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한부울 2015. 7. 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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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스코틀랜드, 원과 잉글랜드 그리고 로마노프

 

글쓴이:한부울

 

1.다신교의 스코트와 일신교의 앵글과 색슨
2.스코틀랜드와 고려역사 동질성
3.십자군전쟁은 고려동경반란사건
4.고려와 스코틀랜드, 로마노프

 

한국인은 자기 조상도 모르는 호로자식 같은 민족이 맞는가?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민족인가?

때문에 필요 이상의 강박관념만을 가지고 자신들을 학대한다는 것인가?

여러분들의 생각은 객관적으로 과연 어떤 것일까?

처음부터 우리나라의 근원의 역사자체를 삼한역사라 하지 않고 일제식민지로부터 시작된 한반도 역사라고 가르치고 알렸다면 이런 수고가 왜 필요할까?

그렇지 않는가?

엄청난 세계역사인 삼한 역사를 우리민족의 근원이라 해 놓았다는 것은 우리의 과대망상증이 아니라 그들의 음흉한 역사판짜기가 잘못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세계사라는 삼한역사의 큰 그릇이 비워져 사라질 수 없다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재야사학인들에게 극도의 탐구욕을 촉발시킨 것은 결코 과대망상이라고 폄훼 또는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와 러시아 해군기, navy 해군 남색의(navy blue)

Flag of Scotland (Saint Andrew's Cross). Often informally referred to as "the Saltire".

Andrew's cross (17011924; 2001present)

 

17121917, Ensign of the Russian Navy, the so-called андреевский (St. Andrew's) flag.

A blue saltire on a white field.흰색바탕의 파란십자

 

먼저 위 두 깃발을 한번보자.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 스코틀랜드 깃발[Flag of Scotland (Saint Andrew's Cross)]과 17121917 동안 사용된 러시아해군깃발(Ensign of the Russian Navy)이다.

똑같이 A blue saltire on a white field.즉 흰색바탕의 파란십자가가 들어가 있는 깃발이다.

이것을 다르다고 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우리는 한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1.다신교의 스코트와 일신교의 앵글과 색슨

 

본 블로그에서 늘상 말한 것이지만 문제는 하나의 역사가 조각조각 나버렸다는 것에 문제점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동서양이 나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근세기에 거대한 자본을 손에 쥔 서세들의 서양우월주의 편협된 사고에 의해 자행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체제에 의한 하나의 역사는 조각조각 팬케이크처럼 나누어지거나 타고르의 시 구절처럼 수많은 담벼락을 만들고 그 사이로 종교, 인종, 지역주의, 관습에 따른 이질감을 채워 넣어 자본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을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서세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현대 경제학적인 면에서 자본증대를 산업에 한정 할 때 원가를 줄이고 생산성향상을 이루어야 하지만 자본수출이 상품수출과 다른 점은 바로 독점자본가에 의해 시장이 독점된다는 점이다.

자본 수요처를 늘리고 확대시키는 것은 이윤을 최대한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으로 경쟁을 촉발하거나 취약한 자본을 점령하여 독점하고 그것에 걸 맞게 폭리를 취하는 형식을 서세부르주아(bourgeois)들은 노렸을 것이 분명하다.

때문에 이러한 수많은 어줍잖은 이윤생성틀을 만들어야 했고 때문에 하나의 체제를 흔들어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동양문화가 일구어 놓은 역사를 극도의 역사열등감을 가진 서세들이 이에 앙심을 품고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로 확장된 스파이트 펜스(spite fence)라는 악의의 담벽을 쳤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기존 하나의 역사를 흔들어 놓는 수법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언어로 다른 사건처럼 만들고 똑같은 인물을 각 다른 언어역사사건에 등장시킴으로서 그것을 현대어로 도플갱어(Doppelgänger)라고 이름하지만 실제 유전공학인간복제가 아니라 역사문서를 그대로 복제하여 인물을 수없이 다른이름, 다른환경, 다른관습문화로 둔갑시켜놓았다는 것은 손오공마술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고려엉겅퀴(Cirsium setidens (Dunn) Nakai)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다는 식물이다.
이것을 곤드레나물이라고 등식한다.
그러나 아무리 고유종이라고 하여도 정보가 단절될 수 없을 것인데 세계식물을 관장하는 미국유전자원정보네트워크와 식물유전자원관리체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그렇다면 고려엉겅퀴는 다른 학명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브리타니아(Britannia)를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라고도 하지만 이것을 고대 로마시대때는 오늘날 잉글랜드의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섬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으니 대영영국은 잉글랜드란 공식이 성립한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브리타니아라고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이설에서 본 블로그 글을 접한 분들께서는 이에 대한 사실진위를 어느정도 인지할 수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AC 410년 로마군이 브리타니아에서 철수함으로써 이 지역은 앵글로족(Angles)과 색슨(작센)족(Saxons or Sachsens)의 무대가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게 만들고 그것에 더하여 브리티시 아메리카(British America:1607-1783)역사를 근대사가 영국 식민지(Colonies)로 정리하면서 결국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17년 유럽왕가가 해체형식을 밟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자본제국에 의해 무명무실하게 변하면서 영국인들의 정서를 핑계삼아 게르만 작센에서 앵글로 윈저왕가로 고치게 되었다고 하였지만 유대자본을 등에 업은 자본제국에 의해 정리되어야 하는 유럽왕가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과거 유럽왕가들의 정체성이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칼레도니아(Caledonia)명칭 역시 그레이트브리튼 북부 스코틀랜드의 옛이름이라 하거나 또는 로마제국의 브리타니아(Britannia)북부지역을 말하는 라틴어 이름이라 하였다.

당시 로마군이 그레이트브리튼 북부까지 침공하고 지배한 사실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부여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유럽사가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을 세계삼한역사관(世史觀)점으로는 정리단계에 있다고 할 때 사실상 동로마가 유럽에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근원적으로 세계사라고 하는 삼한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접근이 필요할 뿐인것이다.

