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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랄(오이라트)-oirat

한부울 2009. 8. 16. 23:40

와랄(오이라트) oirat


와랄(瓦剌)부족은 오이라트(oirat)라고 하며, 근세조선에 조공을 받쳤습니다. 왕조실록에 자주나옵니다. 주 거주지역은 신강성의 준가리 분지입니다. 주요도시는 신강성의 오르무치, 이녕(伊寧), 극랍마의(克拉瑪依) 등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칼믹족이라 합니다. 이녕은 천산에서 이리하(伊犁河)에 있으며, 이 강은 발하쉬호로 들어가며 대륙조선사관에서는 열하(熱河)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녕 지역은 해발600미터입니다. 카자흐스탄과 신강성을 천산산맥이 가로막고 있지만, 신강성 서북부의 이녕, 카자흐스탄의 Alakol호수, 이리티쉬강 등은 매우 낮은 지대여서 습기를 품은 공기가 신강성으로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되어 오아시스를 형성해줍니다.


칼믹족(와랄족)은 17세기초 이리하(伊犁河,illi강)주변의 신강성서북쪽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다가 후금(만주족,여진족)에 의해 볼가강에 이주하였으며, 이리하에서는 와랄이라하고, 볼가강에서는 칼믹족(돌궐어로 잔류자)이라 합니다. 이들은 1771년에 다시 이리하에 귀환합니다.

 

          The Tumens of Mongolia Proper and relict states of the Mongol Empire by 1500

 

                                   The Dzungar Khanate at 1750 (light-blue color)

 

                                                           Kalmyk horsemen


따라서 와랄(오이라트)의 거주 지역은 신강성 이리하 주변과 그 하류의 카자흐스탄이고, 올량합(오량해)는 외몽고 서북부 ‘우브스 누우르 염해’와 러시아령 투바 공화국입니다. 이들 부족과 여진족은 거주지가 겹치기 때문에, 여진족은 신강성 북부 이리티쉬 강변을 따라 카자흐스탄 북부 지역과 러시아령에 산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근세조선초에 이만주는 자주 조공를 바칩니다. 여진족은 조선 이전에는 만주족으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만주는 사람이름이면서 부족이름이고, 일종의 부족장의 이름으로 추정됩니다. 이만주의 부족이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했으므로, 여진족이 만주족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주어가 여진어를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조실록을 보면 여진족은 숲이 우거진 지역이고, 추워서 벼농사가 불가능하고, 밭농사는 가능하지만 목축업이 더 적당한 곳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동북삼성의 만주는 이러한 조건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만주지역은 벼농사가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몽고 오르도스 지역, 거연해 지역을 만주로 추정하고 있지만, 이곳은 사막이지 숲이 아닙니다. 왕조실록과는 부합되지 않는 지역입니다.


몽고족과 돌궐족은 거의 같은 부족입니다. 몽고족이 세계를 정벌할 수 있었던 힘은 돌궐족이 몽고족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돌궐족은 유목민으로 카스피해에서 바이칼호까지 산재해서 살았습니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올적합의 위치가 어느 곳인지 추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조선군이 중국인을 올량합 부족으로부터 구출하여 중국 북경에 보내주기로 한 기사가 왕조실록에 있는데, 북경에 가는 길에는 올적합의 영역을 통과해야 합니다. 올적합에게 포로로 잡힐 까봐 조정에서는 근심하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리하를 열하로 본다면 북경(연경)의 위치는 카자흐스탄 발하쉬호 주변으로 볼 수 있으며, 올적합의 위치는 와랄 부족과 겹치는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연경의 위치를 이 지역으로 보는 것이 좀 지나친 면이 있지만 조선에 내조했던, 올량합, 올적합, 와랄, 여진족, 첩목아(티무르) 등이 거주하는 지역을 보면 신강성 북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신강성 북쪽의 러시아령이 되기 때문에 연경의 위치가 카자흐스탄으로 비정되는 것입니다. 명나라는 우선 제외하고, 요, 금, 원, 후금의 수도로서 적격인 곳을 찾다보니, 이 지역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원나라 이전에는 몽고라는 말이 사서에 없습니다. 있기는 하지만 사서를 재 편찬할 때 몽골이라는 말을 끼워넣었을 것입니다. 원나라 이전에는 몽고족은 돌궐족의 하위 부족 이름인 것입니다. 징기스칸이 득세하면서 몽고가 유명해지고, 몽고어 역시 돌궐어의 하위 언어인데, 몽고어가 국제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궐을 흡수한 뒤에는 몽고어와 돌궐어가 합쳐지게 되고 페르시아어 문법의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몽고제국에서 돌궐계통 몽고족은 이슬람을 믿게 되고, 몽고계통은 티벳 라마불교를 수용합니다. 오이라트족이 티벳불교를 믿는 것으로 보아서 돌궐-몽고족 중에서 비교적 징기스칸의 몽고족에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이라트족은 러시아에서 칼믹족이라 하는데, 유럽에서 유일하게 티벳 불교를 믿는 종족입니다. 오이라트족의 하부 부족으로 토굿(torghut)족이 있습니다. 토굿은 토곡혼과 음이 유사함으로 아마도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티벳을 사서에는 토곡혼이라 했으며, 날조사관의 고지도에 청해성 감숙성 지역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즉 청나라는 1700년대에 토곡혼을 물리치고 청해성을 영토로 삼았으므로 현재는 토곡혼의 영역은 서장 자치구만 남게 된 것입니다. 티벳은 지금도 청해성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티벳의 주장을 보면 청해성은 중화민국 때에야 잃어버린 영토라고 합니다. 날조사관의 고지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토곡혼을 청해성으로 고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이라트족이 티벳의 라마불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아서 토곡혼과 오이라트는 겹치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즉 토곡혼은 신강성북부와 카자흐스탄에도 살았다는 뜻입니다. 여진족에 의해 밀려서 현재의 티벳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이라트가 볼가강으로 이주할 때 토곡혼의 일부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오이라트는 세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카스피해 연안으로 간 칼믹한국(주로 Torghut족), 준가르 분지의 탑성을 중심으로 한 준가르한국, 티벳의 게룩파 불교를 보호하는 코슛(Koshut)한국이 있다. 이 중에서 준가르 지역의 오이라트는 왕조실록의 야선과 관계가 깊습니다.


왕조실록에서 야선은 북경을 공격했다고 번역했으나, 원문을 보니 경사(京師)로 되어있습니다. 경사는 섬서성 서안을 가르키고, 북경(연경)은 카자흐스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키백과사전의 글을 보면 야선은 오이라트부족입니다. 야선은 오이라트의 초로스 부족의 추장이고, 나중에 초로스 부족은 준가르 분지에 거주합니다.


러시아령 칼미키아 공화국의 칼믹족과 신강성의 오이라트(와랄)족에 대한 내용을 위키 백과 사전 영문 사이트에서 번역했습니다.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역자 주는 로 표시합니다. 아마도 러시아인이 쓴 것으로 보이고, 영문으로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서 한글로 번역하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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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Oirad, Oyirad)

 

 


오이라트(Oirad, Oyirad)는, 몽고 타카하라인 서부로부터 동쪽 트르키스탄(신쿄)의 북부에 걸쳐 거주하는 민족.


오이라트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15 세기부터 18 세기에 몽고와 대등한 몽고 타카하라의 유력 부족 연합인 오이라트족연합에 속한 제부족의 민족이다. 그들은 근대 중화 인민 공화국, 몽고국의 일부가 된 후, 몽고 민족의 일원으로 간주해지고 있다. 그러나 본래는 오이라트족이다. 러시아 연방에서는 카룸이크인으로 불리고 독립한 민족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인구는 대략 20만명에서 30만명.


몽골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오이라트는 홉스굴 지역에서 일어났다. 홉스굴은 호수의 최대 길이가 134킬로미터나 되는 몽골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며, 지금은 몽골에서 최고의 관광지 가운데 한군데이다.


몽골 서북쪽에서 일어난 오이라트를 흔히 할하 몽골인 또는 동몽골과 구분하여 서몽골이라 한다. 동몽골 지역이 초원 지대라면, 서북 몽골은 주로 초원삼림지대라고 할 수가 있는데, 오이라트라는 부족 이름에서도 지역의 특성을 알 수가 있다. 오이라트는 "숲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오이라트부의 지도자는 칸이라는 직위대신 太師(타이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타이시라는 칭호는 몽골제국 시대 군사령관이라는 의미였다. 오이라트부 지도자가 실권을 장악하였음에도 칸의 지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오이라트부는 칭키스칸의 직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들이 칸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고 하드라도, 몽골의 유목민들이 그를 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는데, 이를 칭키스칸의 통치원리(chinggisid principle)라고 하였다.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그 아들 토곤이 마흐무드의 지위를 이어받는데, 토곤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아울러 토곤의 아들이 에센인데, 이 부자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초원의 패자가 되었다.


