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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한부울 2011. 11. 3.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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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天然痘, Smallpox)로 본 박제가(朴齊家)는 에드워드인가?

 

글쓴이:한부울

 

지금까지 밝혀 본 근대사는 무엇인지 분간 할 수 없는 엄청난 대 혼돈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제부터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호환마마(虎患媽媽) 천연두(天然痘)를 이야기 해보련다.

우리는 두창(痘瘡), 완두창(豌豆瘡)이라고 하고 한어자료엔 천화(天花), 천화병독(天花病毒:学名 Orthopoxvirus variola), 천행반창(天行斑瘡:돌림성 사기의 침입으로 온몸 살갗에 고름집이 생긴 것)이라 하는 천연두이다.

인류사를 바꾸어놓은 악질(惡疾)로서 아메리카를 초토화한 역병이 바로 천연두(天然痘, Smallpox)인 것이다.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유럽에 매독과 발진티푸스 등이 발병할 때라고 하는데 콜럼버스가 발견하였다 하는 신대륙 아메리카는 생전처음 겪는 이 역병에 수많은 인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마비가 되어 버렸다고 표현한다.

스페인의 침공이 있기 전 아메리카의 인구는 대략1억여 명이었으나 이 중 90%이상(90,000,000명)이 1518년 유행한 천연두란 역병으로 몰살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한어자료에는 그 보다 더 이른 1507년부터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에 천연두가 유행했다고 나온다.

2년 뒤 아스텍의 원주민들은 침략군인 스페인군을 물리칠 기회가 있었으나 천연두 때문에 퇴각해야만 했으며 천연두는 아스텍의 국경을 넘어 과테말라, 잉카제국 등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그렇다면 북아메리카대륙은 어땠을까?

스페인사람들은 대부분 어릴 적 이병에 감염되어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없어 그러진 못했었고 속수무책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아즈텍제국(Azteca, 1200-1522)과 잉카제국(印加帝國, Inca Empire, 1438-1533)은 이렇게 멸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소위 근세사는 서양사의 토대를 닦기 위해 이 전염병 천연두로 말미암아 종전에 어떤 문화가 있었던지 간에 모두 깨끗하게 청소한 것이라고 묘사되고 있다.

전염병이 당시 무서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스페인 사람들은 면역력이 있었다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실제 중미와 남미에 공히 오래된 문화를 영유하며 존재하였다던 아즈텍과 잉카가 실제로 무엇을 지칭했는지 알 수 없다. 근세기 서양세력에 의해 기획적으로 이런 역사가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전염병은 이상하게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특히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상황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북아메리카대륙에는 토착인 인디언 말고 역사문화자체가 없었다고 선을 그어놓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바다를 경계로 하는 것도 아니고 땅이 이어져 아즈텍은 아예 박살이 나는데 북아메리카대륙 어디에도 이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는 것은 자료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것이 근세사의 문제점의 핵심이다.

 

근대에 들어 천연두(天然痘, Smallpox)는 종두가 실시된 후, 1979년 소말리아의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WHO가 공식적으로 박멸한 것으로 선언한 바이러스 전염병이다. 옛날 조선에서는 마마, 두창이라고 불리었으며, 1800년대 후반에 지석영(池錫永, 1855-1935)선생이 이를 퇴치하기 위해 종두를 주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종두(種痘)는 천연두를 예방할 목적으로 백신을 인체의 피부에 접종하는 일을 가리키는데 1796년에 영국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발견한 우두 바이러스를 이용한 인공 면역법을 가리킨다.

종두에는 인두법과 에드워드 제너의 인공면역법(종두 접종법)에서 기원하는 우두법(牛痘法, cowpox)이 있는데 인두법(人痘法)은 면역 물질을 천연두에 걸린 사람에게서 얻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며 마찬가지로 우두법(牛痘法)역시 면역 물질을 소마마 앓는 소에게서 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인두법은 인도(印度)에서 시작되었으며 12세기 무렵에 송나라(高麗)에서 발견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사는 조선 18세기 말에 실학자 박제가(朴齊家,:750-1805)에 의해 인두법이 알려지고 1830년대에 우두법이 알려졌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1749-1823)라는 사람과 박제가(朴齊家)가 동일인물이라는 의심을 떨치수가 없다.

제가 역시 이 인두법을 17세말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에드워드 제너가 발견한 인공면역법이고 서로 상통하고 비슷한 시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르지 않을 것이란 판단이다.

태어난 시기가 1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다가 똑 같이 인두법과 우두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같은 날 태어나 똑같이 이 인두, 우두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란 "기록"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기록에 의한 의도된 착오, 잘못된 기록 그리고 당시 무시할 수 없었던 어떤 내셔널리즘에 의한 여러가지 변수가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근대사에서 잘못된 역사 기록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순을 찾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쉽게 넘어갈 일은 분명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말 신(神)이라도 이러한 기현상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박제가와 에드워드의 사망년도에서 차이가 난다.

이것은 특히 반도역사를 만든 일제가 얼마든지 나쁜 의도에 의해 조작 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분명 두 사람 중 한사람은 허구인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인데 실존인물은 에드워드 제어일 가능성이 높고 허구는 박제가란 위인이다.

이 글을 보고 나를 미친 소리한다고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근대사가 그만큼 신뢰를 상실하였다데 있다.

이런식의 반도역사는 춤을 추고 있었지만 우리는 까맣게 알 수 없었고 오직 암기가 죽도록 해왔다.

그것이 반도역사이다.

같은 한사람을 서양사람으로 만들고 동양사람으로 만들면 이미 두사람이 생겨난다.

이런식으로 가르기를 했던 것이다.

나라 역시 하나의 나라를 서양에 나라 하나만들고 동양에 나라 만들면 두개의 국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왜 필요할까?

제국들의 지배역사를 만들고 그들 문화의 우월성을 돋보이기에 하여 역사에서 누릴 수 없는 특혜와 보상을 받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식의 역사가 얼마나 우리를 황당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현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사고 현대사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종두법은 엄밀히 따진다면 조선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했다고 판단되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인두법은 인도(印度)에서 시작되었으며 12세기 무렵에 송나라(高麗)에서 발견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고려(高麗)이고 조선(朝鮮)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본 블로그가 파악한 바로는 송나라는 송고려이고 인도역시 삼한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실제 수많은 전염병들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더라도 먼저 조선에서 앓았고 병이 주는 모진 결과를 치뤘다는 사실을 조사결과 알 수 있었던 상황이다.

아래 표를 한번보자.

전염병 이력이 빽빽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천연두가 발생한 시점이 1506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한어자료에 나오는 서인도군도(西印度諸島)에서 1507년에 발병된 천연두(天花)보다 1년 빠른 시기이다.

이걸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설명할 수 있는가?

