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버(beaver)로 본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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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버(beaver)로 본 근대사
글쓴이:한부울
소제:비버로 본 유럽과 북아메리카는 같은 역사영역일 수밖에 없다.
Ⅰ.
비버를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정리하고 보아야 할 원칙이 있다.
그것은 북아메리카대륙과 유럽대륙의 지명이 혼합되어 마구 섞여 있다는 사실과 지금은 각 대륙별로 지명이 분리되어 있지만 유럽지명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옮겨가지 전에 지명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즉 많은 유럽도시의 이름과 동일한 지명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엄청나게 많지만 한결같이 뉴(New)를 앞에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 뉴(New)가 지명앞에 붙어 있다는 것은 본질의 역사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실제 근원적으로 따질 때 뉴(New)는 유럽지명 앞에 붙어야 할 단어이다.
유럽의 역사가 있었기에 북아메리카대륙의 역사가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것은 근세기에 거꾸로 뒤집어진 것이다.
즉 유럽지명이 그러하듯 유럽인들은 본래 북아메리카대륙에 거주한 세력들임을 알 수 있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 행세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자금이 그들에게 필요했고 근세기 삼한의 보루였던 대조선이 허망하게 해체됨과 동시에 그들은 비로소 북아메리카대륙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먼로독트린(Monroe Doctrine)을 바탕으로 북쪽을 장악한 화이트(white)들에 의해 유럽서양인들은 유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한 예로 1666년에 발생한 런던대화재사건은 그 이전런던역사를 도저히 알 수 없도록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알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자신들조차도 누구인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그들은 많은 시간동안 바다에서 해적신분으로 허송세월을 보내야 했으며 습기가 차 눅눅한 섬에서 벗어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17세기 황금시대라고 하는 시기에 그들의 근거지로서 활동하던 지역은 바로 카리브해도서라는 것은 문신처럼 남아 있다.
그곳에서 잡다한 유럽서양인들의 세속적인 역사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해적출신인 유럽서양인들은 그곳에서부터 그렇듯 어렵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 하나의 체제에서 그들은 열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해적신분을 벗어던진지 오래이고 하나의 체제, 하나의 역사가 아닌 수많은 조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경제원리로 파생된 자본을 최대한 소유하면서 그것으로 조각들을 지배하고 있지만 이미 너무많이 갈라져 곳곳에서 갈라진 틈사이로 파열음만 크게 들릴 뿐이다.
본래 인류역사는 혼자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고민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삼한역사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가 그렇다.
그러한 깊은 사상을 깡그리 뭉게버리고 해적이란 신분을 세탁하면서 점잖게 정장을 차려입혀 그들에게 제독이니 사령관이니 금색딱지를 붙이고 또는 분에 넘치게 작위가 내려지게 하는가 하면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거금을 들여 초상화를 마구 그려대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러한 그림들이 지금 세계사를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작업을 다 끝마치는데는 1918년부터 기산해도 불과 100년이 필요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Ⅱ.
백과사전을 보면 비버를 “바다삵”이라고도 한다.
수중생활에 적응되어 있으며 댐(dem)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고 독일·폴란드·프랑스·노르웨이·러시아·몽골 등지에 분포하는 유럽비버(Castor fiber)와 알래스카·캐나다 및 아메리카 북부에 분포하는 캐나다비버(Castor canadensis)또는 아메리카비버라고 하는 2종류가 있다 하였으나 이 두 종류는 학자에 따라 동일종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형태와 생태가 비슷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그렇다면 유럽비버나 아메리카비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같은 종이라고 판단을 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서양학자들은 생태적으로 본래 것을 필요이상 분리하고자 하는 습성에 기인한 것이라 할 때 이러한 학명분류상황에서도 그들의 습성적인 주장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분류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분류한 사실은 숨길 수가 없다.
본래 비버(beaver)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서식하는 두종의 설치류를 몽땅 합해 칭하는 것으로서 비버라는 단어는 인도 게르만 공통 고대어, 조어(祖語)로서 로마어로 청동과 윤기를 뜻하고 프랑스 고대어 비에브르(bièvre) 혹은 셀틱어 베프로스(befros)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며 12세기들어 프랑스어로 비버(속명:Castor)가 되었다는 어원을 알 수가 있다.