본 블로그 글 "1.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 소제 3) 실증주의와 끼워넣기한 유럽사 편에서 말한 것처럼, 영국의 스톤헨지(stonehenge)는 1611년 삽화그림에 나타나는 곳에서 이 유물들이 근세기에 아마도 어디론가 옮겨졌다는 추론이 가능한 것을 알 수 있었고 옮겨졌다면 현재 영국 남부 윌트셔(Wiltshire)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Avebury)가 될 것임이 확신한 사실을 우리는 밝혀 본 것이다.

이런 유물이동작업 시기를 때론 1898년이라 실제로 위 글에서 밝혀진 것처럼 작업과정의 사진촬영이 세상에 낱낱이 밝혀진 1954년에 본격적으로 현재위치에 고착되었다는 의혹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을 1919년부터 특히 1950년 이후 런던 고대유물협회가 실시한 발굴을 근거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다분히 짜맞춘 순서에 의한 작업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들은 일찍이 변광현 교수가 제기한 유럽의 모든 고고학자들에 의해 1913년에 시작되었고 이집트 왕릉의 계곡에서 발굴조사 끝에 투탄카멘(Tutankhamon)의 무덤을 발견하였을 1922년때부터 크레타(Crete)와 이집트역사는 갑자기 2000년을 훌쩍 뛰어넘어 이 지역을 인류문명의 기원지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지적한 것이며 이러한 작업들은 모두가 현재 유럽대륙역사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유럽사가 결코 정상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하는 것들이다.

몰론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잉글랜드를 근거로 할 수밖에 없는 영국학자들이라는데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이다.

잉글랜드인들은 오리엔탈문화를 꽃피운 삼한역사주체가 되고자 했던 것이 틀림없다.

 

유럽사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1603,재위:1558-1603)가 죽고난 후 곧바로 등극한 제임스 1세(James I, 1566-1625,재위:1603-1625)가 1603년부터 왕국연합(Union of the Crowns)이라는 동군연합 상태였던 잉글랜드(웨일스를 포함한)의 왕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모친이 바로 메리 1세(Mary I,1542- 1587,재위:1542-1567)란 사실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다가 억지로 엮이는 듯한 결과임을 알 수 있고 특히 메리1세는 스튜어트 왕가(House of Stuart)출신으로서 당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즉 엘리자베스1세 이후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기반으로 역사가 아니면 바로 설 수 없었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청교도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에 의하여 찰스가 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처형당하면서부터 잉글랜드는 사실상 역사적으로 종지부를 찍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은 일본역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에도 막부(江戶幕府) 또는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라고 하는 막부정권(1603-1868)이 시작된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불사조처럼 재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1707)에 의해 스코틀랜드와 합병이다. 

기원전 390년에 켈트족(Celts)의 한 갈래라고 하는 골족이라고도 하는 갈리아족 즉 고구려인들은 로마를 공략하고 전 국토를 침공하려고 위협하였다는 사실과  서기 451년 아틸라 휘하의 훈족(Hun)이 갈리아에 쳐들어간 것과 역사라고 하지만 합쳐놓고 보면 이렇게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켈트인의 팽창은 이탈리아를 흔들어 반란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기독교태동을 말하고 있지만 이 켈트인들의 부각은 5세기 마치 게르만 족(노르만족)들을 복종시킨 다음 서로마를 침공한 아틸라(Attikla:434-453)의 훈족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켈트족, 슬라브족, 발트족이 사는 지역에서 곰은 동물의 왕이자 전사의 상징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단군신화가 낳은 곰족의 실체가 같다는 것은 사실상 유럽사는 우리삼한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들의 역사 한계가 자연스럽게 들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스코트족(scot)은 스코틀랜드인의 선조 게일어(Goidelic languages)을 사용하며 아일랜드 게일족(켈트)과 알프스에서 기원한 켈트족의 혼혈 민족이라고 알려지고 프랑스 북부지방의 高盧(고노, 고로) 즉 갈리아(Gallia), 골(Gaul)지역에 근거한 그들의 종교는 다신교(多神敎:polytheism)라고 알려져 태양신을 근거로 하는 환인사상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로마도 다신교를 근거로 하는 것으로 근원적으로 서양종교 즉 기독교가 하나의 신만을 신앙하는 일신교(一神敎:Monotheism)라는 것에 맞추고 있지만 종교문제에서조차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유럽사자체가 괴이하게 비춰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잉글랜드가 다신교의 스코틀랜드와 연합할 수있었다는 것은 포괄적인 역사가 아니라 일부 한정된 주체들에 의한 조작된 역사가 아닌가 하는 점을 강하게 읽을 수가 있다.

 

2.스코틀랜드와 고려역사 동질성

 

그렇다면 고려역사와 스코들랜드역사가 과연 어떻게 같다고 하는 것인가?

현재 근대사를 바탕으로 생각 할 때 고려와 스코틀랜드 역사가 김히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잉글랜드가 몽골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근대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거의 불가능하다.

한반도역사를 바탕으로 할 때 7-8차에 걸친 고려동경반란은 고려에 대한 예수회의 반란 즉 십자군원정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히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세계삼한역사찾기에서는 가능하며 또한 감춰진 이러한 사실들이 명명백백 밝혀지고 있는 것이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우리의 이러한 주장은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글, 우리 말로 엮어져 있는 역사자료가 모두 제국주의 식민지역사가들에 의해 조작된 것일뿐 세계삼한역사이론을 뒤받침할 자료가 취약하고 열악하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때문에 역사를 세부적으로 밝힌다는 자체가 용이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고 동시에 대중적으로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일부 걱정과 우려도 틀리지 않는 이야기다.

반대로 이제 그들이 기득권이기 때문이다.

 

근대사가 말하는 1603,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됨과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된다는 설정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일본역사의 막부(幕府)정권과 똑 같은 것으로 단편적으로는 그들의 의도된 역사설정이라는 점임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어쨌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같은 왕을 섬기는 하나의 나라(同君聯合)가 되었다는 것은 잉글랜드를 스코틀랜드란 역사를 통해 생성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명확하게 알게 한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는 근대사의 주요한 모든 것을 빨아 당기고 식성좋은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것이다.