똑같은 년도에 하나는 서인도제도에서 발견되고 하나는 지금의 한반도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거리도 거리지만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힘든 지리적, 지형적 위치이고 조건인 것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배가 오고가고 하는 것도 아니라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구도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사실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두개의 역사를 만들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혼란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슨 병인지로 모르는 돌림병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유행성전염병으로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이러한 병을 기록으로 보았을 때 병의 실체를 도무지 알수없게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그러하더라도 상황적인 판단과 더불어 분명 시기적으로도 천연두하고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조선이란 나라에서 또는 정부가 이런 돌림병을 매우 신중하게 충분히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객관적 시각에서도 당시 조선의 의료수준은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더 진보하고 상당히 뛰어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비록 미리미리 대처를 할 수 없었더라도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었다 하더라도 노력의 결과 현대 우리가 의료해택을 누리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어쨌던 반도역사에서 축소하려고 하였지만 보이는 것의 노력은 노력인 것이다.

 

한센병도 그렇지만 매독 역시 조선에서 먼저 발병하여 치료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이 종두를 찾아 노력했다는 것을 박제가(朴齊家,1750-1805)로부터 알 수 있지만 여기서 말한 것처럼 실제로 이 박제가가 정말 에드워드라면 대단히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근대의학 자체가 모두 조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논문을 새롭게 발표해야 할 판이다.

그에 따른 혼란은 인류가 불신할 수밖에 없는 근대사를 믿지 않으려 할 것이고 치명적인 상처로 남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필연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뒤집기는 불가능해보인다.

왜냐하면 기득권이 지배하는 세상이기에 그들의 주장을 뒤 엎기란 힘든 것이라는 것 쯤 안다.

현대의학 역사 뿌리자체가 완전히 와해 되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파고인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본격적으로 조선시대 천연두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찍이 여러 가지 전염성 돌림병으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장티푸스라는 온역(瘟疫)은 이미 고려시대 숙종5년(1100)부터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매독환자도 1439년부터 이미 귀족사회까지 퍼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445년부터는 나병환자가 제주도에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 외 괴질(怪疾), 악질(惡疾), 염병(染病), 열병(熱病)등 전염성이 있는 돌림병을 두리 뭉실하게 대칭, 약칭하여 지칭하고 있다는 자체가 현대의학의 발원 점을 숨기고 덮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분명하게 든다.

명백하게 들어나는 병명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따질 때 현대의학이 조선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이 탈로 날것이 두려워 고의적으로 은폐하고 막으려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이렇게 두리 뭉실하게 지칭한 병명들 때문에 명확한 병명을 알 수 없다는데 안타까운 마음 금할길이 없다,

솔직히 14세기에 유행한 흑사병이나 지금 주제로 다루고 있는 천연두, 한센병, 매독,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 이러한 무서운 병은 다 전염성이 있고 열과 반점, 염증을 동반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역병이라고 하면 무조건 생명과 직결되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서에서 후세들을 위해 병명을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이것만 보더라도 반도역사의 한계를 볼 수가 있다.

실제로 병명을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무슨 병인지 후세 손이 어떻게 알수가 있겠는가?

역사서란 후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기록이라고 볼 때 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고 평할 수밖에 없는 역사만들기에만 치중한 그야말로 무성의한 역사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조선왕조실록 등 수많은 사서들을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워낙 방대한 것이기에 세세하게 따질 수도 없었고 제대로 완벽하게 만들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일제가 관리한 사서일지라도 끈질기게 찾다보니 이렇듯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고 그 무엇인가가 손에 잡히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자고 숨겨놓은 것을 찾으려니 어찌 힘이 안들겠는가?

그리고 기록에 대역(大疫)과 질역(疾疫)이란 명칭은 기원전14년 백제온조왕부터 나오고 장티푸스라고 하는 온역(瘟疫)은 고려시대 숙종5년(1100년)부터 나온다.

엄청 이른 시기인 것이다.

이미 고려 조선은 이러한 전염병을 통달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악질(惡疾)이란 용어는 1438년(세종20년)부터이고 1456년(세조2년)에 창진(瘡疹)과 장티푸스라는 온역(瘟疫)이 등장한다. 천연두가 아메리카를 침범할 당시 1500년(연산군6년)부터는 돌림병이란 이름이 등장하며 1526년에 염병(染病)이란 지칭이 있고 1541년 때는 현대 구제역(口蹄疫)이라 병명도 등장하고 있다.

1544년(중종39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전염성 열병(熱病)이라 하고 있는데 발생회수는 샘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돌림병이나 전염성 열병을 조선 역사는 심하게 앓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만든 의학적 공헌에 비하면 일제가 1917년 소록도에 세웠다고 하는 자혜의원은 솔직히 장난에 불과한 것이고 음모가 숨어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무슨 병인지 알 수 없도록 이렇듯 애매하게 대칭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그 무엇을 숨기려 한 것일까?

바로 흑사병(黑死病)이다.

솔직히 이 흑사병은 자료가 없어 다룰 수 조차 없다.

그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다른 전염병은 다 기록되었는데 이 흑사병만큼은 기록에서 빠져있다.

이 흑사병만 찾을 수 있다면 근대사는 바로 휴지통을 들어 갈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이런 형국이니 흑사병인지 천연두인지 매독인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흑사병(黑死病)기록은 조선사에서 통째로 감추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고 일제 침탈기임을 감안 할때 짐작하고도 남는 이야기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과연 조선에서 흑사병(黑死病)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 했다.

찾아보니 역시나 이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병은 1340년대 유럽으로 퍼져 유럽인구 약 2천5백만명을 죽음으로 몰았는데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의문을 가지는데 유럽대륙이란 실제가 그 당시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있었다면 아랍이란 명칭이다.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 여차례의 흑사병 발생하여 전 유럽을 휩쓸었고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고 까지 불리고 있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으며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사람으로 몰려서 집단폭행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이 흑사병은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생겼는데 흑사병이란 명칭은 1883년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조선의 전염성 역병의 대칭, 또는 약칭이라고 숨겨놓은 사실과 비교되고 대비된다는 것에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왜 조선기록에서 흑사병이라 칭하지 않았는지도 이해되는 측면이다.

 

또한 괴질(怪疾)이라고 등장하는 시기가 1632년(인조10년)부터이다.

이 괴질(怪疾)을 치료하는 술이라 하여 도소(屠蘇)라는 술이 있는데 옛날 풍속에 설날이면 마시던 약주(藥酒)의 한 가지라 하였다.

이 술 역시 전해오는 것이지만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병 치료 방법에 따른 술인 것이다.

술을 마시며 여유롭게 치료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어지간한 병은 일상적으로 조선인들이 대수롭지 않게 다가가거나 인지하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괴질(怪疾)과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장수(長壽)하기 위해 이 술을 마셨다고 하는 도소는 대략 길경(桔梗), 육계(肉桂), 방풍(防風), 산초(山椒), 백출(白朮)등의 약재(藥材)를 넣어 빚었다고 하는데 흔히 듣던 약초들이다.

특별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 괴질(怪疾)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악질(惡疾)이란 용어는 1438년(세종20년)부터이고 괴질(怪疾)은 1632년(인조10년)부터이다.

이것이 흑사병일 수도 있는 것이다.

 

11세기 십자군전쟁(고려거란전쟁)중 중동에서 균이 묻어 유럽을 강타하여 13세기에 퍼졌다고 하는 한센병, 앞서 다룬 적이 있다.

