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십자군사건
*********************************
동경반란(東京反亂)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사건
글쓴이:한부울
마케도니아(Macedonia)는 탐라(耽羅)?
모순된 근세기 역사에서 가장 혜택을 받았던 수혜자는 누구일까?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 많다.
그 중 동아시아에서는 누가 무어라 해도 지금 열도에 기생하는 일본 역사를 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영토 면으로 따졌을 때 수혜자는 러시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역사를 부정하는 특이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우크라이나(Ukraine), 도네츠크(Donetsk)태생으로서 현재 러시아의 수학자이며 모스크바 대학교수이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인 아나톨리 티모페에비치 포멘코(Anatoly Timofeevich Fomenko, 1945.3.13- )이다.
이 사람은 수학자이면서 과학적으로 분석한 토대로 기존역사가 잘못된 것이란 사실을 밝히고 있는 장본인이다.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became the largest and wealthiest city in Europe between the 9th and 11th centuries.]
서양인 특히 러시아계 그들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기존 서양역사를 부정하고 그가 과학적으로 밝혀낸 새로운 역사를 주창하는데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입장에서 그가 주장하는 사실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삼한의 역사 자취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이 솔직하게 없지 않다.
아직 그의 저서가 대한민국에서 본격적으로 출판되지 않아 그의 글 진위를 밝혀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현재 역사 즉 근대 동, 서양사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응원군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던 좋은 소식이고 느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동경반란 또는 동경민란이라는 사건을 삼한역사에 맞춰 밝혀보고자 한다.
설명이 이렇다.
고려 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 또는 경주민란은 고려19대 명종(明宗, 1131-1202, 재위: 1170-1197)시기 1190년 이래 약 15년에 걸쳐 일어난 경상도 지방의 민란으로서 민란 중심지가 고려의 동경(東京), 곧 경주(慶州)였으며, 반란의 기치가 신라 재흥(再興)이었으므로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비슷한게 비잔티움제국에서도 이와같은 복고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십자군으로 연결되는데 제4차 십자군의 시작은 1202년부터 시작하여 1204년을 끝으로 그들의 복고운동의 결산 라틴제국을 세운다는 역사이다.
우리가 이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이라는 기치아래 생성된 반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를 한꺼번에 거꾸로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반전의 역사란 사실이다.
고려가 신라를 통합했으니 비잔티움이 신라마를 통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면 곧 신라가 라틴이라는 등식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긴가?
경주민란은 전후 6,7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 중 고려 제20대 국왕 신종(神宗, 1144-1204, 재위:1197-1204)시기 1202년(신종5년)신라의 부흥(復興)을 외치면서 경주(慶州)에서 일어난 농민군(農民軍)의 난(亂)이 유명하다 하였다.
이것이 제4차십자군과 이렇게 똑 같은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이비(利備)를 두목으로 삼은 일당과 운문의 발좌(勃左)를 두목으로 한 일당은 신라 재흥을 표방하며, 각지에 격문을 돌려 주(州)·군(郡)을 약탈하였다.
약탈은 십자군이 하던 행동이었다.
그래서 추악한 십자군이란 역사 별칭이 붙고 교황은 십자군을 파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동경반란에 최충헌은 대장군 김척후(金陟候)를 총지휘관으로 삼아 철저히 토벌케 하였으나 이비는 운문·울진·초전의 적을 규합하여 삼군(三軍)을 편성하고, 주·군을 회유·위협했지만 고려 정부는 김척후 대신 다시 정언진(丁彦眞)을 파견하니, 정언진은 무당과 공모하여 이비를 체포, 난을 마침내 평정했다 한다.
이후 동경을 경주로 개칭하여 격을 낮추었다 한다.
그러니 동경보다 경주는 격이 낮은 것이다.
놀라운 것은 열도 도쿄가 동경이 되고 일제가 한반도 경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의 못된 심사를 알만하다 할 것이고 반도사가 우스꽝스러운 역사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한다.
이것이 동경반란 사건의 간추린 개요이다.
[6세기 비잔티움]
그런데 이사건과 비잔티움제국에서 일어난 사건과 년도 뿐만아니라 내용에서도 묘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1190–1204/05: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Basil Chotzas at Tarsia.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위 영어자료에는 비잔티움제국의 반란 년대별 리스트에서 볼 수 있는데 위 글귀를 풀어보면 “정권분리 또는 이탈에 이어 새로운 정권 창립을 위한 반란”이란 뜻이다.
바로 재흥(再興), 또는 부흥(復興)운동이다.