분류체계학상 쥐목 또는 설치목(囓齒目:Rodentia), 비버아목(河狸亞目:Castorimorpha)으로 나뉘고, 다시 1820년에 비버과(河狸科:Castoridae)로 나누어지면서, 비버속(河狸屬:Castor)이 된 것이다.
비버과(Castoridae)의 유일(惟一)속(屬)에 비버속(Castor)에는 단 2종(種)이 속해 있는데 유럽종(種:Eurasian Beaver)으로 알려지고 린네가 명명한 ‘Castor fiber Linnaeus,1758’ 학명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미국종(種:American Beaver)으로 알려진 ‘Castor canadensis Kuhl,1820’학명이 그것이다.
비버의 특징적인 형태적으로 보면 몸길이 60-73㎝, 꼬리길이 33-44㎝, 몸무게는 20-27kg 정도이며 몸 빛깔은 밤색에서 옅은 검은색까지 변화가 많고 외형은 거대한 땅다람쥐(gopher)와 비슷하지만 귀는 작고 꼬리는 배의 노와 같이 편평하고 비늘로 덮여 있고 뒷발에는 물갈퀴가 발달되어 있으며 또 머리는 넓적하고 턱이 크면서 강하고 둥근 귀와 작은 콧구멍은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굳게 닫을 수 있으며 눈에는 세 개의 눈꺼풀이 있고 투명한 속눈꺼풀이 아래로 내려 있기 때문에 물속에서도 앞을 볼 수 있으며, 육지에서는 나무를 자를 때 날카로운 가지에 눈이 찔리지 않게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였다. 비버는 시력이 좋지 않지만 예민한 후각과 청각을 이용하여 위험에 잘 대처하고 이빨은 스무 개인데, 앞니가 매우 강하여 지름이 30㎝인 나무를 10-15분 내에 갉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특성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한어자료에 보면 비버를 하천너구리의 하리(河狸) 또는 바다너구리의 해리(海狸)라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특히 하천 가까운 곳에 있는 나무를 갉아 넘어뜨린 다음 쌓인 흙이나 돌을 첨가하여 댐(dem)을 만드는 특성이 있으며 댐의 높이는 일정하고 댐의 길이는 20-30m가 보통이나 때에 따라서는 650m나 되는 것도 있다 하였다. 보금자리는 완성된 못의 중앙에 대체로 있는데, 나무·돌·흙 등으로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보금자리는 수면보다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며 규모가 커서 사람이 똑바로 서서 들어갈 정도의 것도 있다 한다. 그리고 큰 하천이나 늪에 사는 개체들은 늪 기슭에 터널을 파고 그 깊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출입구가 항상 수면 밑에 있게 하여 외적침입에 대비하는 것에서 아마도 비버의 이러한 철저한 습성을 어지럽고 살벌한 세태에 함부로 사는 인간들이 배워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河狸:Castor, 海狸, 海騾
科學分類
界: 動物界 Animalia
門: 脊索動物門 Chordata
綱: 哺乳綱 Mammalia
目: 囓齒目 Rodentia
亞目: 河狸亞目 Castorimorpha
科: 河狸科 Castoridae Hemprich, 1820
屬: 河狸屬 Castor Linnaeus, 1758
[1]Castor fiber Linnaeus, 1758 Eurasian Beaver
[2]Castor canadensis Kuhl, 1820 American Beaver
각 학명 분포지를 보면 [1]Castor fiber Linnaeus, 1758 Eurasian Beaver 학명은 유럽비버인데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디스커버리(Discover life)분포지도에 유럽대륙 전역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고 [2]Castor canadensis Kuhl, 1820 American Beaver 학명은 보다시피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 분포지도에서 북아메리카대륙 전역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비버가 북아메리카대륙 북부를 한정한 것이 아니라 전역에서 서식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유럽종(種:Eurasian Beaver)이 서식하는 파트별로 보면 프랑스 동부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론(Rhone)강, 북해로 흘러드는 독일의 엘베(Elbe)강, 노르웨이 남쪽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를 흘러 발트해(海)로 들어가는 네만강(Neman River),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남서부로 흐르는 드네프르 유역(Dnepr Basin)과 러시아의 보로네시(Voronezh)에 서식하는 것으로 자료에 나타난다.