둘째, 1348년에 유럽에 상륙하여 유럽 인구의 3분의1을 숨지게 한 페스트 흑사병(黑死病)

셋째, 1494년 프랑스의 샤를르 8세가 프랑스, 독일, 스페인, 스위스 등의 연합군을 편성해 이탈리아를 침공하였으나 나폴리에서 병사들에게서 나병보다 더 심한 피부병이 나기 시작하여 철수하게 한 매독이다. 이것도 앞서 다룬 적이 있다.

네째, 1518년에 신대륙 아메리카를 강타하여 원주민 90.000.000명을 몰살케 한 천연두는 지금 다루고 있는 이야기다.

다섯째, 인도의 벵갈 지방에 유행하던 풍토병으로서 1817년 영국군의 배를 통해 캘커타로 옮겨졌고 1826년 벵갈 지방에 재유행하면서 러시아 남부에까지 퍼졌으며 러시아는 다시 전쟁을 통해 페르시아, 터키, 폴란드 등에 옮겼고 1830년대엔 이집트, 영국, 캐나다, 미국, 멕시코까지 퍼지게 하여 1831년 이슬람교도 순례지인 메카에 상륙하면서 이슬람 지역을 초토화했다는 콜레라이다.

다음에 다룰 예정으로 있다.

여섯째, 기원전부터 아시아와 유럽 등에 발병했으며 기원전 5세기 히포크라테스의 기록에도 나오고 1493년 남미를 초토화시켰다는 기록의 말라리아가 있다

  

                                                [origins smallpox map]

 

그 외 발진티푸스(斑疹傷寒, Typhus),장티푸스(傷寒, Typhoid Fever)와 이질(痢疾, Dysentery)이 있는데 이것들을 모두 기록에서 온역(瘟疫)이라고 했던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천연두는 조선에서 처음 발생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처음 발생된 조선에서 이 종두를 찾았을 것이며 박제가에 의해 발견되었고 마침내 종두를 만든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래는 한어자료에 밝힌 천연두 대 발생년보이다.

 

[天花大事記]

西元前164年,天花病從羅馬蔓延到歐洲和波斯;持續達15年之久。라마를 거쳐 구주와 페르시아(persia)까지 넓게 퍼져 15년 계속되었다.

1507年,西印度群島流行天花,這是西半球第一次發生該病,死亡1000多人。

1520年,墨西哥(Mexico)西班牙(Spain)人進入發生天花,造成300余萬人死亡。在此後的50年內,墨西哥(Mexico)因爲天花又喪失了近2000萬人。

1560年,巴西(Brazil)發生天花流行病,死亡數百萬人

1798年,英格蘭(England)天花流行,死亡8萬人。

1870年,法國(France)流行的天花襲擊了德國(Germany)和法國的部隊,德國部隊僅在實施預防注射過程中就有297人死亡,共死亡23679人。

1926年-1930年,印度(India)天花造成驚人的疫病災害,死亡50萬人。

1930年2月,墨西哥(Mexico)天花流行,死亡600人。

1930年2月,菲律賓(philipines)巴盧特(Balut섬)和薩蘭加尼(Niyasaland)發生天花流行,死亡200人。

1946年11月,香港820名天花病患者一半多被奪去生命,死亡530人。

1954年1月,蘇丹(Sudan)天花流行,日死亡40人,計死亡數百人。

1956年5月-12月,伊拉克(Iraq)天花病流行,7個月內就有2500名患者,死亡300人。

1957年2月-4月,印度加爾各答(Kolkata)天花病流行,一周就有141人喪生,共死亡946人。次年1月-7月,印度天花和霍亂(cholera)流行,死亡1.6萬人。

1958年4月,東巴基斯坦(East Pakistan)發生天花和霍亂(cholera),死亡5萬人。

1958年9月,印度尼西亞(인도네시아)東部發生霍亂(cholera)和天花,死亡515人。

1959年12月-1960年2月,前蘇聯(쏘련)在消滅天花25年後,莫斯科(Moscow)發生輸入性天花爆發。

1961年1月14日-2月4日,印尼爪哇(Java)中部地區天花流行,有2500多名患者,死亡143人。

1961年4月,尼亞薩蘭(Nyasaland)馬拉維(Malawi)天花流行,造成103人死亡。

1966年6月11日,印尼蘇門答臘(Sumatra)西部地區發生天花流行,死亡400人。

1967年3月-5月,東巴基斯坦今孟加拉国(Bangladesh)流行天花,死亡1500人。

1974年1月1日-6月30日,印度發生嚴重的天花流行,患者10萬名,死亡3萬人。

 

위 [天花大事記]천연두 대사건기록연대표에 최초 아메리카에서 발생한 천연두 관련 연보이다.

(1)1507年,西印度群島流行天花,這是西半球第一次發生該病,死亡1000多人。

(2)1520年,墨西哥(Mexico)西班牙(Spain)人進入發生天花,造成300余萬人死亡。在此後的50年內,墨西哥(Mexico)因爲天花又喪失了近2000萬人。

(3)1560年,巴西(Brazil)發生天花流行病,死亡數百萬人

 

한어자료

(1)1507年,西印度群島流行天花,這是西半球第一次發生該病,死亡1000多人。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3월21일 (신축)

영수 아기가 구수영의 집에서 천연두가 나아가니 물품을 내리다

○傳曰: “靈壽阿只, 在具壽永家, 痘瘡向瘳, 其賜壽永米五十碩, 鞍具馬一匹。”

전교하기를,

“영수(靈壽) 아기가 구수영(具壽永)의 집에 있으면서 천연두[痘瘡]가 차차 나아가니, 수영에게 쌀 50석과 안장을 갖춘 말 한 필을 내리라.”하였다.

 

첫 번째 기록을 보면 이렇다.

"1507년 서인도제도에 천연두가 유행하였다 하고 사망자가 1000명보다 많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래 똑 같은 시기에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12년 1506년 기사를 한번보자.

“영수(靈壽) 아기가 구수영(具壽永)의 집에 있으면서 천연두(痘瘡)가 차차 나아가니, 수영에게 쌀 50석과 안장을 갖춘 말 한 필을 내리라.”하였다.

이 기사를 내용을 보면 분명 조선에서 천연두가 발병하였는데 마침 앓고 있던 영수 아기가 구수영의 집에서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다.

이때 조선에서 두창, 천화라고 하는 천연두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서인도제도의 유행된 천연두를 이야기 한 것이 틀림없다는 말이다.

 

한어자료

(2)1520年,墨西哥(Mexico)西班牙(Spain)人進入發生天花,造成300余萬人死亡。在此後的50年內,墨西哥(Mexico)因爲天花又喪失了近2000萬人。

 

위 한어자료를 풀어 보면 “1520년에 맥시코에 스페인사람들이 들어오면서 천연두(天花)가 발생하였는데 3,000,000명이 사망하였고 그 후 50년 내에 맥시코에서 천연두로 사망한 사람 숫자가 20,000,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 1520년부터 50년동안이니 1570년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모두 찾아보니 아래 열거한 상황과 같다.

자그마치 50년 동안 20,000,000명이란 어마어마한 숫자의 조선인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이다.