1406년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영종까지 관례화되었다. 명나라는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다. 처음에는 50명 정도의 사절단 규모가 에센 때에 이르러 3,000명까지 늘어났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하여 무역량이 늘어나고 밀무역도 성행하였다.


이에 심각한 문제를 겪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1448년 사례감 왕진은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오이라트는 정통제 14년(1449년) 명나라 변방인 산시 성 다퉁(大同)으로 침입하였다.


토목보의 변에 발생하였다. 에센족은 포로로 잡은 영종이 협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1450년에 명나라 조정에 송환했다. 에센이 몽골초원을 지배하고 있을 때, 명목상의 칸은 케룰렌 강에 본거지를 둔 타이슨 칸이었다. 에센은 누이동생을 타이슨 칸의 정부인으로 들여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칸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으나, 타이슨 칸이 여기에 반발을 하면서, 에센을 공격하나 실패하여 살해되었다.


1452년 타이슨 칸 살해 후 에센은 동몽골 황족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가게 되는데, 황족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닌 경우에는 모두 죽여 버렸다. 에센은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동몽골이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것 심지어는 기록과 문서 그리고 족보 등도 거의 모두 소실되어 버렸다.


이듬해 에센은 스스로 대칸 위에 오르게 되는데, 칭키스칸 가계가 아닌 오이라트 계통의 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에센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가 되었다. 에센의 피살과 함께 오이라트 부도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하여 오이라트는 몽골의 서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오이라트는 서쪽에서 새롭게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나중에 몽골 고원을 다시 장악하게 되는 준가르 제국의 등장을 준비하고 있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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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미크인(러시아어: Калмыки, 칼미크어: Хальмгуд)은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의 주민이며 몽골계 민족이다. 현재 약 14만 7천명이 거주하고 있다. 일부는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몽골에도 약간이 거주한다. 러시아 연방 내의 칼미크족은 17세기 초 이리 지방에서 볼가강 유역에 이주한 서몽골족들이 1771년 대부분 이리에 귀환했을 때, 그런 사정을 모르고 볼가 강 유역에 잔류했던 사람들의 자손이다.

칼미크어를 쓰고, 종교는 라마교와 러시아 정교회이다.


칼믹(Kalmyk people)

 

칼믹(칼묵)은 서부몽고인에게 붙여진 이름이고, 그후에 17세기에는 중앙아에서 온 오이라트(와랄)를 가르킨다. 오늘날 그들은 카스피해 서언의 칼미키아 자치 공화국의 다수를 점한다. 이민을 통해서 칼믹 공동체는 미국, 프랑스, 독일, 체코에 정착해왔다.


황태자 셉덴잡(1705-1782년). 칼카 몽골 왕자 쩨렌의 아들 셉덴잡은 만주 장군이었으며, 그의 군대를 준가르 한국에 대항하도록 해서, 1백만명에 가까운 오리라트 부족이 학살되었다.

 

 전통적인 칼믹 야영지. 칼믹 텐트는 ‘게르’라고 하며, 둥글고, 운반할 수 있고, 자립할 수 있는 구조이며, 그것은 격자 울타리, 서까래, 지붕 고리, 펠트(모전,毛氈) 덮개와 팽팽한 끈으로 구성되었다.


기원


칼믹족은 오이라트족의 유럽계이고, 오이라트의 고대 방목지는 현재의 카자흐스탄, 러시아, 몽골과 중국이다. 1368년 원왕조의 몰락 후에, 오리라트는 동부 몽골, 명왕조와 그 계승자 만주왕조에 대항하는 강력한 적으로 출현했으며, 거의 400여년 동안 내몽고와 외몽고에 대한 지배와 통제권을 놓고 군사적 충돌을 하였다. 충돌은 1757년에 준가르의 오이라트가 전멸되면서 끝났으며, 오이라트는 중국에 예속되는 것에 저항하는 마지막 몽고 부족이다.


대학살은 건륭제에 의해서 되었는데, 그는 아무사나 왕자에게 배신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사나는 코이트-오이라트의 귀족으로 만주 당국에 그를 칸으로 불러주는 조건을 제시했다. 1759년 마지막 준가르 통치자 다와 아치의 사후에서야 건륭제는 준가르 출정의 종료를 선언했다.


이 4백년 시기의 시작부터, 서부 몽고인은 자신을 되벤-오이라트(4개의 동맹)라고 불렀다. 동맹은 주로 4개의 서부 몽고족으로 구성된다. 즉, 코슈트, 초로스, 토구트, 되벳이다. 총체적으로 되벤 오이라트는 징기스칸 유산에 대한 부계 계승자인 몽골족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잡으려하였다.


군사적 목표의 추진에 있어서, 되벤오이라트는 자주 주변부족 또는 분열된 부족을 통합하여, 즉 더 큰 부족이 더 작은 부족을 지배하거나 흡수하는 등, 동맹의 구성에 있어서 상당한 정도의 변동이 있게 되었다. 동맹국에 속하는 더 작은 부족은 코이트, 자차친, 바이드, 망기트이다. 그 지역의 돌궐족 즉 우리안하이, 텔렝구엣, 쇼르 등은 역시 자주 되벤 오이라트와 연합하였다.


공동으로, 이러한 부족들은 서부 내지 아시아의 초원을 방랑하였는데, 오늘날 카자흐스탄 동부의 발하쉬호와 중앙몽고 북부의 러시아령 바이칼호 사이였으며, 그곳에 유르트(게르천막)를 치고, 소떼, 양떼, 말, 당나귀, 낙타를 길렀다.


오이라트 고대 선조는 케라이트, 나이만, 메르킷과 원래의 오이라트, 모든 돌궐-몽고부족을 포함하는데, 그들은 징기스칸의 정복보다 앞서서 서부 내지 아시아를 방랑했다[유랑생활]. 폴펠리엇은 “"토르구트(Torghut[돌궐과 음이 유사])" 를 garde de jour로 번역했다. 그가 쓰기를 토르구트는 그들의 이름을 징기스칸의 보호자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이거나, 또는 케라이트의 후손으로서 케라이트족 속에 있었던 구 garde de jour 에서 온 것인데, 이 케라이트는 “몽골비사”에서 아는 바와 같이 징기스칸에 의해 정복되기전의 케라이트를 말한다.


Treatment as Non-Mongols

 

 

                              Portrait of a Kalmyk by Ilya Repin (1871) 칼믹 족의 초상화


비몽고인으로서의 대우


역사적으로 동부 몽고인은 오이라트를 비 몽고인으로 여겼다. “몽골”이름, “칸”타이틀 그리고 역사적 유산 때문에 동부 몽골족 바꿔말하면 칼카, 챠하르, 튀메드 부족이 이름과 타이틀을 독점적으로 갖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검증 필요} 그들은 이러한 자격을 타고난 권리로 생각했는데, 그들의 계통은 직접 몽골족 원제국과 창시자 징기스칸에게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중반까지, 칸 칭호의 수여가 달라이 라마에게 양도되었을 때, 모든 몽고족들은 이 자격과 이것에 따른 정치적 특권을 인정했다. 비록 오이라트족은 이러한 자격을 17세기 중반전까지 주장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정말로 징기스칸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데, 징기스칸의 동생 카사르는 코슈트 부족을 지휘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인 것이다.


서부 몽고족이 “되벤 오이라트”라고 자칭함에 대응하여, 동부몽고족은 “되친(40 몽고)”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다른 표현으로는 “되친 되벤 코야르(40과 4)”이라고 했다. 이 의미는 되벤 오이라트가 4투멘을 갖는 것에 대하여 동부 몽골족은 40 투멘(만 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기병대 단위)을 갖는 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동부몽골이 오이라트로부터 분명하게 구별하는 다른 방법인 것이다(코다코프스키,1992년). 얄궂게도, 1690년대 초반에, 준가르 칸국(17세기-18세기 중반까지, 되벤오이라트의 계승자 국가)의 동부 몽골에 대한 공격은 집요하고 격렬했으므로, 동부 몽골 왕자들은 자발적으로 그들의 백성과 외부 몽골인을 이끌고 만주국[후금]에 복종하였다. [이글은 러시아인이 쓴 것으로 보임]


최근까지도, 칼믹족을 포함하는 오이라트족은 자신들을 몽골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서부 몽골족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몽고어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 주로 칼믹족, 오이라트족, 칼카족 그리고 부리야트족 등과의 밀접한 관계는 다음과 같은 입증된 사실로부터 증명되는 것이다.


1. 그들은 모두 몽골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을 공유한다.

2. 그들 간에 언어적 친화성이 있는 언어를 사용한다.

3. 티벳 불교를 신봉한다.

4. 수세기 동안 서로 죽이는 전쟁과 광대하고 멀리 떨어진 이주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보만샤니노프,1990년)


또 주목할 것은 그들은 유사한 하위 부족명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케레이트, 타이치유트, 메르키트과 초노스이다.