반면 미국종(種)은 알래스카, 캐나다 및 아메리카 북부에 분포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지금은 북아메리카대륙 전 지역에 서식하고 있다는 것임을 데이터 자료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 종류는 학자에 따라 동일종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형태와 생태가 비슷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본래 북아메리카대륙 서식하는 종을 유럽인들의 역사가 만들어지면서 이 원종이 유럽대륙으로 교묘히 이식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한 근거는 이것뿐만아니라 여러생물표본분류에서 돌출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본 본래 유럽인들의 활동영역이 카리브해라고 하였으며 중앙아메리카와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전진기지로 삼아 해양세력을 키웠다고 보는 것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청교인들이 유럽에서 쫓겨 1620년에 메사츄세츠(Massachusetts)의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것을 역사로 하듯 유럽에서 쫓겨간 사실도 간단하게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다음 글에는 여진족의 행방찾기가 이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Ⅲ.
그렇다면 17세기에 남획이 될 정도로 비버가 어떤 이유로 유명해졌을까 궁금해진다.
물론 구석기시대부터 인류의 의복재료로 한 모피(毛皮:fur)산업의 발달을 들 수가 있다.
특히 당시에 비버모피의 질이 뛰어나 선호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털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자연갈색빛을 띠고 있으며 촉감이 부드러우면서 질겨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도 캐나다에서 나는 비버모피는 품질이 우수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버라고 하면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산이 제대로 라는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은 유럽서양인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서양인의 역사에서 산출된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시아동양인인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분명 모피산업의 시발은 중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근거가 아예들어나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소리다.
세계삼한역사는 다 무엇인가?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사실들을 전부 유럽서양인역사로 바꿔치기 하였다는 이야기다.
현재 알려진 세계사 전반에 걸쳐 그런 현상이 나타나지만 유럽인들의 역사는 그만큼 아시아동양인 역사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아시아동양인 역사에서 유럽서양인역사를 능가 할 수 있다는 징기스칸 조차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지고 보면 러시아인쪽에 가깝다고 나오기 때문에 코카서스인종(Caucasoids)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모피산업발달에서도 중국이 시초였음에도 그러한 사실은 현재 증빙될 수 없을 만치 역사적 위치에서 번계(蕃界)로 빠져 있다.
즉 중국이 위치할 곳에 현재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현재 동아시아대륙에 위치한 신중국은 중화를 주창하는 모순을 낳고 있는 것이다.
당시 생물하나 발견하는 것에서도 유럽서양인들이 없으면 안되었고 세상 어떤 형태의 사건에도 유럽인은 있어도 아시아동양인은 그자리에 없다는 이상한 사실이다.
유럽서양인들은 공격적이지만 아시아동양인은 방어적이 되어야 했고 유럽서양인들이 파괴적이면 아시아동양인은 수세적일 수밖에 없었던 틀이 도대체가 역사 균형이랄께 없는 전혀 맞지 않는 언바란스가 생긴다는 사실에서 잘못된 역사라는 것을 재삼 지적하는 것이다.
현재 근대사는 도저히 균형이 맞지 않는 어딘가 뒤틀어져 있다는 느낌을 항시주고 있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이러한 현상은 원초적으로 모든 역사에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지 않았던 것을 근세기에 유럽서양인들에 의해 억지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 뒤틀림인 것이다.
이러한 뒤틀림현상이 근원적으로 근대사가 많은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이며 기본틀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확하게 확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본 블로그 글 "나복(蘿葍)이 난 나주(羅州)는 캘리포니아 http://blog.daum.net/han0114/17050712"에서 언급했듯이 캘리포니아(California)를 처음발견한 역사에서도 "처음 유럽인(first European)"이란 단어와 함께 시작하는 근대사는 1542년 포르투갈인지 스페인인지 알 수 없지만 탐험가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Juan Rodríguez Cabrillo:1499-1543)가 샌디에이고 만(San Diego bay)을 여행하였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적고 있다.
당시 여행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였던 것인가?
단지 기록을 남겨두었다는 이야기임에도 이처럼 역사로 둔갑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중요한 무엇을 그들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아시아동양인도 그와 같은 기록을 수도 없이 남겨두었을 것인데 그들이 근대사를 주도 하면서 빼버렸거나 없애버렸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이긴자의 역사 바로 그 자체를 질타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록이라 할지라도 단 하나 만의 기록으로 검증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을 역사기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적기록이 기록인가?