아래표를 보면 조선에서도 1524년부터 돌림병 또는 여역, 전염성열병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기록들을 모아놓았다.

위 한어자료 기록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것이 다르다고 하면 조상님들한테 욕먹는 망언이 될 수밖에 없다.

전염병이 태평양을 오고가는 상황이 아닌 그 때 한반도에서멕시코로 옮겨 갈 턱도 없고 멕시코에서 한반도 옮겨 갈 이유도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조선과 멕시코가 거의 같은 지역에 있었다는 설명이다.

지금 이것이 한반도 기록이라고 한다면 이치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자.

어떻게 중미 즉 아메리카에 그것도 멕시코에서 천연두가 발병하여 생때죽음이 20,000,000명인데 난데없이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줄줄이 천연두 때문에 아니면 돌림병 때문에 아니면 전염성열병 때문에 사망할 수 있는지 이런 도식이 처음부터 맞지 않는 엉터리라는 것이다.

바로 대조선의 영역이 그 가까이에 있었다고 해야 맞다.

대조선은 민족과 인종, 종교를 초월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미국이 롤 모델로 대조선을 본 딴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어자료

(3)1560年,巴西(Brazil)發生天花流行病,死亡數百萬人。

 

마지막으로 한어자료를 보면 “1560년에 남아메리카 브라질에서 천연두가 발생하여 유행했다는데 사망한자가 수백만명이다”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아래 똑 같은 시기에 조선왕조실록 명종18년 1563년 기사에서도 천연두가 발생했다고 하고 있다.

내용은 명종에게 세자의 출합을 묻는 것인데 명종은 출합은 길한 달을 따라 4월에 먼저행하고 묘현에 수반하는 것은 대역(大疫),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으니 아직 하지 말라.”하였다.

지금 한창 천연두가 만연하니 참았다가 진정되거나 출합하라는 교시이다.

이것 역시 기사내용은 남아메리카 브라질 천연두 발생과 연관 할 수밖에 없다.

이치는 두 번째 설명과 똑같은 이치이다.

이상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전염병인데 이렇게 똑 같을 수 있겠는가?

반도역사에 마취되어 편견을 갖지 말고 바로 보자는 말이다.

 

명종 18년 계해(1563,가정 42)

1월11일 (경인)

예조에서 세자의 출합에 관하여 아뢰다

○禮曹啓曰: “考本曹謄錄, 則去丁亥年二月十二日, 世子【卽仁宗大王。】廟見, 是年十月十一日出閤。 以此例觀之, 則廟見隨班, 在出閤之前。 今則何以爲之? 取稟。” 傳曰: “出閤則從吉朔, 先行於四月, 廟見隨班, 則未經大疫,【痘瘡。】姑勿爲之。”

예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등록을 고찰해보니 지난 정해년 2월 12일에 세자【곧 인종대왕이다.】가 묘현(廟見)하였고, 그해 10월11일에 출합하였는데, 이 예로써 본다면 묘현에 수반(隨班)하는 것은 출합하기 이전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지 취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출합(궐 밖으로 나가는 외출)은 길한 달을 따라 4월에 먼저행하고 묘현에 수반하는 것은 대역(大疫) 두창(痘瘡)을 치르지 않았으니 아직 하지 말라.”하였다.

 

(1)숙종 25년(1699)11월

병자년(1636년) 장적(帳籍)을 흉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가 다시 시작하다.

경외(京外)의 호수가 1,293,083호(戶), 인구는 5,772,300명인데, 계유년(1693년)에 비하여 줄어든 집이 253,391호(戶)이고, 사람은 1,416,274명이 줄다

(2)숙종 25년(1699)12월

이때 전염병이 오히려 더욱 치열하다.

서울에 죽은 자 3,900명, 각 도에는 250,700여 명이나 되다

(3)영조 18년(1742)7월

이즈음 군인(軍人)과 민간인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고로, 각 도의 수조(水操: 수군:水軍의 훈련)를 정지하다.

 

본 블로그 앞선 글에서 삼국사기가 전체적으로 따지면 숫자가 10분지 1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바 있다.

그렇다면 일제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만 그렇게 숫자를 조작했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든 사서들을 이런 식으로 36년동안 확실하게 고쳤음을 알아야 한다.

일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은 최근에 일본으로부터 반환 받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때까지 그들이 보관하면서 수정하고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을 뒤늦게 우리에게 반환 한 것이다.

그러니 일본은 탈취해간 사서를 볼모로 과거 역사를 찍어내는 공장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찍어낸 사서를 우리는 역사로 받아 들여 가르치고 외우고 있는 것이다.

피를 토하고 통탄할 일인것이다.

이처럼 일제 입맛에 맞게 만든 것으로 조선왕조실록 역시 숫자가 10분지1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글 뿐만아니라 모든 사서를 읽어야 세계삼한역사관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 된다.

아래 돌림병 또는 전염성 열병이라는 고질, 악질에 걸려 수많은 인명이 손상되었는데 숙종 25년(1699) 인구를 파악한 자료로서 자금만치 1693년 때보다 6년 후에는 1,416,274명이나 줄었다고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숫자에 10을 한번 곱해보자.

숫자 얼마인가?

14,000,000명이란 숫자가 나온다.

멕시코 50년간 20,000,000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그냥 기록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1742년 영조 18년에 기록을 보면 "이즘 파악해보니 군인(軍人)과 민간인 사망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고로, 각 도의 수조(水操: 수군:水軍의 훈련)를 정지하다" 하였다.

수십만명의 어마어마한 군사가 이 천연두로 상실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십만명은 900,000명도 될 수 있고 적게는 200,000명도 될 수 있다.

수십만의 군사를 이 돌림병으로 잃어 버렸다는 것은 당시 대조선은 엄청나고 대단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지만 이 악질때문에 한꺼번에 힘을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영조는 루이15세와 연결된다.

대조선은 대단한 영토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천연두와 기타 치명적인 돌림병 때문에 국세가 약해진 것이 틀림 없어 보인다.

생각해보자.

아무리 강력한 군사력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전염병으로 인해 나라전체가 힘을 잃었다면 그 여파는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종두법을 발견한 영국인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가 조선의 박제가(朴齊家,1750-1805)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이렇듯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따졌을 때도 무엇보다도 충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멕시코와 브라질의 천연두 발병이 조선왕조실록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이야기며 이것은 실제로 멕시코와 브라질이 대조선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이 천연두로 본 대조선의 실제 영역은 실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하고 어마어마하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1524

중종 19년

7월

평안도 용천 경내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자가 706명에 이르다. 의주와 철산읍에서도 병(病)이 돌아 3월 이후 돌림병으로 사망한 자가 의주 687명, 철산 169명, 곽산 40명에 이르다. 평안도에 입주민은 돌림병이 잠잠할 때까지 기다리게 하다.

1524

중종 19년

8월

평안도에 돌림병 사망자가 계속적으로 늘어나 1,700명여명에 이르다.

1524

중종 19년

10월

평안도 귀주에 질병 사망자가 21명에 이르다.