나는 이것을 십자군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당시 이와 같은 기치아래 비잔티움제국에서 엄청난 소요사태가 곳곳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 영어자료의 반란을 보면 아나톨리아(Anatolia) 북서부에 있는 타르시아(Tarsia)에서 바질(Basil Chotzas, 1190–1204)이라는 현자(智者)의해 정권분리 또는 이탈에 이어 새로운 정권 창립을 위한 반란인데 이것이 무섭게 제4차 십자군 전쟁과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동경반란이 15년을 끌었다는데 비잔티움제국의 반란 역시 1190-1205년까지라면 정확하게 15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역으로 풀어 보면 바로 결국 십자군전쟁은 신라복고운동 또는 신라부흥, 신라재건운동의 일환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과연 실제 사건 연결상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반란이고 민란인데 이것을 근세기에 십자군의 활동상을 들어내기 위하여 교묘하게 이용을 한 것인가 아니면 이 민란은 또 다른 성질의 또 다른 심각한 재흥, 부흥운동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 사건은 동경반란을 궁극적으로 십자군과 연결하고자 하는 고리로서 이용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비잔티움
List of Byzantine revolts and civil wars
12th century
1182: Revolt and successful usurpation of Andronikos I Komnenos.
1183/1184: Revolt of general Andronikos Lampardas.
1183/1184: Revolt of John Komnenos Vatatzes, governor of the Thracesian theme, against the regency of Andronikos I Komnenos.
1184: Revolt of Theodore Kantakouzenos, governor of Prussa.
1184–1191: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Isaac Komnenos at Cyprus.
1185: Uprising of Asen and Peter, establishment of the Second Bulgarian Empire.
1185: Revolt and successful usurpation by Isaac II Angelos.
1187: Revolt of Alexios Branas against Isaac II Angelos.
1188–1189: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Theodore Mangaphas at Philadelphia.
1190–1204/05: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Basil Chotzas at Tarsia.
1192: Revolt of Pseudo-Alexios II.
13th century.
1200–1206: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Leo Chamaretos in Laconia.
1200–1208: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Leo Sgouros in NE Peloponnese and Central Greece.
1201: Coup by John Komnenos the Fat against Alexios III Angelos in Constantinople is violently suppressed.
1201: Revolt of John Spyridonakes in Macedonia.
1201/1202: Revolt of Manuel Kamytzes and Dobromir Chrysos in Thessaly and Macedonia.
1204–1205: Second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Theodore Mangaphas at Philadelphia.
1204–1205: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Manuel Maurozomes at Phrygia.
1204–1206: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Sabas Asidenos in the lower Maeander River.
1204–1206: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John Kantakouzenos at Messenia.
1224: Revolt of Isaac and Alexios Laskaris against John III Vatatzes.
1225: Revolt of Isaac and Andronikos Nestongos against John III Vatatzes.
고려
1184년(AD) 이의민(李義旼)이 정권 장악.
1193년(AD) 김사미(金沙彌)의 난.
1198년(AD) 만적(萬積)의 난.
명주민란(溟州民亂)은 1199년에
진주노비반란(晋州-奴婢叛亂)은 1200년에
1202년(AD) 탐라민란 평정. 경주˙운문˙울진 등이 연합하여 민란을 일으켜 주군(州郡)을 장악.
1190-1205(AD)고려 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은 1190년부터 15년간 지속적으로 일어난 사건
왜냐하면 본 블로그에서 삼국사기의 동경(東京)이라고 하는 곳이 바로 비잔티움제국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바로 지진역사를 가지고 밝혀내었다.
고려(高麗, corea, korai)에서 발생한 지진(地震)지역은 지중해와 중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446
위 블로그편에 보면 삼국사기기사가 나온다.
(1)三月庚午 慶州地震(고려사절요, 현종 3년) 1012년 현종(顯宗)3년 경오년 3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
(2)十二月丁丑 慶州地震(고려사절요, 현종 3년) 1012년 정축년 12월에 경주에 지진이 있었다.
두개의 기록을 가지고 바로 그리스(Greece)출신의 지진학자 암브라세이즈(Nicholas Ambraseys, 1929-)의 저서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를 자료로 대입하였다.
1).Constantinople AD 1010–1012 earthquakes
(Earthquakes in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259p:Nicholas Ambraseys, 1929-)
바로 삼국사기의 나타난 기록과 같은 년도 1010년-1012년 사이에 그리스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과학적인 근거 아래 지진기록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때문에 고려 현종(顯宗, 992-1031,재위: 1009-1031)때 똑같이 일어난 지진사실에 비추어 경주(慶州)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연재해 기록은 역사사실에 비추어 무엇보다도 정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서양기록에서 바로 신라마(新羅馬)라고 하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사실이다.