유럽서양인들이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새로운 땅에 왔던지 간에 어디든지 들이 닥쳤다고 하면 그것이 최초의 역사가 되었다.
이런 형태의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동양역사가 아니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당치도 않는 이야기다.
당시 유럽인들의 역사는 매우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애초부터 모든 사건들을 식민화란 도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조건 우월하다는 도식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기존 역사가 어떤 역사이든간에 그들은 꼴난 신식무기를 조악하게 들고 나서 무조건 굴복시키려는 도식인 것이다.
참으로 안하무인 무법천지 말 그대로의 유아독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그들은 탐험정신, 개척정신이라고 미화한다.
역사에서 상대방 역사를 배려심이나 존경심을 추호(秋毫)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오직 식민지화란 틀속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거 역사가 어떻든간에 상관하지 않고 그 틀속으로 당연히 기존 역사가 들어가야 하고 기존 역사는 그러한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만들어 그 과정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불합리함을 미화하거나 정당화 하는 식으로 만든 것이 근대사이며 신대륙사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살인을 하여도 떼 강도짓을 했어도, 또 부녀자를 강간하고, 가진 것을 약탈하거나 집단학살까지하는 극악무도 짓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탐험에서 일어날 수 있는 과정이어야 하고 개척을 하려면 그와같은 조건은 감수해야 한다는 식이었으니 그들의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은 이미 인류에게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큰 짐을 지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악행을 마구 저질렀음에도 그들이 남겨 둔 기록만을 근거로 탐험가, 항법사, 지도제작사로 둔갑시켜 본질을 미화하고 정당화하였으며 부지런히 틀에 맞게 편집까지하면서 오래동안 남을 책을 만들어 오늘날 근대사를 완성시키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취급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
때문에 근대사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탐욕의 역사이고 도적질과 해적행위기록의 역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Ⅳ.
처음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세인트로렌스 벨리(St. Lawrence valley )에서 발생한 비버전쟁(Beaver Wars)이라는 것도 보면 1535년 캐나다 이름을 명명한 프랑스의 항법사·탐험가라고 하는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1491-1557)가 1,865여개의 섬으로 형성된 세인트로렌스강(Saint Lawrence river)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비버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가 무슨재주를 부렸는지 알 수 없지만 펜실베이니아, 온타리오호(Lake ontario), 이리호(Lake Erie)부근에 거주하던 이로쿼이족(Iroquois族)을 이용하여 오늘날 퀘벡인 스타다코나(Stadacona)와 오늘날 몬트리올인 호첼라가(Hochelaga)를 점령하면서부터 비버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비버전쟁은 한마디로 프랑스인이 인디언부족들을 이간질 시켜 싸움을 붙인 것인데 비버쟁탈전이라는 것이다.
유럽서양인들에게 비버를 팔게 되니 총도 생기고 먹을 것도 생겨 비버 쟁탈전이 부족간에 발생하였다는 초보적 욕망에 의한 스토리다.
그들의 역사에서 당시 인디언들은 어리숙하기 때문에 유럽서양인들이 하자는대로 언제든지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하는 역사구성원으로 마음대로 기술한 것이다.
원주민으로서 수천년을 함께 함 땅, 조상이 물려준 생명보다 더 귀한 영토를 유럽서양인들이 살상무기인 총을 주고 진귀한 물건을 주고 먹을 것을 준다고 그냥 넘겨 줄 정도로 원주민역사처리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진실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서양인들이 13개주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모두 이런식으로 돈을 주거나 무기를 주고 영토를 차지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인디언은 하나의 서양역사를 만들기 위해 세워놓은 토착적, 원주민이란 상징성에 불과하게 만들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유럽서양인들은 괜히 남의땅에 들어가 이처럼 싸움을 붙이고 이간질 시키며 갖은 악행을 저질러 놓고 뒤 구멍으로는 챙길 것은 다 챙겨 오늘날 그들이 되었다고 하기에는 부끄럽고 추악한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미 그들의 역사에는 도덕이란 단어는 찾아 볼 수 없는 깡패같은 역사일뿐이다.
그러니 지금도 도처에 깡패짓만 활개를 친다.
그러한 무도한 깡패짓을 당시 식민지화정책이라고 하여 그들은 정당화한 것이다.