1707년 연합법에 의해 잉글랜드와 합병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는 것 역시 이러한 엉터리없는 근대사를 특히 잉글랜드 학자들이 꾸미기 위한 것으로서 교묘한 자구책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잉글랜드라는 나라는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 이르러 국가생성과 멸실의 분기점을 맞이 했을 정도로 아주 위태한 나라 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번듯하게 세계를 주름 잡는 역사와 힘을 병용한 나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엘리자베스1세는 스튜어트 왕가 출신의 프랑스의 왕비이기도 한 스코틀랜드여왕 메리1(Mary,Queen of Scots-Mary I,1542-1587)를 1587년 2월 8일 참수시켜 버리고 만다.

물론 당시에 대단하지않았을 잉글랜드를 사이에 두고 한 권력투쟁한 것이지만 상징적인 것은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가 사라지게 만든 것이다.

메리1세를 제거한 엘리자베스는 처녀왕으로서 기독교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함께 한다.

때문에 후계자가 없었지만 기독교 왕이 태생한 것처럼 정적인 메리1세의 아들 제임스1세(James I, 1566-1625,재위:1603-1625)를 잉글랜드왕으로 택하고 등극하게 했다는 것인데 그 만큼 잉글랜드의 역사가 기독교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여러모로 취약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여진어와 영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6 "에서 보았듯이 윌리엄1세(William the Conqueror:1028-1087)가 1066년 1월부터 10월14일까지의 헤이스팅스(Hasting)전투에서 승리한 결과 1066년 12월 25일 영국 왕에 즉위하게 되면서 부터 잉글랜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 하였다.

정복왕이란 닉네임을 가질 정도의 힘을 가진 윌리엄1세가 잉글랜드에 노르만왕조를 세웠지만 정작 자신은 영어를 읽거나 쓸 줄 몰랐으며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생 프랑스인으로 살았다는 사실과 그의 육체조차 프랑스 땅에 묻혔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때문에 잉글랜드의 전체역사 정체성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 역사가 결코 길지 않다는 사실은 중간에 끼워넣기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로 정리되어야 마땅한 이야기다.

시작을 정복으로 한 상징적 역사이기에 끝마무리도 정복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역사에서 1917년 유럽왕가 잉글랜드에서 미국으로 역사전이되면서 동시에 프론티어(frontier)로 나타난다는 것에서 같은 맥락의 역사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요나라가 끝나고 금나라가 시작된 이야기와 비교 된다는 사실을 본 블로그 글을 통해 밝혔던 사실이지만 실제로 동양사 정복왕조 요, 금 만큼 나라 존속역사가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잉글랜드 특히 유럽사와 거의 같은 역사부류로 취급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동양사적으로도 요(遼), 금(金), 원(元)시대가 지극히 정상적인 흐름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대신 대고려 왕조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혼란시대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이 때를 무신정권시대라 한 것일게다.

초창기 잉글랜드 만들기에는 노르만왕국을 꾸미기 위해 요, 금나라를 섞어치기한 역사가 필요하였고 그 이후부터 실제로 정복왕조를 꾸미기 위해 스코틀랜드 즉 대고려를 끌어들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체제에서 하나의 역사만이 존재한 사실을 전제한다면 결코 무리한 추측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중국 즉 정복왕조를 잉글랜드와 교묘히 연결시켰다는 점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혼혈인 거란족이 세웠다 하고 키타이(Cathay, Kitay), 거란국(契丹國) 또는 카라 키탄(Kara Khitan)이라 하는 요(遼,916-1125)가 짧은 시대의 잉글랜드 헨리 1세(Henry I, 1068-1135,재위:1100-1135)와 비교된다는 것은 근대사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크다.

이후 금(金:1115-1234)나라 역시 갈족(羯族)과 연결되고, 말갈족(靺鞨:挹婁:肅愼)은 튀르크와 몽골의 혼혈인 선비족(鮮卑)은 융화된 민족인 여진(女眞)이 세운 나라로서 결국 잉글랜드 핸리3세(Henry III,1207-1272,재위1216-1272)와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서 여진어는 언어학적인 면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핸리1세와 스코틀랜드의 맬컴3세의 딸 마틸다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나고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Henry V,1086-1125,재위:1111-1125)의 황후로 있었던 딸, 어머니와 같은 이름 마틸다(Matilda,1102-1167,재위:1135-1141)를 잉글랜드 핸리1세 후계자로 세웠다는 것에서도 당시 서양사관점에서 고려와 여진의 특수한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결론에 이르러 밝혀질 이야기지만 신성로마제국은 결국 고려의 성체이다.

동시에 기독교 생성과 관련이 있는 역사가 바로 십자군원정역사이다.

1248년, 1270년 두차례 십자군원정에서 지휘한 덕분으로 성왕이라고 칭송되는 루이 9세(Louis IX, 1214-1270,재위:1226-1270)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카페왕조(House of Capet:987-1328)가 결코 다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는 어떤가?

본 블로그에서 연속적으로 발표한 것이지만 루이14세부터 루이 16세까지 조선 숙종, 영조, 정조까지 엮이고 있는 서세의 명칭이다.

이것을 아무렇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함에도 근대사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외형적으로는 불천지 원수관계같은 즉 역사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 개체로서 기술하고 있는 것도 사실상 의심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글쓴이의 판단을 하나의 역사에서 굳이 분리한 경우와 같은 이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현재 재야학자들이 주장하거나 크게 의심하고 있는 붕당(朋黨)문제에 포함된 것일게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역사는 기독교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황이라는 존재자체가 마치 동양중국천자같은 위상에서 유럽제왕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구심점으로 나타나다는 사실 또한 역사로서의 존재가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는고 유럽사와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예수회작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서 유럽사의 존재성을 의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연 연속된 역사성에서 교황존재를 이야기 할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잉글랜드가 정복왕조 원조(元朝)와 같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참으로 이상한 것은 핸리3세의 장자 에드워드 1세(Edward I,1239-1307,재위:1272-1307)는 쿠빌라이(Kublai Khan,1215-1294,재위:1260-1294)가 원나라로 호칭하기 시작한 1271년부터 재위했다는 사실이 같고 쿠빌라이의 아들 테무르(Temür Khan,1265-1307,재위:1294-1307)와의 합친 재위기간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와 몽골이 같다는 사실은 십자군과 직접적인 연관관계를 이야기 할 수 없지만 그만큼 고려전체를 지배했다는 상징성과 비교되는 것이 틀림없다.

