 북극이 아니라 대서양 북극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당시 양키들의 포경선들은 대부분 대서양 북극에 원정하였고 남쪽으로 내려와 남부군 해군 앨라바마호를 만난 아조레스제도에서 주로 고래를 포획하던 상황을 감안한다면 호놀룰루(Honolulu)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그 명칭으로 불리던 곳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때문에 지금의 하와이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게 진단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근세기 역사판짜기 과정에서 이러한 지명이 조작되고 뒤바뀌는 현상은 비일비재하였다 하겠지만 호놀룰루(Honolulu)까지 그렇다는 것은 정확히 태평양을 서쪽으로 고스란히 옮겼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따로 양키 고래잡이 현황의 글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There were only a few recorded catches during the first few decades (17091730s) of offshore sperm whaling. Instead, sloops concentrated on Nantucket Shoals, where they would have taken right whales or went to the Davis Strait region to catch bowhead whales. By the early 1740s, with the advent of spermaceti candles (before 1743), American vessels began to focus on sperm whales. The diary of Benjamin Bangs (17211769) shows that, along with the bumpkin sloop he sailed, he found three other sloops flensing sperm whales off the coast of North Carolina in late May 1743. on returning to Nantucket in the summer 1744 on a subsequent voyage, he noted that "45 spermacetes are brought in here this day," another indication that American sperm whaling was in full swing.

위 온라인백과사전[free encyclopedia]자료에 의하면 북아메리카대륙 근해 향유고래 사냥 처음 수십년(17091730s)동안 기록된 어획량은 극히 적었다고 하고 있다. 대신 슬루프선()은 난투켓 모래톱(Nantucket Shoals)에서 고래를 잡았거나 데이비스해협(Davis Strait)지역으로 가서 고래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1740년대 초반에 경랍(鯨蠟:spermaceti)이 양초의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미국(양키)선박은 향유고래 포획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벤자민 방스(Benjamin Bangs:1721-1769)의 일지는 그가 범킨 슬루프(bumpkin sloop)와 함께 항해하면서 발견한 것은 17435월말 노스캐롤라이나 연안에 떨어진 곳에서 향유고래의 가죽을 벗기고 있는 다른 3척의 슬루프선()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1744년 여름 후속 항해를 위해 난투켓으로 돌아온 그는 "오늘은 향유고래(spermacetes)45마리가 이곳에 들어온다"고 말했고 또 미국(양키)향유고래 포획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또 다른 징후가 보인다고 상황설명을하고 있다.

물론 18세기 상황이지만 양키들이 본격적으로 고래사냥을 북아메리카대륙 동부 연안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다. 

 

Sperm whales have a long history of commercial exploitation. Large-scale hunting began in 1712 in the North Atlantic, based at Nantucket in America. They were not widely hunted for their meat, but for ambergris and spermaceti. Ambergris is a substance that collects around the indigestible beaks of squid in the stomach of the whale, and was highly prized for use as a fixative in the perfume industry. Although artificial alternatives are now available, some perfume makers prefer to use ambergris today.

또 다른 자료를 보면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

향유고래는 오랜시간동안 상업적으로 이용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였고 대규모 사냥은 미국의 난투켓에 근거지를 둔 북대서양에서 1712년에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고기를 얻기 위해 포획된 것이 아니라 용연향과 고래기름만을 위해 포획되었다 하였으며 용연향은 고래 위장에서 가장 소화가 잘 안 되는 오징어 부리 주변에 물질로, 향수산업에서 치료제로 이용되어 높이 평가 받았고 비록 인공적인 대체품들이 현재 사용되고 있지만, 몇몇 향수 제조업자들은 오늘날에도 용연향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연안 난투켓은 양키 고래잡이의 근거지임이 확인 된 것이다.

 

View Source Articles & Credits on EOL

According to Waring et al. (2009), results of multi-disciplinary research conducted in the Gulf of Mexico during the first decade of the 21st Century confirm speculation that Gulf of Mexico Sperm Whales constitute a stock that is distinct from other Atlantic Ocean stocks(s). Sperm whales were commercially hunted in the Gulf of Mexico by American whalers from sailing vessels until the early 1900s. In the northern Gulf of Mexico (i.e., U.S. Gulf of Mexico), systematic aerial and ship surveys indicate that sperm whales inhabit continental slope and oceanic waters, where they are widely distributed. Seasonal aerial surveys confirm that sperm whales are present in at least the northern Gulf of Mexico in all seasons. The best available estimates indicate a population of around 1,500 Sperm Whales in the northern Gulf of Mexico. (Waring et al. 2009 and references therein:Soulanille, Elaine)

또 다른[View Source Articles & Credits on EOL] 고래잡이 워링(Waring)외 연구진(2009)에 따르면 21세기 첫 10년동안 멕시코만(:Gulf of Mexico)에서 실시된 다분야 연구 결과에서 멕시코 향유고래가 대서양 어장 종()과 전혀 다른 종()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고 향유고래는 1900년대 초까지 멕시코 만에서 미국 포경선들에 의해 상업적으로 사냥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멕시코 북부 걸프(, 미국 멕시코만)에서 체계적인 대기환경 및 선박조사는 정어리 고래가 널리 분포되어 있는 대륙사면(대륙붕과 심해저 사이의 급경사면)과 해양수역에 넓게 분포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계절적인 대기환경조사는 향유고래가 모든 계절에 최소한 멕시코 북부에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가장 가능한 추정치는 북부 멕시코 만()에 약 1,500마리의 향유고래가 서식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위 세 문장의 영어자료에서 보더라도 최소한 대서양 내에서 향유고래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19세기에 발생한 동아시아진출설에 대한 반증으로 한반도 역사나 그외 친 서양 역사자료가 말하는 역사진실이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것이며 1853년 일본 우라가에 양키 페리가 입항했다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양키들이 사냥한 고래종류와 분포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은 17세에서 19세기까지의 고래잡이 사냥 장소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최소한 20세기까지는 태평양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으로는 들어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였다.

주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멕시코 만()을 중심으로 향유고래가 포획되었고 나머지 수염고래 역시 대서양 북극과 대서양 남부 그리고 카리브 해()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위 자료들을 통해 알 수가 있다.

이러한 패턴은 적어도 파나마운하가 개통되기 전까지 지속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 증기선이 발명이 되고 연안용 외륜선(外輪船:Paddle steamers)이 출현하여 북아메리카대륙 서부 연안으로 접근하는 고래사냥은 지협적으로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선박이 배수량 만 톤 이상으로 커지고 발전된 프로펠러(propeller)엔진기관과 철갑선이 등장하였고 무엇보다도 위험을 상쇄시킬 수 있는 보험제도가 생기면서 그동안 기존 태평양 횡당 등 접근이 불가하던 해양의 악조건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 수 있었고 태평양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고래사냥도 가능했다고 믿을 수 있다.

오히려 열도일본인들은 2차세계대전(二次世界大戰)이 끝나자 패전국이란 입장과 다르게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앞세워 태평양전체를 휘접고 다니면서 특히 값비싼 향유고래와 수염고래등을 싹쓸이 할 정도였다고 자료에 나오고 있으니 그들의 고래사냥에 대한 남다른 취향을 가졌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서양인들의 고래잡이 습성을 그대로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더하여 서양 포경꾼들이 주로 포획을 한 주요 고래 종()을 살펴보고 그것들의 근원지가 어디며 네덜란드라고 하는 더치(Dutch)의 고래사냥 장소와 그 바톤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양키(Yankee)들의 고래사냥이 정말로 동아시아대륙 소속인 태평양이 맞는지 알아 보아야 한다.

이것을 파악하기위해 전자에 참고한 뉴 베드퍼드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 중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포획한 고래의 종()들을 세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고래()의 생물학분류체계를 보면 우제목(偶蹄目:Artiodactyla) 경우제류(鯨偶蹄目:Cetartiodactyla), 경하마형아목 (鯨河馬形亞目:Whippomorpha)에서 고래하목(Cetacea Brisson, 1762)으로 분류되고 여기에 포유류의 총칭으로, 수염고래류(Mysticeti)와 이빨고래류(Odontoceti)으로 나누고 있다.

전체 고래류의 특징은 유선형 몸체에 수평 꼬리지느러미 및 머리 꼭대기에 분수공이 있는 매우 큰 해양 포유동물이며 앞다리는 지느러미로 진화하였고 뒷다리는 퇴화하였는데, 척추에 연결되어 있지 않고 몸 속에 작은 흔적이 남아있다고 알려지며 꼬리지느러미는 수평방향이고 몸에 털이 거의 없으며 두꺼운 피하지방이 체온을 보호하며 폐호흡을 하고 자궁 내에서 태아가 자라는 것과 배꼽이 있는 것 등 포유동물의 대부분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암컷은 하복부에 한 쌍의 젖꼭지가 있다고 설명된다.