프랑스가 세인트로렌스를 식민지화(植民地化:colonization)하기 위한 전초전성격이었다는 것이지만 서양역사에서 프랑스라고 하면 바로 조선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그들이 이렇게라도 역사를 엮을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조선에서 벌인 동북면 토벌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동쪽과 오대호(五大湖:Great Lakes)남부지역에서는 100년 이상 걸친 전투가 계속되었다고 하였으며 프랑스 탐험가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1567,1570-1635)은 1608년에 세인트 로렌스 강 타두삭(Tadoussac)에 도착하고 그 강을 따라 살고 있는 휴론호(Huron)의 와이앤도트족(Wyandot people)에 합세하여, 뉴욕식민지 북부에 사는 이로쿼이족(Iroquois族)과 맞섰다고 하였다.
이로쿼이족은 배반한 프랑스를 격렬하게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대신 1626년 무렵 허드슨 강(Hudson River)을 거슬러 온 네덜란드상인들을 교역파트너를 삼게 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은 이로쿼이족의 모피를 가지면서 총과 도끼, 칼등을 맞교환하였으며 이로쿼이족은 이렇게 공여받은 무기를 이용하여 1650년대에 시작된 비버전쟁에서 휴런(Huron)과 북서부영토(오하이오:Ohio)서부의 인디언 부족들을 거의 축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야 할 것은 병자호란 이후 동북면에서 여진족의 조선 침공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실제로 없어서 없었는지 아니면 여진족과 병자호란의 주역인 청(淸:Qing)과 같아서인지 밝혀야 한다.
정작 이로쿼이족은 이렇듯 어렵게 축출한 땅 켄터키(Kentucky)와 오하이오(Ohio)을 공백지대로 남겨두고 다시 동북면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무리 희박한 영토개념을 가진 인디언이라고 하지만 이해가 될 수 없는 이야기이며 무엇때문에 이런식의 어리석은 영토관리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근대사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남겨둔 공백지대와 이로쿼이족이 들어간 곳까지 대조선관할 지역인 동북면 함경도(咸鏡道)지역이 아닐까 한다.
1655년 이후부터 이로쿼이족은 영국과 교역을 할 수 있게 되는데 1664년에는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가 영국함대에 점령되면서부터 영국령 식민지 뉴욕으로 바뀌었으며 1670년 캐나다 북동부에 있는 얕고 넓은 만, 허드슨 베이(Hudson Bay)지역에 비버 등의 모피교역을 위해 1670년 5월에 잉글랜드 칙허회사인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 's Bay Company)가 설립되면서 비버의 본격적인 포획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로쿼이족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과 차례로 교역을 한 인디언이 된다.
[루퍼츠랜드Rupert's Land]
Ⅴ.
그렇다면 당시 유럽서양인들에게 비버가 인기 야생동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냥감은 설치류 중에 가장 큰 비버였다 한다.
유럽인들에게 17세기 당시 유행한 패션은 바로 비버햇(beaver hat)이란 모자란 것을 알 수가 있다.
작은 모자를 때때로 비버킨스(beaverkins)라고도 하였는데 17세기때 미국남녀사이에 비버햇(beaver hat)이 급속히 유행하여 모자를 만들 수 있는 모피가 부족현상이 생기면서 가격이 앙등하게 되자 일반대중들이 감당할 수 없어 점차 수요가 감소하게 되지만 그러한 기조는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때는 이 비버모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옥내에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대중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당시 청교도(淸敎徒:Puritan)들이 사용한 푸리턴 모자(puritan hat)도 비버모피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따지고 보면 피복에 관한 문화가 발달하여 모피를 피복에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BC1000년경 바로 중국에서부터이고 그로부터 약200년 뒤에 비로소 유럽에 모피가 도입되었다 하였으며 그때도 모피는 인도(印度:India)에서 중동(中東:Middle East)으로 들어가고, 점점 전 유럽에 퍼졌다는 것인데 세계삼한역사관점의 흐름상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에서 시작하여 중부, 서부를 거치고 다시 따뜻한 텍사스, 캘리포니아를 거쳐 중앙아메리카대륙으로 들어가는 코스와 일치하는 것이다.
지금은 알려지길 이러한 모피산업발전 루트가 중국, 유럽, 인도, 중동 이렇게 대륙이 구분되지만 당시는 아메리카대륙에서 모두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가 있다.
