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顯宗), 숙종(肅宗)은 순치제(順治帝)와 강희제(康熙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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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 숙종(肅宗)은 순치제(順治帝)와 강희제(康熙帝)이다.
1671년에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대기근이 있었고 때문에 경기, 충청도에서 민란 일어났다.
대륙에는 오삼계가 주동이 되어 삼번의 난(1667-1681)이 일어났는데 흡사하게 맞아 떨어진다.
특히 조선에서 경기, 충청도에서 민란이 일어난 그해 현종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긴다.
적어도 민란과 관계되는 옮김이다.
현종과 숙종은 재위 중에 무슨이유인지 분명찮게 이어(移御)와 환어(還御)를 반복하는데
현종은 1659.12.22 순치(順治)16년부터 1673.8.2 강희(康熙)12년까지 아홉 번 씩이나 경덕궁(慶德宮)을 이어(移御)와 환어(還御)를 반복하였고
1.경덕궁(慶德宮)옮김1659.12.22 순치(順治)16년
2.창덕궁(昌德宮)옮김1662.2.11 강희(康熙)1년
3.경덕궁(慶德宮)수리1666.7.20 강희(康熙)5년
4.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기려고 하니, 해조를 시켜 택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때 바깥에서 전하는 말은 궁중이 불결하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혹은 재이 때문에 이 하교가 있었다고도 하였다.1671.1.26 강희(康熙)10년
5.경덕궁(慶德宮)옮김1671.2.2 강희(康熙)10년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대비와 세자도 같은 날에 옮겼다.
6.경덕궁(慶德宮)옮김1671.2.4 강희(康熙)10년
대왕대비와 중전이 거처를 옮겼다.
7.창덕궁(昌德宮)옮김1671.4.28 강희(康熙)10년
상이 옛 거처인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기고, 왕대비·세자·빈궁도 이날 옮기었다.
8.경덕궁(慶德宮)옮김1673.7.23 강희(康熙)12년
약방제조(藥房提調) 등과 여러 승지가 청대하고 들어와 아뢰기를,
“들으니, 명선공주(明善公主:1660~1673)의 병 증세가 분명히 두역(痘疫)이라고 합니다. 상께서도 빨리 피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공주도 마땅히 궐 밖으로 내어다 두고 치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안으로 마땅히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기겠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을 먼저 가게 하라.”하고, 저녁에 상이 경덕궁으로 옮겼다.
9.경덕궁(慶德宮)옮김1673.8.2 강희(康熙)12년
유시(酉時)에 왕세자(王世子)가 경덕궁(慶德宮)에 옮겼다.
숙종 또한 1674.5.30 강희(康熙)13년부터 1718.2.21 강희(康熙)57년까지 열다섯 번씩이나 창덕궁(昌德宮)과 경덕궁(慶德宮)을 번가라 가며 이어(移御)와 환어(還御)를 반복하였다.
1.창덕궁(昌德宮)옮김1674.5.30 강희(康熙)13년
상이 경덕궁에서 창덕궁의 옛 거처로 옮겼다. 이날 유시에 상여를 실은 배가 아무 일 없이 능 밑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 유시에 널을 배에서 받들어 내려 여시위(轝侍衛)가 메고 능 안의 영악전에 도착한 다음 빈소를 만들었다.
2.창덕궁(昌德宮)옮김1674.6.2 강희(康熙)13년
중전이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3.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675.5.12 강희(康熙)14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 하고, 두 혼전(魂殿)도 또한 옮겨 모셨다.
4.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680.8.11강희(康熙)19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어(移御)하였다.
5.경덕궁(慶德宮)에서 인경황후 승하1680.10.26 강희(康熙)19년
2경에 중궁(인경 왕후)이 경덕궁에서 승하하다
6.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691.2.8 강희(康熙)30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어(移御)하였다.
7.경덕궁(慶德宮)이어(移次)1691.2.10 강희(康熙)30년
왕세자가 경덕궁에 이차(移次)하였다.