칼믹족에 대한 유전학적인 연구 발표를 보면 그들의 몽고 기원을 지지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칼믹족은, 시베리아 스텝지역의 유라시아인들과는 다르게, 러시아인과 다른 동부유럽인과 대체로 섞이지 않았다:

 

유전학적인 결론은 칼믹족과 몽골족이 밀접한 사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지지하는 것이다. 더구나, 유적학적인 결과는 칼믹 이민은 상당한 수의 개인들을 말려들게 하였으며, 그리고 칼믹족은 러시아인과 혼합(혼혈)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체로 역사적으로 서로 같은 존재를 유지하는 칼믹족의 능력은 러시아인의 다른 유사한 사람들과의 혼혈과는 선명하게 비교가 된다. 예를 들면 러시아인은 야쿠트족과 혼혈되었다는 증거가 있다. 지금까지는, 칼믹족에 대한 유전학적인 분석은 몽골기원을 지지하고 있으며, 칼믹족의 전 가족들이 볼가강 지역에 이주하였으며, 단순히 남성들만 이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This map from Sebastian Muenster's Cosmographia is one of the earliest references to Kalmyks in Western European historical sources.

 

칼믹족 이름의 기원


칼믹은 돌궐어 ‘잔류자’ ‘남아있다’를 뜻한다. 돌궐족은 13세기 초기에 이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랍 지리학자 이만 알-와디는 14세기에 오이라트를 자주 언급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첫번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카스가리아의 코자스는 그 이름{칼믹}을 15세기에 오이라트에 적용했다. 러시아어로 쓰여진 자료에서 1530년 초기에 “콜막 타타르”를 언급했으며, 지도제작자 세바스티안 뮌스터(1488-1552)는 1544년에 출판된 세계지도에 “칼무치”의 영역을 지도에 표시했다. 그러나 오이라트족은 그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름의 어원을 추적하는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는데, 전설 동양학자 피터 시몬 팔라스부터 현재의 학자까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그들의 돌궐족 이웃은 서부로 이민을 가는데, 그들은 알타이 지역에 남아있기로 결정할 때의 초기에 그 이름{칼믹}이 오이라트족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믿기를 그 이름은 ‘칼믹족은 무슬림이 지배적인 지역에 살고 있는 유일한 불교신도’였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치


칼믹족은 주로 러시아 연방 칼미키야 공화국에 살고 있다. 칼미키야는 러시아의 남동부 유럽으로, 볼가강과 돈강사이에 있다. 남쪽으로는 다겐스탄 공화국, 남서쪽으로는 스타프로폴 크라이,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각각 로스토프 오블라스트와 볼고그라드 오블라스트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 경계는 아스트라칸 오블라스트이다. 남동쪽 경계는 카스피해이다.


소련 붕괴후, 많은 칼믹족들 주로 젊은이들은 칼미키아에서 러시아 대도시 모스크바와 성 페테르스부르그 그리고 미국에 이주하였다. 이러한 칼믹족들이 더 좋은 교육과 경제적 기회를 구하려는 바램으로 이주가 촉진되었다. 지금도 이주는 계속된다.

 

                          전통 노란색 모자를 쓰고 있는 라마 몽케 보르만쉬노프의 초상화.

Portrait painting of Lama Mönke Bormanshinov wearing the traditional yellow hat by Alexander Burtschinow.


 

                                          토르구트족의 이동용 사원 내부 그림, 1776년.


20세기 초 시베리아 티벳 불교신도들이 사용하는 이동용 쿠룰이다. 칼믹족들은 1840년대 전에 비슷한 기구를 사용했을 것이다.


1840년 후에, 종교적 행사는 건물 안에서 행해졌다.

 

This is an example of a mobile khurul that was used by Tibetan Buddhists in Siberia at the start of the 20th century. The Kalmyks would have used a similar device prior to the 1840s


코슈토프스키 쿠룰은 1812년의 전쟁에 참여한 칼믹족 기병대를 기념하여 코슈트 부족의 튜만 왕자가 지었다. 소비엣 통치아래 수백의 사원이 파괴되었다. 코슈토프스키 쿠룰은 현재 폐허 상태이다.


목재로 된 칼믹 쿠룰의 형상이고, 아스트라칸 근처 짜간 아만 정착지에 한때 있었다. 러시아 건축의 영향을 주목할 것. 티벳 디자인으로 된 새로운 쿠룰은 몇 년전에 짜간 아만에 지어졌다.


종교

 

                    After the 1840s, religious services were conducted inside buildings.

 

An image of a wooden Kalmyk khurul that once stood at the Tsagan Aman settlement near Astrakhan. Note the influence of Russian architecture. A new khurul of Tibetan design was built at Tsagan Aman several years ago.


칼믹족은 그들의 민족 종교가 불교가 되는 유럽에서 유일한 주민이다. 그들은 17세기 초반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겔룩파라고 하는 티베트 불교에 속한다. [게룩파, 황모파(黃帽派)라고 함, ‘미덕의 본보기’를 뜻함] 게룩파는 일반적으로 황모파라고 한다. 이 종교는 인도 대승 불교에서 왔다.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라마교라고 하며, 이것은 티벳의 승려 이름 라마(존자)에서 왔다. 그들이 개종하기 전에는 샤먀니즘을 믿었다.


역사적으로 칼믹족 성직자들은 스텝지역 또는 티벳에서 교육을 받았다. 스텝에서 종교적 수련을 받은 학생들은 칼믹 사원에 참여했으며, 그곳은 교육 활동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이러한 사원들은 펠트(모전) 천막 밖에서 행해졌으며, 그들이 이주함에 따라 칼믹 부족들도 함께 갔다. 오이라트족은 현재 동부 카자흐스탄의 도처와 그들이 남부 시베리아에서 볼가강까지 가로질러 갔던 이주 루트에 동반하여 10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의 이식쿨호 주변에 10개의 사원을 가지고 있다.


오이라트족은 또한 카자흐스탄 동부지역에 석재 사원을 지었다. 예를 들면, 석재 불교 사원의 유적은 알말릭과 키질-켄트에서 발견돼 왔다. 더구나, 세미팔라틴스크(7궁전, 카자흐스탄 북동쪽)에 불교 대사원이 있었는데, 그것의 이름은 7개의 강당이 있는 불교사원에서 따왔다. 더욱이, 불교사원의 유적은 우스트 카메노고르스크(카자흐스탄 동부) 근처 압라이케트, 알마티 근처 탈가르, 중국접경 나린콜 지역의 숨베에서 발견되고 있다.


수련이 끝나면, 칼믹족 성직자들은 정신적이 지도와 의학적인 진찰을 베푼다. 성직자로서 칼믹 라마는 상당한 권력을 누리며 일반 부족민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다. 평민으로서 교육과 명예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칼믹족의 사원 체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정책으로서 짜르 정부와 러시아 정교회는 다른 신념 또는 국민성을 갖는 어떠한 백성도 점차적으로 흡수하고 전환하려 하였다. 정책목표는 외국인 영향을 제거하고 새로 추가된 지역을 확고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세례받은 토착민은 러시아 제국에 충성하고 러시아 관료의 지배를 승인했을 것이다.


칼믹족은 짜르 정부에 합병된 영역에 이주했고 그들이 이 영역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정책에 종속되었다. 처음에는 정책은 칼믹 귀족의 전향{개종}에 공헌했다. 가장 이른 시기의 개종 중의 하나는 돈둑-옴보의 자녀, 즉 1737-1741년 사이에 통치했던 칼믹의 6번째 칸과 체르케스에서 태어난 그의 아내였다. 또다른 중요한 개종은 박사다이-도르지, 즉 아유카 칸의 손자로서 세례명은 페테르 타이쉰이다. 각 개종은 칼믹의 칸이 되기 위한 정치적 야망에 의해 촉발되었다. 칼믹 타이쉬는 대조적으로 월급이 주어졌으며, 도시와 정착지가 그들과 그들의 울루스를 위하여 자리잡았다.


나중에 러시아인과 게르만족의 볼가 지역에 정착시키려는 정책은 칼믹족을 압박하여 경제적 이유로 개종하게 했다. 이주자들은 강변의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했고, 황무지는 칼믹족들에게 가축을 방목하도록 남겨두었다. 결과적으로 가축이 줄어들어 칼믹 타이쉬는 빈곤해졌기 때문에, 그들중의 일부는 그들의 울루수를 경제적 이득을 위하여 기독교로 이끌었다.


수도원{라마교} 생활을 방해하기 위하여, 정부는 영구 건물은 정부가 정한 곳에 러시아 건축양식으로 짓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라마교도의 종교 규율에 따른 사원 건축을 중지하게 되었고, 칼믹 사원은 러시아 정교회를 닮게 되었다. 예를 들면, 코슈토프스키 쿠룰은 러시아의 성 페테르스부르그의 카잔 성당을 본 딴 것이다.