Cetacea (n.)
order of marine mammals containing whales, 1795, Modern Latin, from Latin cetus "any large

sea creature" (whales, seals, dolphins), from Greek kētos "a whale, a sea monster," which is

of unknown origin, + -acea.

고래하목의 어원을 보면 1795년 근대 라틴어 세루스(celus)의 큰 바다 생물(고래, 바다표범, 돌고래)등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리스어 케토스(kētos)의 고래, 바다괴물(해양포유류)이란 의미로 쓰이고 이것에 동물접미사-acea 붙인 것이다.

 

鲸下目 学名Cetacea旧称鲸目

科学分类

动物界 Animalia

脊索动物门 Chordata

哺乳纲 Mammalia

偶蹄目 Artiodactyla

演化支全撰类 Artiofabula

演化支鲸反刍类 Cetruminantia

演化支鲸凹齿形类 Cetancodontamorpha

亚目河马形亚目 Whippomorpha

演化支鲸形类 Cetaceomorpha

下目鲸下目 Cetacea Brisson, 1762

小目

수염고래소목(鬚鯨小目:Mysticeti)

이빨고래소목(齒鯨小目:Odontoceti)

(소멸)古鯨小目 Archaeoceti并系群

 

그렇다면 19세기 양키 포경선들이 주로 포획한 고래들의 종()들을 세부적으로 살펴보자.

 

(A)향유고래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

(B)흑고래 Black Whale

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Müller, 1776)

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남방참고래; Eubalaena australis(Desmoulins, 1822)

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북태평양참고래Eubalaena japonica(Lacépède, 1818)

(C)활머리고래, 북극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Balaena mysticetus Linneus, 1758

(D)회색고래 Gray Whale (Eschrichtius robustus)귀신고래 Eschrichtius Gray, 1864 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

Rorqual Whales수염고래과

(E)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흑고래속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

(F)대왕고래 Blue Whale (Balaenoptera musculus)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

(G)큰고래, 지느러미고래 Fin Whale (Balaenoptera physalus)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 등이다.

 

포경선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가 기록한 항해일지에 나타난 고래의 종()열거된 순서가 위와 같고 이것을 생물분류체계적으로 구분을 해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가 있다.

 

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

북극고래속(:Balaena), 종(種) (C)북극고래:활머리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Linnaeus 1758)

참고래속(:Eubalaena), 종(種) (B)Black Whale(북대서양참고래 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 남방참고래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Desmoulins 1822; 북태평양참고래 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Lacépède 1818: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대왕고래속(:Balaenoptera)종(種) (F) 대왕고래 Blue Whale(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종(種) (G)큰고래 Fin Whale(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

흑고래속(Megaptera), 종(種) (E) 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

수염고래소목(Mysticeti)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

귀신고래속(Eschrichtius), 종(種) (D) 회색고래:귀신고래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

이빨고래소목Toothed Whales(齒鯨小目:Odontoceti) 향고래상과(Physeteroidea) 향고래과 (Physeteridae, Grey 1821) 향고래속(Physeter), 종(種) (A)향고래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이제부터 양키 고래사냥꾼들이 포획한 고래를 (A), (B), (C)...순서대로 고래가 어디에 분포하는 것인지원 분포지를 세부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Video footage: Sperm whale go down Physeter macrocephalus Azores Island, Pico, Atlantic ocean

 

먼저 이빨고래소목 Toothed Whales(齒鯨小目:Odontoceti), 항유고래(sperm whale, cachalot)이다.

 

Sperm Whale (Physeter macrocephalus):* Grows to up to 60 feet long, weighs up to 63 tons; * Follows its food supply through the world’s oceans is generally found in colder seas in summer and in temperate and tropical waters in winter; * Feeds on small fish, squid, giant squid: * Dives to depths of at least 3,300 feet deeper than any other marine mammal; * Holds its breath while submerged for up to 90 minutes; * Displays enormous teeth on its lower jaw; * Was the principal prey of the nineteenth-century American whale-fishery; * Haunted Captain Ahab in the classic American novel, Moby-Dick.


 

(A)향유고래란 이빨고래소목(Odontoceti)으로 분류하고 그 하류분류에서 a)강돌고래상과(Platanistoidea), b)참돌고래상과(Delphinoidea), c)향고래상과(Physeteroidea), d)부리고래상과(Ziphioidea)로 나누며 다시 그 향고래상과에는 향고래과(Physeteridae)와 꼬마향고래과(Kogiidae)로 분류된다.

수염고래소목의 고래에게 있는 수염 대신 향유고래는 이빨을 갖고 있으나, 이빨을 이용해 먹이를 먹지는 않고 삼키며 S자 모양의 분수공(blowhole) 1개가 머리 앞 왼쪽에 있다.

미국자료에는 향유고래(Sperm Whale)의 길이가 60피트(feet)까지 자란다 하였고 무게는 63(tons)이라 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에는 74(ton)까지 자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세계의 해양에 먹이들이 있는데 작은 물고기, 오징어, 대왕 오징어(Giant squid)라고 한다.

이 오징어만 하더라도 동양에서는 ‘Architeuthis japonica, Pfeffer 1912’ 하여 어김없이 일본을 종명으로 하지만 서양에서는 ‘Architeuthis dux, Steenstrup 1857’라 하여 Origin-Mid 18th century (denoting the leading voice or instrument in a fugue or canon): from Latin, ‘leader’.후자의 라틴어 의미가 리더인데 바로 대왕오징어와 의미가 일치한다.

학명명명시기도 빠르지만 대부분 북대서양을 분포지로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원종이라는 것이다.

향유고래는 일반적으로 여름에는 차가운 바다, 겨울에는 온대 및 열대바다에서 발견된다. 다른 해양 포유류보다 더 깊은 최소 3,300피트(feet)의 깊이까지 잠수하고 최대 90분 잠수하는 동안 숨을 참는다고 알려진다.

아래턱에 커다란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료에서는 19세기 미국(양키)의 주요 포획대상이었다고 하고 있다.

이빨고래류 중에 가장 큰 종()으로 이빨을 가진 동물로는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 어떤 종()보다도 크고 머리에 밀랍으로 가득찬 경랍기관을 가지고 있고 거대한 사각형 머리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白鯨:Moby Dick)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2004년 동해안에서 70년 만에 발견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일상적인 동선이 아니라는 뜻이다.

즉 한반도 동해안에 향유고래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양키들의 고래서식처를 이 잡듯이 훑어 버리는데 그곳은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서양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주요서식처로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은 학명은 Physeter macrocephalus(대서양)이지만 이에 물타기식의 /Physeter catodon(태평양)을 이야기 한.

면밀하게 따진다면 양키들의 고래잡이 종은 대서양의 향유고래인 것이 확실하다.

 

抹香鯨学名Physeter macrocephalus又称巨抹香鲸卡切拉特鲸是世界上最大的齒鯨

科学分类 编辑

动物界 Animalia

脊索动物门 Chordata

哺乳纲 Mammalia

偶蹄目 Artiodactyla

下目鲸下目 Cetacea

抹香鲸科 Physeteridae

亚科抹香鲸亚科 Physeterinae

抹香鲸属 Physeter

Linnaeus, 1758

抹香鲸 P. macrocephalus

二名法

Physeter macrocephalus Linnaeus, 1758

 

이것도 미심쩍다고 하여 그렇다면 이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의 분포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EOL 자료에 의하면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로 4가지를 들 수 있다.

보로 아틀란틱 오징어(Boreoatlantic Armhook Squid) 학명:Gonatus fabricii(Lichtenstein 1818), 북대서양대구 (coalfish)또는 미국에서 폴락(pollock)이라 칭하는 학명:Pollachius virens(Linnaeus 1758),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라고 하는 학명:케팔로포다 큐비에르[Cephalopoda Cuvier 1797], 큰 종()갈고리 오징어라고 하는 학명:Kondakovia longimana Filippova 1972  가 있고 끝으로 대왕오징어가 있다.



그런데 번째 먹이, 보로 아틀란틱 오징어(Boreoatlantic Armhook Squid) It occurs in the northern Atlantic Ocean from Canada to the Barents Sea. 즉 북대서양에서 생성되어 캐나다에서 노르웨이해 옆 바렌츠해역까지 분포되고 있다 하였다.