8.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698.9.5 강희(康熙)37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9.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707.7.26 강희(康熙)46년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10.창덕궁(昌德宮)환어1708.8.27 강희(康熙)47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으로부터 창덕궁(昌德宮)에 돌아와 거처하였다.
11.경덕궁(慶德宮)환어(還御)1711.10.7 강희(康熙)50년
중궁전(中宮殿)이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12.중궁전(中宮殿)경덕궁(慶德宮)환어1711.12.1 강희(康熙)50년
중궁전(中宮殿)이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하였는데, 왕세자가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문안한 후에 그대로 배환(陪還)하였다.
13.창덕궁(昌德宮)환어(還御)1712.4.13 강희(康熙)51년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창덕궁(昌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14.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1718.2.20 강희(康熙)57년
임금과 중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담청색포(淡靑色袍)·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출궁하였는데, 세자의 지송(祗送)하는 복색도 그와 같았다. 이는 기복(期服) 중에 있으면 길복(吉服)을 착용하지 아니하기 때문인데, 대신들이 의논하여 정한 것이다.
15.경덕궁(慶德宮)이어(移御)이차(移次)1718.2.21 강희(康熙)57년
세자가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차(移次)하였다. 임금과 중궁 양전(兩殿)은 이미 어제 이어하였으나, 관상감에서 세자는 이날에 이차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따른 것이다.
임금이 이어(移御)와 환어(還御)한다는 것은 극히 불안한 정세를 암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위급한 상황을 숨기고 그냥 단편적인 설명만 간단하게 기술해 놓았다.
분명 무엇인가 왕족전체가 쫓긴 것이 틀림 없어 보이는 상황들이다.
이것이 경기, 충청도에 민란이 발생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 일어나 14년이나 끌었던 삼번의 난을 피해 옮겨 다닌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여기서 상기해야 할 것은 근세기 조작세력들에 의하여 대륙조선의 황제를 청나라 황제와 한반도 조선의 왕으로 분리함에 있어 대외 성격이 강한 중요한 사건들과 치적들은 모두 청나라 황제에게 옮겨 기술하였고 내부적인 왕가의 세력다툼, 당파들의 난립, 갈등 등은 조선 왕들에게 전부 옮겨 기록 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을 구분하지 않고 합쳐 보면 실제 역사가 보인다.
지금은 아무리 청나라와 조선이 근세기 조작세력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혼입되었다고 하여도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자료는 극히 없다.
하지만 혼입되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밝혀 하나하나 쌓다 보면 그것이 바로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결코 멈출 수가 없다.
이것이 본 블로그가 주장하고 싶은 요점이다.
후금(後金,1616~1636)를 분리하고 볼 때 청(淸,1636~1912)나라라고 하는 제국의 초대상징적인 존재 홍타이지(皇太極) 숭덕제(崇德帝:1592.11.28~1643.9.21,재위 1626~1643)를 제외하면 바로 청 세조(世祖) 순치제(順治帝)가 시조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도 마찬가지로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역시 기존 이성계왕조세력을 쿠데타 반정(1623)을 일으켜 광해군(光海君:1575~1641,재위1608~1623)왕조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는데 인조(仁祖)는 청의 홍타이지처럼 상징적인 왕으로서 조선후기 실제적인 시조왕은 바로 현종(顯宗)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인조반정인데 이 반정의 시기가 1623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홍타이지가 재위 한 년도 1626년과 불과 3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어 혼입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인조(仁祖)를 홍타이지(皇太極)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본 블로그에서 이미 철종(哲宗:1831.6.17-1863.12.8,재위1849.6.9-1863.12.8)과
함풍제(咸豊帝:1831.7.17~1861.8.22,재위1850~1861)가 혼입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여 올린 적이 있다.
그렇다면 청나라는 조선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 할 수 있어진다.
계속하여 청나라의 순치제, 강희제와 조선의 현종, 숙종관계를 풀어보자.
먼저 산술적인 계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청나라의 순치(23세)와 강희(68세)의 년 수를 합하면 91세가 된다.