중국은 18세기에 모피사용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앞선 나라이었다고 하고, 모피의 감식능력도 우수하였다는 것을 보면 삼한모피산업발전과 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중국은 삼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삼한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모피가 유럽전역에 보급되고, 가공기술도 발달함과 함께 신흥국가 미국이 흥성하면서부터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산출되는 모피가 유럽에 대량 수출되어 모피의 유행은 중국에서 서양각국으로 옮겨졌다고 말하고 있으나 모피산업의 특수성에서 볼 때 야생동물들의 서식지를 주요하게 보지 않을 수 없으며 야생동물이 어느시기에 갑자기 여기저기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중국이 있었다고 하는 동아시아대륙에서 미국 북아메리카대륙으로 모피산업에 필요한 야생동물들이 한꺼번에 옮겨간 것처럼 설명되는 것에 절대로 동의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모피산업발달의 역사가 중국이 시발이었다면 지금도 모피산업이 구가되는 곳도 중국 동아시아대륙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남획되어 완전히 절멸되지 않은 이상 생물학적인 서식처의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이동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본래 오래전 중국이 있었던 곳과 현재 들어난 야생동물의 서식처 북아메리카대륙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원칙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재 인류근대사의 근원적인 혼란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다시말해 BC1000년경에 야생동물이 서식하던 곳이나 18세기 이후 전세계적으로 수요가 폭증하던 때의 모피용 야생동물이 서식하는 곳과는 다르지 않고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7세기때 미국남녀사이에 비버햇(beaver hat)이 급속히 유행했다는 사실 뿐만이 아니라 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1580년대 파리(Paris)를 중심으로 비버가죽모자가 대유행하였다고 한다.
현재 뉴올린언즈를 파리라고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1580년대 파리유행도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을 분리하지 않는다면 같은 이야기라고 본다.
그곳이 다름아닌 대조선이라고 한번 생각해보라.
한 때 북아메리카대부분의 지역에서 번성하던 비버는 1630년대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남획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에서 똑같은 고민을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영국의 국왕 찰스1세(Charles I:1600-1649,재위:1625-1649)가 상류사회사람들에게 반드시 비버모피로 만든 모자를 써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버 남획에 완전히 기름을 부어버린 꼴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되자 영국 뿐만아니라 유럽대륙전체가 비버가죽 붐이 일었다고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나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
당시 국가란 특수한 체제상 국가와 국가는 이질적인 것이어서 언제든지 전쟁을 야기 할 수 있기때문에 극도로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유럽대륙을 현재 유럽연합과 동일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역사 오류를 크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동시다발적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는 곳은 하나의 국가체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맞다.
1720년까지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죽임을 당한 비버의 숫자가 200만(萬)마리가 넘었다는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비버모자(beaver hat)는 사용되었으며 19세기 초까지 인기를 누렸다고 하였고 이 시기에 미시시피강 동쪽에서는 비버가 사실상 멸종 되다시피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하나의 체제에서 지속적으로 비버모자를 사용한 결과일 것이다.
때문에 이 모든 상황은 유럽대륙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발생된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19세기 초에 북아메리카의 모피무역은 최후의 미개척지 즉 미시시피서쪽 땅으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이 지역을 처음으로 탐험한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클락(William Clark)에 의해 1805년에 로키산맥을 넘어 태평양 해안의 개척로가 열리면서 북아메리카대륙 서부해안에는 지구상 어느 곳보다 많은 비버(Beaver:河狸:海狸)와 해달(海獺:水獺:Sea otter)이 살고 있다고 보고 했다는 사실을 유럽인들은 기록하고 있다.
비버로 만든 모자
(a)세 모서리로 넓은 챙이 접힌 트리콘(tricorn)형태로 미국독립전쟁 당시 조지위싱턴의 군대가 썼던모자(continental cocked hat, 1776). (b)위로 젖혀진 모자(cocked hat)는 해군 장교 등의 정장용 모자로 나폴레옹이 즐겨 쓰던 해군칵트모자(Navy cocked hat, 19th century).(c)깃털 장식이 앞에 달린 군모 육군샤코모자(the Army shako,1837)
뉴(New)이니 뭐니하여 유럽대륙지명과 북아메리카대륙 지명을 분리하려고 하였지만 하나의 역사를 억지로 나누려니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절박한 역사 고치기라 할 수 있다.