짜르 정부가 시행한 다른 정책은 라마승의 영향을 점차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를테면, 정부는 칼믹족이 티벳과 접촉하는 것을 심하게 제한했다. 더 나아가, 짜르는 사인 라마(칼믹족의 라마승 고위직)를 임명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주민의 잠식에 따른 경제적 위기는 많은 수도원과 사원의 라마승을 세속화된 생활을 하도록 하게 했다. 19세기에 볼가강 지역의 수많은 칼믹족 사원을 감소시킴으로서 이 정책은 성공한 것이다.


볼가강 지역의 칼믹족 사원의 수

 

 

19세기 초 200개, 1834년 76개, 1847년 67개, 1895년 전 62개, 1923년전 60개.


짜르 정부와 마찬가지로, 공산체제는 칼믹족 성직자들이 일반인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차렸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소비엣 정부는 통제와 압박을 통해서 종교를 제거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최후에는, 칼믹족 쿠룰(사원)과 수도원은 파괴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되었고, 성직자와 신도는 괴롭힘을 당하거나, 살해되거나, 노동 수용소에 보내졌다. 종교 공예품과 서적은 파괴되었으며, 젊은 사람들은 종교 교육 접근이 금지되었다.


1940년 모든 칼믹 불교 사원은 폐쇄되거나 파괴되었으며 성직자들은 체계적으로 탄압받았다. 로엘웬탈 박사가 쓰기를 정책이 철저하게 강제되어서, 칼믹 성직자와 불교는 1940년 출판된 “소벳스카이아 칼미키아” 책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1944년 소비엣 정부는 소비엣 군대에서 싸우지 않은 모든 칼믹족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추방했는데, 독일군과 협력한다는 죄목을 씌웠다. 1957년 명예 회복이 되어, 추방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허가되었으나, 그들의 종교를 회복하고 사원을 짓는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


1980년대에, 소련의 반 종교 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대다수의 칼믹족은 어떠한 공식적인 정신적 지도를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소련정부는 방향을 바꾸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1988년 첫 번 째 불교 공동체가 조직되었다. 1995년에 21개의 불교사원, 다양한 기독교 교파들의 예배당 17 곳, 회교사원 1 곳이 칼미키야 공화국에 있게 되었다.


2005년 12월 27일, 칼미키아 공화국 수도 엘리스타에서 새 쿠룰(사원)이 개원되었다. 쿠룰의 이름은 “부르칸 박신 알탄 수메”이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큰 불교 사원이다. 칼미키아 공화국 정부는 기념할 만한 규모의 웅장한 사원을 짓기로 노력했는데, 전세계의 불교학자와 학생들의 국제적인 교육 중심지로 만들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더 의미있는 것은, 이 사원은 1944년부터 1957년사이 추방되어 죽은 칼믹 사람들의 기념물이다.


언어


민족학의 편집자 로버트 고돈에 의하면: 세계의 언어, 칼믹-오이라트 언어는 몽고어의 동부 분파에 속한다. 고든은 칼믹-오리라트를 오이라트-칼카 그룹아래로 분류했는데, 칼믹-오이라트는 몽고의 국어 칼카 몽고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니콜라스 포페와 같은 다른 언어학자들은 칼믹-오이라트 언어 그룹을 몽고 언어의 서부 분파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했는데, 그 이유는 이 언어 그룹이 분리되어 발전했고 독특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포페는 주장하기를 비록 음성학상 형태학상 차이가 별로 없지만, 칼믹과 오이라트는 두개의 다른 언어이다. 중요한 차이점은 두 언어의 어휘에 있다. 예를 들면 칼믹 언어는 러시아어와 타타르 언어에서 많은 단어를 채택했다. 결과적으로 주로 어휘적인 배경 때문에, 칼믹은 별도의 언어로 분류되는 것이다.


인구에 의하면, 칼믹의 주 방언은 토르굿어, 되르벳어 그리고 부자와어이다. 소수 방언은 코슛어와 올룃어를 포함한다. 칼믹의 방언들은 좀 다양하지만, 차이는 의미가 없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어는 볼가 지역의 칼믹족 유목민들의 방언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되벳족(나중에는 토굿족)은 볼가강 지역에서 돈강 지역의 살스크 주로 이주를 했는데, ‘부자바(또는 돈 칼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부자바 방언은 러시아인과 밀접한 교류를 통해서 발전했다. 1780년 짜르 정부는 부자바를 군사적 행정적으로 ‘돈 코삭크’로 인정했다. 부자바족은 돈 본거지에 통합됨으로써, 부자바 방언은 러시아어의 많은 어휘들과 혼합되었다.


2차세계대전 중에는 소련군에 편입하지 않은 모든 칼믹족들은 강제적으로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분산되었고 공개 장소에서 칼믹 언어를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결과 칼믹 언어를 칼믹족의 젊은 세대들은 공식적으로는 배우지 못했다.


1957년 추방에서 돌아온 뒤에는, 칼믹족은 우선적으로 러시아어로 말하고 출판했다. 결과적으로, 칼믹족의 젊은 세대는 러시아어를 주로 말하고 그들 고유어는 하지 못한다. 이는 대중적인 관심의 문제이다. 최근에 칼믹 정부에 의하여 칼믹 언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것으로써, 칼믹 언어를 상점 간판에 사용하도록 배려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문입구에 ‘입구, 밀다, 당기다’의 단어가 칼믹언어로 나타난다.


칼믹 언어를 재 정립하려는 노력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최근에, 러시아 방송국은 라디오와 TV의 방송시간을 칼믹 언어 프로그램에 할당했는데, 영어로 된 영화와 같이 미리 제작된 프로그램을 구입하여 방송하는 것을 대신한 것이다. 제작단가를 낮추도록 표준이 마련되었다.


서법(書法)


17세기 자야 판디타는 코슛 부족에 속하는 라마승으로 ‘토도 비칭(분명한 문자)’이라는 문자를 고안했다. 이 문자는 문어적으로 통합된 몽고 문자에 기초한 것으로 음성적으로는 오이라트 언어를 채택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토도비칭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3년 칼믹족은 그것을 버렸으며 러시아 시릴릭 알파벳을 도입했다. 그러나 곧 바로 1930년경에 칼믹 언어 학자들은 개조된 라틴 알파벳을 도입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역사


투쟁의 시기


되벤 오이라트는 4개의 주요 오이라트 부족으로 구성된 정치적 단체이다. 그들은 원나라 말기 어느 때에 그들의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재 정립하였다. 오이라트는 이 연합체를 형성해서 자신들을 동부몽고로부터 방어하고 그들의 지배아래 몽골을 재 통합하는 원대한 목표를 추구했다.


[되벤은 도벤이고, 토번(吐蕃)과 음이 유사합니다. 토번은 당나라때 티벳의 이름입니다.]


연합체가 존재하는 동안, 그것은 분산되었으며, 형식이 없었으며 불안정했다. 예를 들면, 되벤 오이라트는 통치할 중심지가 없었으며, 그것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시기에 중심인물에 의해서 통치되지 않았다. 더구나, 4개의 오이라트는 단일 군대를 창설하지 못했고 또는 심지어 통합된 수도원의 체계도 없었다. 최후에는 1640년이 되어서야 오이라트는 통합된 관습법을 채택했다.


유목민으로서 오이라트는 유목민의 수준으로 조직되었는데 그곳에서 각 부족은 노욘(왕자)에 의하여 통치되었으며, 노욘은 추장 타이쉬(추장)로서 역할을 하였다. 추장 타이쉬는 또한 타이쉬라 불리는 더 작은 노욘들의 지지를 받으며 통치했다. 이러한 작은 노욘들은 부족(울루스)구역을 지배했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추장 타이쉬로부터는 독립적이었다. 추장 타이쉬는 다른 부족들의 추장 타이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배하려고 노력했는데, 내부 부족간의 경쟁, 충돌, 정기적인 작은 접전을 유발하였다.


초로스 부족의 추장 타이쉬 야선(也先, 1455년 사망)의 지도아래, 되벤 오이라트는 몽골을 잠시동안 통일했다. 1455년 야선의 사후에 되벤 오이라트의 정치적 연합은 급격히 해체되었으며, 20년동안 오이라트와 동부몽골족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교착상태는 다섯살 소년 다얀칸의 등장으로 끝났으며, 다얀칸(1464-1543)의 이름으로 동부몽골 왕실 군대는 규합했다. 다얀칸은 오이라트의 불화와 약점을 이용해서 동부 몽고지역에서 추방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는 몽고의 본토를 회복했으며 동부몽고의 패권을 회복했다.