그리고 조선의 현종(33세)과 숙종(59세)의 년 수를 합하여 92세가 되어 1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현종 즉위년(1659)12월22일~숙종44년(1718)2월21일
18대 현종(顯宗:1641~1674,재위1659~1674) 33세
19대 숙종(肅宗:1661.8.15~1720.6.8,재위1674~1720) 59세
순치(順治)16년~강희(康熙)57년
청나라 세조(世祖)순치(順治:1638.3.15~1661.2.5:재위1643~1661) 23세
청나라 성조(聖祖)강희(康熙:1654.5. 4~1722.12.20:재위1661~1722) 68세
묘하게도 양나라 국왕 두 사람이 각각 한사람처럼 태어나고 죽는 운명을 똑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진다.
우연인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부터 철저하게 청나라와 혼입되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숙종(肅宗)과 강희제(康熙帝)는 여러 가지 면에 있어 닮은 점이 많다.
같은 시기에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근세기 조작세력들이 숙종과 강희제가 같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숫자적으로 여러가지로 애쓴 흔적이 보인다.
특히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은 묘호(廟號)와 시호(諡號)관계인데
조선과 청나라 왕(王)들의 묘호와 시호를 보면 기준도 없이 이상하게 마구 꼬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우리가 반도사로 배운 것은 청나라는 대국이고 중국이라 시호를 조선왕에게 준다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따져 보면 근세기 조작 세력들에 의하여 바꿔치기 삽입등으로 속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분명 중국자료에 보면 묘호(廟號)는 황제만이 사용하는 것이고 시호(諡號)는 높은 직책(제후, 왕, 대부 등)에 있었던 사람에게만 허용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은 시호만 있어야 하는 것이고 청나라 황제는 묘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이치이다.
더 나아가 조선은 왕은 시호로 불리워야 하고 청나라 황제는 묘호로 불리워야 맞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은 오히려 황제의 묘호로 호칭한다.
현종, 숙종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분명 시호가 아니라 묘호로 대신하는 호칭이다.
순치제, 강희제는 꺼꾸로 시호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대로 호칭된다.
황제라는 뜻을 필요이상으로 확대하여 크게 볼 필요가 없다.
엄밀히 따진다면 황제란 용어자체가 근세기에 서양에서 들어온 호칭으로 동양 왕들에게 근세기에 유행처럼 서양황제와 비견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란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보다 대왕의 칭호가 동양에서는 더 존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시호(諡號)를 보면
한반도 숙종(肅宗)은 묘호가 숙종이고 시호(諡號)가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이며 존호가 더 해져 정식시호(諡號)가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이라 하여 총자수 또한 45자나 된다.
그리고 원효대왕(元孝大王)이라 한 번 더 강조했다.
믿을 바가 못 되는 기록이지만 이러한 숙종에게 후에 청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더 내려 외칭으로 희순왕(僖順王)이라 했다는 것인데 어디에도 그것을 덧붙여 기록된 것이 없다.
이것이야 말로 근세기 의도적으로 조선국왕을 낮추려 조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전도 멍에와 마찬가지다.
반면 대륙사의 강희제의 묘호는 성조(聖祖)라 하고 시호(諡號)는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라 하여 자수는 총25자 이고 인황제(仁皇帝)를 강조했다.
후손들이 이 시호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대륙자료를 보더라도 묘호(廟號)가 위고 시호(諡號)는 분명 아래다.
즉 대왕(大王)이 위고 황제(皇帝)가 아래다.
시호 총수자가 조선의 왕 숙종은 총자수가 42자인데 반해
청나라 황제는 강희제는 불과 25자 밖에 되지 않고 후금태조(太祖)가 27자로 제일 많다.
이성계 왕 계보의 시호 자수를 보면 이성계가 27자이고 태종이방원은 24자이고 세조역시 24자 이며 나머지 왕들은 대부분 12자~14자에 불과하다.