일찍이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Constantine the Great, Constantinus, 272-337,재위:306-337)가 비잔티움(Byzantium)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324년부터 330년에 걸친 대대적인 공사가 끝나고 도시이름을 신라마(新羅馬)라 했으니 곧 신라마(新羅馬)는 동경(東京)이고 경주(慶州)라고 할 수밖에 없다.
콘스탄티노플이 왜 신라마(新羅馬)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430
신로마가 신라인 것이며 통합이 이루어진 고려연합제국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실의 역사이다.
결국 고려 현종 때 경주(慶州)는 분명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는 콘스탄티노플이기 때문에 동경반란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으로 보아 본 블로그가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1190–1204/05: Revolt and establishment of a breakaway regime by Basil Chotzas at Tarsia.
인 것이다.
이외 동시기에 비잔티움제국(Byzantine Empire, 330-1453)의 앙겔로스 왕조(Angelos, 1185-1204)때는 엄청난 반란과 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의 최대한 혼란기였다고 추측 할 수 잇다.
고려와 대입되는 비잔티움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잔티움왕조 앙켈로스왕조(Angelos, 1185-1204)
1.이사키우스 2세 (Isaac II Angelos, 1156-1204, 재위:1185-1195):알렉시우스 1세의 증손자; 폐위되고 실명당함
2.알렉시우스 3세(Alexios III Angelos, 1153-1211, 재위:1195-1203):이사키우스 2세의 형; 제4차 십자군으로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감
3.이사키우스 2세(Isaac II Angelos, 재위:1203-1204):제4차 십자군으로 복위;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폐위
4.알렉시우스 4세(Alexios IV Angelos (or Alexius IV Angelus)1182-1204,재위:1203-1204)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로 아버지와 공동황제;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폐위되어 살해당함
5.알렉시우스 5세 무르주플루스(Alexios V Doukas, 1140-1204, 재위:1204):제위 찬탈;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고려왕조
18 의종(毅宗, 1127-1173, 재위:1146-1170)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됨
19 명종(明宗, 1131-1202, 재위:1170-1197)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0 신종(神宗, 1144-1204, 재위:1197-1204)
21 희종(熙宗, 1181-1237, 재위:1204-1211) 최충헌에 의해 폐위됨
22 강종(康宗, 1152-1213, 재위:1211-1213)
위의 재위 년도를 비잔티움제국 앙겔로스 왕조와 고려왕조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어딘가 모르게 일치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들어나 보인다.
년대가 조금씩 다르지만 최충헌의 의해 세워진 신종(神宗, 1144-1204, 재위:1197-1204)이 퇴위하는 시기가 1204년이고 비잔티움 앙겔로스 왕조 역시 이사키우스 2세, 알렉시우스4세, 알레시우스5세 동시에 3명의 군주가 똑같이 1204년에 종결짓는 재위년도가 기록으로 알 수가 있다.
비잔티움은 여러 왕이 나열되었지만 고려 왕대는 간략하게 한 사람의 국왕으로 처리한 것이다.
고려는 1199년에 십자군이라고 추측되는 최충헌이가 명종(明宗, 1131-1202,재위:1170-1197)를 폐위시키고 문무관의 인사행정(人事行政)를 도맡았고 이로부터 모든 실권은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비잔티움제국 역시 알렉시우스 3세(Alexios III Angelos, 1153-1211, 재위:1195-1203)가 제4차 십자군에게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에 간다는 사실이 그렇게 비슷하고 똑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던 실권은 실권인 것이다.
풀어보았을 때 동양사에서는 최충헌과 징기스칸을 만들고 서양사에서는 라틴제국을 만들어 동양의 몽골제국과 분리했음을 알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Latin Empire, 1204-1261)
보두앵 1세(Baldwin I) 1204–1205
앙리(Henry) 1206–1216, 보두앵 1세의 형제
피에르(Peter) 1217–1219
욜란다(Yolanda, 욜랑드) 1217–1219, 앙리의 누이
로베르 1세(Robert I) 1219–1228, 1221년 대관, 피에르와 욜란다의 아들
장 드 브리엔(John of Brienne, 브리엔의 장) 제국의 섭정(1229–1237)
보두앵 2세(Baldwin II) 1228–1261, 1240년 대관, 1273년 사망
몽골제국(1206-1259)
칭기즈 칸(成吉思汗1162-1227.8.18, 재위1206-1227)
톨루이(1190-1232, 재위1227-1229)칭기즈 칸 2자
우구데이(窩闊臺, 1186-1241, 재위1229-1241)칭기즈 칸 3자
구유크(貴由,1206-1248, 재위1241-1248)우구데이 장남
몽케(蒙哥,1208-1259, 재위1248-1259)톨루이 장남
무단정치 최씨 정권
최충헌(崔忠獻, 1197년~1219년) (1149~1219)
최충수(崔忠粹 1151~1197신종즉위년) 형제이지만 최충헌에게 죽는다.