[세종때 야선에 대한 기사 19건이 있습니다]


1543년 다얀의 사후에, 오이라트와 동부몽골족은 분쟁을 다시 시작했다. 오이라트 군은 동쪽으로 밀고 나아갔지만, 다얀의 막내 아들 게레산자는 동부 몽골군의 지휘권을 쥐고 오이라트를 몽고 북서부의 웁사 노르로 밀어붙였다. 1552년 오이라트가 동부몽골에 다시 한번 도전해온 뒤에, 알탄칸(1507-1582, 다얀칸의 손자)은 투메드와 오르도스 기병대를 이끌고 내몽고로부터 휩쓸었으며, 다양한 오이라트 부족의 영역을 카라코룸(징기스칸의 초기수도)에서 몽고 북서부의 콥도 지역으로 밀어냈으며, 계속해서 몽고의 대부분을 재통합했다.


오이라트는 나중에 준가르분지의 알타이 산맥 남쪽에서 재규합했다. 그러나 게레산자의 손자 쇼루이 우바쉬 콩 타이지는 오이라트를 오브강과 이리티쉬강의 스텝지역을 따라 훨씬 북서쪽으로 밀어냈다. 그 후에 그는 준가르분지의 오이라트 중심지에 알탄칸의 이름으로 ‘칼카 칸국’(카나테,한국)을 개창했다.


좌절을 딛고서, 오이라트는 알탄칸국(칼카칸국)에 출정을 계속하였으며, 쇼루이 우바쉬 콩 타이지의 지위를 빼앗으려 노력했다. 계속되는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은, 일반적으로 이 기간에 한정되는데, 오이라트의 서서시 노래 “몽고인 쇼루이 우바쉬 콩 타이지의 대패”에 기록되어 있으며, 1587년 알탄칸국의 첫번째 칸에 대한 오이라트의 승리를 자세히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 오이라트 카라반 사진, 중국 또는 몽고에서 촬영, 말을 타고 여행하는데 아마도 무역상품.


오이라트의 재기

 

An image of an early 20th century Oirat caravan, taken in either China or Mongolia, traveling on horseback, possibly to trade goods


17세기 초, 첫째 알탄칸이 오이라트를 서쪽으로 오늘날의 동부 카자흐스탄으로 밀어냈다. 토굿족은 가장 서쪽의 오이라트 부족이 되었는데, 타라바가타이 지역과 이리티쉬강, 이쉼강, 토볼강의 북쪽 경계에 야영하고 있었다. 더 서쪽으로는, 카자크족-돌궐 몽고 회교족은 토굿족이 무역 카라반을 시르다르야 강변의 회교 도시와 마을에 보내는 것을 막았다. 그 결과, 토굿족은 짜르정부의 새로 개척한 변경 식민지와 무역관계를 수립했다. 짜르정부의 시베리아로의 팽창과 탐험은 주로 아시아와의 무역에서 이득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촉진된 것이었다.


코슛족은, 대조적으로, 가장 동쪽의 오이라트 부족으로, 자이산 호수 지역 근처와 이리티쉬강의 저지대에 걸친 세미팔라틴스크에 야영을 했으며, 그곳에 몇 개의 스텝(초원) 사원을 지었다. 코슛족은 알탄칸과 다삭칸의 동부몽고 칸국과 인접했다. 두개의 칸국은 코슛족과 다른 오이라트 부족이 중국 접경 도시와 무역하는 것을 막았다. 코슛족은 바이바가스칸과 규쉬칸에 의하여 통치되었는데, 규쉬칸은 게룩파(티벳 라마불교 종단)로 개종한 최초의 오이라트 지도자였다.


두 부족(코슛족과 토굿족)의 사이에 갇힌 부족은 초로스족, 되벳족과 코이트족(공동으로 준가르족)이고, 이들은 되벤오이라트 아래서 누렸던 힘의 기반을 서서히 다시 구축하고 있었다. 초로스족은 그 시기에 지배적인 오이라트 부족이었다. 그들의 추장 카라쿨라는 야선칸을 따르려 하였으며,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여 몽고에 대한 지배와 통제를 위하여 동부 몽고족과 그의 만주족 후원자에게 도전하였다.


카라쿨라의 역동적인 지도력 아래서, 준가르족은 첫째 알탄칸의 확장을 막았고, 준가르 깃발아래 되벤오이라트의 재기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계획의 추진에 있어서, 카라쿨라는 추구착(塔城,신강성의 탑성) 근처 이밀강에 “카박-사리”라고하는 도시를 설계하고 건설했다. 나라를 건국하려고 그가 노력하는 동안에는, 카라쿨라는 외교, 상업, 농업을 격려했다. 그는 또한 근대적 무기를 얻고 소규모 산업 즉 금속 산업을 행하여서 그의 군대를 지원하려고 했다.


오리라트를 통합하려는 시도는 부족들과 그들의 추장 타이쉬들에게 불화를 조성했는데, 그들은 독립정신이 있었지만 그들의 지도자를 존경했다. 이러한 불화 때문에 코 오룩은 토굿족과 되벳부족의 영역을 서쪽으로 볼가강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곳에 그의 후손들이 칼믹칸국을 개창했다. 동쪽에서는 규쉬칸(귀시칸)은 코슛부족의 일부를 티벳고원의 짜이담과 코코노르 지역에 이주시켰는데, 그곳에서 그는 코슛칸국을 개창했으며 외부와 내부의 적으로부터 게룩파(티벳불교 황모파)와 티벳을 보호하였다. 카라쿨라와 그의 후손들은 대조적으로 준가르왕국을 개창했는데 몽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동부몽골족들과 그들의 만주 후원자들과 투쟁했다.


토굿족의 이민


1618년 토굿족 그리고 ‘되벳족의 종속족은 이리티쉬강 상류지역에서 볼가강 저지대의 목초지로 이주하기로 했으며, 그곳은 사라토프의 남쪽, 카스피해 북쪽 그리고 불가강 양안에 있다. 토굿족의 지도자는 추장 ‘코 오룩’이었다. 그들은 거의 전 부족을 데리고 이주한 가장 큰 오이라트 부족이었다. 두번째로 큰 부족은 추장 달라이 바투르가 이끄는 되벳족이다. 그들은 함께 남부 시베리아와 남부 우랄을 거쳐서 서쪽으로 이주했는데, 그들의 적 카자크족의 중심 영역을 통과할 수도 있는 지름길을 우회했다. 도중에 그들은 러시아인 정착지와 카작크와 바쉬키르 야영지를 습격했다.


이주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많은 가설이 나왔다. 일반적으로 인정한 가설은 오이라트 부족 사이에 불평이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준가르의 추장 카라쿨라가 부족에 대한 정치 군사적 지배권을 그의 지도아래 집중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믿기를 토굿족은 단순히 경쟁자가 없는 목초지를 찾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영역이 점차 북쪽의 러시아인, 남쪽의 카작크인 동쪽의 준가르족에 의해서 잠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잠식되어서 사람과 가축은 과밀하게 되었으며 심각하게 양식이 부족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3의 이론은 토굿족은 오이라트족과 알탄칸국과의 군사적 싸움에서 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his map fragment shows part of the Kalmyk Khanate, 1706. ("Carte de Tartarie" of Guillaume de L'Isle (1675-1726), Map Collection of the Library of Congress)

 

칼믹 칸국(한국)


자치시기(1630-1724년)

1630년 볼가강 저저대에 도착한 후에 오이라트족은 한때는 ‘아스트라한 한국’의 일부였지만 짜르정부가 영토로 주장하는 땅에 야영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며, 사라토프의 남쪽부터 아스트라한에 있는 러시아 수비대와 볼가강의 동서 양안까지이다. 짜르정부는 그 지역을 식민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이라트가 그 지역에 야영하는 것을 막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이라트족은 돌궐어를 말하는 이웃들과는 연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에 직접적으로 정치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이라트는 즉시 대다수의 토착민인 ‘노가이 호르데(킵차크 한국 지역의 타타르족)’를 추방함으로써 그들의 위치를 강화했다. 노가이족의 큰 그룹은 동쪽으로 북부 코카시아 평원과 크리미안 한국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은 오스만(오토만) 터키제국의 영토였다. 노가이족은 작은 그룹은 아스트라한의 러시아 수비대의 보호를 구했다. 남아있는 유목민은 오이라트에 예속되었다.


처음에는 러시아인과 오이라트족사이에는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러시아인 정착지의 오이라트족에 의해서 그리고 오이라트 야영지의 코삭크족과 바쉬키르족에 의해서 서로 습격하는 것은 상투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서약과 조약이 오이라트에게 충성과 군사적 원조를 보증하도록 조인되었다. 비록 오이라트는 짜르에 종속되었지만, 오이라트에 의한 그러한 동맹은 이름 뿐인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오이라트는 유목민의 대법전(일키 짜아진 비칭)으로 알려진 문서에 따라서 자신들을 다스렸다. 이 법전은 그들에 의하여 1640년 공표되었는데, 그들은 준가르분지의 같은 교인이고, 일부 동부몽골족으로, 준가르분지의 타바가타이 산맥 근처에 모두 모여서 그들의 차이점을 해결하고 게룩파의 깃발아래 연합할수 있도록 법전을 고안한 것이었다. 비록 통합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최고 지도자는 그 법전을 비준했으며, 그것은 유목생활의 모든 것을 규제한다.