1524

중종 19년

11월

평안도에 돌림병으로 사망한 자가 선천 18명, 곽산 30명, 정주 19명, 철산 10명이고, 7월 이후로는 귀성 107명, 삭주 19명에 이르다. 이 지역에 득병(得病), 와병자가 많은 것을 백성들은 강변의 옛 무덤의 석축(石築)을 모두 파므로써 일어났다고 하다.

1524

중종 19년

12월

평안도에 돌림병이 계속 돌아 10월 이후의 돌림병 사망자가 220명이나 되다. 평안도에 여역(전염성열병) 제문(祭文)을 보내 귀신을 위로하고 유행병이 잠들기를 빌다. 평안도 전후 사망 통계가 3,880여명에 이르다.

1525

중종 20년

1월

평안도에 전염성 열병이 그치지 않고 계속 번져 종묘(宗廟), 명산, 대천에 기도하다. 보통의 전염병은 봄, 가을에 많고 날씨가 차면 잠드는 법인데 이번 것은 겨울에도 오히려 치열하니 괴상하다. 방어 군졸의 전염 사망자 수도 4,800여 명이나 되어 방비가 염려되다. 처음에는 모두 노약자들이 주로 질병에 걸렸었으나 이제는 장년도 걸리고 또한 병을 앓았던 자가 다시 앓기도 하므로, 병을 피해 황해도로 이주하는 자가 많다. 고을마다 사망자가 많아 평양 128명, 의주 94명, 중산 47명, 양덕 14명, 강계 106명, 가산 49명, 철산 27명, 함종 44명, 용강 23명, 선천 57명, 정주 74명, 영변 85명, 성천 22명, 운산 11명이다.

1525

중종 20년

2월

평안도 돌림병 사망자가 합계 7,724명이나 되다.

1525

중종 20년

3월

평안도의 돌림병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12,915명에 이르다.

1525

중종 20년

7월

평안도의 돌림병이 그치지 않아 사망자 통계가 22,349명이나 되다.

1525

중종 20년

10월

평안도 숙천 23명, 함종 16명, 양덕 17명, 가산 3명이 7월 이후 돌림병으로 사망하다.

1526

중종 21년

2월

충청도의 돌림병 사망자가 460명에 이르다. 함경도 경성 경내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한집에 7, 8명이 죽거나 혹은 전 가족이 몰사하기도 하여 사망자가 438명에 이르다.

1526

중종 21년

3월

충청도 돌림병 사망자가 686명, 함경도 976명, 강원도 124명, 경기도 21명, 전라도 928명에 이르다.

1526

중종 21년

4월

경상도의 유행성 열병 사망자 1,290명, 함경도 680명에 이르다. 염병 사망자가 경상도 237명, 염병 사망자가 전라도 560명을 기록하다.

1526

중종 21년

5월

전라도 돌림병 사망 142명, 함경도는 3월 이후부터 580명이 사망하다.

1526

중종 21년

6월

함경도 돌림병 사망자 312명, 경상도 223명, 강원도 111명에 이르다.

1526

중종 21년

7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그치다. 함경도 돌림병 사망이 이 달에 326명이나 되다.

1526

중종 21년

12월

함경도와 강원도에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다.

1527

중종 22년

1월

강원도 삼척, 강릉에 돌림병 사망이 95명이나 되다.

1527

중종 22년

2월

함경도에 돌림병이 유행하다

1527

중종 22년

5월

충청, 경상도에 돌림병이 번지다.

1532

중종 27년

3월

근래 악질(惡疾)이 있는 자가 산사람의 간담(肝膽: 간, 쓸개)이나 손가락을 먹으면 즉효가 있다고 하여, 오작인(仵作人: 시체 사역인, 시체 임검하던 하인)이나 게걸인(거지)에게 비싼 값을 지급하고 그것을 사는 풍습이 유행하다.

심지어는 관찰사 집의 10여 살 날 어린애를 산중에 유괴하여 손가락을 자르고 그 흔적을 줄이려고 온몸을 칼로 찔렀으나 요행히 목숨은 건지 바 있다. 형조 당상 및 좌우 포도대장에게 명하여 범인 체포를 독촉하다.

1534

중종 29년

5월

경상도에 돌림병이 있어 영해부에 질병으로 사망한 자가 190여 명이고, 안동부에 911여 명이다

1535

중종 30년

3월

강원도 울진현의 촌민, 관속이 돌림병으로 죽은 자 190여 명에 이르다.

1538

중종 33년

6월

평안도 의주, 용천, 철산 등지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전염되어 사망한 자가 거의 150여 명이 되다.

1540

중종 35년

6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민간인이 많이 죽다.

1541

중종 36년

1월

서울 뿐 아니라 충청도 천안, 목천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200여 명에 이르다. 평안도에 소의 돌림병(구제역)이 크게 퍼져 죽은 소가 3,515마리나 되다.

1541

중종 36년

3월

지난겨울부터 금년 봄까지 비가 오지 않고, 돌림병이 심해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다.

1542

중종 37년

2월

함경도 회령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200여 명이고, 덕원, 함흥, 홍천에는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람이 많이 죽다.

1542

중종 37년

3월

경상도에 돌림병이 크게 번지다. 함경도 경성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700여 명이나 되다.

1542

중종 37년

5월

함경도 각 읍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42

중종 37년

7월

전라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나주 419명, 영암 308명, 강진 232명이 죽다.

1544

중종 39년

2월

부평에 돌림병이 돌고, 강화도에는 온역(瘟疫: 봄철 전염병)으로 80여 명이 죽다.

1544

중종 39년

3월

앞서 강화도에 돌림병이 치열하여 의원을 보냈으나, 이 의원이 염병(장티푸스)으로 의심하여 두려워 스스로 여염집을 드나들며 치료를 하지 않아 55명 사망에 앓고 있는 자 56명이나 되므로 그 의원을 체포하고 다른의원을 보내다. 경상도 고성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100여 명이 되다.

1544

중종 39년

4월

충청도에 전염성 열병 치열하여 아산현은 40여 명 사망에 131명이 앓고 있으며, 보은은 13명 사망에 앓고 있는 자 166명, 청주는 163명이 죽고 177명이 앓다.

1545

인종 1년

3월

충청도 임천, 공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6

명종 1년

4월

함경도에 전염성 열병이 극심하여 사망자가 갑산 28명, 삼수 73명, 홍원 26명, 길주 127명, 명천 80명, 경성 79명, 부령 38명, 회령 92명, 온성 197명, 경원 134명, 경흥 67명 등 도합 1,331명이나 되다. 경기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가평 170명, 김포 32명, 영평 180명이 죽다. 경상도 비안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6

명종 1년

5월

충청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남녀 사망자 261명, 누워 앓는 자 253명에 이르고, 경기도 부평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44명 병사, 169명이 앓고 있다.

1546

명종 1년

6월

전라도 임실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다.

1546

명종 1년

7월

경상도 청송, 비안에 돌림병 사망자가 60여 명에 이르다.

1546

명종 1년

10월

경기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7

명종 2년

1월

충청도 청산, 영춘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다. 강원도 춘천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47

명종 2년

3월

평안도 용강, 충청도 한산 등지에 전염성 열병이 크게 일다.