1258년부터 헨리 3세의 실정(失政)에 불만을 품은 귀족과 성직자들은 옥스포드조례(Provisions of Oxford)를 입안하고 승인을 강요하면서 발생한 귀족(貴族)들의 반란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후백(侯伯)전쟁이라고도 하는 배런전쟁(Barons' War:1264-1267)이 일어난 사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징기스칸의 4남 툴루이 칸(拖雷,Tolui Khan :1192-1232,재위:1227-1229)의 아들인 쿠빌라이(忽必烈)와 그의 막내 동생인 아리크 부케(阿里不哥,Ariq Böke:1219- 1266)간의 치열한 골육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 충돌 후에 쿠빌라이가 승리했고 결국 1264년 아리크부케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하는 기록에서도 잉글랜드 베런전쟁과 같다 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동양사적으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는 사실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플랜태저넷 왕가(Plantagenet)의 제3차 십자군(1189-1192)을 지휘한 사자심왕(獅子心王)이란 별명을 가진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재위:1189-1199)를 이은 존왕(John,1167-1216,재위:1199-1216)시대인 1215년 귀족들이 요구한 대헌장(大憲章)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가 성립되었고 이어 헨리3세때 옥스포드의 조례를 들어 오늘날 영국의 의회(議會) 하원(下院:Lower House)생성시초라고 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서양인들의 우월주의적인 역사사고에서 기인한 엉터리없는 일방적인 기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엄연히 세계사 즉 삼한역사가 존재한 마당에 왜 의회제도가 잉글랜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져야 하는가?

(隋書)共有大事則聚群官詳議而完之[新羅傳]구당서(舊唐書)事心與衆議號和 人異則罷[新羅傳]

수서와 구당서의 신라전에서보면 화백(和白)회의는 중대 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보통 인민이 아닌 백관(百官,princes)이라는 것, 또 여기서 한 사람의 반대라도 있으면 회의의 결정은 내리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의회정치인 것이다.

동양역사가 말하는 백관과 서양역사가 말하는 귀족에서 그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원조(元朝)가 고려의 중앙정부였다면 이미 고려는 신라의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 잉글랜드는 몽골과 같다. 그렇다면 신라제도를 충분히 습득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근대사에서 잉글랜드역사로 흡수된 스코틀랜드(Scotland)는 마치 한반도역사가 이야기 하는 몽골의 종속관계라고 하던 고려(高麗)와 똑 같다.

이런 주장을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를 과대망상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것은 과대망상이라는 말을 들어도 반론을 할 수가 없겠지만 이러한 주장에 근거가 충분한 것뿐만 아니라 넘칠 정도로 많다.

잉글랜드의 헨리3세가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기 위해 시도된 야욕이 알렉산더 3세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또한 고려 역시 충()자를 제왕 시호(諡號)에 붙이게 함으로서 원나라에 종속관계를 강제하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고려 제24대 국왕 원종(元宗)때 부터라는 것은 같은 재위기간에 있었던 제왕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의 알스핀왕가(House of Alpin:848–1034)에 이은 던켈드 왕가(House of Dunkeld:1034-1286)출신으로 알렉산더1(Alexander I,1078-1124,재위:1107-1124)는 고려 제16대 왕 예종(睿宗,1079-1122,재위:1105-1122)과 연결되고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1198-1249,재위:1214-1249)는 고종(高宗,1192-1259,재위:1213-1259)과 연결되며 알렉산더3(Alexander III, 1249-1286,재위:1249-1286)는 바로 원종(元宗,1219-1274,재위:1259-1274)과 연결되는 재위년도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3(Alexander III)는 알렉산더 2세(Alexander II)의 외아들로 7세 때 왕이 되었고, 1251년 잉글랜드 왕 헨리 3(Henry III)11세 된 딸 마거릿(Margaret of England,1240-1275)과 결혼하게 됨으로서 종속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Margaret of England(1240-1275) was Queen of Scots as the wife of King Alexander III.

헨리는 곧 알렉산더3세를 사위삼은 뒤 스코틀랜드에 대한 종주권을 쥐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알렉산더는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헨리는 스코들랜드를 사위국으로 삼아 알렉산더3세를 부마로 만들면서 종속관계를 형성한다는 계산이 깔린 역사기술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왜 이런 비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식으로 비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반도 역사의 비극 이랄 수밖에 없다.

 

스코틀랜드가 당시 잉글랜드에 의해 주권을 잃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고려사정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렇게 되자 1255년 스코틀랜드 내 친잉글랜드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세력을 키워 제왕의 힘을 잃게 만들었고 2년 뒤 반()잉글랜드계가 다시 세력을 잡아 1262년 알렉산더3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왕국을 이끌었으며 1263년에 엉겅퀴와 관련이 깊은 침략방어전쟁에서 알렉산더 3세는 당시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고 있던 노르웨이 왕 호콘 4세(Haakon IV:1204-1263,재위:1217-1263)의 침공을 물리쳐 호콘의 아들 망누스 5세(Magnus VI,1238-1280,재위:1263-1280)가 1266년 헤브리디스(Hebrides)제도와 맨 섬(Isle of Man)을 알렉산더3세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까지 밝히고 있는 것은 1263년 원종 4년에 김방경(金方慶,1212-1300)이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원종의 시련은 무신정권(武臣政權)막바지로 1259년부터 1268년까지 김준(金俊)이 실권을 가졌고 1268년부터 1269년까지 친정을 하였으며 1269년 안경공 왕창(安慶公 王淐)이 실권 탈취를 기도를 했다가 실패한 바 있고 1269년부터 1270년까지 임연(林衍)이 실권을 맡았으며 1270년 임유무(林惟茂)가 잠시 실권하였고 1270년부터 1274년까지 다시 친정을 하였다는 역사기술은 당시 고려사정 또한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원종의 비 정순왕후는 최충헌(崔忠獻,1149-1219)의 아들 최우(崔瑀)의 외손녀임을 알 수 있는데
본 블로그 글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징기스칸 몽골정권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5"에서 이미 최충헌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징기스칸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역시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종주국으로 삼으려 사위를 삼았던 사실 내용과 틀리지 않는 것이다.