속명(屬名) 보레오아틀란틱(Boreoatlantic)은 고대 그리스어로 북부(northern)를 의미하는 ‘Boreo[Βορέας ‎(Boréas)]’와 대서양을 의미하는 ‘-atlantic’의 합성 어원임을 알 수 있어 이것은 바로 대서양북부지역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없이 북아메리카대륙 권이다. 번째 먹이, 북대서양대구 또는 검정대구(coalfish)라 하거나 미국에서는 폴락(pollock)이라 하는 어종(魚種)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북대서양을 근원으로 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번째 먹이,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라는 것인데 학명:케팔로포다 큐비에르(Cephalopoda Cuvier 1797)이며 마찬가지로 별칭으로 여러 개의 앞 발(head-feet)로 설명된다.

 

Brief squid have large eyes and several arm-like tentacles extending from the head.

짧은 오징어는 큰 눈과 머리에서 뻗어 나오는 팔 모양의 촉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바다생물이라 담수(潭水)에는 견딜 수 없지만 남부대서양에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연안 체서피크 만(Chesapeake Bay)에서 발견된 단형 오징어(brief squid) 롤리군쿨라 브레비스(Lolliguncula brevis, 1823) 즉 대서양 단형 오징어(Atlantic brief squid:柔魚:望潮魚), 혹은 대서양 나비 오징어(Atlantic thumbstall squid)종이며 이것은 특별하게 기수(汽水:brackish water)에 내성이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하였다. 두족류 동물은 복잡한 생화학적인 제약 때문에 민물 속에서 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며, 4억년(億年)이상 생존하는 동안 완전하게 민물서식지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이에 대한 증명이다. 두족류 동물은 심해평원(深海平原:abyssal plain)에서 바다 상층부 표면까지 범위로 넓고 바다의 깊숙한 곳 대부분에 서식한다. 이들의 다양성은 적도부근에서 가장 크며(다양성 연구에 의해 11°N에서 그물로 회수된 40()표본) ()지방에서는 감소된다.


 

  

번째 먹이, 콘다코비아 롱기마나(Kondakovia longimana Filippova 1972)는 학명시기가 최근이라는 단점이 있으며 별칭으로 거대한 사마귀 오징어’, 긴팔 문어 오징어로도 알려져 있고 큰 종()의 갈고리 오징어’라고도 한. 최소 길이가 85cm이고 약 1.15m이상의 덮개(遮蔽物)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종()들의 가장 큰 완벽한 표본에서 총 길이가 2.3m 인것이 2000년에 남극(南極)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종()은 남대양(南大洋)의 표해수층(epipelagic zone)과 중심해수에서 서식하며 이것의 범위는 남극과 남극대륙 극지부근일 수 있지만, 사우스조지아 섬(South Georgia:남대서양, 포클랜드제도 동남쪽 약 1,290km지점에 있는 영국령)과 태즈먼 해(Tasman Sea: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와 뉴질랜드 사이의 바다)까지이며 북쪽으로 뻗쳐 있다.

특히 이 오징어는 주로 상어와 남아메리카대륙의 신천옹(信天翁:albatross), 향유고래, 펭귄 등 남대양의 포식자들에게 먹이가 되는데 특히 상어는 잠꾸러기상어(Somniosidae:sleeper shark)와 비악상어(porbeagle:Lamna nasus)이며 이들이 두족류 생물체의 각각 21%19%를 차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잠꾸러기 상어 역시 학명 시기가 가장 빠른 북대서양 북극지역에 분포지의 그린랜드 상어(Greenland shark), 학명 Somniosus microcephalus Bloch & J. G. Schneider, 1801를 들 수 있고 비악상어(Lamna nasus Bonnaterre, 1788)역시 북대서양 북극을 분포지로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자에서 향유고래의 먹이로는 대왕 오징어(Giant squid)라고 하였지만 이 대왕오징어 역시 분포지는 거의가 대서양 북부와 서부 남부로 나타나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향유고래 먹이 분포지를 살펴 본 결과는 향유고래가 대서양을 범위로 하여 북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까지 폭 넓게 서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한 더치와 양키에 의해 17세기부터 고래사냥의 주 타킷이 된 향유고래의 포획 포경지는 바로 대서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양키 고래잡이들이 포획한 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의 종들이다.

Baleen Whales (suborder Mysticeti)

Baleen whales do not have teeth. Instead, they are distinguished by baleen, which hangs in strips from the roofs of their mouths. Baleen is composed of keratin, a substance found in nails, claws, horns, and hoofs. It looks like hairy, vertical venetian blinds. The whale uses it to strain out krill (masses of small shrimp-like crustacea that float near the water’s surface) from sea water.

향유고래의 이빨고래소목(Odontoceti)는 다르게 수염고래는 이빨이 없다.

대신 입천장에 매달린 발린(baleen:수염)으로 구별된다.

수염은 손톱, 발톱, , 발굽에서 발견되는 물질인 각질(角質:keratin)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털이 많은 수직 베니션 브라인드(Venetian blinds)처럼 보이고 고래의 이 수염은 수면 근처에 떠있는 작은 새우 같은 갑각류, 크릴새우를 걸러내기 위해 사용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염고래류에는 수염고래소목(Mysticeti)으로 분류되고 그 하류분류에 참고래과 (Balaenidae),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 꼬마긴수염고래과 (Neobalaenidae)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빨고래류의 고래보다 몸집이 큰 것으로 나타나며 2개의 분수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대부분 연안에서 생활하며 때문에 인간의 포경산업의 주요 포획대상이 되기도 했던 고래이며 대부분 온순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 먼저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나 귀신고래의 경우는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

 

(B)Black Whale : Growing up to 60 feet long and weighing up to 100 tons, these animals provided the backbone of the American commercial whale fishery from their early colonial shore-side exploitation until the end of the nineteenth century. Commonly termed “black whales” by American whalers, their hunt was called “right whaling” for their marketable baleen, similar to the great right whale of European commerce, the bowhead whale. These little-understood animals were also called Nordcapers or sletbacks and were seldom hunted by Europeans who considered them commercially inferior to bowheads. They made less oil, had coarser baleen, fought viciously, and frequently sank when killed. With a relatively small population in the North Atlantic, Eubalaena glacialis numbers were quickly reduced by colonial whalers who took advantage of their regular migratory routes. The southern species and the North Pacific species, however, provided sustained commercial advantages through heavy exploitation for many decades. Today, Eubalaena glacialis and Eubalaena japonica are the most threatened great whales on earth. The unreported killing of North Pacific right whales by Soviet commercial whalers in the twentieth century almost completely extirpated the species. Around 400 individuals currently make up the population of North Atlantic right whales which face threats from marine traffic, pollution and entanglement in fishing gear.


 

(B)흑고래-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 참고래속(:Eubalaena), (B)흑고래(Black Whale)종(種)은 북대서양참고래 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 그리고 남방참고래 Southern right: Eubalaena australis, Desmoulins 1822; 마지막으로 북태평양참고래 North Pacific right: Eubalaena japonica, Lacépède 1818:등 크게 3종으로 다시 나뉜다.

그러나 학명시기만 놓고 보면 흑고래라는 것은 북대서양참고래인 것으로 판단된다. 

길이 60피트(feet)까지 자라고 무게가 100(ton)에 달하는 이 동물은 미국의 상업적인 고래 어업에서 19세기 말까지 일찍이 식민지동부해안에 대한 개발에 근간을 제공했다고 알려지기 때문에 상당한 흑고래가 희생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일반적으로 미국(양키)고래잡이들이 "검은 고래"라고 부르는 이 포획은 유럽 상거래의 큰 수염고래, 즉 북극고래(bowhead whale)와 비슷한 시장성 있는 "고래잡이"라고 칭 하였으며 거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little-understood)이 포유류들은 얼음고래(Arctic whale or icy whale)혹은 칠칠맞지 못한(sletback)것이라 하여 상업적으로 북극고래보다 못하다고 하였고 유럽인들은 거의 포획하지 않았던 고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인이라고 하여도 대서양으로 넘어와 고래잡이를 했던 것은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것들은 북극고래를 선호했다고 하지만 유럽 특히 터치같은 서양포경선들은 흑고래 중에 북대서양참고래를 포획했다고 추정된다.

그것들은 기름 채취량이 적고 거친 수염을 가졌으며 잔인하게 싸우고 죽으면 종종 가라앉아 버리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는 말이다. 북대서양에서 개체수가 비교적 적은 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는 규칙적으로 이동이 가능한 항로를 이용하는 식민지동부해안에서 포경하는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감소되었고 남부종(southern species)과 북태평양종(North Pacific species)은 수 십 년 동안 심한 개발에 의해 상업적으로 유리하다고 하여 지속적으로 포획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대서양참고래(Eubalaena glacialis)와 북태평양참고래(Eubalaena japonica)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협받는 거대 고래라고 알려져 있고 특히 북태평양참고래(North Pacific right whales)20세기에 소련의 상업적인 포경선들에 의해 알려지지 않는 포획행위는 거의 멸종을 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0년경 부터이다.