1547

명종 2년

5월

성안에 전염병으로 60여 명이 앓고 있고, 또한 길에 거지와 성 밖에 시체가 즐비하므로 활인서 및 오작인을 벌하다.

1547

명종 2년

6월

충청도 청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75명이 사망하다.

1547

명종 2년

7월

전라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맹렬하다.

1547

명종 2년

11월

강원도 통천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다.

1548

명종 3년

1월

한성부의 5부(部)에 전염성 열병 사망자가 많아, 각 방(坊)에 별도로 의무(醫巫)를 보내 구료하게 하다.

1548

명종 3년

3월

충청도 황간에 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184명이 죽다. 공주, 서산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청주는 정월 이후 사망자가 31명, 현재 앓고 있는 자가 19명이고, 온양은 사망자가 70명에 앓고 있는 자가 93명, 진천은 사망자가 560명에 현재 와병중인 자가 989명, 회인은 10명이 죽다. 황해도에도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다.

1548

명종 3년

4월

충청도, 전라도, 황해도, 경상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각각 140명, 359명, 158명, 1,683명이 사망하다.

1548

명종 3년

5월

충청도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187명이 죽다. 평안도 평양, 중화, 자산, 삼등, 순안 등지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438명이 죽다. 황해도 황주, 해주, 서흥, 신천, 봉산, 수안, 백천, 재령, 강음, 송화, 은율, 장연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많고, 경기도에는 421명이 죽다.

1548

명종 3년

6월

경상도에서 전염성 열병으로 630명이 사망, 충청도에는 사망자가 530명, 와병중인 자 760명 가운데 448명, 강원도 229명, 평안도 129명이 죽다. 이때 석웅황(石雄黃)을 사용하면 서로 전염치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1549

명종 4년

3월

경기도 여주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600여 명에 이르다.

1549

명종 4년

4월

경기, 강원도에 전염성 열병으로 사망자가 많다.

1549

명종 4년

6월

청홍도(충청도)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150여 명이 사망하다.

1549

명종 4년

12월

북도의 겨울 추위가 다른 도(道)보다 심한데, 금년 겨울은 봄같이 따뜻하여 전염성 열병이 점점 날로 번져 사망자가 11명이 발생하다.

1550

명종 5년

5월

충청도 청주, 청양, 음성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발하다.

1550

명종 5년

6월

대궐 내의 군사들 가운데 와병자가 많이 발생하므로 구료소의 양식물을 활인서에서 지급케 하다. 평안도 정주, 귀성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와병자가 400여 명, 사망자가 90여 명이 되다.

1551

명종 6년

2월

경기도 고양, 안산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3

명종 8년

12월

전라도 두도에 꽃이 만발하고, 양맥(보리와 밀)의 이삭이 패고, 오얏(자두)과 매화가 열매를 맺다. 황달, 학질 전염병 사망자가 전국에 걸쳐 심히 많다.

1554

명종 9년

2월

경상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4

명종 9년

3월

전라도에도 돌림병이 치열하다.

1554

명종 9년

5월

충청도 홍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 444명, 와병자 621명이다. 강원도에는 대략 1,100여 명이 죽고, 전라도에는 1,550여 명이 죽다.

1557

명종 12년

2월

경기도 이천, 교동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7

명종 12년

3월

경기도 부평 경내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57

명종 12년

6월

경기도 인천, 부평에서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62

명종 17년

4월

충청도 진천현에 전염성 열병으로 남녀 70여 명이 사망하고, 제천에도 20여 명이 죽고 138명이 와병중이다.

1562

명종 17년

6월

원주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백성이 많이 요절하다.

1563

명종 18년

6월

충청도 해미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1566

명종 21년

2월

서울에 사람을 죽이고 쓸개를 탈취하는 자가 빈번하다. 간혹 체포되어 죄를 받는 자도 있다. 이즈음 사서(士庶)들이 음식을 숭상하고 색(色)을 좋아하여 음창(淫瘡: 성병)을 많이 얻다. 어느 의관(醫官)이 가르쳐 주길, 만약 사람의 쓸개를 얻어 치료하면 그 질병이 치유된다 하여 비싼 값으로 사람을 모집하여, 사람을 죽이고 그 쓸개를 빼내다. 서울의 동활인서, 보제원, 인제원, 종루 등지에 거지들이 많이 모였으나, 최근 4, 5년간 1명도 보이지 아니하니 대개가 쓸개를 탈취하기 위해 모두 살해된 것이다. 거지가 없어지자 이제는 평민에게까지 미치는 고로 여염집에서 아이를 잃은 자가 빈번히 많다.

1566

명종 21년

4월

충청도 신창에 물이 넘치고, 홍주의 민가에는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6

선조 9년

6월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케 하다. 이때 서울 안팎의 사람들이 창질(瘡疾)을 치료하는데 사람의 간과 쓸개(肝, 膽)로써 약을 하다. 흉악한 무리들이 어린이를 사람 없는 곳에 유괴하며, 비록 건강한 남녀라 할지라도 혼자서 길을 가면 겁탈하여 배를 가르고 쓸개를 탈취하여 비싼 값에 팔려지므로, 나무숲에 결박되어 배 갈라진 자가 산골에 서로 마주 볼 지경이다.

1577

선조 10년

 

8도(道)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다. 민간에 와전되어 독역신(毒疫神)이 내려왔기 때문이라 하여, 잡곡밥으로써 역귀를 물리치다.

1577

선조 10년

1월

충청도 천안군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많으며 인근으로 퍼지다.

1577

선조 10년

2월

평안도, 황해도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7

선조 10년

3월

양계(兩界: 평안, 함경도)에 돌림병이 치열하다.

1577

선조 10년

4월

평안도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6,000여 명에 이르다.

1577

선조 10년

7월

8도에 홍수가 나고, 전염성 열병이 성하다. 관서지방의 백성들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자가 매우 많아 호인(胡人)들이 변경을 넘볼 수 있을 지경이다.

1577

선조 10년

12월

양남(영호남)에 전염성 열병이 치열하므로 제사를 지내다.

1578

선조 11년

6월

큰 비로 강이 범람하고, 산이 무너지고 집이 떠내려가다.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도)에는 전염성 열병이 아직 치열하여 죽은 백성이 많다.

1580

선조 13년

3월

전라도에 전염성 열병이 만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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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4년 신묘(1591,만력 19)

1월4일 (신축)

간원이 이대화·이희득을 개체할 일, 허준의 당상관 가자를 환수할 일을 논한 데 대한 비답

○辛丑/司諫院前啓, 李大禾改正事, 李希得改遞事, 許浚堂上加還收事, 入啓, 答曰: “告于本官措捕事, 載於啓本, 實非虛瞞。 夫掠人功而以爲己功, 極是無狀的事, 大禾豈如此乎? 此事無疑矣。 李希得誠爲可合。 久在近侍之人, 加一資, 亦非不可。 去歲豆瘡之證極驗, 閭閻一家之內, 或有連化者, 聞來駭耳, 聽之驚慘。 此兒之姊亦因痘瘡而逝。 旬日之內危急, 實無望其更甦, 幸而救活, 是浚之功, 非加資, 不足以報之。 不然何敢强拂朝廷之意? 夫人主之賞, 卽爲恩澤, 豈有例耶? 又何賞等級之可論乎? 予欲借一資朝廷, 朝廷似當許之。”

사간원이 전에 아뢴, 이대화를 개정할 일, 이희득을 개체할 일, 허준의 당상관 가자를 환수할 일을 입계하니, 답하였다.