곧 그곳까지 덫 사냥꾼들이 몰려와 비버와 해달을 포획하기 시작했고 이 동물들이 거의 사라진 뒤에는 더 이상 개척할 곳이 없어 값이 덜 나가는 동물로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이때 동아시아항로가 그들에 의해 충분하게 열렸다면 그들의 뛰어난 탐험정신과 개척정신을 살려 왜 아시아대륙 시베리아로 진출할 수 없었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불가능한 때였다.
즉 태평양을 감히 넘을 수 있는 항해기술이나 선박규모가 적어도 1900년까지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파나마운하가 개통된 시각도 1914년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하는 것은 그 때 부터 비로소 태평양을 넘나 들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이다.
그 뒤 사향뒤쥐(麝鼠:muskrat)와 담비(貂屬:marten)의 모피가 몇 년 동안 모피무역을 지탱하였지만 이 동물들 역시 머지 않아 거의 사라지는 형편이 되었다.
19세기에 모자가 실크(Silk)재료로 바뀌면서 비버의 인기가 떨어졌고 해달(海獺:Sea otter)과 바다표범(海豹:seal:Phoca)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한다. 18세기의 북아메리카대륙 알래스카 연안과 오리건연안에서만 서식하던 북해의 해달(海獺:바다족제비)이 각광을 받았으나, 19세기에는 그 자원역시 고갈되었고, 이를 대신하여 알래스카의 물개(北方海狗:Callorhinus ursinus)가 유행하였으며 다음에는 북아메리카대륙 브리티시컬럼비아주(British Columbia)와 래브라도(Labrador)에 집중적으로 서식하던 검은여우(銀狐:Silver fox)가 차차 대신하여 인간의 끝없는 모피사랑은 야생동물의 수난으로 계속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의 모피는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동아시아대륙으로 수출되는 모피산업시발의 역사와 완전히 다른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Ⅵ.
이처럼 모피무역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3세기가 넘도록 북아메리카에서 번성하며 계속세력을 확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결국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해마다 수십만(數十萬)마리의 모피동물들이 희생되어 그 가죽과 모피를 유럽으로 수출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유럽종비버는 사실상 명암도 꺼낼 수가 없었다.
19세기 초에 시작된 캐나다 동북부 뉴펀들랜드(Newfoundland)의 바다표범사냥은 1850년대 절정을 이루는데 약 60만(萬)마리의 바다표범이라고도 하는 물범(海豹:seal:Phoca)이 죽임을 당했다고 자료에 나온다.
결국 바다표범의 숫자가 80%가까이 줄어들자, 20세기초부터 바다표범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북아메리카 서쪽에서는 러시아인들이 베링해에서 해달을 싹쓸이 한 후 마찬가지로 프리빌로프제도(Pribilof Islands)근해의 바다표범을 1791년부터 1820년대까지 250만(萬)마리를 포획했다고 한다.
러시아 사냥꾼들이 근세기에 지금의 아시아로 옮겨간 뒤 바다표범은 숫자를 회복했다지만 알래스카(Alaska)가 미국에 팔린 후 다시 미국인에 의해 연간 25만(萬)마리씩 죽임을 당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모피산업은 수렵(狩獵)과 도살(屠殺)로 얻어지는 것이기에 기존 서식하던 생물의 개체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북아메리카대륙 북부지역의 야생동물에 의존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삼한의 모피산업의 자료를 보면 상당히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종지리지를 보면 삼한 영역에서 수많은 종류의 모피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결국 과거 우리나라는 본래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풍부한 곳에 영역을 두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세종지리지를 살펴보면 조선 동해와 인접한 강원도(江原道)공물(貢物)로서 쇠가죽·말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담비가죽·범가죽·표범가죽·사슴가죽·잘(검은담비가죽)·수달피·해달피(海獺皮)·돼지가죽·어피(魚皮)·노루가죽·곰가죽·표범꼬리·여우꼬리·곰털·돼지털로 나타나고 조선 서부에 있었던 평안도(平安道)의 공물은 쇠털·말털·개가죽·표범가죽·사슴가죽·노루가죽·여우가죽·삵가죽·수달피(水獺皮)이것은 해달이다·초피,돈피가죽[貂皮]·날다람쥐가죽[靑鼠皮]·돼지가죽으로 나타나며 조선 북쪽 전역을 나타내는 함길도(咸吉道)공물(貢物)은 표범가죽·금곰가죽(金熊皮)·아양사슴가죽[阿羊鹿皮]·노루가죽·삵괭이가죽·여우가죽·표범가죽·표범꼬리(豹尾)·여우꼬리(狐尾)라고 나타남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명칭들을 보면 우리나라 한반도에서 서식할 수없는 야생동물들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이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비버(河狸, 海狸)인지 담비(貂, 貂鼠, 貉子)인지 알 수 없게 초피(貂皮)란 애매모호한 명칭을 사용하여 흐려 놓았으며 초(貂)가 붙어 있는 똑같은 담비형태의 종인 초웅(貂熊)이 있다는 실체도 세종지리지에 무엇이라 했는지 밝혀야 한다.