우리가 궁금해 하던 일본은 2차세계대전 전까지 북아메리카대륙 서부와 중앙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을 관할 했다고 할 때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 북태평양참고래는 아마도 쏘련 못지 않는 학살이 자행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재 400 마리정도 개체 수량의 북태평양참고래가 해양교통, 공해, 어류장비로 인한 멸종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8.19세기에 더치나 양키들의 고래잡이에 대상이 된 것은 바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라는 사실을 알 수있어야 할 것이다.

 

(C)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 Grows to about 60 feet in length and weighs 100 tons or more; * Prized by whalemen for quantity and quality of its blubber and baleen; * Carries the thickest blubber of any whale (20-28 inches), an adaptation to the icy Arctic waters in which the species lives; * Possesses longest (10- to 14 feet) and largest number (600) of baleen plates.



(C)북극고래-수염고래소목 Baleen Whales(鬚鯨小目:Mysticeti) 참고래과 (Balaenidae)

북극고래속(:Balaena), (C)북극고래:활머리고래 Bowhead Whale (Balaena mysticetus, Linnaeus 1758)종(種)은 길이 약 60피트(feet)로 자라고 무게는 100(ton)그 이상이다. 고래 기름과 수염의 양과 질은 고래잡이들이 상품으로 평가한다.

고래의 지방두께 20~26 인치(inch)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차가운 북극 얼음물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고 긴 것은 10~14피트(feet)길이와 가장 많은 600개의 수염판(baleen plates)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진다.

The bowhead whale has been hunted for blubber, meat, oil, bones, and baleen. Like the right whale, it swims slowly, and floats after death, making it ideal for whaling. Before commercial whaling, they were estimated to number 50,000.

Commercial bowhead whaling began in the 16th century when the Basques killed them as they migrated south through the Strait of Belle Isle in the fall and early winter. In 1611, the first whaling expedition sailed to Spitsbergen. By mid-century, the population(s) there had practically been wiped out, forcing whalers to voyage into the "West Ice"the pack ice off Greenland's east coast. By 1719, they had reached the Davis Strait and, by the first quarter of the 19th century, Baffin Bay.

북극고래는 송곳니, 고기, 기름, , 그리고 수염 때문에 특히 서양고래잡이들에 의해 사냥되어 왔다.

참고래처럼, 천천히 헤엄치고, 죽은 후에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기 때문에 고래잡이에 이상적이라고 하였고 상업적인 고래잡이가 성행되기 이전에는 개체수가 5()마리로 추정되었다.

물론 번식에 의해 상당량이 늘어났겠지만 무차별 포획으로 인해 이것도 멸종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상업적인 포경은 잘 알다시피 포르투갈, 스페인 남만무역에 의해 16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

그 때 남유럽 피레네산맥의 양사면인 에스파냐 북부와 프랑스 남서부에 거주하는 부족인 바스크족(Basques)들이 가을과 초겨울에 북대서양 벨 섬의 해협을 통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을 포획했다고 알려지는데 포르투갈 예수회 공동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of Loyola)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역시 이 이 바스크부족이다.

벨섬의 해협(Strait of Belle Isle)이라 함은 캐나다 동부의 래브라도반도(Labrador Peninsula)와 뉴펀들랜드섬(Newfoundland) 사이의 벨섬해협(Strait of Belle Isle)이.

그런데 스페인지배로 몰락한 유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들은 캐나다 동부지역이며 대서양 북극 지역에 나타날 수 있었던 일반적인 상황임을 알 수가 있다.

물론 포르투갈인들의 인도양과 말라카해협의 활동 범위에서 크게 벗어난 이야기지만 상업적 포경이 이때부터 실시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은 대서양에 묶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선 위치는 15세기부터 대해양시대라 하여 목표로 한 인도양과 말라카해협 및 더 나아가 동아시아대륙이란 서양사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7세기 1611, 첫 번째 고래잡이 탐험은 더치(Dutch) 즉 네덜란드인에 의해 발견된 스피츠베르겐 섬(Spitsbergen)이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서 아는 상식인데 역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유럽대륙의 근원을 애써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북극고래는 20세기 중반까지, 개체수가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던 포경선들로 하여금 그린란드 동쪽 해안의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서빙(西氷)"이 되도록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은 시초가 대서양 북극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1719년까지 그들은 대서양 북극지역인 데이비스해협(Davis Strait)에 도착했고 19세기 1/4분기(1825년)까지 배핀만(Baffin Bay)에 도착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곳들도 자세히 보면 일찍이 유럽인들에 의해 모두 탐험되었다고 하는 곳인데 그들의 거처가 분명하게 들어나 있다는 사실을 서양사는 교묘히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다.

즉 무수히 많은 유럽 서양고래잡이들이 북대서양에서 포획활동을 했다고 이해해야 마땅 할 것이다.

 

(D)Gray Whale (Eschrichtius robustus):* Grows to up to 48 feet long, weighs from 25-30 tons; * Migrates 12,000 miles roundtrip longest migration of any whale species from the frigid waters of the Bering and Chukchi Seas, where it summers, to the warm lagoons of Baja California, where it winters; * Considered ferocious by whalemen, who called it “devil fish.” Present almost affectionate interaction between whale watching humans and gray



다음은 (D)회색고래이다.

수염고래소목(Mysticeti) 귀신고래과 (Eschrichtiidae) 귀신고래속(Eschrichtius), (D) 회색고래:귀신고래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 1861)종(種)을 보자.

귀신고래라고도 하는 회색고래(Gray Whale)는 최대 48피트(feet)길이까지 자라고 25~30(ton)까지 무게가 나가면서 수명은 50~70년이다. 왕복 12,000 마일(miles)을 이동하며 회색고래의 가장 긴 이동 거리는 따뜻한 캘리포니아 바자(Baja California)유호지에서 겨울철의 혹한수의 베링과 추크치해(Chukchi Seas)까지 이동하며 악마의 물고기라고 고래잡이들은 칭하고 흉폭하다고 하는 것은 고래를 관찰하는 인간과 귀신고래(회색고래)사이에 애정 어린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고 있다.

물론 거칠기는 하지만 수염고래 특성상 온순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회색고래의 학명은 덴마크(Danish)의 동물학자, 생리학자, 해부학자인 에스크리크트(D. F. Eschricht:1798-1863)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이다.

회색고래는 에스크리크티우스(Eschrichtius)유전자에서 유일한 종()이며, 귀신고래과(:family Eschrichtiidae)의 유일한 유전자이다. 이 포유류는 3천만년 전 점신세(漸新世:Oligocene)의 초기에 나타난 포유동물로써 입 속에 있는 여과장치를 이용하여 다량의 먹이생물을 한꺼번에 포식하는 형태 고래(filter-feeding whales)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North Atlantic populations were extirpated (perhaps by whaling) on the European coast before AD 500 and on the American coast around the late 17th to early 18th centuries.

그러나 제일 주요하다고 여겨지는 북대서양개체는 AD500년 이전 유럽해안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유입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18세기 북대서양에서 멸종되었다고 하고 있다.

사실상 현재 회색고래(귀신고래)라고 하는 속과 과 모두 유일하다고 하는 학명(Eschrichtius robustus)의 분포지는 북태평양을 나타내고 있다.

때문에 발트해(Baltic Sea), 와덴 해(Wadden Sea), 세인트 로렌스 만(Gulf of St. Lawrence), 펀디 만(Bay of Fundy), 허드슨 베이(Hudson Bay) 및 팜 리코 사운드(Pamlico Sound)를 포함한 대서양의 양쪽 해안 연안으로의 계절적으로 이동개체군은 현재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다.

그동안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영국 등 유럽 해저나 연안의 화석에서 방사성탄소연대가 이를 확인시켜주고 위 분포지 가능성을 말하고 있으며 1997 년 프랑스 몽펠리 부근의 남부 라타라(Lattara) 고대항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 된 로마시대의 유물들에서도 대서양 회색 고래들이 바덴해(Wadden Sea)에서 유럽 해안을 오가며 이동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고 하고 있다.

고대 유전자(DNA)바코딩과 교원질(膠原質:collagen) 관련 펩티드(peptide) 근원의 지문채취를 이용한 2018년 연구는 지브롤터(Gibraltar)해협 동쪽에 있는 로마시대의 고래 뼈들이 한때 지중해까지 서식했던 것을 확인시켜주는 회색고래(북대서양긴수염고래:North Atlantic Common Rorqual)라고 밝혔다. 이것은 북아메리카대류과 유럽대륙 북극와 북대서양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하게, 미국 동부 해안 지하 화석의 방사성 탄소는 최소한 17세기 동안 그곳에 회색고래가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며 이 개체는 1675년부터 최근까지 적어도 뉴욕사우샘프턴(New York Southampton)에서 플로리다주 주피터섬(Jupiter Island, Florida)까지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1835년 난투켓 섬(Nantucket Island)의 역사에서 오벳 메이시(Obed Macy)1272년 전 식민지 초기에는 덴마크어로 죽검(Danish skrog:hull, carcass)이라고 발음과 비슷한 "스래그(scragg)"라고 불리는 고래가 항구에 들어와 정착민들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썼다는 사실과 네덜란드 학자 안톤 부데베인 데인스(Anton Boudewijn van Deinse:1885-1965)1725년 브리티시 법관이며 해양생물학자인 폴 더들리(Paul Dudley)가 초기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종들 중 하나로 묘사한 "크래그 고래"가 거의 확실히 회색고래였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을 자료가 말하고 있다.


