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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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글쓴이:한부울
서문
서양인들은 왜 17세기부터 조선을 배회했을까?
고서(古書)로 본 고래
석탄보급소
고래가 인간과의 만남 그리고 절멸
서양인들의 끝없는 물욕
양키의 등장
벤자민 터커의 운명과 역사위치
양키들이 사냥한 고래종류와 분포지
마무리
서문
오래전부터 이글을 써 올리려 했지만 자료가 만만치 않았고 시간도 여의치 않아 쓰지 못했던 고래(whale)역사에 대한 세계삼한역사관적 분석의 이야기다.
고래에 대한 이야기는 한반도 역사만 놓고보면 우리 역사와 별로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고서에는 고래자료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사학자들이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 서식했다고 인지하고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결코 한반도의 동해가 태평양을 접하고 있는 일본보다 고래를 많다고 할 수 없다.
실제로 일본 동쪽 바다, 즉 서태평양에는 엄청난 고래들이 많이 서식하고 종류도 다양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래와 접촉이 많다고 하는 것은 바다와 접하기 때문이며 그 바다는 대양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에 비하면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동해바다로는 협소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상하게도 울산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盤龜臺巖刻畵)만 보면 한반도 동해에 접근하는 고래라고 볼 수 있을 것인데 대왕고래, 혹등고래, 향고래뿐만아니라 북극고래,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가 그려져 있다.
이 대다수 종들이 북극과 남극을 종횡한다 할지라도 동해라고 알려져 있는 한반도와 열도사이 해안선을 타고 통로로 사용할 수도 있으나 서식처라고 할 수 없음에도 암각화에는 매우 다양한 고래 종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이 글을 쓰면서 더욱 의문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의문스러운 것은 암각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고래종을 보면 한반도 역사 기록에도 그에 대한 많은 자료가 있을 법하지만 정작 고래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는 것이 없다.
고대에는 고래가 많았지만 조선시대에 넘어오면서 고래가 거의 사라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래는 인간들에 의해 절멸한 것이 아니라면 아주 오래전부터 습성적으로 서식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정설인데 비이주성 범고래는 사라졌다가 해마다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암각화에 고래의 다양한 종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지금도 동해바다에 이 고래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일본인만큼 한반도인들이 고래에 대한 집착이 덜 하다.
때문에 마구잡이 포획을 하여 절멸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역사고서에는 고래의 자료가 없고 현실적으로도 일본인 보다 고래를 접하기가 쉽지 않는, 동해가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역사연속성의 괴리는 크다 할 것이다.
이것에서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지 않으면 안되는 역사 상황을 읽을 수 있으며 기록이나 눈에 띄는 유물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은 그 만큼 어느 시점 큰 변혁기에 외부의 물리적인 충격에 의해 알 수 없도록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글쓴이가 판단하기에는 조선영해 동해바다에 태산 같은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다는 사실을 빈약한 고서에서 그나마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이야기다.
동해 고래가 태산(泰山)같다는 표현은 서거정의 사가시집(四佳詩集) 52권에 나타나는 기록이다.
고래가 태산같다는 표현에 걸 맞는 고래들은 대왕고래, 큰고래, 보리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참고래, 북극고래 등 많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대로 고래가 서식하는 환경이 조성 되려면 적어도 열도일본처럼 대양을 직접적으로 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범고래나, 북극고래의 이동 통로 정도의 역할을 하는 한반도와 열도 사이에 동해가 결코 역사의 현장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반도 동해에서의 고래활동이 적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포경금지에 대한 결과라고 할 수 없는 근원에 의한 지리적, 생태환경적인 문제가 그속에 내재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멀쩡한 역사를 서양세력들이 난도질 한 후 그것을 고래 상황을 인지하려 하기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다고 해야 맞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한반도가 아닌 역사의 땅 동해에는 세계 온갖 다양한 고래가 태고적부터 들끓었다고 볼 수 있다.
그곳은 단언하는데 바로 대서양이다.
본래 일본인들은 고래에 집착이 강하다.