그런데 14대 선조이후부터 이 시호가 현격하게 늘어나는데 선조가 36자이고 폭군이라는 광해군이 50자이다. 숙종이 42자, 영조 66자, 순조가 77자, 제일 많은 시호자수는 추증왕인 문조(文祖)가 109자로 제일많다.
청나라 시호 자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상한 것은 반도사의 숙종(肅宗)이외 조선왕들은 모두 지금까지 묘호(廟號)로 불린다.
반면 대륙사의 황제 강희제(康熙帝)는 시호(諡號)로 불린다.
묘호(廟號)와 시호(諡號)만을 놓고 보면 존귀하게 취급된 것은 오히려 조선 왕이라 생각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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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계보]
王位 |
廟號 |
諡號 |
韓語 |
名諱 |
別名 |
統治時間 |
王陵 |
追封 |
穆祖 |
仁文聖穆大王 |
목조 이안사 |
李安社 |
|
追封 |
德陵 |
追封 |
翼祖 |
康惠聖翼大王 |
익조 이행리 |
李行里 |
|
追封 |
智陵 |
追封 |
度祖 |
恭毅聖度大王 |
도조 이춘 |
李椿 |
孛顔帖木兒 Temür |
追封 |
義陵 |
追封 |
桓祖 |
淵武聖桓大王 |
환조 이자춘 |
李子春 |
吾魯思不花 |
追封 |
定陵 |
1 |
太祖 |
康獻至仁啟運應天肇統廣勛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
태조 고황제 이성계 |
李成桂 |
李旦 |
1392年-1398年 |
健元陵 |
2 |
定宗 |
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
정종 이방과 |
李芳果 |
李曔 |
1398年-1400年 |
厚陵 |
3 |
太宗 |
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啟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
태종 이방원 |
李芳遠 |
|
1400年-1418年 |
獻陵 |
4 |
世宗 |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세종 이도 |
李祹 |
|
1418年-1450年 |
英陵 |
5 |
文宗 |
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
문종 이향 |
李珦 |
|
1450年-1452年 |
顯陵 |
6 |
端宗 |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
단종 이홍위 |
李弘暐 |
|
1452年-1455年 |
莊陵 |
7 |
世祖 |
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
세조 이유 |
李瑈 |
|
1455年-1468年 |
光陵 |
8 |
睿宗 |
襄悼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
예종 이황 |
李晄 |
|
1468年-1469年 |
昌陵 |
追封 |
德宗 |
懷簡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
덕종 이장 |
李暲 |
|
追封 |
敬陵 |
9 |
成宗 |
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
성종 이혈 |
李娎 |
|
1469年-1494年 |
宣陵 |
10 |
燕山君 廢王) |
憲天弘道經文 緯武大王 |
연산군 이융 |
李隆 |
|
1494年-1506年 |
海等村 |
11 |
中宗 |
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
중종 이역 |
李懌 |
|
1506年-1544年 |
靖陵 |
12 |
仁宗 |
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
인종 이호 |
李峼 |
|
1544年-1545年 |
孝陵 |
13 |
明宗 |
恭憲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
명종 이환 |
李峘 |
|
1545年-1567年 |
康陵 |
14 |
宣宗 |
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歷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 達孝大王 |
선조 이연 |
李昖 |
本名李鈞 |
1567年-1608年 |
穆陵 |
15 |
光海君 廢王) |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壯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 崇業大王 |
광해군 이혼 |
李琿 |
|
1608年-1623年 |
烈陵 |
擅立 |
- |
興安君 |
흥안군 이제 |
李瑅 |
|
1624年 (非正統) |
果川 |
追封 |
元宗 |
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
원종 이부 |
李琈 |
|
追封 |
章陵 |
16 |
仁祖 |
憲文烈武明肅 純孝大王 |
인조 이종 |
李倧 |
|
1623年-1649年 |
長陵 |
17 |
孝宗 |
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 正德大王 |
효종 이호 |
李淏 |
|
1649年-1659年 |
寧陵 |
18 |
顯宗 |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 彰孝大王 |
현종 이연 |
李棩 |
|