Journal of Mammalogy, Volume 58, Issue 2, 31 May 1977, Pages 237239,

Robert L. Brownell, Jr., Chan-il Chun

Probable existence of the Korean stock of the gray whale(Eschrichtius robustus)

Two geographically lsolated populations of gray whales, Eschrichtius robustus, ard knownin the North Pacific-the eastern Pacific or California stock, and the western Pacific or Korean stock(Rice and Wolmah, 1971: Tomilin, 1967). The range of the Korean stock is from the Sea of Okhotsk to the southern shores of the Republic of Korean(Tomilin, 1967: Andrews, 1914).

Rice and Wolman(1971) reviewed the history of commercial exploitation of the Korean stock. Mizue(1951) reported that the last catch from this stock was a singlle whale taken in 1933 off the eastern coast of Korea, and concluded that the stock was extinet.


문제는 이 종()에서 우리나라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태양신() 신화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에서 주인공 부부가 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하는 그 바위가 귀신고래였다는 설이 있어 실제로 동해에 귀신고래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하여 아래 같은 자료가 발견되는데 현재 유일한 귀신고래 학명 분포지가 북태평양을 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와 동해(東海)를 오가는 북서태평양귀신고래라 하여 이것을 한국계 귀신고래라고 1912년 미국인 탐험가 로이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Korean stock of gray whales’ 라는 명칭을 붙이기 까지 하였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쓰지 않는 비공식 명칭이라 하는데서 생각해보면 오히려 위 북아메리카대륙 대서양개체성이 더 높다 할 수 있다.

즉 지금의 유일종으로 알려지는 학명의 명명시기가 (Eschrichtius robustus, Lilljeborg)1861년이라는 점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귀신고래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한 사실등을 묶어 볼 때 진성 귀신고래의 학명이 지금과 전혀 다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Synonyms

Balaena gibbosa Erxleben, 1777

Eschrichtius gibbosus 1861

Agaphelus glaucus Cope, 1868

Rhachianectes glaucus Cope, 1869

유일종의 별칭인 위 4가지 학명을 분석할 필요성이 있고 그 중에서도 제일 명명 시기가 빠른 학명 "Balaena gibbosa Erxleben, 1777"가 의심되나 분류학상 속(屬)이 북극고래속(Balaena)이며 북극고래또는 활머리고래(Balaena mysticetus Linnaeus,1758)와 같이 취급될 수밖에 없다.

거의 고래하목(Cetacea)에 속하는 전체 과(科)를 분류한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는 분명히 알 것이지만 그는 살아있지 않다.

이에 대한 문제제시를 보면 The subfossil remains of now extinct gray whales from the Atlantic coasts of England and Sweden were used by Gray to make the first scientific description of a species then surviving only in Pacific waters. 영국(England)과 스웨덴(Sweden)의 대서양 연안으로부터 멸종된 회색 고래의 하위 화석 유적은 그레이 존 그레이(John Edward Gray)가 과명을 명명할 때 태평양의 물에서만 살아남은 종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을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한다.

대서양개체와 태평양개체 사이의 정체성은 해부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겠지만 한 종이 멸종된 상황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의 결과는 세계능력있는 생물학자들이 밝혀야 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에서 주인공 부부가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하는 한국 귀신고래, 삼한 귀신고래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 그리고 진짜 귀신고래가 서식한 곳이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즉 대동양이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긴수염고래(rorquals Whale)

(E)Humpback Whale(Megaptera novaeangliae): * Grows to up to 50 feet and weighs up to 50 tons; * Does not have a hump but arches its back when it dives, which may account for the name; * Displays huge flippers, which are nearly as long as one third of its body; * Breaches dramatically, propelling its huge body almost entirely out of the water and diving back in with an enormous splash; * Noted for complex, repetitive vocalizations. The Humpback was one of the five species normally hunted by the Yankee whalers, although it was the least desirable since it sank about half the time after being killed and its baleen was useless.



(E)혹등고래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흑고래속(Megaptera), (E) 혹등고래 Humpback Whale (Megaptera novaeangliae, Borowski 1781)종(種)이다.

최대 50 피트(feet)까지 자라며 무게는 최대 50 (ton)이다.

혹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깊이 잠수할 때는 등을 아치모양으로 둥글게 구부리고 앞으로 회전하여 꼬리가 물과 수직이 되게 물속으로 들어가며 특징적인 것을 묘사한 것이며 몸의 1/3 정도에 해당하는 거대한 가슴지느러미가 있다.

물속에서 몸을 물 밖으로 거의 완전히 밀어내 배를 위로 하고 솟구쳐 올라 등 쪽을 활 모양으로 구부린 후 머리를 먼저 물속으로 처박는 재주넘기를 하면서 큰 마찰음과 포말을 내기도 하고 15 m가 넘는 대형 고래가 자기키만큼 뛰어오른다고 하였으며 복잡하고 반복적인 발성은 5~35분간 계속되기도 하며 소리는 신음소리나 울음소리에서부터 윙윙거리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알려진다.

혹등고래(Humpback)는 보통 양키들의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다섯 종(種)들 중 하나이지만 죽은 후 약 반시간 동안에 가라앉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어 별도 선호하지 않는다고도 알려진다.

Humpback whales were hunted as early as the 18th century. By the 19th century, many nations (the United States in particular), were hunting the animal heavily in the Atlantic Ocean and to a lesser extent in the Indian and Pacific Oceans. The late-19th-century introduction of the explosive harpoon allowed whalers to accelerate their take. This, along with hunting in the Antarctic Ocean beginning in 1904, sharply reduced whale populations. During the 20th century, over 200,000 humpbacks were taken, reducing the global population by over 90%. North Atlantic populations dropped to as low as 700 individuals.

혹등고래는 18세기 초부터 사냥되기 시작했고 역시 19세기까지 특히 미국(양키)들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대서양에서 그리고 더 적은 범위의 인도양(카리브해 예상)에서 이 고래를 사냥하고 있었다. 19세기 말, 폭발성 작살이 도입되었고 포경선들은 포경행위의 도약을 가속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1904년에 시작된 남극해에서의 사냥과 함께 고래개체수를 급격하게 줄이게 하였으며 20세기에는 20() 마리가 넘는 혹등고래가 포획되어 전 세계 개체수의 90% 이상 줄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대서양 혹등고래의 개체수는 700 마리까지 줄어들었다.

 

(F)Blue Whale (Balaenoptera musculus): *Grows to a length of 100 feet and weighs up to 150 tons * the biggest creature that ever lived. Because of intensive whaling in the 20th century, the Blue Whale has been left as one of the most endangered species. It was never hunted by the Yankee whaleman because it was considered too fast, too big, and because it invariably sank when killed.



(F)대왕고래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대왕고래속(:Balaenoptera)(F)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Blue Whale(Balaenoptera musculus, Linnaeus 1758) 종(種)이다.

현존하는 동물은 물론, 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로서 100 피트(feet)길이로 자라며 최대 150 (ton)까지 나간다. 평균적인 길이는 25m에서 33m정도이며 발견된 개체 중 가장 긴 고래는 길이 33.58m이고 가장 무거운 고래는 무게 190(ton)이라고도 한다.

20세기의 집중적인 고래잡이 때문에, 푸른 고래는 멸종 위기에 처한 종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너무 빨랐고, 너무 크고, 죽으면 반드시 가라앉았기 때문에 양키고래잡이(Yankee whaleman)에 의해 사냥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를 잡거나 죽이기는 쉽지 않다고 하고 그들의 유영속도와 힘에 의해 고래잡이들이 초기에 향유고래나 참고래를 대상으로 포획하는 동안 거의 추적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크고 빨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1864년 노르웨이 고래사냥꾼 스벤 포인(Svend Foyn:1809-1894)에 의해 큰 고래를 잡을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작살(harpoon)이 발명되고 이를 증기선(steamboat)에 장착하면서 목적을 이루었고 곧 노르웨 북부의 핀마크(Finnmark)해안에 몇 군데의 고래잡이 집하장을 설치했으나 지역어부들의 분쟁으로 인해 1904년 폐쇄되었다고 한다.