그것은 아메리카대륙 서부쪽에 거주하면서 삶과 어우러진 습관적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고래가 한반도 동해에서 손쉽게 잡힐 수 있는 많은 량이 포획이 된다면 지금의 독도분쟁은 지금보다 몇 십배 증폭이 되어 갈등이 첨예화되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가 있다.
한반도 동해에는 일본인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고래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일본은 지금도 연구목적으로 잡는 고래가 매년 1000 마리 이상으로 알려졌다.
연구라는 것은 개체 수를 임의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인데 속내가 보이는 이야기고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시모노세키(下關)시나 고래고기 음식이 발달한 나가사키(長崎)현 등에서는 음식 문화의 차이를 부정한다 하여 포경을 막고 있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글쓴이가 주장한 조선 영해의 동해바다에 온갖 고래가 득실거렸을 것이라고 예상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은 이글을 대신하고자 한다.
한반도 포경역사에 있어 가장 권위자라는 모학자의 흥미로운 주장에서 보면 "17세기부터 한반도에 찾아 든 이양선은 대부분이 포경선(捕鯨船:catcher boat)이었다"는 사실이다.
포경선이라 함은 고래잡이 배이다.
이 말에는 결국 조선 영해에 포경선이 많았다는 이야기며 그 포경선들은 모두 이양선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처럼 한반도 동해는 포경선이 득실거릴 정도로의 고래서식지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 오류에 의한 착각속에서도 어떤 사실을 밝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이 분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인으로써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판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특별하게 지리적 자원이 없었던 한반도에 17세기부터 해양세력 즉 해적들이 이양선을 몰고 벌떼처럼 몰려 들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서 그들의 실제 추구하였던 포인트를 정확히 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부터 서양세력들은 고래를 상업포경에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이양선은 바로 1627년(인조5년)10월에 네덜란드 3인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653년(효종4년)8월에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웨르호(De Sperwer:160톤)"가 제주도에 표착하는 것을 깃점으로 고래사냥이 성행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다.
그 이후 18세기 후반 프랑스대혁명에 임박하면서부터 프랑스함대가 출현하는데 1787년 부솔호(La Boussole:500톤)와 아스트로라베호(La Astrolabe:500톤)가 제주도를 측량하고 울릉도까지 접근하는 등 배회하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후 영국 브로이튼(William Robert Broughton)지휘한 북태평양 탐험선 프로비던스호(Providence:406톤)가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사실이 있으며 1801년에는 서양선박 정체를 알 수 없는 1척이 제주도 대정에 표착하고 서양인 5명을 상륙시키는 등 행태가 이어진다.
생각해보면 한 개의 마스트로 세로 돛을 가지는 소형 배, 슬루프형(Sloop)406톤 밖에 되지 않는 함선을 끌고 수만키로(km)를 넘나들었다고 하는 사실도 신기한 것이며 북태평양 탐험선이라고 하는 것도 탐험선이 아니라 포경선이 분명하여 그렇다면 북태평양에는 알레스카(Alaska), 알류샨열도(Aleutian Islands)에 회색고래, 큰고래, 북극고래를 포획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포경과정에서 어떻게 한반도 동래 용당포에 표착하였는지가 분명하지가 않다.
그들의 개략적인 기록을 보면 종전처럼 승무원들이 마카오에서 겨울을 나기 전에 홋카이도(Hokkaidō)의 해안을 조사했던 것처럼, 아시아(?)로 항해했고 1797년 5월 16일 오키나와 남쪽의 미야코 지마(宮古島) 산호초를 들이받아 파괴되었을 때 천우신조로 돛대가 두개인 작은 스쿠너(schooner)를 구입하였고 선장 브로이튼(Broughton)과 그의 선원들은 이 작은 스쿠너(schooner)로 동북아시아를 탐험하고 난 후 1799년 2월에 영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어떻게 천우신조로 작은 스쿠너를 구입했고 오키나와에서 어디로 구조되어 동래 용당포에 표착한 것인지도 연결되는 자료가 없고 동북아시아를 탐험을 어떻게 했다는 사실도 솔직히 알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