최우(崔瑀, 1219~1249년) 최충헌 아들
최항(崔沆, 1249~1257) 최우의 아들
최의(崔竩, 1257~1258년) 최항의 서자
최충헌(崔忠獻 1149-1219, 집권:1196-1219), 집권23년
칭기즈 칸(成吉思汗, Činggis Qaγan, 1162-1227,재위:1206-1227) 집권21년
고려 최씨 무신정권은 징기스칸 몽골정권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425
니케아 제국(Empire of Nicaea 1204-1261)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라스카리스(1204년 통치):공식적인 즉위는 없었음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Theodore I Lascaris, 1174-1222, 재위:1204-1222):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요한네스 3세 두카스 바타체스 (John III Ducas Vatatzes, 1192-1254, 재위:1222-1254):테오도루스 1세의 사위, 간질환자
테오도루스 2세 두카스 라스카리스(Theodore II Lascaris, 1221-1258, 재위:1254-1258) :요한네스 3세의 아들
요한네스 4세 두카스 라스카리스(John IV Lascaris, 1250-1305, 재위:1258-1261):테오도루스 2세의 아들, 미카일 8세에 의해 폐위되어 실명당하고 감옥에 갇힘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Michael VIII Palaeologus, 1224-1282, 재위:1259-1261):스트라테고스(Strategos); 요한네스 4세의 섭정; 알렉시우스 3세의 증손자, 1261년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킴restored Byzantine Empire)
그리고 위에서 보면 콘스탄티노플의 라틴제국(Latin Empire, 1204-1261)의 년도와 동양의 몽골제국(1206-1259)의 년도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민란과 반란의 시기는 공교롭게도 제4차 십자군전쟁(1198-1204)과 연결되며 이 후 십자군의 활동과 고려를 공격하는 몽골군의 활동은 같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분명 십자군이 비잔티움제국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몽골군이 고려를 공격하였다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는 이유역시 십자군이 세운 라틴제국과 몽골제국은 년도가 거의 같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몽골군의 7차에 걸친 것으로 고몽(高蒙)전쟁을 유발케 하여 기록하였고 십자군은 8차에 걸친 원정기록으로 활동상황을 조작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쨌던 서양사는 당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분명 고려이었고 그것도 고려연합제국이었다는 것을 지금까지 들어나는 역사사실에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1201: Revolt of John Spyridonakes in Macedonia.
Spyridonakes was born in Cyprus.
끝으로 마케도니아(Macedonia)에서 존 스피리도나케스John Spyridonakes (1195–1201)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 존 스피리도나케스는 키프러스(Cyprus)출신이며 알렉시오스3세(Alexios III Angelos, 1195-1203)재위기간 동안 신임을 받아 비잔티움의 주지사까지 올랐으나 반란과 혼란을 이용 반역을 도모하여 끝내 달아나지만 이것은 삼한역사에 나오는 탐라 지방관의 탐학과 공물의 과대징수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하여 일어난 사건과 내용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일본 해상자위대기가 이것을 도용한 것 같다.]
탐라민란은 1170년(명종 즉위년)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신분질서의 해이와 집권자들의 토지점탈, 지방관의 탐학 등으로 사회가 동요하자 전국각지에서 농민·천민의 난이 잇따라 일어났다. 탐라는 이미 명종 초기에 탐욕스러운 지방관의 교체를 요구한 바 있으며, 또한 1186년(명종 16)에는 탐라가 반역하였다는 소문에 정부에서 놀라 안무사(安撫使)를 파견하였다가 무고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신종 때 전라도·경상도 지역에서 반란이 격렬하게 일어나자, 탐라주민들도 영향을 받아 1202년 10월 지방관의 탐학을 제거하려고 난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소부소감(小府少監) 장윤문(張允文)과 중랑장(中郎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그 해 12월 반란의 괴수 번석(煩石)과 번수(煩守)를 죽임으로써 평정되었다. 이 난 또한 지방관의 탐학과 공물의 과대징수 등으로 백성들의 생활이 궁핍하여 일어난 것이다.
때문에 탐라민란은 존 스피리도나케스의 난과 혼입될 수 있지만 성질상 많이 닮았다고 볼 때 탐라(耽羅)의 위치가 마케도니아(Macedonia)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