이후 대왕고래가 사냥되기 시작했는데 1883년에 아이슬란드(Iceland), 1894년 덴마크 자치령 페로제도(Faroe Islands), 1898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1903년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에서 사냥되었다고 하고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최초로 남대서양에 있는 산이 많은 불모의 섬, 조지아 남부(South Georgia)에서 포획되었다고 하고 있다. 1925년까지 그곳 조선소에 설치된 선미(고물) 조선대(造船臺)출현과 증기로 작동되는 고래 작살기는 대왕고래와 수염고래 전체적인 어획량을 늘렸고 남극과 남극대륙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1930년에서 1931년 두 해 동안 남극에서만 29,400 마리의 대왕고래가 포획되었기 때문에 이후로 물론 개체수가 현격하게 감소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개체수 감소현상 때문에 1946년에 고래의 국제무역을 제한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역사성이 있는 모든 아시아연안 대왕고래 개체집단들은 일본의 191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벌어진 산업수렵정책에 의해 단기적으로 거의 멸종될 위기에 몰렸고 한 때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동중국해로 이동하였다고 하고 있지만 전부 멸종되다 시피 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사냥은 국제포경위원회에 의해 1966년에 금지되었고 소련에 이어 러시아에 의한 불법포경은 1970년대에 마침내 중단되었으나 그 때 북반구에서는 33()마리의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가 포획되었고 남극대륙, 남반구에서 3() 마리가 잡혔다고 알려진다.

극에서 개체수가 360 마리로 줄어든 것은 초기 숫자의 약 0.15%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어 이를 계산해보면 초기에 약 24()마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G)Fin Whale (Balaenoptera physalus):* Grows from 60 to 85 feet long and weighs up to 80 tons; * Considered one of the fastest of marine mammals, swimming at estimated speeds of up to 25 miles per hour; *Not hunted by whalers in the age of sail harpoons became dislodged due to its swimming speed and, like its close relative, the blue whale, it usually sank when killed.



(G)큰고래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대왕고래속(:Balaenoptera) (G)큰고래 Fin Whale(Balaenoptera physalus, Linnaeus 1758)종(種)이다.

길이 60~85피트(feet)길이에 80(ton)까지 자라는데 대왕고래 다음으로 큰 해양 포유류이다.

두 가지 분명한 아종이 북대서양과 남극에 있고 전 세계의 대양, 극지방, 열대지방에 걸쳐 분포하지만 극지방의 빙산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개체 밀도는 온대지방에서 가장 높다.

무리 지어 다니는 작은 물고기 및 오징어, 크릴새우 같은 갑각류를 먹고 시간당 최대 25 마일(miles)의 유영 속도로 예상되는 해양 포유류 중 가장 빠른 것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유영하는 동안 포경원들이 포획을 하지 않는 것은 작살은 유영 속도 때문에 빗나가고 가까운 친척 인 대왕고래와 같이 죽임을 당하면 보통 완전히 가라앉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보호 대상으로 지정되어 국제포경위원회(IWC: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에서 포경 제한하고 있지만 최근 아이슬란드와 일본에서 임의로 이들을 다시 포획하고 있으며 일본의 마구잡이 포획으로 개체 수가 줄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많은 큰 긴수염고래(rorquals)처럼 큰고래(fin whale)는 세계적인 종이다. 가장 높은 개체밀도는 온수와 차가운 물에서 나타나고 가장 따뜻한 적도인 지역에 덜 밀집되어 있다.

북대서양 큰고래는 멕시코 만과 지중해, 북쪽으로는 배핀만(Baffin Bay)과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까지 분포가 넓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큰고래는 대략 30°N 위도에서 흔하지만, 브라이드고래(Bryde's whale:Balaenoptera edeni)와 큰고래를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30°N 위도 남쪽에서 나타나는 것에 대해 상당한 혼란이 발생한다.

광범위한 선박 조사를 통해 연구원들은 서부 북대서양에 있는 큰고래의 여름 먹이 범위가 해안에서 1,000 fathom(수심단위:1.83m)까지 주로 41°20'N51°00'N 사이라고 결론지어졌다.

19세기에,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는 가끔 배를 탄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되기도 했지만, 비교적 안전했던 것은 유영속도가 빨라 그 당시 범선들을 쉽게 앞지를 수 있었고 종종 죽임을 당했을 때 가라앉기 때문에 애써 고래를 쫓는 시간은 낭비라 생각했지만 나중에 증기선(steam-powered boats)과 큰 고래를 포획하기에 적합한 작살들이 나타나 그들을 한 껏 포획하고 산업규모로 대왕고래와 보리고래(sei whale:balaenoptera borealis)와 함께 확보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다른 고래종들이 과도한 수렵을 겪으면서, 포경산업은 그러한 공간 대체물로 여전히 육질이 풍부한 큰고래로 눈을 돌렸다 하였고 그것은 주로 송곳니, 기름, 그리고 발린(수염)때문에 사냥되어졌다.

704,000 마리의 큰고래들이 1904년에서 1975년 사이에 남극의 포경 작전에서만 잡혔다고 알려진다.

 

수염고래소목(Mysticeti) 수염고래과 (Balaenopteridae) 대왕고래속(:Balaenoptera)

브라이드고래(Bryde's whales:Balaenoptera edeni)

보리고래(sei whale:balaenoptera borealis)

 

마무리

    

이미 벌써 완성 된 글을 올릴 수도 있었다.
한편으론 독자들에게 미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블로그에 올려놓고 정리단계에서 그만 낭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텍스트파일, 그림파일 할 것 없이 전체적으로 랜섬웨어(Ransomware)에 공격을 받아 어렵게 확보한 자료들을 순식간에 다 잃어버리고 새롭게 재차 자료를 구해 올리는 과정에서 글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위험을 예상하고 평소에 외장하드를 사용하고 기존 자료를 확보한 것 때문에 중요한 자료들은 상당수 보존할 수 있었다.
랜섬웨어공격을 두번째 크게 당하는 입장이라서 조심을 극도로 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어쨌던 글을 쓰기 위해서는 죽을 고생을 하고 찾아 놓은 괜찮은 자료와 그와함께 정리해놓은 글까지 깡그리 잃어버리는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두번째 난감한 입장에 놓였다는 것은 앞으로 자료를 관리하는데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최근에 올리는 3가지의 글이 모두 그렇게 늦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생물학적으로 분석한 것 중에 가장 자료가 광범위하게 수집되고 그것을 참고로 하면서 짧지 않는 글을 긴 시간과 작지 않는 공력으로 정리하여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마침내 블로그에 올리게 되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소기의 성과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 근세사와 고래잡이의 역사는 어쩐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16세기부터 고래잡이가 성행된 것은 상업적으로 포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상업적이라는 의미는 사고파는 행위를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인데 그 속에는 자연보호나 환경보호 따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더욱이 역사는 그들의 기록이 말해주는 것으로 정리되고 실증적인 것이 되어서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 느낌을 받는다.

고래가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사람과 비교하기는 힘들어도 서양인들이 발이 닫는 곳은 고래뿐만아니라 사람도 그와같은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서양인들이 가는 곳은 늘 상 학살이 따라 다닌다.
서양인들이 가는 곳은 늘 전염병이 돌아 쑥대밭이 되고 만다.
고래사냥이 초창기에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음에도 망망대해에서 목숨을 걸고 고래와 씨름을 하기를 몇날 몇일을 그렇게 버티다가 결국 고래가 항복하면 동시에 바다에 그냥 가라 앉는 고래를 아쉬움으로 달래면서 애초 포기하거나 아예 공격하지 않지만 숨이 끊겨도 가라앉지 않는 고래는 바로 올라타 배를 싣을 수 있도록 난도질하여 조각을 내고 주요분위를 분해하여 올려 놓는 과정은 고래잡이 포경원들에게 결코 쉽지 않는 사투인 것이 틀림없다.

기록들을 보다보면 특히 포경선원들의 선상생활은 그야말로 참혹한 것이고 사람이 목숨을 붙이고 사다는 의미가 새롭게 각인될 수밖에 없는 참담한 생활이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선주의 지시를 받은 산장은 선원들을 재촉하고 고래를 잡을 수 있을만큼 포획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고래잡이 선원들의 참상은 나중에 기회있을 때 하자.


재차 말하지만 서양인들의 고래잡이의 주 활동범위는 그들의 본거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미 그들이 포획한 고래 종들의 분포지를 살펴보고 충분히 밝혀 알았다.

글쓴이가 서양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동양사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인이며 이는 일반적으로 오해가 있을 수 있는 유럽인들과 별개로 구별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크다.