그들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오이라트족은 국경지대의 실세가 되었으며, 종종 이웃 회교도에 대항하는 짜르정부와 연합하기도 했다. 아유카칸의 시대에는, 오이라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탁월하게 되었으며, 그 이유는 짜르정부는 오이라트 기병대를 자주 사용했으며, 남부에 있는 회교권에 대항하는 군사 진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 회교권은 페르시아, 오스만 터키제국, 노가이와 쿠반 타타르족(달단족), 크리미언 칸국이다. 아유카칸은 또한 카작크족(주로 카자흐스탄)에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했으며, 망쉬락 반도의 투르크멘족을 종속시켰으며(망쉬락 반도는 카자흐스탄 서부 카스피해에 있으며, 투르크멘족은 주로 투르크메니스탄에 거주하는 돌궐족), 북부 코카서스의 고지인(高地人)에 대항하여 여러 번 출정했다. 이러한 출정은 칼믹한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돋보이게 했는데, 그것은 러시아와 회교권을 분리하는 완충지대로 작용을 했으며, 그 이유는 러시아는 유럽에서 유럽강대국이 되기위해 전쟁을 했기 때문이다.


짜르 정부는 군사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오이라트 기병들을 용병으로 쓰기 위해, 오이라트 칸과 귀족에게 화폐와 포목으로 지급하는 방식에 점차 의존했다. 그러한 점에서 짜르정부는 코사크족에게 했던것과 같이 오이라트족을 다루었다. 그러나 화폐지불과 포목 공급은 상호간의 자금 유용을 중지시키지 못했으며, 여러면에서, 양쪽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짜르 정부가 오리라트족에게 제공한 또 다른 유력한 동기부여는 러시아의 국경도시들의 시장에 면세로 접근할 수 있게 한 것으로, 그곳에서 오이라트는 그들의 가축과 아시아와 이웃 회교도들로부터 얻은 품목을 러시아 상품과 교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무역은 러시아의 통제 아래에 있는 타타르족와 바쉬키르족과 같은 이웃 돌궐족들과 이루어졌다. 이 무역협정은 오이라트 추장 즉 노욘과 자이상들에게 실질적인 이익, 화폐 그리고 다른 것들을 제공해주게 되었다.


프렛 아델만은 이 시기를 국경시대로 서술했으며, 그것은 1630년 코오룩 통치하의 토굿족이 출현한 시기부터, 1724년 코오룩의 후손 아유카칸의 대 칸국의 멸망까지로, 그 때는 조금 구별할 수 있는 것으로 적응이 되는 변동의 단계이다:


국경시대에 칼믹족과 러시아인 사이의 상호관계는 별로 지속되지 않았다. 정기적인 접촉은 아마도 주로 칼믹족의 가축과 직사각형의 차, 곡식, 직물 그리고 금속품과 같은 유목 필수품에 수반한 생산품 등의 계절 상품을 아스트라한, 짜리찐, 사라토프에서 교환할 때이다. 이것은 일종의 교환관계인데, 즉 칼믹족이 전통적으로 관련된 유목민, 도시 장인과 무역업자들 사이를 말한다. 정치적 접촉은 일련의 조약 협정으로 구성되는데, 즉 칼믹 칸의 러시아에 대한 명목상의 충성, 한편으로는 칼믹족과 다른 편으로는 코삭크족과 바쉬키르족에 의한 상호 습격을 중지한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칼믹 귀족은 러시아화되었고 명목상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칼믹 스텝지역에 대한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 러시아의 도움을 보장받으려는 희망으로 모스크바에 갔다. 그러나 칼믹 귀족에 대한 러시아의 보조금은 나중에야 정치적 통제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점차 칼믹족 왕자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고 러시아 정책에 남아있게 되었다.


아유카칸의 시기에 칼믹한국은 정치 군사적 힘이 최고조에 달하였다. 칸국은 러시아 국경도시, 중국, 티벳 그리고 이웃 회교권들과의 자유무역으로부터 경제적 번영을 했다. 이 시기에, 아유카칸은 또한 준가르 분지에 있는 그의 오이라트 인척들과, 티벳의 달라이 라마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다.

 

 1720-1725년의 러시아 제국 지도, 이 부분은 인접한 칼믹국가(녹색부분)를 보여주고 있으며, 서양 학자는 준가르 칸국이라고 칭한다.


오이라트에서 칼믹까지


역사적으로 서부 몽고부족은 그들 각자의 부족명으로 자신들을 식별하였다. 아마도 15세기에, 4개의 주요 서부 몽골부족들은 연맹을 결성했으며, “되벤 오이라트”를 그들의 총체적인 이름으로 정했다. 17세기 초반, 두번째로 큰 오이라트 국가가 출현했는데, 준가르 제국이라 한다. 준가르족들(처음에는 초로스족, 되벳족 그리고 코이트족) 서부 내륙 아시아에 제국을 개창한 반면에, 코슛족(호슛)들은 티벳에 코슛 칸국을 개창하여 게룩파(라마불교)를 적들로부터 보호하였으며, 토굿족들은 볼가강 저지대에 칼믹 칸국을 개창했다.


야영 후 언젠가, 오이라트는 자신들을 “칼믹”이라고 구별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은 아마도 이웃 회교도에 의해서 불려졌을 것이고 나중에는 러시아인들이 그들을 표시하는데 사용했다. 오이라트는 외부인인 러시아인과 이웃 회교도들과 거래할 때 이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종족, 씨족, 또는 다른 내부적인 제휴에 의하여 자신들의 소속-이름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칼믹이라는 이름은 볼가강 저지대의 모든 오이라트 부족들에게 즉각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 1761년 후반에, 코슛족과 준가르족(만주제국의 피난민)은 자신들을 가리키고, 토굿족은 예외적으로 오이라트를 가르킨다. 토굿족은, 대조적으로, 스스로 칼믹이라는 이름뿐만아니라 코슛과 준가르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유럽학자들은 모든 서부 몽골족을 지역에 관계없이 총체적으로 칼믹으로 식별하였다. 그러한 학자들은 회교자료에 의거하였는데, 회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칼믹이라는 단어를 서부 몽고인을 경멸적인 방식으로 표시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중국과 몽고의 서부 몽고인들은 그 이름을 모욕적인 술어로 여겼다. 대신에, 그들은 오이라트 이름을 쓰거나 또는 그들 각자의 부족명, 예를 들면 코슛, 되벳, 초로스, 토굿, 코이트, 바이드, 밍가트 등을 사용한다.


시대를 넘어서, 불가강 저지대의 오이라트 이주민의 후손들은 그들의 위치에 상관없이 칼믹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 위치는 아스트라한, 돈 코삭크 지역, 오렌부르그, 스타프로폴, 테렉 그리고 우랄이다. 일반적으로 인정된 다른 이름음 ‘울란 잘라타’ 또는 “붉은 단추를 단 사람들”이다.


자치권의 소퇴, 1724-1771년


1724년 아유카칸의 사후에, 칼믹족의 정치적 상황은 불안정하게 되었는데 여러분파가 칸으로 인정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짜르 정부는 또한 점차적으로 칼믹한국의 자치권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이를테면 이러한 정책은 칼믹족이 가축을 방목했던 초지에 러시아인과 게르만족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더구나, 짜르정부는 칼믹 칸에게 의회를 강요했으며, 그로 인해 칸의 권위는 희박하게 되었는데, 반면에 계속해서 칼믹 칸에게 러시아를 대신해서 싸울 기병대를 공급해줄 것을 기대했다. 대조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는 많은 칼믹족들에게 정통신앙(기독교)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했다. 17세기 중반에 칼믹족은 점차 이주민의 잠식과 내부 문제 간섭에 대하여 환멸을 느꼈다.


1770-1771년의 겨울에, 우바쉬 칸은, 아유카칸과 마직막 칼믹 칸의 증손으로서, 백성들을 조상들의 고향 준가르분지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는데, 그곳은 만주제국의 확고한 통제아래 있었다. 축복을 받고 출발 날짜를 정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를 접촉했다. 점성술 표를 참고한 후에, 달라이 라마는 복귀 날자를 정했지만, 출발하는 순간에, 볼가강의 얼음이 약해져서 좌측 또는 동부 연안에서 방목하던 칼믹족들만 떠나가게 되었다. 우측 연안(서쪽)의 사람들은 뒤에 남아야만 했다[강을 건너지 못해서].