1659年-1674年 |
崇陵 |
19 |
肅宗 |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啟休篤慶正中協極神毅 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
숙종 이순 |
李焞 |
|
1674年-1720年 |
明陵 |
20 |
景宗 |
德文翼武純仁 宣孝大王 |
경종 이균 |
李昀 |
|
1720年-1724年 |
懿陵 |
21 |
英宗 |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歷洪休中和隆道肅莊彰勛正文宣武熙敬 顯孝大王 |
영조 이금 |
李昑 |
|
1724年-1776年 |
元陵 |
追封 |
眞宗 |
溫良睿明哲文 孝章大王 昭皇帝 |
진종 소황제 이행 |
李緈 |
|
追封 |
永陵 |
追封 |
莊宗 |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啟祥顯熙莊獻廣孝大王 懿皇帝 |
장조 의황제 이선 |
李愃 |
|
追封 |
隆陵 |
22 |
正宗 |
文成武烈聖仁 莊孝大王 宣皇帝 |
정조 선황제 이산 |
李祘 |
|
1776年-1800年 |
健陵 |
23 |
純宗 |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勛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啟統垂歷建功裕范文安武靖英敬 成孝大王 肅皇帝 |
순조 숙황제 이공 |
李玜 |
|
1800年-1834年 |
仁陵 |
追封 |
翼宗 |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浚祥堯欽舜恭禹勤湯正啟天建統神勛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范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致中達和繼歷協紀剛粹景穆峻惠衍祉敦文顯武仁懿 孝明大王 翼皇帝 |
익종 익황제 이영 |
李旲 |
|
追封 |
綏陵 |
24 |
憲宗 |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 哲孝大王 成皇帝 |
헌종 성황제 이환 |
李奐 |
|
1834年-1849年 |
景陵 |
25 |
哲宗 |
熙倫正極粹德純聖欽命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 英孝大王 章皇帝 |
철종 장황제 이원범 |
李昪 |
本名李元範 |
1849年-1863年 |
睿陵 |
26 |
高宗 |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勛洪業啟基宣歷乾行乾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 仁翼貞孝 太皇帝 |
고종 태황제 이재황 |
李熙 |
本名李載晃 |
1863年-1907年 |
洪陵 |
27 |
純宗 |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
순종 효황제 이척 |
李坧 |
|
1907年-1910年 |
裕陵 |
[청왕조 계보]
廟號 |
諡號 |
姓名 |
在位時間 |
年號 |
皇陵 |
太祖 |
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 高皇帝(追尊) |
愛新覺羅努爾哈赤 |
1616年 |
天命 |
福陵 |
太宗 |
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 文皇帝 |
愛新覺羅皇太極 |
1627年 |
天聰 |
昭陵 |
世祖 |
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 章皇帝 |
愛新覺羅福臨 |
1644年 |
順治 |
孝陵 |
聖祖 |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功德大成 仁皇帝 |
愛新覺羅玄燁 |
1662年 |
康熙 |
景陵 |
世宗 |
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 憲皇帝 |
愛新覺羅胤禛 |
1723年 |
雍正 |
泰陵 |
高宗 |
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 純皇帝 |
愛新覺羅弘曆 |
1736年 |
乾隆 |
裕陵 |
仁宗 |
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孝恭勤儉端敏英哲 睿皇帝 |
愛新覺羅顒琰 |
1796年 |
嘉慶 |
昌陵 |
宣宗 |
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 成皇帝 |
愛新覺羅旻寧 |
1821年 |
道光 |
慕陵 |
文宗 |
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 顯皇帝 |
愛新覺羅奕詝 |
1851年 |
咸豐 |
定陵 |
穆宗 |
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 毅皇帝 |
愛新覺羅載淳 |
1862年 |
祺祥 |
惠陵 |
德宗 |
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 景皇帝 |
愛新覺羅載湉 |
1875年 |
光緒 |
崇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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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新覺羅溥儀 |
1908年 |
宣統 |
華龍陵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