유럽인들이라고 하여 다 선문영인이고 선지식꾼들이 아닌 만큼 적어도 15세기부터 18세기사이에 역사를 조작한 세력, 바로 해양세력으로써 종전 해적행위를 일삼던 무리라고 정리하고 싶어진다.

그들의 활동범위를 이야기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대서양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보고 크고 작은 섬, 정크선을 숨길 수 있는 작은 만(灣)같은 한적한 곳, 다도해(多島海) 즉 대서양을 포함한 각 해안, 카리브해(Caribbean Sea)연안과 남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을 근거로 했다는 것은 별로 의심할바가 아니다.
아시아역사, 신중국역사, 그리고 한반도와 열도를 배경으로 하는 태평양에서 17세기부터 그들 서양세력들에 의해 고래잡이가 성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코메디같은 이야기다.
이런 가당찮은 주장은 2차세계대전 후 미군군정하에서 그들이 뿌려놓은 주입식 교육프로그램으로 인해 기정사실화된 것으로써 상당한 모순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와 열도만 겪었던 일이 아니라 아시아전체가 이런 역사수렁이 속으로 빠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전 글에서도 주장한 사실이지만 아무리 무모하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망상에 빠진 해양세력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결코 이익이 되지 않고 그들의 삶이 제대로 보장되지 것에 무조건 동조하거나 협조할 턱이 없으며 만약 기대에 여의치 않다면 냉정하게 판단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국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부터 동아시아대륙 홋가이도까지 혹은 북아메리카대륙 버지니아주 노퍽(Norfolk)에서 동아시아대륙 열도일본 우라가(浦賀)까지 돛2개 아니면 3개짜리의 500톤도 되지 않는 소형 범선을 끌고 자그만치 30,000 km가 넘는 항해거리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죽음을 담보하고 수개월동안 실행한다고 생각해보라.

당신이라면 하겠는가.
서양인뿐만 아니라 누군들 목숨과 일순간 인생을 종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택할 사람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17세기때 툭하면 서양인들은 그러한 논리로 식민제국을 건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럴때 글쓴이 뿐만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하고 그들이 말처럼 특별한'그들의 신(神)'이 있어 지켜주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것을 서양세력들이 모를 턱이 없다.


이런 취약점은 일본을 이용하고 그것을 타겟으로 유럽역사를 만들고자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에 출발점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예수회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동아시아에 일본이 존재했다고 하는 것은 서양세력들이 동서양사를 분리하면서 생성된 역사프레임을 조작키 위한 수단이며 삼한역사를 동아시아에 가두어 둘 수 있는 조건을 동시에 만드는 것이며 서양역사의 실증적 자료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동아시아의 일본은 서양문화 즉 유럽역사의 산파역할을 했다.
오히려 유럽에서 난리를 치고 있는 자포니즘 현상이 바로 그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증거이다.
이것을 위해 그들은 적당하게 포장해야 했고 짜집기하여 진짜처럼 만들어야 했으며 오늘날 서양사가 완성이 될 수 있도록 2차세계대전에서 최종 마무리 진 것은 그들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보면 서양인들의 동양사의 진출사는 반드시 일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번 주제 글인 고래잡이가 북아메리카대륙 해안이나 더 나아가 대서양을 대상으로 성행했다는 것은 그들의 최소한의 근거지가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유럽사 모순만큼 크다.

그러나 서양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고래잡이를 태평양을 중심으로 아시아대륙 한반도와 열도를 기착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완성된 유럽사의 실증적 역사를 표본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이야기가 아니다.

해양시대를 개척했다고 하는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1460-1524)가 인도양을 거쳐 인도에 들어간 것이 3차간에 1524년이 마지막 년도이고 1534년 8월 15일에 이냐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1491-1556)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가 주도하여 일본과 관계설정을 맺게되는데 예수회 공동창시자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1506-1552)는 1549년 8월 카고시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어쨌던 간에 일본과 유럽역사는 이렇게 엮이게 된다.

그것들은 결코 전통성의 순응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의혹스럽게 바라보는 예수회 생성과 역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이다.

유럽역사의 바탕이 되는 해양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마치 오늘날의 발달된 운송수단을 이용하여 지구 곳곳에 누비는 상황을 그대로 적용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당시 서양세력들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역사에 대해 비판도 없고 아무런 방해나 장해가 없었다는 사실은 2차세계대전 후 세계질서를 손아귀에 틀어 쥔 힘이 평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는 것이다.

누가 이러한 역사를 거부할 것인가.

거부할 힘과 여력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아마도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듯 이러한 모순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투쟁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없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지금까지 이 긴 글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해양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세들이 처음 고래잡이를 시작한 장소는 절대로 태평양이 될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한반도 또는 열도에 도착한 서양인들도 실제사실이 아닌 전부 허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 수 있어야 한다.
즉 독도 지명이 되어버린 1849년 프랑스 포경선 리앙쿠르호(De ancourt)가 처음으로 한반도 동해안에 들어와 이를 발견했다고 한 사실도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게 본다면 일본 열도 우라가에 입항했다고 하는 양키 고래잡이 선장 페리의 정체도 허구이거나 행적을 따져보면 모호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엔 절대 무리는 없다.

이것이 글쓴이가 파악한 분석에 의한 상식이며 펙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6세기부터 해양시대의 대주자 더치(Dutch)라고 알려진 네덜란드에 의해 본격적으로 포경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더치(Dutch)17세기 후반부터 잉글랜드와 대립되면서 점차 인도를 거점으로 세력을 키우던 잉글랜드세력에게 압도(壓倒)되었고 1799년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이때부터 고래잡이의 터전과 그 구성원들이 양키들에게 그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인데 자본이 자리를 이동하게끔 크게 움직인 것이 틀림없다.

더치가 새로운 자본주로 변신한 양키인가하고 의문도 가질 수 있다.

잉글랜드는 불쑥들어갔다가 다시 튀어나오는 스폰치 또는 봉봉볼 같은 느낌이 드는 역사개체이다.

그들은 북아메리카대륙 뉴잉글랜드를 깃점으로 하고 버지니아주가 그들의 본거지라는 점도 인식한다.

정확하게 18세기후반 19세기 초부터 고래잡이 바톤(baton)을 더치에 이어받아 20세기 초까지 고래잡이는 양키에 의해 지속되었고 그들이 북아메리카대륙 북대서양 주요한 고래의 씨를 말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미국이 고래에 대한 책임을 느껴서인지는 몰라도 1946년 12월 2일 워싱턴 D.C.에서 국제포경규제협약(1948년 11월 발효)이 채택하였고 국제포경위원회(IWC)설립하여 1982년 남획으로 인한 멸종을 우려하면서 결국 상업포경을 금지할 것을 결의했으며 이어 1986년부터 세계적으로 포획이 전면 금지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은 더치(Dutch), 양키(Yankee) 이 두 세력들의 포경활동의 주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북아메리카대륙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의 뉴베드퍼드(New Bedford)와 난투켓(Nantucket)은 고래잡이 근거지로 동일하게 사용한 흔적이 이글에서도 발견된다.

실제 포경활동에 대한 사실들을 현재 뉴베드퍼드에 있는 포경박물관(New Bedford Whaling Museum)자료를 통해 일련의 사실과 궁금한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일부분이라도 분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고무적인 것 틀림없다.

그러나 많은 포경선 중 벤자민 터커(Ship Benjamin Tucker)의 자료만을 참고로 하였다는 사실에서 스스로 자료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당시 19세기 초반 고래잡이의 극적인 상황과 포획된 고래가 생물학적 관점으로 어떤 종()이 주류이었는가를 파악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정리하고 들어가면 19세기 미국(양키)의 주요 포획대상이었다고 하고 있는 향유고래(Sperm Whale)의 서식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서양이라는 확고한 사실과 향유고래의 주요 먹이로 4가지가 분류되는데 첫째먹이 보로 아틀란틱 오징어, 둘째먹이 북대서양대구(coalfish), 세째먹이 두족류(頭足類:Cephalopoda), 네째먹이 큰 종()갈고리 오징어’, 다섯째먹이 대왕오징어까지 분포지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을 깃 점으로 나타나고 북아메리카대륙 동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양 즉 대서양 전체에서 서식하던 것임을 알 때 이 향유고래를 포획하고자 하던 서양해양세력들은 대서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판단을 하게 했다.