우바쉬 칸의 지도아래, 약 20만 칼믹족들은 볼가강 좌안의 방목지로부터 준가르 분지로 여행을 시작했다. 대략 토굿족의 6분의 5정도가 우바쉬 칸을 따라갔다. 코슛족, 초로스족, 코이트족의 대부분은 또한 준가르 분지로의 여행에 토굿족을 따라갔다. 반면에, 되벳족은 결코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바쉬 칸은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으며, 곧장 중앙아시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것으로, 카작크와 키르기즈 적들의 영역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많은 칼믹족들은 복병에 의해 살해되거나 붙잡히거나 노예가 되었다. 일부 그룹은 길을 잃어서 다시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며 또는 심지어 러시아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대부분의 칼믹족 가축은 말라죽거나 붙잡혔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 또는 목마름으로 죽었다. 몇 달동안의 혹독한 여행후에, 원래 그룹의 3분의 1만이 준가르분지에 도착했으며, 그곳에는 만주제국의 관리와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탈출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카헤리네 2세(러시아 여황제, 재위기간 1762-1796년)는 칼믹한국을 폐지했고, 모든 정부의 권한을 아스트라한의 주지사에게 넘겼다. 칸이라는 타이틀은 폐지되었다. 가장 높은 원주민 관직으로 남아 있는 것은 부(副)-칸이 있는데, 그 또한 정부에 의해 가장 높은 등급의 칼믹 왕자로 인정받았다. 부-칸을 임명함으로써, 짜르 정부는 영원히 칼믹족 정부와 정세에 결정적인 실세가 되었다.


제정 러시아(짜르)에서의 생활


1771년의 이주후에, 러시아 제국의 일부에 남아있던 칼믹족은 짜르 정부의 확고한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유목생활을 하였으며, 방목지는 돈강과 볼가강 사이였으며, 겨울에는 카스피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보냈는데 북서쪽으로는 사르파호수와 서쪽으로는 만치 호수까지이다. 봄에는 돈강과 사르파 호수 계(系)를 따라 이동했으며, 여름에는 돈강변의 더 높은 지대를 점유하고, 가을에는 사르파와 볼가의 저저대에서 보냈다. 11월과 12월에는 겨울 야영지와 방목지로 돌아갔다.


상당한 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토굿(토르구트)족은 여전히 숫적으로 우세하고 지배적인 칼믹족으로 남아있었다. 러시아의 다른 칼믹족은 되벳과 코슛족이다. 초로스와 코이트 부족의 영역 역시 현존하였지만, 그들의 울루수(종족 분파)를 독립적인 행정단위로 유지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큰 부족의 울루스에 흡수되었다.


1771년의 탈출(이주)을 일으켰던 요소들은 남아있는 칼믹족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탈출에 뒤이어, 토굿족은 예메랸 푸가체프의 코사크 반란에 참여했는데, 칼믹족의 독립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때문이었다. 푸가체프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 카헤리네 2세(러시아 여황제)는 토굿족의 부-칸 직위를 되벳부족에게 넘겼는데, 되벳족의 왕자들은 반란이 있을 때 (짜르) 정부에 아마도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토굿족은 칼믹족의 세습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코슛족은 인구가 작아서 이러한 정치 협정에 도전할 수 없었다.


칼믹 사회의 붕괴는 탈출(이주)과 토굿족이 푸가체프 반란에 참여함으로써 촉발되었으며, 칼믹 부족의 구조를 재편성하도록 촉발시켰다. 정부는 칼믹족을 세개이 행정단위로 구분하였으며, 각자의 위치에 따라서 아스트라한, 스타프로폴과 돈의 지방 정부에 부속시켰으며, 행정을 위한 “칼믹족의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특별한 러시아 행정관료를 임명했다. 정부는 또한 칼믹족의 소그룹들을 우랄, 테렉, 쿠마 강변과 시베리아에 재 정착시켰다.


행정구역을 재구성하면서 이제 지배적인 되벳부족을 세개의 분리된 행정 단위로 나누었다. 칼믹 스텝 지역의 서쪽의 사람들은 아스트라한 지방 정부에 부속시켰다. 그들은 ‘바가(레쏘르) 되벳’이라고 하였다. 대조적으로, 스타프로폴 지방의 북쪽 지역으로 갔던 되벳족은 인구가 더 작았음에도 ‘이케(大) 되벳’이라고 불리웠다. 마지막으로, 돈의 칼믹족은 ‘부자바(부자와)’로 알려졌다. 비록 그들은 칼믹부족의 요소들로 구성되었지만, 부자와족은 되벳족의 첫째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이름은 돈 강의 두 개의 속국인 부스가이와 부수룩에서 왔다. 1798년 짜르 파울 1세는 돈 지역의 칼믹족을 ‘돈 코삭크족’으로 인정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군복무의 댓가로 러시아인의 상대역으로서 같은 권리와 이득을 얻었다.


세월이 지나서, 칼믹족은 점차 운송할 수 있는 둥근 펠트(모전) 유르트(게르천막)를 대신하여, 집과 사원을 고정하여 정착했다. 1865년 소련 칼믹 자치구의 미래의 수도가 되는 엘리스타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 공정은 러시아 혁명 후 까지 지속되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


러시아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칼믹족은 1917년 2월 혁명을 열정적으로 환영했다. 칼믹 지도자들은 짜르 정부를 교체한 러시아 임시 정부가 그들의 문화, 종교, 경제를 고려하여 더 큰 자치권과 자유를 허용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세비키가 1917년 11월 2차 혁명을 통하여 정부를 장악한 후에는 이러한 열망은 사라졌다.


볼세비키가 정권을 잡은 뒤에, 공산주의에 반대한 다양한 정치적 종족적 그룹은 “백색운동”이라고 하는 느슨한 정치적 군사적 연합체를 구성했다. 볼세비키 정부의 군부대인 적색군과 싸우기 위해 자원군(백색군)은 소집되었다. 처음에 이 군대는 주로 지원자와 짜르 지지자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는 돈 칼믹족을 포함하는 코삭크족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볼세비키의 탈-코사크화 정책에 저항했다.


두 번째 혁명은 칼믹족을 반대 진영으로 분열시켰다. 많은 사람들은 짜르 정부가 칼믹 스텝지역을 식민지화로 만들고 칼믹족을 러시아화하는 등 역사상의 행위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볼세비키 주의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로써 적대감을 느꼈다: (1)칼믹족은 그들의 전통적인 지도자(귀족,성직자)에 대한 충성심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반 공산주의의 원천); (2)칼믹족의 땅과 가축을 빼앗은 현지 러시아 농부들과 킬믹족이 싸우도록 볼세비키는 부추겼다.


바가 되벳족의 드미트리 툰두토프 왕자와 코슛족의 세렙-드잡 튜멘 왕자가 이끄는 아스트라한의 칼믹 귀족은 아스트라한 칼믹족을 아스트라한 코삭크족의 군대로 통합하면서 볼세비키에 반대하는 취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칼믹 기병의 군사 동원이 일어나기도 전에, 적색군은 아스트라한과 칼믹 스텝지역에서 권력을 잡았으며, 군사 동원을 막았다.


아스타라한을 점령한 후에, 볼세비키는 칼믹족에 대하여 잔악한 보복에 관여했으며, 특히 불교사원과 불교 승려들에게 하였다. 결국 볼세비키는 1만 8천명의 칼믹 기병을 징병하여 적색군에 편입했으며, 그들이 백색군에 가입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는 많은 적색군의 칼믹 기병이 백색 진영으로 도망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대다수의 돈 칼믹족은 또한 그들의 코삭크 생활과 자랑스런 전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백색운동에 가담했다. 돈 코삭크족으로서 돈 칼믹족은 백색군 장군 안톤 덴킨과 그의 계승자 표트르 우랑켈 장군의 지휘아래 싸웠다. 그들이 속하는 돈 코삭크 군은 백색운동과 코삭크 저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전쟁은 주로 코사크 땅에서 이루어졌고 돈코삭크족에게는 대단한 재난이었으며, 마을과 전 지역은 동포를 살해하는 충돌속에서 반복적으로 편을 바꿨으며, 양측은 잔학한 행위를 범했다{영문이 불완전한 문장이어서 창작 번역함}. 돈칼믹족을 포함한 돈코삭크족은 특히 군인과 민간인의 사망자가 많았으며, 전쟁 자체와 굶주림과 전쟁에 의한 질병 때문이었다. 어느 역사가는 볼세비키는 돈 코삭크족 인구의 약 70%(또는 70만)를 살해하는 등 돈코삭크 사람들을 대량 몰살하는데 대해 유죄라고 주장했다.