“본 고을에 고하여 체포했다는 것이 계본(啓本)에 실려 있으니 사실은 속인 것이 아니다. 남의 공을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삼는 것은 지극히 무상(無狀)한 일인데 대화(大和)가 어찌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이 일은 의심할 것이 없다. 이희득의 일은 진실로 합당한 것이다. 오랫동안 근시(近侍)의 자리에 있었는데 한 자급을 더해주는 것은 불가한 것이 아니다. 지난해 두창(痘瘡)이 매우 위험했었는데 여염에서는 한집안에서 잇달아 죽은 경우도 있다니 놀라고 참담함을 느꼈다. 이번 아이의 누이도 두창으로 잃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위급해져 다시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다행히도 다시 살아난 것은 허준의 공이니, 가자하지 않으면 그 공을 갚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조정의 뜻을 어찌 강력히 거절하겠는가. 임금의 상은 곧 은택인데 어찌 전례가 있을 것이며 상의 등급을 논할 수 있겠는가. 내가 조정에게 한 자급을 빌리고 싶으니 조정에서도 허락하는 것이 온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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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

선조 36년

3월

전라도 내에 전염성, 열병대소역(大小疫: 두창과 홍역), 대두온(大頭瘟)으로 죽는 자가 없는 날이 없다. 특히 장성읍에는 가문이 전멸한 사례가 있다. 성황 등 절에서 제사를 고하다. 병을 얻으면 처음에는 면종(面腫: 얼굴에 나는 부스럼)과 같이 목안이 부어 아프나 약이 효과가 없다. 한집에 5, 6명이 서로 전염되어 누워 앓다가 5일이 못되어 문득 죽으니 극히 참혹하다.

1612

광해 4년

1월

함경동 기근의 뒹 전염성 열병이 다시 치열하고 경흥 등 읍에 사망자가 줄을 잇다.

1628

인조 6년

12월

장단과 개성부에 두창(痘瘡: 손님마마, 두창은 두창바이러스 (smallpox virus or variola virus)에 의해 발생하는 질환으로, 흔히 “천연두”, “마마” 로도 불리는 병이다. 두창바이러스 (variola virus)는 Poxviridae과의 Orthopoxvirus속에 속하는 이중나선 DNA 바이러스(double-stranded DNA virus)이며 백시니아바이러스(vaccinia virus) 등으로 생물학적 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은 병원체이다.)이 유행하다.

1668

현종 9년

4월

8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이어지는데 마마(두창, 천연두)와 홍역으로 사망한 자가 많다.

1669

현종 10년

3월

황해도에 두창(痘瘡: 마마, 천연두) 사망자가 900여 명이다.

1671

현종 12년

2월

전라도에 기근과 동사로 죽은 자가 239명,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753명이나 되다.

경기도에 전염병 사망이 147명에 이르다.

제주도에 동사, 아사, 질병 사망자가 437명이나 되다.

강원도 전염병 사망자 116명, 강화부 50여 명, 경상도 200여 명, 황해도 5,000여 명이나 되다.

8도의 백성들이 기근, 두창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가운데 특히 삼남(三南) 지방이 심하다.

1671

현종 12년

3월

전라도에 전염병 사망자가 1,730명에 이르고, 굶주린 백성이 133,590여 명, 길에서 사망한 자가 140여 명이다.

1680

숙종 6년

9월

도하에 두진(마마)이 크게 치열하다.

1693

숙종 19년

8월

제주도에 대소두(대소두) 괴질 환자가 1,950명이나 되어 기도를 행하게 하다.

1699

숙종 25년

11월

병자년(1636년) 장적(帳籍)을 흉년으로 인해 중지하였다가 다시 시작하다. 경외(京外)의 호수가 1,293,083호(戶), 인구는 5,772,300명인데, 계유년(1693년)에 비하여 줄어든 집이 253,391호(戶)이고, 사람은 1,416,274명이 줄다.

1699

숙종 25년

12월

이때 전염병이 오히려 더욱 치열하다. 서울에 죽은 자 3,900명, 각 도에는 250,700여 명이나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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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6년 경신(1680,강희 19)

10월18일 (계묘)

중궁이 두창으로 앓다. 송시열의 환향을 만류하다

○中宮有違豫之候, 證涉痘患。 時, 上亦未經痘疾, 藥房都提調金壽恒請對, 請自上移御他宮, 上許之。 壽恒又言: “宋時烈以子病, 欲陳疏退歸, 宜竭誠挽留。” 是日時烈上疏乞歸, 上賜優批勉留。

중궁(中宮)이 편찮은 징후가 있었는데, 증세가 두창(痘瘡) 병환이었다. 그때 임금도 또한 아직 두창을 앓은 적이 없었으므로,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이 다른 궁궐로 이어(移御)하기를 청(請)하니, 임금이 이것을 허락하였다. 김수항이 또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이 아들의 병(病) 때문에 상소하여 조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만류(挽留)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송시열이 상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내용으로 비답(批答)을 내리고 만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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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6년 경신(1680,강희 19)

10월19일 (갑진)

중궁이 두창으로 앓자, 자전을 받들고 창경궁으로 이어하다

○時, 中宮患痘疹, 證候分明。 上遂奉慈殿, 移御于昌慶宮。

그때 중궁(中宮)이 두진(痘疹)을 앓았는데, 증후(證候)가 분명해지자, 임금이 드디어 자전(慈殿)을 받들고 창경궁(昌慶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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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36년 경인(1710,강희 49)

2월14일 (기유)

지평 홍중우가 약원의 상전과 진하 후의 무릇 관계된 절목에 대한 일로 아뢰다

○己酉/持平洪重禹上疏, 請藥院賞典及陳賀後凡干節目, 悉遵癸亥【卽上經痘之年。】己卯【卽春宮經痘之年。】所已行者, 而深體少愈之訓, 毋忘寢疾之日, 上答曰: “朝家賞典, 務歸得中, 癸、己之例, 不宜爲援也。 疏末所陳, 可不留心焉?” 蓋昨年春宮瘧患, 平復後, 未行賀儀, 合行於今番, 故重禹欲重其事, 同之於癸、己兩年也。

지평(持平) 홍중우(洪重禹)가 상소하여, 약원(藥院)의 상전(賞典)과 진하(陳賀) 후의 무릇 관계되는 절목(節目)을 모두 계해년【곧 임금이 두창(痘瘡)을 앓은 해이다.】과 기묘년【곧 춘궁(春宮)이 두창을 앓은 해이다.】에 이미 행한 것을 따르도록 청하고, 조금 나았을 때 더욱 조심하라는 훈계(訓戒)를 깊이 체찰(體察)하여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던 날을 잊지 말도록 청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조가(朝家)의 상전(賞典)은 적중함을 얻는 데로 귀착(歸着)되기를 힘써야 하니, 계해년과 기묘년의 예(例)를 끌어대는 것은 마땅하지가 않다. 상소문의 끝에 아뢴 말은 유의(留意)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개 작년에 춘궁(春宮)의 학질이 나은 뒤에 하의(賀儀)를 거행하지 않아 이번에 아울러 거행하므로, 홍중우가 그 일을 중(重)하게 하고자 하여 계해·기묘 양년(兩年)과 같이 하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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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2

영조 8년

4월

삼남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성하다. 해당 도의 중앙에 단을 설치하고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다. 경상도 각 읍에서 전염병과 마마가 아울러 치열하다. 영덕현에 괴질이 있어 일시에 죽은 자 64명이다.