1272년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려던 잉글랜드의 헨리3세가 사망한 후 공교롭게도 고려에선 삼별초의 난(三別抄抗爭:1270-1273)이 수습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삼별초가 고려를 힘들게 한 세력으로서 기존 역사상식과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쿠빌라이(忽必烈,1215-1294,재위:1260-1294)가 1271년 비로서 국호를 원(元)으로 하고 중앙행정기관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였으며 '검은 자갈밭'인 카라코롬(Karakoram)에서 대도(大都)로 수도를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핸리3세의 아들인 에드워드1세(Edward I,1239-1307,재위:1272-1307)가 1272년에 등극하여 이어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에서 대도(大都)가 어디라고 했던가?

"대도(大都)와 가자미(川鰈-Platichthys flesus)가 주는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427"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 그리고 "1차려몽일본원정으로 본 쿠바와 시칠리아는 같은 위치에 있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0" 에서 북평(北平), 대도(大都:Great Capital) 캄발루크(Cambaluc)가 틀림없이 워싱톤(Washington, D.C)이어야 한다고 한바가 있다.

이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쿠빌라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307년 에드워드1세가 스코틀랜드 정복길에서 죽음을 맞이 하는 것과 같은 시기에 원조 테무르(鐵穆耳,1265-1307,재위:1294-1307)가 1307년에 죽음을 맞이 한다는 사실과도 같다.

또한 에드워드 2세(Edward II,1284-1327,재위:1307-1327)가 에드워드1세 뒤를 이어가는 것은 공교롭게도 원조(元朝)에서도 카이산(海山,1281-1311,재위:1307-1311)과, 이어 동생 아유르바르와다(愛育黎拔力八達,1285-1320,재위:1311-1320), 장남 시디발라(碩德八剌,1303-1323,재위:1320-1323)에 이어 충선왕의 정비인 계국대장공주의 아버지이기도 한 카말라의 아들 예순테무르(也孫鐵木兒,1293-1328,재위:1323-1328)까지 이어져 재위년도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여기서 더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동양사의 제왕과 서양사의 나타나는 인물을 동일하게 비교할 수 없다 하더라로 잉글랜드와 몽골(원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상 몽케보다 쿠빌라이가 뛰어났다는 것과 핸리3세보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1세가 뛰어났다는 것도 원조(元朝)와 잉글랜드(Enland)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단편적으로 또 한번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원(元朝)은 후대 명으로 이어지면서 중국화가 되었다는 것과 근세기 그레이트 브리티시와 상징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도 의미가 큰 것이다.

유럽사에서 노르만왕조를 시작으로 유럽대륙에서 중국형태로 존재한 잉글랜드 또는 프랑스로 변모한 것이고 근세기에는 프랑스가 결국 빠지면서 모든 역사사실이 잉글랜드로 집중되면서 그것이 통칭 영국이 되었고 나중에 브리티시라는 합중국이 미국에서 탄생한 결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임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있다.

 

유럽왕조로 볼 때 프랑스는 카페왕조(Capet)의 루이 9세(Louis IX)로 시작하여 분가인 부르몽왕가(Bourbon)를 탄생시키고 앙리4세(Henry IV)에서 샤를 10세(Charles X)가 사망하는 1836년까지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Norman dynasty:1066-1154), 플랜태저넷 왕가(Plantagenet:1126-1399), 랑카스터(Lancaster:1399-1471)와 요크(York:1461-1485)이어졌다가, 튜더왕가(Tudor:1485-1603)에서 엘리자베스1세로 대가 끊기며 제임스 1세(James I)로 부터 시작되는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가(Stuart)에서 네덜란드왕가 오라녜나사우 왕가(Oranje-Nassau:1689-1702)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1707년 스튜어트왕가의 앤(Anne)에서 완전히 이것조차 단절되고 더 이어질 것이 없자 비로소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란 체제아래 1714년부터 하노버왕가(Hannover)로부터 시작하게 하여 프랑스 부르몽왕가가 단절되는 시기와 같은 1837년에 윌리엄 4세(William IV)까지 이어져 끝이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프랑스가 1836년에 끝난 것이나 잉글랜드가 1837년에 끝난 것은 국가명칭만 다를 뿐이지 같다는 것이며 이후 빅토리아여왕부터 섹슨족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Herzogtum Sachsen-Coburg und Gotha)로 이 왕가가 합쳐지면서 1936년까지 이어짐을 알 수가 있지만 작센 또한 어차피 노르만왕조일뿐이다.

몽골 원조(元朝)에 고려가 귀속된 것 같은 역사기술은 잘못된 것이다.

고려(高麗)의 중앙정권의 명칭 즉 조대명과 같은 것으로서 역시 신성로마제국(神聖로마帝國:Sacrum Romanum Imperium,965-1806)과 정확하게 연결된다는 사실과 신라(新羅)는 기독교세력이 세우려고 하던 라틴제국(Latin Empire)이라는 사실 또한 엉뚱하게 남아메리카대륙이 아니라 서남부유럽을 지정하는 것도 아마도 근세기의 유럽역사학자들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3.십자군전쟁은 고려동경반란사건

 

지금까지 고려(高麗)의 심장부인 중앙정부의 동서양 변신을 여러각도로 살펴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고려(高麗)실체를 정확하게 볼차례이다.