물론 우리나라 땅에 서식하던 동물뿐만 아니라 조선의 모피산업에 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문제에서도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제조시스템이 완전하게 갖추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수렵과 도살(屠殺)로부터 가죽을 벗기는 작업의 박피(剝皮), 나무통에 물을 채우고 가죽을 하루 이틀 담가두는 작업인 생려(生戾), 칼로 털을 제거하는 전타(銓打), 기름기를 제거하는 탈지(脫脂), 동물의 배설물등을 활용해 가죽을 부드럽게 하는 작업 제유(製鞣), 그리고 건조하는 작업과 최종 건조된 가죽 문지르기 작업인 무두질까지의 작업 전 과정이 세세하게 기록되고 있다는 점은 그 만큼 모피산업이 최고조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피산업기술이 절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터전을 조선 영역에 모피를 생산할 수 있는 수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분명하게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비버과(Castoridae)의 유일 속(屬)에 비버속(Castor)에 2종(種)이 있다는 점은 근대생물학자들에 밝혀진 것이고 그래서 분류학적으로 유럽종과 아메리카종을 나누고 있지만 두 종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완전히 대륙이 갈라진 것처럼 지역적으로 구분이 될 수 없는 하나의 동일종(同一種)이라고 학자들이 규정할 정도로 형태와 생태가 비슷하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성 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다는 것이다.
북아메리카대륙 역사와 유럽역사가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속에는 삼한역사가 중국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까지다.
이것을 세밀하게 분류학적으로 따져본다 하여도 1758년에 처음 린네(Carl von Linne:1707-1778)가 유럽종을 분류한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로부터 약 60년이 흐른 뒤 1820년에 들어 독일인 박물학자 탐험가인 빌헬름 헴프릭(Wilhelm Friedrich Hemprich:1796-1825)은 비버과(河狸科:Castoridae Hemprich,1820)로 뒤늦게 분류하였으며 같은시대의 사람이고 같은 독일인 박물학자이며 동물학자인 하인리히 퀼(Heinrich Kuhl:1797-1821)에 의해 같은 년도에 린네와 다른 한 속(屬)을 분류한 것이 오늘날 아메리카대륙종(種)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린네가 분류한 유럽종은 유명무실한 것일 수밖에 없는 대신 뒤 늦게 독일인 하인리히 퀼이 분류한 아메리카대륙종이 근원종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버린 것이다.
본래 하나의 종을 나눈 것임을 알 수가 있다는 말이다.
단지 먼저 세상을 경험한 린네의 이름이 유럽종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중세까지만 해도 유럽 전역에 먼저 분포했다고 하겠지만, 정작 근세기에 모피장사가 활성화 된 곳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었으니 그러한 주장은 틀리는 것이며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사실 상 근원종이 있었던 곳은 유럽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이다.
지금까지 모피산업의 야생동물 모두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식하던 동물임을 우리가 알게 된 것이다.
미국의 어떤 생물학자는 비버를 북아메리카의 중요 생물 종(種)중에 하나로 보고 있는 이유를 비버가 스스로 댐을 지어 습지를 만들면 그 습지에 여러 생물이 모여들어 살기 때문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동물의 습성이라고 하지만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유럽서양인들이 근세기의 역사를 분리하고 세분하여 혼탁하게 만들어 놓은 근대사의 잘못을 비버들이 그들의 우월감에 빠져 있는 오만한 작태를 지적하고 분리가 아니라 같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손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비버들의 가르침을 근대사를 만든 유럽서양인들은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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