두 번째 종()에서수염고래소목에 분류된 흑고래 역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가 주종을 이루었고 당시 유럽대륙에 거주한 유럽인이라고 하여도 대서양으로 넘어 북아메리카대륙 북극에서 고래잡이를 했던 것은 숨길 수가 없는 사실이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서 일찍부터 포경하는 서양 사람들에 의해 빠르게 감소되었다는 사실과 17세부터 포경을 시작했던 더치(Dutch)나 양키(Yankee)들의 고래잡이에 주요 대상이 된 것은 바로 북대서양참고래(North Atlantic right: Eubalaena glacialis, Müller 1776)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이도 첫번째 종()과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세 번째 종()으로 수염고래소목의 북극고래 혹은 활머리고래가 무게 100(ton)이상의 고래에서 채취되는 기름과 수염의 양과 질은 고래잡이들이 상품으로 평가했다는 사실과 송곳니, 고기, 기름, , 그리고 수염을 얻기 위해 특히 서양고래잡이들에게 적극적인 포획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고 참고래와 마찬가지로 사냥하기 좋도록 천천히 헤엄치고, 죽은 후에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기 때문에 고래잡이들이 선호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어 이 종()의 주요 서식처가 북대서양 북극이며 위치적으로는 캐나다 동부의 래브라도반도(Labrador Peninsula)와 뉴펀들랜드섬(Newfoundland)사이의 벨섬 해협(Strait of Belle Isle)인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 이 역시 위 두 종()과 동일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네 번째 종()인 수염고래소목의 회색고래(귀신고래)는 워낙 남획이 심해 절멸되었다고 하는 종()인데 이 종()을 한국귀신고래라 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북대서양귀신고래가 절멸하는 대신 잔존하고 있는 북태평양귀신고래가 한국귀신고래로 변신하려다 그 마저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당시 빈곤한 한국의 위치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귀신고래는 3천만년 전 점신세(漸新世:Oligocene)의 초기에 나타난 포유동물로써 입 속에 있는 여과장치를 이용하여 다량의 먹이생물을 한꺼번에 포식하는 형태 고래(filter-feeding whales)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북대서양개체라고 하는데 서기(AD)500년 이전 유럽해안과 북아메리카대륙 동부해안에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초 사이에 유입되었다고 설명하고 18세기에 북대서양에서 멸종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스페인에 의해 몰락한 바스크부족에 의해 1372년부터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귀신고래를 포획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주요서식처가 북극 발트해(Baltic Sea), 와덴 해(Wadden Sea), 세인트로렌스 만(Gulf of St. Lawrence), 펀디 만(Bay of Fundy), 허드슨 베이(Hudson Bay) 및 팜 리코 사운드(Pamlico Sound)를 포함하고, 대서양의 북극, 양쪽 해안과 연안으로의 계절적으로 이동개체군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이 개체는 1675년부터 최근까지 적어도 뉴욕사우샘프턴에서 플로리다주 주피터섬(Jupiter Island, Florida)까지 움직임이 다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역시나 1835년 난투켓 섬(Nantucket Island)의 역사에서 오벳 메이시(Obed Macy)1272년 전 식민지 초기에 덴마크어(Danish skrog:hull, carcass)껍질과 죽검; 목졸라 죽이다는 의미의 "스래그(scragg)"라고 불리는 고래가 항구에 들어와 정착민들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했다고 그의 글에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으며 네덜란드 북해 해양표본을 수집하던 동물학자인 안톤 부데베인 데인스(Anton Boudewijn van Deinse:1885-1965)1725년 브리티시 법관출신이며 해양동물학자인 폴 더들리(Paul Dudley:1675-1751)가 초기 뉴잉글랜드 포경선들에 의해 사냥된 종()들 중 하나로 묘사한 "크래그 고래(scrag whale)"가 거의 확실히 회색고래였다고 지적했다는 사실 등은 비록 멸종이 되었지만 북아메리카대륙 특히 대서양 서부연안에 분포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과 함께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태양신() 신화인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작품에서 주인공 부부가 귀신고래(바위)를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고 한 설화는 옛부터 동해안에 귀신고래가 많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아시아대륙의 오호츠크해(Sea of Okhotsk)와 동해(東海)를 오가는 고래를 북서태평양귀신고래라 하고 이것을 한국계 귀신고래라고도 칭한 1912년 미국인 탐험가 로이 앤드류스(Roy Chapman Andrews:1884-1960)‘Korean stock of gray whales’ 라는 명칭을 붙였다는 것은 원래 명칭을 옮기고자 했던 것이지만 이마저도 현재는 학계에서 쓰지 않는 비공식 명칭이라 하고 있다.

이런 사실에서도 보면 답답하게 여긴 미국 학자가 한국귀신고래라고 명칭을 붙여 넘겨주었음에도 이조차 못 받아먹는 것이 한반도 생물학자들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할 이야기다.

197753158(:Volume)포유동물학 저널(Journal of Mammalogy)에서 회색고래(귀신고래)는 한국고래일 가능성을 말하였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두 종()의 회색고래(gray whales:Eschrichtius robustus)가 하나는 북태평양 개체의 캘리포니아 고래자리(Cetus)(California stock)와 다른 하나는 서태평양 개체의 한국고래자리(Cetus)(Rice and Wolmah, 1971: Tomilin, 1967)으로 구분하였는데 어쨌거나 태평양에서 동서구분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의 근거로 한국고래자리(Cetus)의 범위를 오호츠크 해부터 한반도 남해안까지(Tomilin, 1967: Andrews, 1914)를 말하였고 이 고래를 상업적으로도 이용된 사실을 밝혀 최종 1933년에 한반도 동해안 벗어난 곳에서 마지막으로 이 귀신고래가 포획된 사실을 말하면서 그러한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 보고서는 한반도 귀신고래가 동해안에서 마지막으로 1933년에 포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지만 기실 '한국귀신고래'라 함은 지금은 멸종이 되어버린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동양(大東洋)에 존재해야 하는 즉 대서양개체 바로 그것일 것이란 확신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는 상식이다.

그리고 양키들에게 포획된 고래 다섯번 째 종()은 수염고래소목(Mysticeti)의 혹등고래(Humpback Whale)이다.

이 혹등고래 역시 울산반구대의 고래암각화의 암면조각(岩面彫刻:petroglyph)에서 등에 빗줄기처럼 무늬로 표시된 고래가 이 혹등고래라고 여겨지는데 18세기 초부터 사냥되기 시작했고 역시 19세기까지 특히 미국(양키)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은 대서양과 그리고 더 좁은 범위의 인도양(카리브 해 예상)에서 이 고래를 사냥하고 있었다고 알려지며 19세기 말, 폭발성 작살이 도입됨과 함께 발전된 포경선에 의해 혹등고래 잡이가 가속화되었고 이것은 1904년에 시작된 남극해에서의 사냥과 함께 고래개체수를 급격하게 줄이게 만들었으며 20세기에는 20() 마리가 넘는 혹등고래가 포획되어 전 세계 개체수의 90% 이상 줄었다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혹등고래도 위 네 가지의 종들과 서식처가 물론 다르지 않다.

여섯번 째 종()은 수염고래소목의 대왕고래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이며 무게가 190(ton)가량 이라고도 한다.

19세기 중반부터 사냥되기 시작한 상황에서도 몸집이 거대하면서 유영속도가 빠르고 죽으면 반드시 가라앉았기 때문에 19세기 초기만 하더라도 양키고래잡이(Yankee whaleman)에 의해 사냥되지 않았지만 1883년에 아이슬란드(Iceland), 1894년 덴마크 자치령 페로제도(Faroe Islands), 1898년 뉴펀들랜드(Newfoundland), 1903년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에서 사냥이 점차적으로 진행되었고 1904년에서 1905년 사이에 최초로 남대서양에 있는 산이 많은 불모의 섬, 조지아 남부(South Georgia)에서 포획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1925년까지 그곳 조선소에 설치된 선미(고물) 조선대(造船臺)출현과 증기로 작동되는 고래 작살기는 대왕고래와 수염고래 전체적인 어획량을 증폭시켰고 특히 남극과 남극대륙에서 포획을 증가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양키가 포획한 마지막 종()으로 수염고래소목의 '큰고래' 종()인데 알려진 길이는 27.3 m(89.6 ft) 최대 체중 추정치는 114 ton(톤)으로서 이 종의 가까운 친척 인 대왕고래와 같이 19세기 중기부터 본격적인 포획이 시작되었고 북대서양 큰고래는 멕시코 만과 지중해, 북쪽으로는 배핀만(Baffin Bay)과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까지 분포가 넓게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살펴본 바대로 양키들이 19세기에 사냥한 고래의 종()이 7종()을 살펴보았지만 이것들의 분포지가 하나같이 전부 대서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긴 시간을 왔다.

보시다시피 더치와 양키들의 포획활동은 결론적으로 대서양이다.

결국 그들이 16세기부터 동아시아대륙에 감히 넘나들었다고 하는 것은 유럽역사를 만들기 위한 허구이다.

한반도 근세사, 열도일본근세사, 더나아가 신중국과 아시아제국역사가 허구란 사실말고는 이 글에서 답할 것이 없다.

이를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는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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