십자군(Crusades:1096-1270)은 신성로마제국을 동질성이 잇는 것처럼 끌고 들어가려고 하지만 십자군태생자체가 서양사적으로 볼 때도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반란군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의 수학자이며 역사가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는
고대그리스, 고대로마, 고대이집트를 포함한 고대사 모두가, 중세에 일어난 사건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으며 중국(中國)이나 아랍(Alab)의 역사 모두가 17 세기부터 18 세기에 걸친 역사사실에 불과한 것으로 이와같은 역사사실들은 모두 예수회(Society of Jesus)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즉 중국이라는 실체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역사를 심취한 모택동도 중국은 별도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사라 하였다.

아랍역시 유럽사를 창조하기 위한 대역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지금까지 이야기로 알 수가 있었다.
또한 그는 트로이아전쟁(Troia戰爭)과 십자군(Crusades:1096-1270) 역시 실제가 아니라고 하였다.

더하여 몽고제국의 징기스칸(成吉思汗,孛兒只斤 鐵木眞1162-1227,재위:1206-1227)은 동양몽골인이 아니라 러시아사람이었다고 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본 블로그의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악라사(鄂羅斯)와 같은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몽골인은 몽골리안 즉 동양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거의 본 블로그에서 밝혀나가는 실체들이 하나둘씩 스스로 몸체를 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보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포멘코(Fomenko)가 말한 BC12세기 또는 BC13세기경 발생했다고 하는 트로이전쟁(Trojan War)역시 희랍신화에 나타난 것으로서 그리스와 트로이(소아시아계)의 충돌로 묘사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유럽사를 만들기 기초작업이었던 것이다.

사실상 독일인도 포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지고 따지고 보면 노르만왕조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종족명이라는 점에서 볼 때 독일인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1822-1890)은 유럽사만들기에 협조자로서 공과가 크다는 것은 결국 유럽사의 조작설에 연관된 인물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역시 현재 위치의 그리스만들기를 위한 학술연구를 바탕으로 정당화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그는 1870년부터 20년간 트로이 폐허인 소아시아의 에게 해 연안에서 5㎞ 떨어진 히살리크(Hissarlik)언덕을 발굴, 유적을 확인하고 트로이 일대도 발굴하여 여러 층에 걸친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트로이전쟁의 유적으로 판단하였으며 1876년에는 '황금이 풍부하다'고 알려진 아르고리스만(Argolis灣)기슭의 미케네(Mycenaean)고분을 발굴하여 고대 그리스 이전의 에게 해 문명(Aegean civilizations)의 계통을 밝혀 현재 위치의 그리스를 고착화한 잘못이 없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를 뒤받침하듯이 1900년부터는 영국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rthur John Evans:1851-1941)에 의해 크레타에서 크노소스의 왕궁을 발굴하면서 이를 더욱 확실하게 하였다는 것은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으로 꿰맞추기 의혹을 짙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유럽사에서 무엇을 믿을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 십자군은 신성로마제국이라고 하였지만 결국 고려의 반란군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헨리3세와 동시대에 프랑스를 지배하던 루이9세(Louis IX)는 1248년의 십자군7차원정 이집트공격과 1270년 8차원정 지중해 지배권을 획득하기 위한 튀니지공격 등, 두 차례에 걸쳐 동방(東方)으로 십자군(十字軍)을 직접 이끌었다는 사실때문에 교황으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아 성왕(聖王)이라 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틀에 집어넣고 맞추려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필 왜 프랑스의 루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Edward I,1239-1307,재위1272-1307)역시 1258년에서 1265년동안 내란에 부왕을 도왔다고 하지만 실제 쿠빌라이와 같은 1260년 시작 재위년도를 가르키는 것은 물론이고 1265년에 반대파 시몽 드 몽포르를 격파하는데에 공을 세우면서 1271년에는 십자군에 참가하였으며 원정 중에 왕으로 선출되어, 1274년에 대관(戴冠)하였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서양사는 왜 십자군을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했고 이처럼 중요하게 인용하지 않을 수 없을까 하는 것에서 사실상 필요이상으로 유럽왕실과 밀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게 한다.

즉 우리 사서에 홍모번(紅毛番)이라 하던 세력이 만든 유럽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근원 즉 뿌리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양을 누비던 비주류에서 막되먹은 해적출신들이 무슨 역사가 필요했겠는가? 

막말까지 해본다.

십자군(十字軍;croisade)이라 함"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Deus lo vult"라는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의 호소로 조직된 기독교적인 성향을 강하게 띤 군대를 가리킨다고 설명되어 있다.

교황이 과연 당시 그런 오묘한 발언을 했다고 한편으론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때문에 그러한 발언을 했을까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감행된 중세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국가들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 대항하여 성지(聖地)예루살렘을 만들고 그것을 탈환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설정하여 지속된 것처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을 냉정하게 따져볼 때 즉 아랍사를 통해 유럽사를 만들려 했다는 의혹이 없지 않다.

본 블로그 글 "코리아지협(whilst the Isthmus of Corea) http://blog.daum.net/han0114/13203353"에서 에루살렘을 온두라스라고 한적이 있다.

왜 기독교인들이 에루살렘에 목을 메는가?

사실 에루살렘이 중동에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쫓겨났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하던 땅이라고 하여 신성하다고 하였다.

우리의 역사찾기와 비슷하게 들리지만 그들이 찾아야 했던 역사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과거 하나의 체제에서 중국이라던 곳은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는 사실은 본 블로그를 통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독교가 가장 전해지지 않은 지역이라고 알려진 10/40 창(10/40 Window)이 가르키는 곳이 바로 중국이며 그곳에는온주(温州)라는 온두라스(Honduras:深邃)가 있었다는 것으로서 특히 기독교인들이 가장 탄압이 심했던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이곳은 과거 난민들이 집거한 곳으로서 근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국이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접근된다.
절강성 온주를 중국의 에루살렘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십자군이 활동한 곳을 보면 직접적으로 성지와는 관계없는 리베이아반도의 레콩키스타(Reconquista)나 동유럽에 파견된 동방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원정을 감행한 북방십자군, 이단에 대한 알비 십자군(Albigensian or Cathar)등 이것들은 유럽사를 포괄하는 광역의 역사기술임을 알 수 있는데 마치 정복자의 유럽대륙 어느곳을 가리지 않고 정복행선지와 똑 같다.