1920년 11월, 적색군은 크리미아에서 우랑겔의 저항을 격파했으며, 약15만의 백색군과 그들의 가족을 터어키의 콘스탄티노플로 피난하게 하였다. 돈 칼믹족의 작은 그룹은 영국과 프랑스 선박에 간신히 탈출했다. 노보로시스크 러시아 항구도시에서의 혼란에 대하여 돈코삭크족에 대한 영국군 선교단의 윌리암슨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중략) 우리는 여전이 산발하는 라이플 총소리와 해군의 총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볼세비키 지지자들은 옥상으로부터 싹독 자르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적색 보병대는 도시에 잠입했었으며, 살인  강간 여러가지의 수간(獸姦)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반면에 백색군이 석유 탱크에 불을 지름에 따라 폭발이 도시를 진동시켰으며, 그리고 만(灣)을 가로질러서 거대한 장막연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부두는 승선할 수 있도록 애걸하는 사람들로 까맣게 되었다. 몇몇의 칼묵(칼믹)코삭크족은 아직도 말과 여행용 천막수레를 가지고 있었으며, 물에는 여행용 가방, 옷, 가구, 심지어 시체까지 온갖 쓰레기가 떠다녔다. 소름끼치는 상황이었다. 피난민들은 여전히 굶주렸고, 병자와 사망자는 쓰러진 장소에 누워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피난 사무소에 돌진하려 했으며 영국군은 총검으로 해산시켜야만 했다. 여성들은 통행권을 위하여 보석과 그들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자신조차도 제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의 환상조차도 갖지 못했다. 규칙은 오직 백인군과 그들의 부양가족과 영국과 함께 일하는 사람의 가족만이 승선이 허용되었다.


거기서부터 이 그룹은 유럽 특히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와 프랑스에 재정착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의 지도자들은 백색운동에 활동적이었다. 1922년 수백명의 돈 칼믹족은 일반사면에 의해 고향으로 귀환했다. 드미트리 툰두토프 왕자를 포함한 몇몇 귀환자는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곧바로 처형되었다.


칼믹 소비엣 공화국 건국


1920년 11월 소비엣 정부는 칼믹 자치주를 설립했다. 스타프로폴 칼믹 정착지를 대다수의 아스트라한 칼믹족과 합병함으로써 형성된 것이었다. 소수의 돈 칼믹족(부자와)은 돈 호스트로부터 이 자치주에 이주했다. 행정 중심은 엘리스타로 자치주의 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로 1920년대에 자치주의 수도로서 지위를 반영하여 확장되었다.


1935년 10월, 칼믹 자치주는 칼믹 자치 소비엣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재편되었다. 공화국의 주요 직업은 소떼 방목과 농업으로 성장하는 면화업과 어업이 포함된다. 산업은 없었다.


집단 농장화


1929년 요셉 스탈린은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시키고, 아스트라한 칼믹족에게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마을에 정착하도록 강요했다. 500마리 이상의 양을 소유한 칼믹족 목부(牧夫)는 시베리아의 노동수용소에 추방되었다.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운동에 대한 칼믹족의 저항과 그러한 운동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상당한 수의 칼믹족이 죽었다.


1930년대, 스탈린은 불교사원과 도서관을 폐쇄하고 사원과 종교서적을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불교성직자들은 총살되거나 시베리아 노동수용소에 장기 유폐에 처해졌으며 그곳에서 그들 모두 죽었다.


제2차세계대전와 추방


1941년 6월, 독일군은 소련을 침공했으며, 칼믹 자치 소비엣 사회주의 공화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1942년 12월, 적색군은 독일점령으로부터 이 공화국을 해방시켰다. 1943년 12월 28일, 소비엣 정부는 칼믹족이 독일과 협력한다고 고발하고 칼믹족 적색군인을 포함한 전 주민을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 추방했다. 24시간 안에 겨울 밤중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난방도 되지 않는 가축 운반차로 주민소환이 이루어졌다. 3분의 1에서 2분의 1의 칼믹 주민은 (추위에)노출됨으로서 이동중에 죽었으며 또는 추방된 다음해에 굶주림과 노출로 죽었다. 모든 권리가 박탈됨으로써 칼믹족 공동체는 존재하기 않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칼믹족 인종청소가 완성되었다.


칼믹 자치 소비엣 사회주의 공화국은 급격히 해체되었다. 그 영역은 분할되어 인근 지역에 옮겼는데, 아스트라한 주, 스탈린그라드 주, 스나프로폴 크라이(州)다. 칼믹족의 모든 흔적을 말살하기 위해서, 소비엣 당국은 도시와 마을의 이름을 칼믹 이름에서 러시아 이름으로 바꿨다. 예를 들면 엘리스타는 스텝노이가 되었다.


시베리아 추방으로부터 복귀


1957년 소비엣 수상 니키타 흐루쉬체프는 칼믹족 주민을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귀환후에 칼믹족은 고향이 러이아인과 우크라이나인에게 점유되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남아있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7년 1월 9일 칼미키아는 다시 한번 자치주가 되었으며, 1958년 7월 29일 러시아 SFSR내의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다음해에 농업과 관개수로 사업의 불량한 설계로 인하여 넓은 지역이 사막화가 되었다. 더구나, 산업공장은 그러한 공장의 경제적 실행 가능성에 대한 분석없이 건설되었다.


1992년 소련의 해체후에, 칼미키아는 계승 정부인 러시아 연방의 자치공화국으로 남기로 했다. 그러나 그 해체는 국가적 지역적 규모로 경제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넓은 지역의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결과로서 생기는 격변으로 인하여 많은 젊은 칼믹족 특히 시골지역에서 러시아 연방의 안팎으로 경제적 기회를 찾아서 칼미키아를 떠나게 되었다. [대륙조선연구회 번역: 이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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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오이라트는 바이칼남부를 국경으로 했다


지금 와라(瓦剌)의 인마(人馬)가 네 길[四路]로 나누어져 야선(也先)은 자신이 와서 대동(大同)과 선부(宣府)를 공격하고, 아라지원(阿剌知院)은 영평(永平) 등지를 공격하고, 달달(韃靼)의 불화왕(不花王)은 요동(遼東)을 와서 공격하며, 또 한 지대(支隊)의 인마(人馬)는 감숙성(甘肅省)을 와서 공격하기로 기한을 정하여 약속을 정했다.」


문종 즉위년 경오(1450, 경태 1)

함경도 감사와 도절제사에게 야인의 방비에 신중히 할 것을 명하다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유시하기를,

“통사(通事) 최윤(崔崙)이 아뢰는데, ‘중국 사람의 말에 깊은 곳의 달달(達達) 와라야(瓦剌也)가 먼저 억만 명 군사를 거느리고 삼위(三衛)의 달자(達子)를 거의 섬멸(殲滅)하고, 또 여름이나 가을쯤에 해서(海西)의 야인(野人)을 습격하려고 꾀하므로, 야인(野人)이 두려워 떨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더라 합니다.’ 하니, 그 지경에 만일 깊은 곳의 야인(野人)이 왕래하는 일이 있거든 비밀히 듣보아서 아뢰고, 방어하는 모든 일을 더욱 부지런히 조처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라


세종 29년 정묘(1447, 정통 12)

함길도 도절제사에게 국경 방위를 유시하다


와라가 바로 오이라트이다. 지도상에 와라의 위치를 보면 뜻밖에도 바이칼호 서쪽이다. 와라는 명나라를 대규모침공한일이 있는데 그들이 선택한 곳이 바로 대동시이다. 지도의 토목이라 쓰인곳으로 만리장성을 따라서 동쪽으로 이동한뒤 장성안쪽으로 침공한것을 알수있다. 이들이 선택한 요동은 요동성혹은 난하동쪽으로 요동성은 원래 베이징근처에 있었다.와라와 조선사이에 타타르가 지도처럼 있다면 조선은 국경에 대해 타타르만 신경쓰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와라까지 신경쓰고 있다. 즉 조선과 와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던 것이다. 와라가 일부 타타르부족을 병합하여 조선과 경계를 했다는 것이 제일 정확한 해석이다. 실제로 중국역사지도에는 조선에 충성한 올량합을 바이칼호바로 남쪽에 표기한다. 조선은 올량합을 와라의 최전선에 내보낸것이다. 결국 조선의 영토는 지도상의 타타르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와라와 경계를 지은것이다.

 

[클릭원본]


김종서(金宗瑞)가 상서(上書)하여 변사(邊事)를 논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서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 달달(韃靼)의 탈탈왕(脫脫王)은 광녕(廣寧)과 요동(遼東)의 가까운 지역에 군사를 주둔(駐屯)시키고 야선(也先)은 대동성(大同城) 밖에 주둔하고 있으니, 이만주(李滿住) 등 여러 종족(種族)의 야인(野人)이 모두 그들에게 투항(投降)하고서 성언(聲言)하기를, 장차 요동(遼東)을 공격하고 우리 나라까지 칠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평안도(平安道)에서는 성(城)을 쌓는 일에 시달리고, 잇따라서 기근(飢饉)과 질역(疾疫)이 발생하여 사망(死亡)하고 유리(流離)한 사람이 절반 이상이나 되어 민생(民生)이 쇠잔 피폐(疲弊)하고 병마(兵馬)가 피곤하고 쇠약하여졌다.


문종 즉위년 경오(1450, 경태 1)

김종서가 올린 변방 방비의 상소를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다


야선즉 와라(오이라트)의 지도자가 대동성에 주둔하고 있는데 조선은 평안도가 난리가 났다. 즉 평안도가 대동성주변에서 난하(요동)까지라는 것이다.[만주몽골조선땅임]