1732

영조 8년

5월

도하 전염병이 날로 치열하여 병자가 1,500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서로 계속 잇는 고로 환자에게 양식 쌀을 지급하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백성이 많이 죽다.

제주도에 황충(누리)과 전염병이 치열하다.

1731

영조 7년

6월

영남지방에 전염병이 돌아1,915명 중 325명이 사망하다. 안동지방에만도 100여 명이 죽다. 호서지방은 1,050명 중 378명이 사망하다.

1732

영조 8년

2월

경상도 각 읍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다.

1732

영조 8년

4월

삼남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성하다. 해당 도의 중앙에 단을 설치하고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다. 경상도 각 읍에서 전염병과 마마가 아울러 치열하다. 영덕현에 괴질이 있어 일시에 죽은 자 64명이다.

1732

영조 8년

5월

도하 전염병이 날로 치열하여 병자가 1,500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서로 계속 잇는 고로 환자에게 양식 쌀을 지급하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극성을 부려 백성이 많이 죽다.

제주도에 황충(누리)과 전염병이 치열하다.

1732

영조 8년

6월

충청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백성이 많이 죽다.

1732

영조 8년

9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733

영조 9년

3월

경상도 칠원, 곤양 등 24읍에서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자가 800여 명에 이르다.

1733

영조 9년

4월

경기도에 전염병 사망이 300여 명에 이르다.

전라도에서 전염병이 다시 치열하여, 흥양 1읍의 사망자가 147명이고, 경상도 26읍에 사망자가 800여 명이다.

경상도의 전염병 사망자가 모두 3,399명이다.

1733

영조 9년

5월

강원도에 우박이 커서 새알만하고, 전염병 사망이 268명이다. 경상도가 오래 가물고 전염병이 더욱 치열하다.

곤홍도(충남)의 유민(流民) 사망이 7,540여 명이다.

전라도의 전염병 사망이 1,084명이다.

1740

영조 16년

2월

평안도에 전염병 기운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사람들이 많이 죽다.

1741

영조 17년

5월

관서 지방에서 큰 질병으로 죽은 자 1천여 명으로 집계되다.

1741

영조 17년

7월

관서 지방에서 큰 질병으로 사망한 자가 3,700여 명이나 되다.

1742

영조 18년

1월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에서 전염병이 크게 일어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1742

영조 18년

4월

서울 안팎의 전염병이 치열하여 죽은 자가 몇 만 명인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1742

영조 18년

6월

이때 전염병 기운이 크게 치열하여 비록 집문을 닫고 방에 앉아 있을지라도 전염될까 염려하다.

1742

영조 18년

7월

이즈음 군인(軍人)과 민간인 사망자수십만 명에 이르는 고로, 각 도의 수조(水操: 수군:水軍의 훈련)를 정지하다.

1742

영조 18년

10월

전염병이 다시 치열하여 전염병 제사를 행하다. 경기, 해서, 영남에서 전염병이 9월부터 다시 치열하여 사망자가 서로 이어져 셀 수 없을 정도다.

1742

영조 18년

11월

겨울이 따뜻하기가 봄과 같아 전염병이 크게 발생하여, 사망자가 많아 8도에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1742

영조 18년

11-12

경기, 호서, 호남, 영남, 관서, 북도 및 송도(개성)에 전염병이 다시 일어 사망자가 수만 명이다.

1743

영조 19년

3월

죄수가 질병에 걸리면 옥관(獄官)을 옥문 밖에서 지키게 하다.

1743

영조 19년

6월

함경도 명천에서 비, 눈, 모진 바람이 연 3일 동안 크게 불고 전염병이 하루가 다르게 치열하다.

1743

영조 19년

12월

각 도에 전염병이 크게 치열하여 사망이 6, 7만 명을 넘다.

1746

영조 22년

4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크게 일어 금산 등 21읍의 죽은 자가 949명이나 되다. 경상도에선 687명이 죽다.

1746

영조 22년

5월

서울 외에 전염병이 점차 치열하여 8도에 전염병 제사를 설치하다.

1746

영조 22년

6월

전염병이 심히 치열하여 충청도에 사망, 1,657명, 경상도 1,614명이 되다.

1746

영조 22년

7월

전라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사망이 1,385명이다.

1763

영조 39

 

다산 정약용 두 살 때 완두창(豌豆瘡)을 앓았다.

1786

정조 10년

4월

근래에 반진(斑疹: 마진:痲疹: 온몸에 좁쌀 모양의 붉은 점이 돋는 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 서울 안팎으로 두루 치열하다. 상하 귀천 구별없이 가난하여 약을 구하기 어려운 자에게 질병의 증상을 진찰하여 약을 지급하다.

1788

정조 12년

9월

호서 지방에서 돌림병이 돌다. 영남지방도 그러하다. 탐라에 전염병으로 백성이 많이 죽다. 질병으로 인해 농사와 어업을 못하는 자는 세금을 감해 주다.

1789

정조 13년

5월

해서, 영남지방에 유행병이 많다.

1790

정조 14년

3월

평안도 삼등 등 읍에 전염병이 치열하다.

1790

정조 14년

4월

북도에 전염병이 치열하여 환자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라, 향과 축문을 보내 제를 지내다.

1790

정조 14년

6월

북도에 두창이 돌다.

1791

정조 15년

5월

해서 지방에 큰 질병이 돌다. 금위신번 해서군(海西軍)은 귀향시켜 농사일을 돌보게 하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유배(流配) 죄인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다.

1792

정조 16년

2월

재령인 김경화가 가난한 자와 전염병에 걸린 자를 거의 천여 명이나 구한 공이 있어 상(賞)을 내리다.

1793

정조 17년

4월

호서, 영남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전염병 제사를 지내다.

1793

정조 17년

5월

죄수 중 질병에 걸린 자에게 약을 나눠주고 구료하다.

1793

정조 17년

6월

호서, 호남, 영남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한 자가 많다.

1808

순조 8년

7월

호서에 전염병이 더욱 심하므로 19읍에 비변랑을 보내 각 읍민들을 위무하다.

1812

순조 12년

4월

해서지방에 전염병이 치열하므로 별여제를 도내 중앙읍에 설치하고 행하다. 도하 돌림병이 점점 만연하다.

1812

순조 12년

9월

홍경래(洪景來)관서병란(兵亂)에 기근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백성들의 사망이 많은지라 신구환곡(新舊還穀)을 탕감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