그들은 실제로 에루살렘탈환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유럽대륙에 그들의 흔적만들기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통계숫자에서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십자군의 확고부동한 신성한 취지와는 다르게 십자군측이 예루살렘을 확보한 기간은 1099년에서 1187년과 1229년에서 1244년 합해 133년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에루살렘은 진정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왜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이미 수천년을 지배한 땅이라면 그들이 역사근거지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후 20세기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게 됨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이 짧은 시간을 지배했다고 여기고 있느니 참으로 이해가 힘든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학자 포멘코의 주장을 빌리지 않다 하더라도 결국 존재하지 않았던 유럽사를 끼워넣기하기 위한 궁지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부족한 그 무엇을 에루살렘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십자군에 대해 명쾌한 답을 이미 본 블로그 글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494"에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정권분리 또는 이탈에 이어 새로운 정권 창립을 위한 반란”이란 뜻의 십자군 동원이 있었다는 것은 결국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인 경주민란임을 알 수 있었고 민란은 전후 6,7차에 걸쳐 일어났다는 것도 십자군 원정횟수가 같은 것이며 그 중에서도 고려 제20대 국왕 신종(神宗,1144-1204,재위:1197-1204)시기인 1202년(신종5년)에 신라의 부흥(復興)을 외치면서 경주(慶州)에서 일어난 농민군(農民軍)의 난(亂)이 유명하다고 알려진 것도 십자군 활동과 거의 같은 것이다.

십자군이 어디서 태동되어 모집되었다는 것도 불분명한 것으로 온 유럽대륙을 휩쓸었다는 것이 정론이지만 그것은 밝힐 수 없는 불투명한 것이다.

경주민란은 영어자료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인데 1190년부터 1204년까지 비잔티움제국의 반란과도 일치하며 거의 정확하게 3차십자군전쟁(1189-1192), 4차십자군전쟁(1202-1204)과 일치한다.

또한 아나톨리아(Anatolia) 북서부에 있는 타르시아(Tarsia)에서 바질(Basil Chotzas:1190–1204)이라는 현자(智者)의해 정권분리 또는 이탈에 이어 새로운 정권 창립을 위한 반란이라 하였고 이는 결국 정확하게 제4차 십자군 전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십자군을 빙자한 역사음모는 포괄적이라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유럽사 반란사실은 신성로마제국 지배하에 있었던 그리스에 대한 유럽인들의 불만에서 표출된 것으로 이해되며 그곳에 라틴제국을 역사적으로 건설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지만 결코 기독교국가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처음 십자군원정 형태가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us PP. II,재위:1088-1099)에 의해 태동되었다 하였고 피에르(Pierre l'Ermite:1050-1115)라는 광신도를 이용하여 1096년에 모집된 군중십자군(People's Crusade:平民,農民)을 교묘히 전쟁을 선동했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로마교황청은 세계사에서 일단 비주류세력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와같은 행위는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Heinrich IV,1050-1106,재위:1084-1105)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1세(Alexius I,1048-1118,재위:1081-1118)가 동맹을 맺을 것을 우려한 교황이 강박관념에 의해 십자군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고려 15대국왕 숙종(肅宗,1054-1105,재위:1095-1105)은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4세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위 국기는 정상적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본 블로그 글 "붉은 십자기(red cross flag)는 조선(朝鮮)깃발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58 "에서 붉은십자기는 삼한깃발로서 조선 이후 대한제국 깃발일 가능성을 이야기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어디로 보았는가?

중앙아메리카이다.

대동아전쟁시 만주는 대한제국에 소속된 영역임을 알 수가 있다.

 

4.고려와 스코틀랜드, 로마노프

 

앞에서 말하길 고려엉겅퀴(Cirsium setidens (Dunn) Nakai)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란다는 식물이며 이것을 곤드레나물이라고 등식한다고 하였다.

아무리 한반도에서 난다는 식물이라 할지라도 학명이 있다는 것은 근거가 있다는 것으로서 당연히 세계식물을 관장하는 미국유전자원정보네트워크와 식물유전자원관리체계에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고려엉겅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사실을 밝혀보았듯이 스코틀랜드는 고려가 확실하다.

스코틀랜드에는 국화로 엉겅퀴가 있고 이것이 상징이며 가장 오래 된 식물이라 하였다.

이것을 스코니시엉겅퀴라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것은 본 블로그 글 "엉겅퀴(Cirsium:)와 스코틀랜드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6"에서 이미 부족함이 없도록 살펴본 것이다.

글쓴이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삽주(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와 엉겅퀴(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를 동서양 분리시켜 아예 고려엉겅퀴에 실존하지 않았을 인물 나카이(Nakai)를 시도때도 없이 마구 붙여 한반도 고유종으로 만들면서 곤드레나물이라고 하고 실체를 감추어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가 고려라는 것을 밝혀지면 켈트인도 고려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나마 목숨 연장 줄을 스코틀랜드에 걸고 있는 잉글랜드가 역사가 한번에 여기서 박살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약한 추측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핵심이다.

마치 고려가 왜구 침략에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처럼 1263년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3(Alexander III)는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여러 섬들을 지배하고 있던 노르웨이 왕 호콘 4(Haakon IV)의 침공을 물리쳤다는 사실과 김방경이 왜구를 격퇴한 사실과 정서적인 문제까지 일치한다.

노르웨이 왕 호콘4세는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임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몰래 맨발로 걸어가다가 스코틀랜드 엉겅퀴를 밟고 아픔의 충격과 고통소리에 자고 있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을 깨우게 되면서 결국 침입자들을 물리쳤다는 사실에서 국가를 보위한 전설의 꽃이며 구국의 꽃으로 숭앙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현재 스코틀랜드의 꽃(Flower of Scotland)이라는 노래에도 국화 엉겅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거의 수호신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3(James III,1452-1488,재위:1460-1488)의 통치 동안인 1470년에 발행되었던 은화에서 이 엉겅퀴 꽃 위에 왕관이 씌워져 있다는 것은 이를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본 블로글 "엉겅퀴(Cirsium:)와 스코틀랜드"에서 밝혀듯이 엉겅퀴의 대부분이 북아메리카대륙을 근원지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스코틀랜드와 고려는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깃발은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란 문양을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죽은 후 교회에 의해 시성(諡聖)이 된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1세기 초에서 기원후 1세기 중순 안드레아(그리스어: Ανδρέας 안드레아스) 즉 남자다운 또는 기독교의 사도를 말하거나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베드로의 동생이라고 상징되는 것이라 하였다.

또는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Andrew the Apostle:1st century-1st century AD)로 훗날 기독교의 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설명도 존재한다.

상징물은 그물과 물고기 그리고 스코틀랜드 깃발처럼 X자형 십자가이며, 어부·생선장수·스코틀랜드·러시아의 수호성인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위키자료의 설명이다.

 

                   스코틀랜드 해군깃발(A model of the Great Michael in the Royal Museum)

 

위 해군함은 바로 뉴헤이븐 선창(Newhaven dock)에서 1507년에 건조하고 돛대가 3개가 있는 캐럭(carrack)1000톤급 전투함으로서 300명의 선원을 태운 아키앤젤 미카엘(Michael Archangel)호의 모형이다.

이것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함선으로서 해군 깃발에서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을 걸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또한 해군함을 건조한 선창이었던 뉴헤이븐은 1638년 청교도들이 건설한 무역항으로서 현재 미국 북동부 해안 코네티컷(Connecticut)주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상 이렇게 될 때 활동무대가 전부 북아메리카대륙 북동부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 깃발은 이미 16세기때부터 스코틀랜드의 해군 깃발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과 별도로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은 또한 러시아의 수호상징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릴 놀라게 하는 것은 러시아라고 알고 있는 로마노프왕가(House of Romanov:1613-1917)의 해군 깃발에서 세인트 엔드류스 크로스(Saint Andrew's Cross)문양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등은 곧 스코틀랜드와 로마노프왕가가 절대로 다르지 않을 것이란 역사성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이것에 대한 사실의 역사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러시아라고 하는 로마노프왕조에서 공교롭게도 제왕이르에서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3(Alexander III)이름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로마노프왕조10번째 군주 알렉산드르 1(Alexander I:1777-1825,재위1801-1825)12번째 군주 알렉산드르 2(Alexander II:1818-1881)가 있으며 13번째 군주 알렉산드르 3(Alexander III:1845-1894,재위:1881-1894)까지가 바로 그것이다.

로마노프왕조의 알렉산드르3(Alexander III)는 바로 불운한 군주 니콜라이2(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재위:1894-1917)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처음 니콜라이2세의 군주문양 역시 바로 오리엔탈 상징성이라고 하는 용()문양이었다.

이것의 결국 합치점은 바로 대고려(大高麗)이며 고려가 이들의 역사주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 알다시피 로마노프왕가(House of Romanov:1613-1917)는 본래 용()을 문장으로 하는 것임을 알 때 현재 게오르기(Georgi)가 위 로마노프왕가의 상징인 용을 창으로 찌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근세기 레닌과 스탈린이 점령하에 변이되고 왜곡된 문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가 다음 준비한 글 “13). 대비달자 악라사와 대한제국을 여러분께서는 자연스럽게 접하겠지만 노브로고로드(Veliky Novgorod-Novgorod the Great)와 폴란드가 로마노프왕조와 얼마나 밀접한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노브로고로드나 폴란드 모두가 슬라브족이라고 설명된다.

 

                              슬라브 인의 역사적 기원과 이동[HoAth;그림참조]

 

위의 글을 잠시 보면 습지와 소택지가 있는 프리페트(Pripet)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 비슬라(Visla), 오데르Oder), 엘베(Elbe), 부그(Bug)강 상류를 포함하는 더욱 광대한 지역이 원시 슬라브 인의 최초의 요람지라 하였고 이곳에서 민족적 형성을 이루었으며 차츰 인도유럽어족에서 분리해 나간 것으로 본다고 하였다.

물론 습지와 소택지로 말할 것 같으면 북유럽보다 북아메리카대륙 오대호 근방이 더 크고 넓다.

때문에 슬라브의 근원지를 북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북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또 이 지역에서 슬라브 인은 석기시대를 거친 후 기원전1300년경부터 시작된 루사티아 문화(Lusatian capitals)를 이어받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고트 인들이 슬라브 부족들을 통제했다는 사실에서 350370년까지 고트의 왕들은 단명했던 고트제국을 세우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하기 직전 고대이란인 사르마티아(Sarmatia)를 공략하여 패배시켰으며 여기에 속해 있던 슬라브 인들 중 일부는 고트족에 복속되었거나 일부는 북으로 이주하여 미래의 노보고로드(Novogorod)지역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역사근원은 9세기에 등장한 동슬라브계(East Slavic)의 키예프루시(Kievan Rus:8821283)에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근세사는 말하고 있는 것에서 볼 때 결국 1240년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拔都,Batu:1207-1255)가 통치하던 몽골계타타르인 킵차크한국(Kipchak Khanate:1243-1502)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소멸했다는 사실에서 잔존성을 희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슬라브족이 잔존해 있었을까? 의구심이 없지 않다. 

동시에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러시아의 수학자이며 역사가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가 주장한 몽고제국의 징기스칸(成吉思汗,孛兒只斤 鐵木眞1162-1227,재위:1206-1227)은 동양몽골인이 아니라 러시아사람이라고 한 사실을 상기해야 할 부분이지만 이들을 결코 슬라브족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분명하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슬라브족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 북유럽일 것 같지만 본래 슬라브족이 근거하였던 곳은 북아메리카대륙을 이야기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지만 결국 소멸운명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엉겅퀴문제를 시작으로 살펴본 결과 스코틀랜드와 로마노프왕조는 같은 뿌리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역사의 연속성은 고려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안타깝지만 고려에서 끝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최소한 1941년까지 존속했을 고려(高麗)가 바로 대한제국으로 남아 서세와 최후일전을 치룬 역사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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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발라고구려 선생님"의 조언으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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